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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70년⑥] 김홍도 키운 '예림의 총수'- 강세황

잠용(潛蓉) 2016. 11. 17. 11:41

[공감 70년] (6) 유홍준의 안목-

김홍도 키운 '예림의 총수'...

핵심을 찌른 화평, 조선 화단을 이끌다
경향신문ㅣ2016.05.23 22:09 수정 2016.05.24 09:54 

 

표암 강세황의 예술비평

 

강세황, ‘자화상’, 1782년, 비단에 채색, 88.7×51.0㎝, 보물 590호,

/진주 강씨 문중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보관)


안목의 가장 뚜렷한 사회적 실천은 미술비평이다. 조선시대에도 미술비평이 면면히 이어져 왔다. 초기에는 그림을 보고 시로 읊는 감상비평 정도였지만, 후기 들어 본격적인 화평(畵評)이 성행하면서 마침내는 가히 미술평론가라고 부를 수 있는 인물이 등장했다. 그가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이다. 표암은 진주 강씨 명문 출신으로 벼슬이 한성판윤에 이르렀고 70세에는 할아버지, 아버지 뒤를 이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삼대가 기로소에 들어간 집안”이라는 불후의 명예를 얻었다.

 

기로소란 70세가 넘은 현직 정2품 이상의 원로대신을 예우하는 명예기관이다. 게다가 두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했고, 79세로 천수를 다했으니 표암은 참으로 복 받은 선비였다고 하겠다. 이력을 보면 표암의 인생은 화려한 것 같지만 이는 뒤늦게 벼슬길에 올라 출세한 것이었고, 환갑 이전까지 표암은 초야에 묻혀 지내던 무관(無官)의 시골 선비였다. 그러나 표암은 근 40년의 길고 긴 재야 시절에 서화가로서, 그리고 미술평론가로서 활동함으로써 오늘날 조선시대 최고의 미술평론가라는 칭송을 받고 있다.

 

■ 간결하고 핵심적인 미술비평
서화가로서 표암은 필획이 아름다운 지적인 분위기의 글씨와 고상한 문인화풍의 산수화로 유명해 영·정조시대 명사를 소개한 이규상의 <병세재언록>에서 <서가록>과 <화가록> 모두에 이름이 올랐고 석농 김광국은 난초 그림은 표암에 이르러 비로소 격조를 갖추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표암의 미술사적 공헌은 역시 미술비평에 있다. 그는 겸재 정선, 관아재 조영석 같은 앞 시대의 대가들과 현재 심사정, 단원 김홍도 같은 동시대 화가들의 무수한 작품에 화평을 가했다. 이런 적극적인 미술평론은 실로 전례 없던 일이었다. 그는 특히 현재의 예술을 높이 평가하여 그의 ‘화조도’에 대해 “기법이 익숙해지면 속(俗)되기 십상인데 이 그림은 원숙하면서도 고상한 아취가 있다”고 평했다.

 

그의 화평은 이처럼 아주 간결하면서도 핵심적이다. 또 한 예로 담졸 강희언의 ‘인왕산도’에 대해서는 “진경산수를 그리는 사람은 혹시 지도처럼 될까 걱정하는데 이 그림은 충분히 실경의 모습을 담았으면서도 화법을 잃지 않았다”고 했다. 표암은 인품이 너그러워서 남을 비판하는 것보다 그의 장점을 드러내주는 화평을 많이 남겼다. 그래서 “표암 평”이라는 세 글자가 들어 있는 작품은 당연히 그 예술적 가치가 몇 갑절 더 높아졌기 때문에 표암의 집 앞에는 화평을 받아가려는 사람으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미술평론가로서 표암의 영향력은 이처럼 대단했고 실제로 당시 화단을 이끌어가는 ‘예림의 총수’였다. 표암이 화단을 리드해 나아가면서 당대의 회화는 더욱 풍부해져 갔다. 한 예로 1763년, 표암 51세 때 문인·화가 8명의 모임을 기념해서 그린 ‘균와(筠窩)아집도’에는 다음과 같은 화제가 있다.

 

강세황·김홍도, ‘송호도’, 18세기 후반, 비단에 담채, 90.4×43.8㎝,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책상에 기대어 거문고를 타는 사람은 표암이고, 담뱃대를 물고 있는 이는 현재 심사정이다. 바둑 두고 있는 이는 호생관 최북이고 구석에서 구경하는 이는 연객 허필이며 퉁소를 불고 있는 이는 단원 김홍도이다. 인물을 그린 사람은 단원이고, 소나무와 돌을 그린 사람은 현재다. 표암이 그림의 구도를 배치하고 호생관이 채색을 하였다. 모임의 장소는 균와이다.”

 

내남이 다 알고 있듯이 영·정조시대는 왕조의 문예부흥기다. 회화에서는 진경산수, 문인화, 속화라는 참신한 장르가 유행했는데 이는 영조시대의 겸재, 관아재, 현재 같은 문인화가들이 개척한 것을 정조시대의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고송 이인문 같은 도화서 화원들이 이어받아 꽃피운 것이다. 즉 선구적인 지식인 화가들이 개척한 것을 테크노크라트라 할 직업화가가 이어받은 것인데 이 양자 사이를 연결해주는 교량 역할을 한 것이 바로 표암 강세황이었다.

 

■ 40년간 백수로 지내다 말년에 출세가도

재야 시절 표암은 이처럼 미술평론가로서 당당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지만 표암 자신에게 그 40여년은 사실상 백수였다. 백수의 심정은 백수가 잘 안다. 나도 30대에 8년간 ‘미술평론가’라는 백수로 지냈다. 지식인 백수의 공통적인 고민은 사회적 존재감에 대한 불안이다. 자신이야 프라이드를 갖고 살지만 세상은 실력보다 직위로 평하는 것이 억울하기만 하다. 그래서 표암은 54세 때 자서전을 지으면서 “내가 죽은 뒤에 다른 사람이 내 행장을 쓰느니 차라리 내가 평생 걸었던 길을 붓 가는 대로 써서 아들에게 준다”며 자신의 삶을 이렇게 옹호했다. “나는 호를 표옹이라 했다. 등에 흰 얼룩무늬가 표범처럼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서 총명하고 재주가 있어 열서넛에 내가 쓴 글씨를 얻어다 병풍을 만든 사람도 있었다.

 

15세에 진주 유씨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현숙하고 부덕(婦德)이 있었다. 형님이 무고(誣告)에 걸려 귀양살이를 하는 것을 보고 과거에 응시할 생각이 없어졌고, 오로지 옛 글을 깊이 공부하면서 당송의 문장을 암송한 것이 많았다. 38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처가인 안산에 가서 조그만 집에 거주하며 오직 책과 필묵을 즐겼다. 그림을 좋아하여 때로 붓을 휘두르면 힘이 있고 고상하여 속기를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깊이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이것으로 감흥을 풀고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나는 키가 작고 외모가 보잘것없어서 모르고 만난 사람은 나를 만만히 보고 업신여기는 사람까지 있었지만 그럴 적마다 나는 싱긋이 한 번 웃고 말았다. 나는 대대로 벼슬한 집안의 후손이지만 운명과 시대가 어그러져서 늦도록 출세하지 못하고 시골에 물러앉아 시골 늙은이들과 자리다툼이나 하고 있다. 뒷날 이 글을 보는 사람은 받드시 내가 불우한 사람이었다고 탄식할지도 모르지만 나 스스로는 자연스럽게 즐기며 살았고, 마음속이 넓고 비어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조금도 섭섭히 여기거나 불평함이 없는 사람이다.”

 


강세황·김홍도·심사정·최북, ‘균와아집도(筠窩雅集圖)’, 1763년, 종이에 엷은 색, 112.5×59.8㎝,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표암은 이렇게 초야에서 처연히 살고 있었는데 1763년 51세 때 둘째 아들 완이 과거에 합격하면서 인생의 변곡점이 일어났다. 영조대왕은 과거 급제자를 면접하는 자리에서 표암의 아들에게 부친이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었다. 이에 서화를 즐기며 지낸다고 아뢰니, 영조는 “말세에 인심이 좋지 않아서 혹시 천한 기술을 즐긴다고 업신여기는 자가 있을까 염려되니 그림 잘 그린다는 얘기는 다시 하지 말라”고 했다. 표암은 이 말을 전해 듣고 사흘 동안 눈물을 흘리고 드디어 화필을 불태웠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이후 10년 뒤 다시 화필을 잡을 때까지 50대의 작품이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이때 많은 미술평론을 남겼다.

 

그러다 1773년 표암은 환갑 나이에 영조의 특별한 배려로 영릉 참봉이 주어져 관계로 나아가게 되었고 이듬해엔 사포서(司圃署)의 별제로 되었다. 64세 때 늙은이를 위한 과거시험인 ‘기로과(耆老科)’에 장원급제하고 벼슬이 날로 높아져 71세 때엔 한성부 판윤(서울시장)이 되었으며, 그 이듬해엔 청나라 건륭제의 즉위 50년을 경축하는 천수연(千壽宴)의 축하사절단 부사(副使)가 되어 연경(燕京)에 다녀오기도 했다. 말년의 표암은 그렇게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었지만 문인화가로서, 미술평론가로서의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표암의 이러한 마음은 그의 자화상 찬문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수염과 눈썹이 하얗구나. 관모를 썼으면서 평복을 입었으니 마음은 재야에 있고 이름은 조정에 오른 것을 알 수 있구나. 가슴에는 수많은 책을 품었고 필력은 오악을 흔들 수 있는데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겠는가. 나 혼자서 낙으로 삼은 것임을.” 표암은 78세에 명예직인 지중추(知中樞)로 물러났다. 그리고 이듬해인 1791년,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임종 직전 표암은 붓을 달라고 하여 8글자를 쓰고는 눈을 감았다고 한다. “푸른 소나무는 늙지 않고, 학과 사슴이 일제히 우네(蒼松不老 鶴鹿齊鳴).” 참으로 복 받은 삶이었다.

 

김홍도, ‘나그네’(선면), 1790년, 종이에 담채, 28.0×78.0㎝, 간송미술관 소장

 

■‘ 불세출의 화가’ 단원 김홍도 키워내

미술평론가로서 표암의 가장 큰 공적을 꼽자면 단원 김홍도라는 불세출의 화가를 키워낸 것이다. 표암은 단원이 이빨을 갈 무렵(7세)부터 그림을 가르치면서 단원은 모든 장르에 능한 “무소불능의 신필”이고 화본(畵本)을 보고 배운 것이 아니라 형태를 사생하여 꼭 닮게 그려낸 “조선 400년 역사상 파천황적 솜씨”라고 극찬했다. 표암과 단원의 사제관계는 합작인 ‘송호도’에 잘 나타나 있다. 소나무는 스승인 표암이 그렸고, 호랑이는 제자인 단원이 그렸으니 그 제작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기만 하다. 나이를 반 꺾어야 동갑이 되는 “절년이하지(折年而下之)”였지만 나이를 잊고 벗으로 지낸 “망년지우(忘年之友)”라 했다.

 

1777년 표암 65세, 단원 32세 되는 어느 날이었다. 단원이 표암을 찾아와 호를 단원이라고 하고 싶다며 기문(記文)을 부탁했다. 이에 표암이 글을 써주려고 하는데 막상 단원에게는 그것을 걸어둘 ‘정원(園)’이 없기에 차라리 소전(小傳)을 써주어 방 벽에 붙이게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표암의 ‘단원기(檀園記)’ 두 편인데, 아! 그것이 훗날 단원 김홍도의 일생을 증언한 가장 귀중한 글로 남을 줄은 표암도 단원도 몰랐을 것이다. 표암은 단원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감격적으로 말했다.

 

“내가 단원과 사귄 것은 전후하여 모두 세 번 변하였다. 처음에는 단원이 내게 그림을 배웠으니 (사제로서 만났고), 중간에는 사포서에 같이 있었으니 (직장의 상하관계로 만났고), 나중에는 그의 그림에 내가 평을 썼으니 우리는 (예술로서 만났다.)” 단원에게는 그런 스승이 있었고, 표암에게는 그런 제자가 있었다. 표암과 단원이 예술로 만난 마지막 작품은 1790년, 병에서 회복한 단원이 스승께 보낸 ‘나그네’라는 부채 그림인데 거기에는 표암의 기꺼운 화제가 실려 있다.

 

“단원이 중병에서 일어나자마자 능히 이 작품을 그릴 수 있었으니 그 배움의 정밀함을 가히 알겠다. 고질병에서 나았다니 기쁜 마음이 일어나며 마치 직접 (단원의) 얼굴을 보는 듯하다. 이 부채를 상자 속에 잘 간직해야겠다.” 이때 표암은 78세였고, 그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표암과 단원의 사이는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다.

우리 역사에 이렇게 아름다운 스승과 제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그저 고맙고 마냥 자랑스럽기만 하다.

 

<유홍준 |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