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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서예·사진

[공감 70년⑧] '나라의 큰 어른 위창 오세창'

잠용(潛蓉) 2016. 11. 17. 12:32

[유홍준의 안목](8)

나라의 큰 어른 위창 오세창
경향신문 2016.07.18 20:38 수정 2016.08.16 10:04 댓글 0개

 

한국 서화사 홀로 집대성… 문화로 나라를 지키다

 

 

위창 오세창이 자택에서 정좌를 하고 붓글씨를 쓰는 모습.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1864~1953). 이 분의 이름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점점 잊혀져 가고 있는 것은 참으로 미안한 일이다. 위창은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의 격동기에 살면서 개화사상을 익히고 ‘만세보’ 사장을 역임한 초기 언론계의 리더였다. 3·1독립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었고, 1945년 일제가 패망한 뒤 남한에 진주한 미군정이 주인 잃어버린 조선왕조의 옥새를 대한민국에 넘겨줄 때 국민을 대표해 인수받은 나라의 큰 어른이셨다. 해방 공간에서 우후죽순으로 정당이 난립할 때 앞다투어 위창을 고문으로 모셔갔고, 이승만, 김구, 여운형 등이 미군정을 자문하기 위해 결성한 ‘민주의원’ 28명 중 한 분이었다. 1953년 동란 중 향년 90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대구에서 사회장으로 모신 분이 위창 오세창이시다.

 

위창 자신은 근대의 서예가로 전서(篆書)에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했으며, 당대의 안목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는 옛 그림과 글씨 수천점을 집대성해 <근역화휘(槿域畵彙)> <근역서휘(槿域書彙)> <근묵(槿墨)> <근역인수(槿域印藪)> 등을 편찬했고, 역대 서화가 인명사전인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이라는 불후의 고전을 남기셨다. 뿐만 아니라 고미술계의 지도자로서 민족미술인들의 단체인 서화협회 고문이었고, 간송 전형필 선생의 고서화 수집품은 거의 다 위창의 안목과 지도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다. 위창의 유작 중에는 문화로 나라를 지킨다는 ‘문화보국(文化保國)’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당신이야말로 ‘문화보국의 위인’이라 할 만한 분이다.

 

■ 개화파에서 민족의 지도자로

위창은 대대로 역관을 이어온 중인 집안의 자제로, 아버지인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은 역관으로 정2품에 오른 초기 개화파 지도자의 한 분이었다. 위창은 1880년 17세에 사역원 시험에 합격하여 대를 이어 역관이 되었으며, 1884년 갑신정변 때는 스승인 유대치와 연루되어 수난을 겪었고 1886년엔 박문국 주사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 기자를 지냈다. 1894년 김홍집 내각의 갑오경장 때는 군국기무처 낭청(비서관)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정3품에 올라 우정국 통신국장 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 1897년 34세 때엔 일본 문부성의 초청으로 1년간 일본에 머물면서 도쿄 외국어학교 조선어 교사를 지냈다. 귀국 후에는 개화파로서 활동하다 1902년 6월 개화당사건 때 일본에 망명해 5년을 보냈고, 이때 위창은 천도교 손병희 참모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06년 1월 손병희와 함께 귀국한 위창은 6월에 천도교의 항일언론지인 ‘만세보’의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이듬해 강제 폐간되자 1909년에 창간한 ‘대한민보’의 사장이 되어 친일단체 일진회에 대항하는 언론운동을 펼쳤다. 이때 위창은 우리 언론사상 최초로 창간호부터 1면에 시사만평을 실었다. 관재 이도영이 그린 만평은 대개 위창이 정하고 쓴 것이라고 하는데, 이를테면 미련한 놈이 도끼를 잘못 써 제 등에 찍히는 그림을 그리고는 “완용 자부 상피(頑用 自斧 傷皮)”라고 썼는데, 음을 바꾸면 “이완용이 자부(子婦)하고 상피(相避·근친상간) 붙었다”라는 야유가 된다. 그러나 1910년, 결국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위창은 칩거하며 우리 서화사 자료를 집성하는 작업에 전념했다. 춘곡 고희동의 증언에 따르면 “언행은 은인자중하며 지내다가 기회를 당하면 놓치지 않고 와락 출동을 하여야 하네. 두고 보게”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1919년 천도교의 손병희, 권동진, 최린 등과 함께 3·1독립운동을 준비하면서 기독교계, 불교계 인사들과 비밀리에 접촉한 후, 독립선언서 제작에 들어갔다. 기미독립선언문은 육당 최남선이 쓰고 위창이 감수한 것이었다.

 

그때 위창은 육당의 초고를 검토하면서 이런 일화를 남겼다. 선언문 앞머리에 일제의 부당한 처사를 쭉 나열한 유명한 구절 “아(我) 생존권이 박탈(剝奪)됨이 무릇 기하(幾何)이며”라는 구절에 이르렀을 때 위창은 육당에게 박탈은 ‘빼앗아 가는 것’이고 ‘빼앗겨 잃어버린’ 피동태는 박상(剝喪)이라며 교정을 보고서는 “요즘 젊은 애들은 한문을 잘 몰라서 큰 일”이라고 하셨다고 한다. 3·1독립운동 후 위창은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언도받고 2년8개월을 복역한 뒤 1921년 11월에 가석방되었다. 그때 나이 58세였다. 이후 위창은 다시 칩거하며 서화사 자료 집성에 전념하게 된다.

 

 

오세창, , 지본, 119.5×38.7㎝, 1948

■ 한국미술사의 할아버지

위창은 서화 감정에서 움직일 수 없는 권위였다. 진위 판정에서 위창이 맞다면 맞는 것이고 작가 추정에서 위창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었다. 지금 시대엔 그런 권위있는 안목이 없어 요즘 미술계가 그렇게 시끄러운 것이다. 위창은 부친의 학통을 이어받아 서화사를 집대성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부친 오경석은 추사 김정희의 말년 제자로 금석학의 학통을 이어받아 <삼한 금석록>을 펴냈으니 위창의 작업은 추사로부터 이어진 것이었다.

 

이런 사실은 퍽 옛날 얘기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우리나라 옛 그림>을 펴낸 이동주 선생은 생전에 위창을 찾아뵙고 안목을 많이 배운 바 있는데 추사에 대해 강의를 하시면서 “추사는 성격이 아주 까다로웠대요”라며 추사의 인간상을 풀어나가셨다. 강의가 끝난 뒤 내가 동주 선생에게 그 사실이 어느 책에 나오느냐고 여쭈었더니 “위창 노인이 역매 어른에게 그렇게 들었대요”라는 것이었다. 순간 추사, 역매, 위창 모두가 꼭 옆집에 살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들처럼 다가왔다.

 

위창의 이 작업은 1916년 12월 매일신보에 5회에 걸쳐 실린 만해 한용운의 위창 오세창 방문기인 ‘고서화의 3일’에 자세하다. 만해는 첫날 <근역화휘> 화첩과 금석문 탁본을 감상했고, 다음날에는 23첩으로 된 서첩 <근역서휘>를 보았고, 사흘째에는 육당 최남선과 함께 <근역서휘, 속편> 12첩을 큰 감명 속에 오래 배관했는데 특히 위창이 여기에 머물지 않고 서화가들의 색인 작업을 하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했다고 했다. 

 

오세창, 전서 ‘문화보국(文化保國)’, 1951

위창의 가장 빛나는 업적은 바로 이 역대 서화가 인명사전인 <근역서화징>의 편찬이다. 신라, 고려, 조선 상·중·하 5편으로 나누고, 이를 출생연도순으로 배열했는데 수록 인명이 서예가 576명, 화가 392명, 서화가 149명 등 총 1117명이다. 각 서예가와 화가의 성명에 이어 자·호·본관·가계·출생 사망연도 등을 밝힌 다음, 각종 문헌에 나오는 해당 예술가에 대한 기록과 논평, 제시(題詩) 등을 있는 대로 찾아 싣고 그 서목을 다 밝혔다. 이를 위해 인용한 문집이 총 270종이나 된다. 이 밖에 읍지·족보·비명·서화 작품의 제발(題跋)까지 견문이 닿은 것은 모두 수록하고 전해지는 작품의 이름과 소재까지 기록했다.

 

이는 실로 방대한 인명사전이고 백과사전이다. 육당 최남선은 이 저술을 일러 ‘찬연한 등탑(燈塔)’이고, ‘암흑한 운중(雲中)의 전깃불’이라고 했다. 이런 방대한 작업이라면 몇 십 명의 연구자가 몇 년에 걸쳐야 할 수 있는 것인데, 홀로 해내신 것이었다. 그동안 한국 회화사와 서예사는 이 <근역서화징>이 있음으로 해서 후학들이 그다음 단계의 연구로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책은 1917년에 탈고되었고, 1928년에 계명구락부에서 출간되었으며 2009년에야 한글 번역본이 나왔다. 책 원본을 보면 <근역서화사>라 되어 있는데, 자료 모음이라는 뜻으로 ‘징(徵)’이라 바꾼 것은 위창의 학문적 겸손이었다. 왕조사회가 붕괴되고 근대적 시련이 시작되는 시점에 위창 오세창이라는 분이 있어 미술사 분야는 전통의 단절없이 구학(舊學)에서 신학(新學)으로 자연스럽게 넘어왔으니, 근대적인 학문체계로서 한국미술사의 아버지가 우현 고유섭이라면 위창 오세창은 한국미술사의 할아버지다.

 

 

오세창, 상형고문(象形古文), 지본, 25×36㎝, 1939

■ 위창의 서화 수집

위창은 고서화의 연구뿐만 아니라 수집에도 열과 성을 다했다. 1915년 매일신보의 한 기자는 위창 선생 방문기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근래에 조선에는 진귀한 서적과 서화를 헐값으로 방매하며 조금도 아까워할 줄 모르니 딱한 일이로다. 이런 때에 오세창씨 같은 이가 있음은 가히 경하할 일이로다. 씨는 10 수년 이래로 조선의 서화가 (일본으로) 유출되어 남을 것이 없을 것을 개탄하여 재력을 아끼지 않고 부지런히 구입하여 현재까지 수집한 것이 글씨 1125점이오, 그림 150점이다. … 씨는 앞으로 100여점만 더 구득하면 조선의 유명 서화는 누락됨이 없으리라 하며 부지런히 수집 중이다.”

 

이때 위창은 아마도 우리나라 서예사와 회화사를 실작품으로 보여주겠다는 원대한 구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위창은 이렇게 모은 서화를 체계화해 <근역화휘> <근역서휘> <근묵> 세 묶음으로 펴냈다. 편저에 모두 무궁화 근(槿) 자를 쓴 것에는 나라를 잃은 아픔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때는 조선도 아니었고 대한민국도 아닌 무궁화 산천이었던 것이다. <근역화휘>는 천(天)·지(地)·인(人) 3첩으로 여기에는 신사임당의 ‘백로’, 겸재 정선의 ‘만폭동’ 등 명화 67점이 들어 있다. <근역서휘>는 총 37책으로 정몽주, 안평대군에서 동시대 이도영에 이르는 1306인의 시와 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참으로 엄청난 컬렉션이 아닐 수 없다. <근역화휘>와 <근역서휘>는 훗날 다산 박영철의 소유로 되었다가 그의 유언에 따라 1940년 서울대에 기증되어 서울대박물관이 건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상·중·하 3책, 별책 필사 24.8×16.5㎝

위창은 옛 문인들의 편지인 간찰 총 1136점을 묶어 <근묵>(34책)을 펴냈는데 이는 성균관대 박물관 소장으로 2009년에 영인 번역되어 5책으로 간행되었다. 또 위창은 고서화 감정의 필수인 인장을 모아 ‘도장 모음’이라는 뜻으로 <근역인수>도 펴냈다. 여기에는 자신의 것 225개를 포함해 총 850명 3912과(顆)의 인장이 실려 있다. 이는 사진판이 아니라 직접 작품에서 오려 편집한 것이니 그 귀함을 가히 알 만하다. <근역인수>는 국회도서관 소장으로 1986년에 영인 출간되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다. 한 사람의 노력으로 이처럼 엄청난 작업을 해냈다는 것이 좀처럼 믿기지 않을 정도인데 위창의 위대함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간송 전형필, 다산 박영철, 오봉빈 등을 지도해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고 가꾸는 데로 나아가게 했으니 나는 이를 위해 ‘안목’의 한 장(章)을 더 할애하지 않을 수 없다. 돌이켜보건대 위창은 자신의 안목을 민족을 위해 남김없이 베풀며 문화보국에 평생을 바친 분이다. 그 위업에 대해 만해 한용운은 위창 탐방기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 나라의 문화유산[古物]은 그 국민의 정신적 생명의 양식이라고 듣고 있다. 나는 위창이 모은 고서화들을 볼 때에 대웅변의 연설을 들은 것보다도, 대문호의 소설을 읽은 것보다도 더 큰 자극을 받았노라. 만일 훗날 조선인의 기념비를 세울 날이 있다면 위창도 일석(一石)을 차지할 만하도다.”

 

<유홍준 |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