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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70년⑤] 김광국의 '석농화원'… '조선 문화의 자신감'

잠용(潛蓉) 2016. 11. 16. 19:18

[공감 70년] (5) 유홍준의 안목 -

김광국의 '석농화원' 그림을 사랑한 정조시대 중인...

'조선 문화의 자신감' 화첩에 담다
경향신문ㅣ2016.04.26 22:14 수정 2016.05.23 22:00 댓글 0개

 

 

심사정, ‘와룡암소집도’, 28.7×42.0㎝, 종이에 담채, 18세기, 간송미술관 소장윤두서, ‘석공공석도’, 김광국 화제, 이면우 글씨, 그림 23.0×15.8㎝, 제발 23.0×15.8㎝, 종이에 수묵, 18세기, 개인소장

 

우리 사회에서는 미술품 애호가를 곱지 않은 눈으로 보는 편견이 만연해 있지만 미술 애호는 음악 감상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급 취미 중 하나이다. 그뿐만 아니라 미술품 애호가가 작품을 사주지 않으면 미술문화란 이루어질 수가 없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미술품 컬렉터는 그 시대 미술문화의 강력한 패트론으로 되고, 민족문화를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메디치와 우리의 간송 전형필이다.

 

■ 전설적인 컬렉터, 석농 김광국

조선시대에도 많은 미술 수장가가 있었다. 아직 시장경제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종 때의 안평대군, 인조 때 낭선군 같은 왕손들이 서화를 많이 수집하였다. 그러다 영·정조시대로 들어오면 양반과 중인 계급에서 가히 수장가라 할 만한 분들이 등장했다. 그 첫 번째 인물이 영조시대의 양반인 상고당 김광수이고, 두 번째 인물이 정조시대의 중인인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1727~1797)이다.


김광국은 7대에 걸쳐 의관(醫官)을 지낸 중인 집안 출신으로 나이 21세에 의과에 합격하여 수의(首醫)까지 올랐고 나중에는 가선대부라는 높은 명예를 얻었다. 그리고 1776년 50세 때는 연행사신을 동행하여 중국에 다녀온 바 있다. 그리고 추측건대 그는 우황을 비롯한 중국 의약품의 사무역으로 부를 축적하여 많은 미술품을 수집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석농은 비록 중인계급이었지만 높은 교양과 학식을 갖추었고 그림을 볼 줄 아는 안목으로 당대의 문인, 화가들과 폭넓게 교류하였다. 그의 안목은 거의 타고난 것이었다. 지금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현재 심사정의 ‘와룡암 소집도’에는 김광국 자신이 쓴 다음과 같은 화제가 붙어 있다.

 

“갑자년(1744) 여름에 나는 와룡암으로 상고당 김광수를 찾아갔다. 향을 피우고 차를 마시면서 서화를 품평하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소나기가 퍼부었다. 이때 현재 심사정이 밖에서 허겁지겁 뛰어와서 옷이 다 젖었으므로 서로 멍하니 쳐다보았다. 잠시 후에 비가 그치자 온 뜨락의 풍경이 마치 산수화 같았다. 현재는 무릎을 끌어안고 한참 바라보다가 ‘멋지다’라고 외치더니 급히 종이를 찾아 ‘와룡암 소집도’를 그렸다.” 1744년이라면 상고당은 56세, 현재는 38세, 석농은 불과 18살이었다. 석농 김광국은 이처럼 10대부터 나이 신분을 뛰어넘어 당대의 문인, 화가들과 교류하며 서화를 감상하고 수집하였다.

 

 

심사정, ‘와룡암소집도’, 28.7×42.0㎝, 종이에 담채, 18세기, 간송미술관 소장윤두서, ‘석공공석도’, 김광국 화제, 이면우 글씨, 그림 23.0×15.8㎝, 제발 23.0×15.8㎝, 종이에 수묵, 18세기, 개인소장

■ 방대한 화첩 <석농화원>의 전모

김광국의 서화 수집품은 <석농화원(石農畵苑)>이라는 화첩으로 꾸며졌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 화첩은 뿔뿔이 흩어지고 낱장으로 파첩되어 그 양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다만 김광국의 제발이 붙어 있는 간송미술관의 24점, 선문대박물관의 21점, 그 밖의 미술관과 개인 컬렉션에 10점 등 모두 55점은 분명 <석농화원>에서 낙질된 것이었다. 그리고 동시대 유한준의 <저암집>에는 <석농화원>에 붙인 발문이 증언으로 남아 있다.

 

“그림에는 그것을 아는 자, 사랑하는 자, 보는 자, 모으는 자가 있다. 한갓 쌓아두는 것이라면 잘 본다고 할 수 없고, 본다고 해도 칠해진 것밖에 분별하지 못하면 아직 사랑한다고는 할 수 없다. 사랑한다고 해도 오직 채색과 형태만을 추구한다면 아직 안다고 할 수 없다. 안다는 것은 화법은 물론이고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오묘한 이치와 정신까지 알아보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림의 묘미는 잘 안다는 데 있으며 알게 되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참되게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나니 그때 수장한 것은 한갓 쌓아두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김홍도, ‘군선도’, 김광국 화제, 정동교 글씨, 그림 24.2×15.7㎝, 제발 24.2×10.5㎝, 비단에 담채, 18세기, 개인소장

내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서문에 조선시대 한 문인의 글을 이끌어 썼다고 한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바로 여기서 따온 것이었다. 그리하여 <석농화원>은 한국회화사의 한 전설로만 남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2013년 12월21일 화봉갤러리에서 열리는 고서경매에 <석농화원>의 목록집이 출품되었다. 얼른 달려가 이를 보니 <석농화원>은 무려 10권으로 이루어졌고 수록 작품 수는 267점에 이른다.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유명한 화첩인 <화원별집(畵苑別集)> 76점도 다름 아닌 <석농화원>의 별집으로 꾸며진 것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목록집은 발간을 위한 육필본으로 첫머리에는 박지원과 홍석주의 서문이 들어 있고 작품마다 석농이 지은 화평을 강세황, 이광사, 유한지, 박제가 등 당대 문인의 글씨를 받아 붙였다고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정조시대 명사가 총망라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반가움을 넘어 놀라움이었다. 나는 이 <석농화원> 목록집을 사서 영인본과 함께 번역 출간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을 느꼈다. 나는 ‘무제한 입찰’로 써내어 결국 낙찰받았다. 경쟁이 많아 예상가를 훌쩍 넘는 고가였지만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문화재였다. 나는 이듬해 한국미술사학회에서 이 책의 내용과 미술사적 의의를 발표하였다.

 

내가 이 목록집을 소유하게 된 지 얼마 안 되어 미술애호가 한 분이 자신은 <석농화원> 화첩에서 낙질된 작품 5점을 소장하고 있다며 이 목록집 원본을 양도해 달라고 부탁해 왔다. 나는 그분이야말로 이 책을 소장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여 번역이 끝난 뒤 낙찰받은 그 값에 그대로 드렸다. 번역은 성균관대 김채식 선생과 공역으로 하였고 소장가들의 전폭적인 도움을 얻어 기왕에 밝혀진 140점의 도판을 모두 실었다. 이렇게 출간된 <석농화원> 영인 번역본(눌와·2015)은 내가 미술사가로 살아가면서 가장 뚜렷한 업적을 낸 보람으로 자부하고 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같은 책은 세월이 지나면 세상에서 잊혀지겠지만 <석농화원>은 한국미술사와 함께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서양화(네덜란드 그림), 김광국 화제, 김종건 글씨, 그림 22.0×26.9㎝, 제발 25.6×18.6㎝, 에칭, 18세기, 청관재 소장

■석농 김광국 <석농화원>의 명문들

<석농화원>에는 겸재 정선이 18점, 현재 심사정이 14점으로 압도적으로 많이 들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석농이 생각한 당대의 최고 화가는 겸재와 현재였다. 석농은 겸재의 그림에 대하여 이렇게 평했다. “우리나라의 그림은 비록 명수라 하더라도 만약 중국에 보낸다면 얼굴이 붉어지지 않을 자가 드물 것이다. 그러나 근래의 겸재 정선만은 송나라 원나라의 훌륭한 작품과 견주어도 많이 양보할 필요가 없다.” 석농 김광국은 우리 문화에 대하여 이런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서 연암 박지원은 <석농화원>에 서문을 쓰면서 이렇게 말했다. “석농은 연경에 들어가서 천주당의 여러 그림을 두루 살펴보았다. 그가 조선으로 돌아오면 아마도 전에 모았던 우리 그림들을 모두 불태울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도리어 날이 갈수록 우리 그림 수집에 열을 올렸으니 무슨 까닭일까.” 그러나 석농은 내심 현재를 더 높이 평가하였다. “겸재와 현재의 그림에 대하여 세상에서 누가 낫고 못한지에 대한 논란이 있는데 내가 일찍이 우리나라 화가 중에 집대성한 사람은 오직 현재 심사정 한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상고당 김광수도 내 말을 옳다고 여겼다.”

 

 

<석농화원>의 총 목차

<석농화원>에는 탄은 이정, 연담 김명국, 관아재 조영석, 공재 윤두서, 표암 강세황, 능호관 이인상, 단원 김홍도 등의 것이 6점에서 3점씩 실려 있다. 이는 오늘날 조선시대 회화사의 평가 그대로이다. 석농 당년에 단원 김홍도는 아직 유망주인 정도였지만 훗날 대가로 평가받을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종래의 화조도는 대개 수묵담채였고, 대상을 핍진하게 그린 것은 김홍도로부터 비롯되었다. 내가 명나라의 대가인 여기의 그림을 여러 차례 열람하였는데, 그의 필법이 단원보다 크게 낫지 않았다. 나는 이 말이 옳다고 동의할 후세의 안목을 갖춘 자를 기다린다.”

 

<석농화원>에 네덜란드 동판화가 들어 있다는 것은 충격적인데 그 자신도 낯선 문명의 신기함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이 그림은 바로 태서(泰西·서양)의 판각본(동판화)이다. 그냥 보면 단지 거미줄 같고, 자세히 보면 또 파리똥 같은데, 현미경을 가지고 살펴보면 곧장 사람으로 하여금 기이하다 소리치게 만든다. 아까 거미줄로 본 것은 바로 천백의 계선이고, 아까 파리똥으로 본 것은 바로 천백의 물상이니, 아 신묘하도다. 기술이 여기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석농의 화평은 본격적인 예술비평에서 감상비평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하고 때로는 유머를 곁들인 것도 있다. 그는 혜원 신윤복의 아버지인 신한평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내가 일찍이 신한평군에게 <미녀도>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는데, 그 풍만한 살결과 어여쁜 자태가 너무나 실감나서 오래 펼쳐볼 수가 없다. 오래 보았다가는 이부자리를 망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미술비평을 넘어 인생철학이 담긴 화평도 있다. 그가 요절한 원명유(元命維)의 그림에 부친 글에서는 애잔한 마음까지 일어난다. “사람으로 인해 그림이 전해지는 것은 그림에겐 행복인데, 그림으로 인해 사람이 전해지는 것은 사람에겐 불행이다. 원명유는 사람 때문에 전해졌어야 마땅한데, 오직 이 한 폭의 작은 그림이 인간 세상에 전해지고 있으니 이 어찌 원명유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후세에 이 그림을 통해 그의 재주를 상상할 것이니, 오히려 허전하게 아무 명성이 없는 것보다 낫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원명유는 일찍 죽었고 또 자식도 두지 못하여 더욱 슬프구나.”

 

김광국은 간혹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그림을 이렇게 평했다. “홀로 그윽한 창가에 앉으니 가을 생각이 우울하다. 은근히 취기가 올라 작은 종이를 펼치고 붓 가는 대로 난초떨기를 그렸으니 나는 마음 속의 기분을 그려냈을 뿐이다. 그것이 부들이 된들 난초가 된들 내가 구별할 필요가 있겠는가.” 김광국이 <석농화원> 전 10권 중 마지막 10권 부록편을 꾸민 것은 70세 때였다. 그리고 석농은 이듬해인 1797년, 향년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타계하기 직전까지 <석농화원> 완성에 혼신의 힘을 다하여 우리에게 이런 엄청난 문화유산을 남기신 것이다. 사람이 돈을 버는 것은 능력이면서도 운세이다. 그러나 그렇게 모은 돈을 어떻게 쓰느냐는 자신의 선택이고 의지이다. <석농화원>을 남겨 조선시대 문화사를 풍요롭게 증언한 석농 김광국은 정조시대의 간송 전형필과 같은 한국문화사의 위인으로 기려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유홍준 |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