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훈 칼럼]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기운 뒤에 외적이 와 무너뜨린다"
조선일보ㅣ양상훈 주필ㅣ2017.03.09 03:11
병자호란 겪은 인조 '적이 오기도 전에 나라는 병들었다' 통탄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외적과 싸움엔 등신, 우리끼리 싸움엔 귀신
김종인 전 민주당 대표가 민주당을 탈당하며 던진 한마디가 긴 여운을 남긴다. '나라는 스스로 기운 뒤에야 외적이 와 무너뜨린다.' 1636년 겨울 인조 임금은 흔히 그랬듯이 또 부적격자를 군(軍)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 사람은 청군(淸軍)이 국경을 넘을 때 이를 알리는 봉화가 서울에 도달하지 못하게 했다. 정부 내에 소동이 일어날까 봐 그랬다고 한다. 병자호란은 그렇게 시작됐다. 난(亂)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정부는 청군 침입 소식을 들은 뒤 이틀 만에 남한산성으로 도망갔고 다시 47일 만에 항복했다. 나라를 정신적·물질적·육체적으로 짓밟은 청군이 돌아간 뒤 인조는 국민에게 유시를 내렸다. 그 한 구절이다. "나라는 반드시 자신이 해친 뒤에야 남이 해치는 법이다." [國必 自伐而後 人伐之] 인조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이 말을 어찌 안 믿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병자호란 47일의 굴욕' 윤용철 지음)
나라는 이미 스스로 기울어 있었다. 9년 전 1차 침입한 청(당시 후금)은 순식간에 두 지역의 수장을 사로잡았다. 황제의 왕자 한 명이 이 두 사람의 아내와 첩들을 막사 안에 두고 온갖 희롱을 했다. 이동할 때는 남편들로 하여금 아내와 첩이 탄 말 고삐를 잡게 했다. 이 나라의 축소판 같은 일들이 연속으로 이어진다. 말 고삐를 잡은 남편들이 아내의 부정(不貞)을 비난하자 말 탄 아내들은 '너는 한 게 뭐냐'는 식으로 맞비난했다.
외적과는 변변한 싸움 한번 하지 못하고 붙잡힌 남편과 아내가 그 처참한 상황에서조차 서로 물고 뜯는다. 한 변방서 벌어진 이 작은 장면 하나에 '외적과 싸움엔 등신, 우리끼리 싸움엔 귀신'인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만 같다. 나라로 확대해도 다르지 않다. 군비를 확충하려 했으나 여기저기 반대로 실패했다. 쓸데없는 명분 싸움, 탁상공론만 이어졌다. 인조는 '적이 몰려오기 전에 이미 나라는 병들었다'고 했다.
인조는 무능한 사람이었지만 당시 사회 전체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북방에서 강력한 위협이 등장했는데도 평가절하하고 무시하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설마' 하는 안보 불감증이었다. 막상 화(禍)가 닥치자 그렇게 말 잘하는 사람 많은 나라에 싸울 사람이 없었다. 먼저 온 적군은 일종의 선발대였다. 숫자도 적고 장거리 행군에 지쳐 있었다. 결전으로 얼마든지 승부를 볼 수 있었지만 미리 겁을 먹은 장군들은 '못 싸운다'는 핑계만 대고 병사들은 기회만 있으면 도망쳤다. 대신들은 포위된 남한산성 안에서도 언쟁에 끝이 없었다. 전략 도출을 위한 토론이 아니었다. 상대에 대한 적의가 청군에 대한 적의보다 더 컸다. 외적에 대해선 공포만 가득했다.
300여년 뒤에 같은 일이 그대로 벌어졌다. 1951년 중공군 100~200명이 국군 후방 고갯마루 하나를 차단했다고 수만명 병력이 순식간에 흩어져 도망쳤다. 한 곳에서는 중공군이 기관총으로 빗자루 쓸듯이 국군을 살상하는데 만명 가까운 국군 병력 중에 총을 들어 응사하는 사람이 단 한 명 없었다는 증언이 있다. 전방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 때 뒤에서는 우리끼리 무섭게 물고 뜯는 정치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끼리 싸울 때 참 대단한 능력을 발휘한다. 경탄스러울 때도 있다. 그 창의력, 끈질김, 분투 정신, 헌신은 실로 경이롭다. 지금 촛불 시위나 태극기 시위에 나가려고 외국에서 비행기 타고 오는 교민들이 있다고 한다.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엔 나오지 않는다. 각자는 나라 걱정이겠지만 우리 서로를 향한 적대감과 증오가 이만큼 크다. 이 열의를 외적에게 돌렸다면 대한민국은 누구도 만만히 보지 못하는 강한 중견국이 돼 있을 것이다.
촛불 시위대가 '사드 배치를 강행하면 1500만 촛불의 분노가 한·미 동맹을 향할 것'이라고 했다. 당장 미군이 없어지면 북·중·러·일 사이에 낀 나라에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한·미 동맹이란 발판 위에 살면서 그 땅이 꺼져라 발을 구르는 사람들도 바보는 아니다. 한·미 동맹에 대한 공격도 우리끼리 물고 뜯는 연장선상에 있다. 내 적(敵)과 친하니까 너도 적이라는 것이다. 우리 서로를 향한 적의에 눈이 멀었다. 우리가 정말 잘하는 우리끼리 물고 뜯기에 먹이가 됐으니 아무리 굳건한 한·미 동맹도 언젠가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
사방팔방에서 전에 보지 못한 파도가 치고 있다. 탄핵보다 더 높은 파고다. 쓰나미로 바뀔 수 있다. 그런데도 세계 돌아가는 것은 단 한 번 제대로 본 적 없는 인물들, 평생 우물 안에서 우리끼리 물고 뜯는 것만 해온 사람들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 있다. 입만 열면 외적이 아니라 우리끼리 물고 뜯는다. 모두가 거기에 정신이 팔려 있다. 나라는 반드시 자신이 해친 뒤에야 남이 해치는 법이다.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사드보복과 ‘삼배구고두례’
강원도민일보ㅣ강병로 2017년 03월 09일 목요일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다시 찧어라”.
쿵! 쿵! 쿵! 청나라 태종을 향해 삼배구고두례(三拜九敲頭禮)를 하는 인조의 이마가 뻘겋게 피로 물들었다. 한번 절을 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바닥에 찧는 삼배구고두례... 조선은 그렇게 무너져내렸다.380년 전인 1637년의 일이다. 전쟁(병자호란) 발발 45일 만에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 마련된 수항단(受降壇)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치욕적인 항복례를 거행한다. 그후 조선의 백성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고. 환향녀(還鄕女)도 이 때 생긴 말이다.
사드 보복에 나선 중국과 중국인들의 태도가 갈수록 가관이다. 10억의 인구를 가진, 미국과 함께 세계를 양분하는 G2국가가 맞는지 의심스럽다. 이런저런 꼬투리를 잡아 롯데마트를 폐쇄시키고 한국관광을 가로막는 행태에 말문이 막힌다. 시정잡배나 할 짓을 버젓이 해놓고 “그런 일 없다”고 잡아뗀다. 겅솽 중국 외교부대변인은 한한령(限韓令)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니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그러고도 현대판 ‘삼배구고두례’를 강요하는 그들의 심보가 과거 역사의 판박이다.
중국 국가인 ‘의용군행진곡(義勇軍進行曲)’을 부르며 한국 제품을 불도저로 깔아뭉개는 퍼포먼스가 전쟁을 연상케 한다. 섬뜩하다. 가사의 내용을 보자. ‘일어나라/…/우리의 피와 살로/우리의 새장성을 쌓자/중화민족에 닥친 가장 위험한 시기/억압에 못 견딘 사람들의 마지막 외침/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 우리 모두 일치단결하여/ 적의 포화를 뚫고/ 전진하자/ 적의 포화를 뚫고/ 전진 전진 전진 전진하자’. 오성기를 휘두르는 그들에게 한국은 ‘적’이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나라가 엉망진창이 되면서 주변 국가들이 모조리 적으로 돌변하고 있다. 그들의 애국가(愛國歌)에서 피비린내가 물씬 풍긴다. 미국의 애국가 ‘별이 빛나는 깃발(The Star-Spangled Banner)’은 ‘포탄의 붉은 섬광과 창공에서 작렬하는 폭탄이 밤새 우리의 깃발이 휘날린 증거’ 라고 노래하고, 러시아 애국가에서도 ‘쳐들어오는 적을 무찌르고…’라는 노랫말이 보인다. 이런 나라들 틈바구니에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를 부르는 처지가 안타깝다. 언제까지 ‘하느님’만 찾아야 하는 건지…?
<강병로 논설위원 brkang@kado.net>
仁祖大王이 淸나라에 무릎 꿇은 굴욕의 조선역사 "삼배구고두례" (三拜九叩頭禮) 1636년 후금(後金)은 날로 세력을 키워 내몽골을 정벌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근처까지 나아가 명(明)나라를 위협하였다. 그리고 인조 14년인 1636년, 후금 태종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스스로 황제라 칭했다. 같은 해 12월, 청나라는 12만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공격하였으니 바로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1628년 왕의 호위를 맡을 무예별감을 설치하다. 중국 대륙의 정세 변화로 조선은 또다시 국운을 건 선택에 내몰렸다. 청나라가 정묘년에 맺었던 형제지맹(兄弟之盟)을 군신지의(君臣之義)로 바꾸고 조선에게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했으며, 세폐 규모도 크게 늘렸다. 이에 조정에서는 외교적 교섭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화론과 무력으로 강력하게 응징해 명분을 세워야 한다는 주전론이 맞선다. 조경(趙絅), 김상헌(金尙憲), 유계(兪棨) 등 소장파는 주전론, 이귀(李貴), 최명길(崔鳴吉), 홍서봉(洪瑞鳳) 등 인조반정을 주도한 공신들은 주화론을 내세웠다. 이 과정에서 조선과 청 사이에는 갈수록 전운이 짙어졌다. 1636년 2월에는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가 인열왕후(仁烈王后)의 국상에 사신으로 왔다가 인조가 국서를 받길 거부하고, 또 주전론자들이 두 사신을 엄히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자 황급히 조선을 떠났다. 이어 청나라는 황제 대관식에 참석한 조선 사신에게 “왕자와 주전론 주창자들을 볼모로 보내지 않으면 다시 군대를 일으키겠다.”라고 위협하고, 11월에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하지만 주전론 쪽으로 기울던 조선에서는 이 같은 요구를 계속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청 태종은 12월 1일, 청군 7만 명, 몽골 인 3만 명, 한족 2만 명 등 모두 12만의 군사를 일으켜 조선을 침공하였다. 이것이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이들은 압록강을 넘은 뒤 거침없이 한성으로 향했다. 청나라 군대가 12일에 압록강을 넘은 뒤, 13일에는 평양, 14일에는 개성까지 진격했다는 보고가 잇따랐다. 도성의 주민들 사이에는 혼란이 일었고, 피란 행렬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이에 인조도 한성에서 벗어나기로 하고, 세자빈 강씨와 원손(元孫), 둘째 봉림대군(鳳林大君), 셋째 인평대군(麟坪大君)을 14일 강화도로 피란 보냈다. 인조도 이날 밤 강화도로 향하려 했으나, 청군이 이미 연서역(延曙驛, 은평구 연신내 일대로 영서역이 개칭된 것)을 통과했고, 강화도로 가는 길까지 차단했다는 보고를 받고 강화도행을 포기했다. 대신 인조는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백관을 대동하고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그러자 한성 주변 관리들이 수백 명씩 군사를 몰고 집결해 산성 내 병력은 1만 4,000여 명에 이르렀다. 당시 인조는 도성에서 빠져나오기 직전, 적군이 이미 양철평(良鐵坪, 은평구 녹번동)까지 왔다는 급보를 받자 최명길을 청군에게 보내 강화를 청하면서 시간을 끌게 했다. 15일 새벽, 인조는 강화도로 옮기기 위해 남한산성을 나섰으나,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치고 산길이 얼어붙었다. 인조는 말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으나, 여의치 않아 결국 남한산성으로 되돌아갔다. 또 강화도로 향한 세자빈 강씨 일행은 갑곶나루에 이르렀으나, 나룻배가 없어 이틀을 추위에 떨다가 겨우 강화도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백성들은 미처 나룻배를 타지 못한 채 청군에게 희생됐다. 조정에서 일반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청군의 거센 진격에 제대로 손쓸 틈이 없었던 셈이다. 이에 사헌부와 사간원은 15일 “적군이 압록강을 건넌 뒤로 어느 한 곳도 막아내지 못한 채 적군을 깊이 들어오도록 내버려둬 백성이 큰 고통을 겪고, 국왕이 어찌할 도리가 없도록 만들었다.”라며 도원수 김자점(金自點) 등에게 죄를 물을 것을 청했다. 이튿날 마침내 청군이 남한산성에 이르렀다. 조선군과 청군은 서로 전면전은 피한 채 한동안 산발적인 싸움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조선군 300여 명이 청군의 유인 작전에 말려들어 성 바깥으로 나갔다가 몰살당하는 일이 있었다. 조선 군사들은 청군이 일부러 소와 말을 풀어 둔 것을 알고 나가지 않으려 했으나, 체찰사 김류가 이를 잡아오라며 재촉하는 바람에 결국 화를 당했다. 이 일로 군사들의 사기는 다시 한 번 크게 떨어졌다. 해가 바뀌고 1월 들어 청 태종은 군사를 20만 명으로 늘려 남한산성 밑 탄천에 포진시켰다. 남한산성은 갈수록 고립무원의 지경으로 빠져들었다. 당초 산성 내에는 양곡 1만 4,300석과 장 220항아리 등 50일간의 양곡이 준비돼 있었지만, 이마저도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산성일기》 1월 14일자에서 ‘하루 양식으로 군병은 3홉씩 줄이고, 백관은 5홉씩 줄여도 다음 달까지 닿지 못하니,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하고 기록하였다. 이를 간파한 청 태종은 직접 서한을 보내 화친의 뜻을 내비치며, 인조가 직접 성 밖으로 나와 군신의 예를 갖추고, 그에 앞서 척화신(斥和臣) 두세 명을 먼저 내보라고 압박했다. 하지만 인조는 “차라리 척화한 신과 함께 죽을지언정 그들을 내줄 수 없다.” 하며 거부했다. 그러자 이미 싸울 뜻을 잃은 일부 군사들은 척화신을 내보내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주전론자인 윤집(尹集)과 오달제(吳達濟)는 스스로 적진에 가기를 청했다. 그러던 중 강화도가 이미 함락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마침내 인조는 청 태종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이때 청군에 넘겨진 윤집과 오달제는 홍익한(洪翼漢)과 함께 심양에 끌려가서도 청에 항복하기를 거부해 죽음을 맞는다. 이 세 사람을 일러 삼학사(三學士)라고 한다. 피신한 지 48일째인 1월 30일, 인조는 소현세자와 남색 옷을 입고 서문을 통해 산성 밖으로 나갔다. 성에서는 통곡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청 태종은 한강 동편의 나루터인 삼전도(三田渡)에 9층으로 단을 만들어 그 위에 앉아 있었다. 황제를 상징하는 황색의 막과 양산에 병기와 깃발이 단을 에워싸고 있었고, 정병 수만 명이 단을 중심으로 네모지게 진을 치고 있었다. 청 태종은 장수들에게 활쏘기를 시키다가 멈추게 하고는 인조에게 100보가량을 걸어서 삼공육경(三公六卿, 3정승과 6조 판서)과 함께 뜰 안의 진흙 위에서 배례하게 했다. 신하들이 돗자리 깔기를 청했지만, 인조는 “황제 앞에서 어찌 감히 스스로를 높이리오.”라고 말했다. 이렇게 인조는 청 태종이 앉아 있는 단을 향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행했다. 이를 두고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한다. 이어 청 태종이 인조에게 돈피(獤皮, 모피) 갖옷 두 벌을 건네자, 인조는 그중 한 벌을 입고 다시 뜰에서 세 번을 절하며 사례했다. 이로써 조선은 청과 군신 관계를 맺고 조약을 체결했다. 그 내용은 청에 신하의 예를 갖출 것, 명과 단교(斷交)할 것, 청에 물자와 군사를 지원할 것, 청에 적대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말 것, 세폐를 보낼 것 등이다. 조선과 청의 이런 관계는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청이 패배할 때까지 그 기본 방향이 유지됐다. 이처럼 굴욕적인 항복에 분노한 백성들은 곳곳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대표적인 것이 박철산의 의병부대로, 이들은 용강 근처 적산에서 적의 주력군을 맞아 완강하게 저항했으며, 때문에 적산은 ‘의병산’으로 불렸다. 의주 부윤 임경업(林慶業)은 1642년 청의 요청으로 명에 출병했다가, 명군과 손잡고 청에 맞서려다 사전에 발각돼 실패로 끝났다. 두 차례의 호란으로 국가 운영과 존명사대주의(尊明事大主義)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조선은 인조에 이어 즉위한 효종(봉림대군) 재위 기간에 북벌론(北伐論)을 통해 위기 수습을 시도한다.
↑ 청태종공덕비 삼전도비라고도 한다. 청 태종이 인조의 항복을 받은 뒤 세운 전승비, 만주어, 몽골어와 한자로 기록되었다. "대청(大淸) 숭덕(崇德) 원년(元年) 겨울 12월에 관온인성황제께서, 우리 편에서 먼저 화의를 깨뜨렸으므로 크게 노하시어 병위(兵威)로 임하시어 바로 동녘을 치시니 감히 항거하는 자가 없었다. 이때 우리 임금께서 남한산성에 계셨는데, 위태롭고 두려워 마치 봄날 얼음을 밟는 것 같으시어, 밝은 해를 기다리시기를 5순(旬)이었다. 동남쪽 여러 군사가 잇따라 패해 무너지고, 서북쪽 장수들은 산골짜기에 틀어박혀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하였으며, 성안의 양식 또한 떨어져 갔다. 이러한 때에 황제께서 대군으로 성에 육박하시니, 마치 서릿발 같은 바람이 가을 대나무 껍질을 휘몰아 가려는 것 같고, 화로의 이글거리는 불이 조그만 새털을 태워 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황제께서는 죽이지 않는 것으로 병위를 삼으시고 오직 덕을 펴시는 것을 앞세우셨다. 그리하여 곧 칙유를 내리시어, “오라. 짐은 너를 온전하게 할 것이다.”하셨고, 용골대와 마부대 등 여러 대장들이 황제의 명에 따라 길에 가득 차 있었다. 이때 우리 임금께서 문무 모든 신하들을 모아 놓으시고, “내가 대국(大國)에 화호(和好)를 의탁한지 10년인데 이제 이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은 내가 어둡고 미혹하기 때문에 스스로 천토(天討)를 재촉하여 만백성이 어육이 되게 한 것이니, 죄는 나 한 사람에게 있다. 그런데 황제께서는 차마 죄인을 도륙하지 않으시고 이와 같이 타이르시니, 내 어찌 감히 타이르심을 받들어, 위로 우리 종묘사직을 안전하게 하고 아래로 우리 생령들을 보호하지 않으리오.”하셨다. 대신들이 찬성하여 마침내 임금께서는 수십 기를 거느리시고 군전(軍前)에서 죄를 청하였는데, 황제께서는 예로써 극진히 대우하시고 은혜로써 가까이 하시어, 한번 보고 심복으로 허락하셨으며, 물품을 하사하는 은택이 신하들에게까지 고루 미쳤다. 예가 끝나자 황제께서는 곧 우리 임금을 서울로 돌아가게 하시고, 그 자리에서 남쪽으로 내려간 군사를 부르시어 서쪽으로 돌아가게 하셨으며, 백성을 무마하시고 농사를 권장하시니, 멀고 가까운 곳에 새떼처럼 흩어졌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와서 우리나라의 수 천리 산하가 이전과 같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소방(小邦)이 상국(上國)에 죄지은 지 오래되었다. 기미년의 전쟁에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이 명나라를 돕다가 패하여 사로잡혔는데, 태조무황제(누르하치)께서는 다만 홍립 등 몇 사람만 머물러 있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여 돌려보내셨으니 그 은혜가 한없이 컸다. 그런데도 소방은 미혹하여 깨달을 줄 모르다가 정묘 년에 지금의 황제께서 동정(東征)을 명하시자 우리 임금과 신하는 성으로 피해 들어가서 화평을 청하였다. 황제께서는 이를 허락하시고 형제의 나라와 같이 보시어 강토를 복원하시고 강홍립 또한 돌아왔다. 이로부터 예우가 변치 않으시어 관개(冠蓋)가 서로 오고갔는데, 불행이 근거 없는 논의가 일어나서 소란꾸미기를 선도하므로 소방이 변방의 신하들을 선칙하였어도 불손한 말이 계속 돌아다녔다. 그 문서를 상국의 사신이 얻었으나 황제께서는 오히려 관대하게 용서하시어 즉시 군사를 가하지 않으시고, 먼저 명을 내려 나라에 출정할 시기를 호유하셨는데, 이리 핑계 저리 핑계 할 뿐 아니라 군사를 일으키지 않다가 몸소 명령을 받고 끝내 모면하지 못하였으니, 소방 군신의 죄가 더욱 모면할 길이 없게 되었다. 황제께서 대병으로 남한산성을 포위하시고 다시 일부 군대에 명하시어 먼저 강화도를 함락시켜 궁빈(宮嬪), 왕자와 경사(卿士)의 가족들까지 다 포로로 하셨는데, 황제께서는 여러 장수들을 경계하시어 소란을 떨거나 해치지 못하게 하시고, 종관(從官)과 내시로 하여금 간호하게 하셨다. 또 크게 은전을 내리시어 소방의 군신과 포로 된 권속들을 옛집으로 돌려 보내셨다. 서리와 눈은 따뜻한 봄으로 변하고, 가뭄은 단비가 되었으며, 망한 것이 다시 살아나고, 끊어진 것이 다시 이어졌다. 동쪽 땅 수천리가 고구 생성의 혜택을 입었으니, 이는 실로 만고의 기록에 드문 일이다. 한수 상류 삼전도의 남쪽은 곧 황제께서 머물러 계시던 곳이라 단과 뜰이 있는데, 우리 임금께서 수군에 명하시어 그 단을 더욱 높고 크게 하시고, 또 돌을 깍아 비석을 세워서, 황제의 공덕을 드날리어 영원히 전하게 하셨다. 참으로 천지자연과 함께 함이니, 어찌 우리 소방만이 대대로 영원히 의지하랴. 또한 대조(大朝)의 인(仁)을 행하고 무(武)를 올바르게 다스리면 아무리 먼 곳에 있던 자라도 귀순하지 않는 자가 없으리니, 그것은 다 이에 기인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의 큼을 본뜨고 해와 달의 밝음을 그린다 하더라도, 그 만의 하나라도 방불하게 하기에는 모자랄 것이나 삼가 그 대략을 실을 뿐이다." <신봉승의 조선의 마음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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