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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70년⑦] 추사 김정희의 금강안

잠용(潛蓉) 2016. 11. 17. 12:17

[유홍준의 안목](7)

추사 김정희의 금강안(金剛眼)
경향신문ㅣ2016.06.20 20:52 수정 2016.06.21 10:16

 

추사의 가장 뛰어난 재능 ‘안목’…

한 시대의 예술을 키웠다

 

 

김정희, ‘불이선란’, 19세기 중엽, 종이에 수묵, 55.0×31.1㎝, 개인 소장

 

추사 김정희(1785~1856)가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은 결국 글씨이다. 그러나 당대인들은 그를 단지 명필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추사는 글씨뿐만 아니라 그림, 시와 문장, 고증학과 금석학, 차와 불교학 모든 분야에서 높은 경지를 신묘하게 깨달은 ‘르네상스적 학예인’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세상에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를 두고 팔방미인이라고 가볍게 말한다면 그것은 큰 실례다. 추사 사후 10년 뒤에 편찬된 그의 시집인 <담연재시고>를 보면 서문에 이렇게 쓰여 있다. “추사는 본래 시와 문장의 대가였으나 글씨를 잘 쓴다는 명성이 천하에 떨치게 되면서 이것이 가려지게 되었다.”

 

■ 만능 학예인이자 ‘해동의 유마거사’

추사의 학문은 조선후기 실학의 한 갈래인 실사구시학파로 금석학과 고증학에선 단군 갑자 이래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전설 속의 북한산비가 신라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낸 것도 추사 김정희였다. 그런가 하면 추사는 ‘해동의 유마거사’라고 칭송될 정도로 불교의 교리에 밝았다. 일찍이 선운사 백파선사와 선(禪)에 대하여 논쟁하면서 <백파 망증(妄證) 15조>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차로 말할 것 같으면 다산 정약용, 초의선사와 함께 조선의 3대 다성(茶聖)으로 꼽힌다. 그렇게 열 가지, 스무 가지 방면에서 뛰어났던 추사였는데 홍한주는 <지수염필>에서 또 이렇게 말했다.


“추사의 재능은 감상이 가장 뛰어났고, 글씨가 그다음이며, 시와 문장이 또 그다음이다(秋史之才 鑑賞最勝 筆次之 詩文又次之).”

 

여기서 말한 감상이란 예술적 가치를 변별해 내는 안목과 감식(鑑識)을 의미한다. 추사는 자신이 감정한 작품에는 ‘추사상관(秋史賞觀)’ ‘추사심정(秋史審定)’이라는 도장을 찍었다. 그 중에는 아마도 가짜에 찍었을 ‘오(誤)’라는 도장도 있다. 추사는 중국의 서화까지 감정하였다. 그의 평생 지기인 이재 권돈인이 송나라 황정견의 글씨, 원나라 조맹부의 말그림, 명나라 심석전의 산수화 등 중국 서화 10여점의 감정을 추사에게 의뢰한 적이 있었는데 각 작품의 질, 내력, 도서 낙관, 문헌자료, 그리고 자신의 소견을 밝힌 글을 보면 그 엄격한 논증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추사는 일찍이 서화 감상에 “금강안(金剛眼)과 혹리수(酷吏手)”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금강역사 같은 무서운 눈, 혹독한 세리(稅吏)의 손끝 같은 치밀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세상 사람들은 추사 김정희를 금강안이라고 불렀다.

 

 

김정희, ‘사서루’, 19세기 중엽, 종이에 묵서, 26×73㎝, 개인 소장

 

■ “가짜는 있어도 졸작은 없다”

추사는 금강안을 자신의 작품에도 가차없이 들이대었다. 그래서 추사의 그림과 글씨는 가짜는 있어도 졸작은 없다. 그런 추사의 금강안이 진실로 귀한 빛을 발하는 것은 세상을 위하여 이를 아낌없이 베풀었다는 점이다.

추사의 제자 사랑은 끔찍한 것이었다. 제주도 귀양살이 시절 소치 허련, 과천 시절 소당 김석준에게 보여준 사랑은 거의 편애에 가까웠다. 서화뿐만 아니라 붓 잘 만드는 박혜백, 전각 잘하는 오소산에게 장인정신이 무엇인가를 자상하게 가르쳐 주었다. 정말로 많은 학예인들이 이런 추사를 따르면서 일세를 풍미하는 예술사조를 형성하게 되었으니 후세인들은 이를 추사의 또 다른 호를 빌려 ‘완당바람’이라고 하였다.

 

완당바람의 실체를 가장 실감 있게 보여주는 것은 <예림갑을록(藝林甲乙錄)>이다. 1849년, 추사 나이 64세 때 여름이었다. 그때 추사는 9년간의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돌아와 용산의 강상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젊은 서화가들이 추사에게 글씨와 그림을 지도받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6월14일부터 7월14일까지 글씨 8명, 그림 8명으로 나누어 5일 간격으로 모두 여섯 차례 추사 앞에서 작품을 시험보고 품평을 받았다. 이를 ‘묵진(墨陣) 8인’ ‘화루(畵壘) 8인’이라고 군대식으로 불렀다. 마치 서화 경연대회에 병사(兵士)처럼 출전하였는데 두 부문에 다 참가한 이가 2명 있어 모두 14명이었다. 이들은 모두 19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서화가들로 24세의 고람 전기부터 42세의 희원 이한철까지 중인 서화가와 도화서 화원들이 망라되어 있다. <예림갑을록>은 이때 추사가 각 작품에 내린 논평을 고람 전기가 일일이 받아써 두었던 기록이다. 이 책의 발문에서 고람은 이렇게 말했다.

 

 

전기, ‘계산포무도’, 19세기 중엽, 종이에 수묵, 24.5×41.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가을 하늘 높고 기운이 맑아 차를 마시며 시를 읊다가 옛 광주리 속에서 추사 선생님의 평을 하나하나 읽어보니 말씀은 간결하나 뜻이 원대하여 경계하고 가르치심이 지성스럽다. 평을 얻은 자로 하여금 부르르 떨며 정진하게 하고 잃은 자로 하여금 두려워 고치게 하는 것이 있다. 근원과 끝을 연구해 풀어내고 바르고 그른 것을 가리어 바로잡으셨으니 모두 잘못된 길을 벗어나 바른 문을 두드리게 하고자 하심이었다. 우리 선생님께서 내려주심이 너무 많구나.”

 

추사의 가르침은 정말로 자상했다. ‘묵진’에 출전한 고람의 글씨에 대한 평을 보면 다음과 같다. “대련 글씨 중 오른쪽 한 줄은 아주 뛰어나고 아름다워 과연 법도에 맞는다고 일러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왼쪽 한 줄은 아직 정리되지 않아 표준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이것은 행을 나누는 데 주의를 하지 않아서 이렇게 비뚤어지게 된 것이다. ‘자(自)’자 위의 삐침이 너무 제멋대로여서 전혀 먹을 아끼는 뜻이 없고, 제6, 제7자는 아래위에 갈고리처럼 돌려 꺾은 것이 도무지 제자리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이 오른쪽 한 줄을 잘 썼기 때문에 최고의 상등(上等)으로 뽑아놓은 것이다.”

 

‘화루’에서도 그림의 필치와 구도에 대해 아주 상세한 평을 내렸다. 혜산 유숙의 작품에 내린 평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림에는 반드시 손님과 주인이 있어야 한다는 점은 뒤집을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인지 알 수 없다. 붓놀림에는 비록 재미있는 곳이 있으나 부득이 제2등에 놓지 않을 수 없다.”

 

 

허련, ‘완당선생 초상’, 19세기 중엽, 규격 미상, 개인 소장

 

■ 추사 학예의 국제성

추사의 학예 활동은 동시대 청나라 문인들과의 긴밀한 교류 속에서 전개되었다. 이런 추사를 두고 간혹 중국을 숭상한 사대주의자라고 말하는 분도 있는데 그것은 정말로 오해다. 추사는 박제가 유득공 등 북학파 선배들이 문로를 개척한 청나라 학예와의 교류를 활짝 꽃피운 분이다. 추사가 당시 청나라를 대표하는 학자인 완원, 청나라 건륭시대 4대 명필 중 한 명인 옹방강, 그리고 섭지선, 오숭량, 왕희순 등 기라성 같은 문인들과 주고받은 학문과 예술의 교류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한 예로 추사의 감정인 중에는 ‘동경 추사 동 심정 인(東卿 秋史 同 審定 印)’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동경과 추사가 함께 살펴 감정한 도장”이라는 뜻인데 동경은 청나라 섭지선의 자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작품을 인편에 들려 보내며 북경과 서울에서 두 사람이 감정을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는 <청조학(淸朝學)의 동점(東漸)과 김정희>에서 “청조학 연구의 제1인자는 추사 김정희이다”라고 단언하기에 이르렀다. 또 완당바람은 기존의 민족적 화풍의 쇠퇴를 가져오게 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시대양식은 생성, 발전, 소멸에 이르는 생명의 리듬이 있다. 18세기, 영정조시대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와 단원 김홍도의 속화는 19세기로 들어와서는 매너리즘에 깊이 빠져들면서 양식의 생명을 다하고 있었다.

 

이런 시점에서 추사 김정희가 예술의 본원적 가치를 구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학문으로 치면 고증학적 입장과 같은 것이다. 대상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를 넘어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를 갖추어야 한다고 역설하며 손재주만이 능사가 아니라 모름지기 만 권의 책을 읽고 천 리를 여행하면서 진정한 문인다운 자질을 길러 그것이 작품 속에 절로 배어나오게 하라고 하였다. 추사의 참신하고도 수준높은 그리고 동시대 청나라 학예와도 국제적으로 교감하는 이 예술론에 많은 동조자와 추종자가 따랐다. 중인 출신 서화가, 도화서 화원은 물론이고 이재 권돈인, 자하 신위, 황산 김유근, 운석 조인영, 동리 김경연 등 내로라하는 사대부들도 그의 예술론에 합세하여 추사 일파를 이루며 19세기 시대양식으로 되었던 것이다.

 

 

이하응, ‘석란’(대련), 1887년, 비단에 수묵, 각 폭 151.5×40.8㎝, 호림박물관 소장

 

■ 추사의 빛나는 장인정신

그 추사 일파 중 빼놓을 수 없는 분이 흥선대원군인 석파 이하응이다. 석파는 낭인시절에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막 돌아온 추사를 용산의 강상으로 찾아가 난초 그림을 배웠다. 그런데 2년여 뒤, 추사가 이번엔 북청으로 귀양가는 바람에 그 가르침이 중단되었고 그 후 1년 지나 과천으로 돌아왔을 때 석파는 자신이 그린 난초 그림을 갖고 추사에게 가르침을 구하였다. 이때 추사는 ‘석파의 난초 그림 화첩에 쓰다’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보여주신 난초 그림에 대해서는 이 늙은이도 의당 손을 오무려야겠습니다. 압록강 이동에 이만 한 작품은 없습니다. … 내가 난초를 그리지 않은 지 20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이 늙은이에게 난초를 요구하는 사람은 석파의 난초를 구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추사는 절대로 그냥 칭찬만 하는 분이 아니었다. 이런 찬사는 애정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격려 차원인 것이다. 더 핵심적인 것은 글 중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구천구백구십구 분까지 이르렀다 해도 나머지 일 분만은 원만히 성취하기 어렵습니다. 이 마지막 일 분은 웬만한 인력으로는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겠지요.”

 

2% 부족이 아니라 0.01%의 부족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추사는 만년에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사자는 코끼리와 싸울 때도 온 힘을 다하지만 토끼를 잡을 때도 온 힘을 다한다”고 했다. 사람들은 추사를 타고난 천재라고 말하곤 하지만 추사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추사는 벗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 글씨는 아직 부족함이 많지만, 저는 70 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습니다.” 실로 자랑스러운 고백이다. 추사는 이처럼 무서운 장인적 수련과 연찬을 거쳤다. 추사 김정희의 금강안은 진정한 장인정신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유홍준 |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