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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애청곡

[옛날동요] "고향 생각" (1939) - 선명회어린이합창단 노래

잠용(潛蓉) 2018. 6. 19. 20:34




"고향 생각" (1939)
김루안 작사/ 박태현 작곡/ 노래 선명회어린이합창단


< 1 >
저 산 너머 새파란

하늘 아래는

그리운 내 故鄕이

있으련마는


千里 萬里 먼 땅에

떠난 이 몸은

故鄕 생각 그리워 ~

눈물 지누나 ~


< 2 >
버들숲 언덕에

모여 앉아서

풀피리 불며 놀던

그리운 동무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나?

생각사록 내 故鄕이 ~

그립습니다 ~ 




(고향생각 - 선명화 합창단)

 




△ 작곡가 박태현 (朴泰鉉 1907~1993)


박태현(朴泰鉉 1907~ 1993) : 박태현은 1907년 9월 19일 평안남도 평양 설암리에서 아버지 박일찬, 어머니 한인찬 사이에서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집안 선대로부터 예능분야에 뛰어난 가정환경과 교육열이 높은 부모로 인하여 일제강점기시절에도 철저한 신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평양에서 숭덕학교-숭실중학교를 다니는 동안 조선을 대표하는 중학교팀에서 축구선수 생활을 하였다. 평양숭실전문학교 시절에는 체육, 미술, 음악 등 예술 전반에 탁월한 재주를 보이며 남다른 특기를 보여주기도 하였고, 스승 박윤근과 마두원 외국선교사에 의해 음악활동에 심취하기도 하였으며, 미술전람회에 입선되기도 하였다.


일본동양음악학교에서 첼로를 전공했으며 수많은 동요곡과 가곡을 작곡하였다. 합창과 관현악지휘도 했으며 대학에서 강의도 했다. 그의 다채로운 음악활동 가운데 특히 동요창작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37년 자신의 첫 번째 동요작곡집을 펴냈으며 그 가운데 수록되어 있는 「산바람 강바람」(윤석중 작사), 「누가 누가 잠자나」(목일신 작사), 「물새발자국」(김영일 작사) 등 수많은 애창 동요곡을 남겼다. 박태현 가곡집 『녹이(綠耳)』에 19곡의 가곡이 수록되어 있으며 국민적 애창곡으로는 「3·1절노래」·「한글날노래」·「애국의노래」가 있다.


그의 형인 박태은이 명치대학 재학 중 매국노 이완용 저격사건에 직접 연루되어 구금되는 불행한 사건으로 인하여 가족이 서울 신당동으로 거주지를 옮기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조선 미술전람회 입선(1932년), 국가대표급 축구선수였던 평양 생활을 접은 채 일본 기와바다미술학교로 진학하였다. 공부 중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의대 입학 권유를 외면하고 일본동양음악학교 첼로과에 들어갔다. 졸업 후 귀국하여 형의 죽음 소식을 들은 후부터 조선의 민족정신에 눈뜬 채 애국가요, 국민가요, 어린이를 위한 동요 작곡활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후진 양성을 위하여 학교에서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환갑 이후에는 그림 그리기와 교회 찬양대 지휘자로서 열정을 보이기도 하였다. 1980년부터 경기도 성남에 정착하여 살면서 성남문화예술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국향토문화대전>


고향 생각 
광명시민신문ㅣ2005년 07월 01일 (금) 15:57:32호 
 
저 산 넘어 새파란 하늘 아래는
그리운 내 고향이 있으련마는
천리 만리 먼 땅에 떠난 이 몸은
고향 생각 그리워 눈물짓는다.


버들순 두던에 모여 앉아서
풀 피리 불며 놀던 그리운 동무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나
생각사록 내 고향 그립습니다.


바쁘게 살다보면 잊어버리고 있다가 명절이 되면 너도나도 귀성객이 되어 고향 찾아간다고 교통체증으로 온 나라가 몸살을 앓게 된다. 이 노래는 어느 누가 생활고에 시달려 만주땅쯤 살면서 불렀던 노래 같다. 어릴 적 내가 타향에 있다고 가정하고 부르니 슬프고 그리운 노래였다. 어릴 적부터 떠나온 고향이라 이제는 찾아가도 노인들만 반겨주고 젊은이들은 누구인지도 모른다. 다들 고향이 좋아서 찾아가지만 그립다기보다는 어릴 적 추억이 서려 있어서 고향을 찾는 것 같다. 고향 떠나 결핵환자들 봉사한답시고 돌아다니다가 가끔씩 찾아가면 어른들께 꾸중이나 듣고 특히, 나이 많은 조카에게 들은 몇 시간의 충고는 잊혀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충고를 많이 한다. 객지에서 고향사람을 만나면 더러는 나보다 더욱 비참하게 살고 있지만, 고향에서 만나면 어디에서 누구의 양복을 빌렸는지 빌려 입고 고급담배를 사서 물고 기분 좋게 담배를 꺼내주며 어느 회사 높은 자리에 근무하노라고 허세 부리는 모습을 본다. 그러나 나는 빌려 입을 양복도 없었거니와 있다해도 오히려 벗어놓고 헌옷으로 갈아입고 갈 성질이다. 한 평생 내 돈으로 양복 한 벌 안 맞추어 입어보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또한 내가 피우기 위해 담배 한 갑 사보지 않았다. 다행히도 내가 골격이 잘 빠지고 생김새가 잘생겨서 헌옷을 입으면 잘 어울린다. 거지와 다를 바 없는 복장에 생활은 폐병쟁이, 거지들이랑 어울리다보니 찾아간 고향에서는 어느 누구도 반겨주지 않았다.


고향을 떠난 지 40년이 넘었으나 설날이라고는 군 제대하던 해에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상주 노릇 하느라고 한번 고향에서 지낸 것 같다. 정말 찾아가고 싶지만 사정상 못 찾아간 사람들 많을 것이다. 빚지고 도망 나온 사람들, 가족들끼리 싸우고 화해 못한 사람들, 돈 못 벌고 출세 못 해서 금의환향 할 수 없는 사람들, 또 객지에서 돼지를 기르는데 짐승 맡기고 떠날 수 없는 이들, 근무처에서 당직을 맡아 떠날 수 없는 이들, 고향타향 이생전생 초월하고 선에 취하고 도가에 입적한 도사들, 이웃집 유부남․유부녀와 눈 맞아 지 남편, 지 마누라 버리고 도망 나온 바람난 년놈들, 너무너무 돈 많이 벌고 출세해서 고향도 잊고 돈에 취하고 명예에 묻혀 사는 이들, 시집가서 시집살이하느라 당연히 찾지 못하고 사는 여인들, 그리고 이민 가서 천리만리 타향살이하며 살아가는 동포들, 이 모두가 귀성객 대열에 끼지 못하고 안하고 살아가는 이들이다.


나는 여기에서 갖가지로 사정에 얽혀 귀향이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살아간다. 그나마 나는 가끔 지나가다 들릴 수 있는 고향 땅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다른 곳을 보면 물 막아 발전소 짓는다고 수몰지구 되어 물에 잠기고, 개발인지 닭발인지 한답시고 돈주고 몰아낸 후 빌딩 지어 낯설 게 해놓고 공장 짓고, 골프장 만들고, 군사기지 들어서서 찾아갈 고향도 없는 이들은 더욱 슬플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그리워 할 고향마저도 없다. 이들은 철조망 너머 고향 두고 그리워하며 가지도 못 하고 늙어가고 죽어 가는 이들이야말로 생각사록 내 고향만 그리워하신다. 향수를 잊는 길은 우리나라가 고향, 지구가 고향이라고 생각하면 간단하다. [임락경  kmtimes@empal.com]  


옛 노래서 길어올린 나의 기억, 시대의 기억
한겨레ㅣ2005.08.25. 17:22 수정 2005.08.25. 17:22 댓글 0개 
 

[강원도 화천 산골짜기 시골교회 목사 임락경씨 평생 농민·노동자와 살아온 그가
 탁월한 기억력을 바탕으로 이승만 찬가 비롯한 관제가요 눈시울 적시는 구전·민중가요 등
 옛 노래 72편 속에 각인된 전쟁과 독재, 가난과 기쁨의 추억을 끄집어냈다]


▲ 촌놈 임락경의 그 시절 그 노래 그 사연 임락경 지음. 삼인 펴냄. 9800원


[한겨레] 강원 화천 화악산 골짜기의 '시골교회' 목사 임락경(60)씨.
강원 화천 화악산 골짜기의 ‘시골교회’ 목사 임락경(60)씨.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뜻’을 세워 평생을 농사꾼으로, 장애인·노인을 보살피며 농민·노동자와 어우러져 살아왔다. 그는 이젠 점점 잊혀지는 옛 노래들을 정확히 기억하는 재주꾼으로도 이름났다. 스스로 말하길 “잡다한 노래들”이다. 그가 갖가지 옛 노래를 기억할 수 있는 것은 노래들에 그 시절 그 삶의 조각이 정지화면처럼 각인돼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입이 노랫말을 흥얼거리면 기억 저편에서 농사꾼의 땀, 전쟁과 독재의 추억, 그리고 가난과 기쁨의 화면들이 질긴 빨랫줄에 걸린 것처럼 끊김없이 줄줄이 이어 나온다.


노래들은 그의 입에 머물지만, 모두가 한결같이 울고 웃는 이 땅 민초들이 함께 불렀던 노래들이다. 거기엔 ‘억지춘향’으로 학교 운동장에 정렬한 채 불러야 했던 엉터리 관제가요들도 있고─ “왔네 왔네 해방 왔네 망명 갔던 이 박사가/ 일제 탄압 물리치고 조국 광복 이룩코저/ 중국 미국 건너가서 해방 싣고 돌아왔네/ 얼씨구 좋다 지화자 좋다”(‘이승만 박사 찬가’, 1957년 국민학교 보급 가요).


노래로 말하는 자서전

부르다 보면 고향 떠난 민초들의 촉촉한 눈시울을 떠올리게 하는 구전가요들도 있고─ “저 산 넘어 새파란 하늘 아래는/ 그리운 내 고향이 있으련마는/ 천리만리 먼 땅에 떠난 이 몸은/ 고향 생각 그리워 눈물짓는다/ 비들순 두던 데 모여 앉아서/ 풀피리 불며 놀던 그리운 동무/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나/ 생각사록 내 고향 그립습니다”(‘고향 생각’).


1980년대에 감옥 가는 운동권 연인들이 이별하며 불렀던 유행가들도 있으며─ “님께서 가신 길은 영광의 길이었기에/ 이 몸은 돌아서서 눈물을 감추었소/ 가신 뒤에 제 갈 길은 님의 길이요/ 바람 불고 비 오는 어두운 밤길에도/ 홀로 섰는 이 발 길에 눈물을 감추었소”(’아내의 노래’). 가난과 노동의 절절한 아픔이 새겨진 민중가요들도 있더라─ “서방님의 손가락은 여섯 개고요 시퍼런 절단기에 뚝뚝 잘려서/ 한 끼에 오만 원씩 이십만 원을 술 퍼먹고 돌아오니 빈털터리래”(‘야근’). 그러고보면, 노래의 기억은 과거 사건의 기억인 셈이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가 지금은 사라진 구전가요의 긴 노랫말을 또렷한 음질로 재생하는 탁월한 기억력을 발휘해, 임 목사가 쓴 <촌놈 임락경의 그 시절 그 노래 그 사연>(삼인 펴냄)은 일제 때부터 1980년대까지 민초들이 자주 불렀던 72편의 창가, 동요, 관제가요, 군가, 유행가, 운동가요의 에피소드를 담았다. 노래 이야기는 곧 ‘노래로 말하는 임락경의 자서전’이 되었다.



▲ 민초들이 불렀던 옛 노래들에는 어렴풋하고도 때로는 또렷한 그와 그 시대의 옛 추억들이 새겨져 있다고 시골교회 임락경 목사는 말한다. 민초들의 노래들은 그에게 가난과 땀, 전쟁과 독재, 고난과 기쁨의 옛 기억들을 담고 있는 ‘앨범’이기도 하다. 마을축제 때 사진의 맨앞쪽 상쇠잡이가 임 목사다. /사진 <…그 시절 그 노래 그 사연>에서.


그가 머릿속 기억의 장소에다 채록한 노랫말의 출처는 그 삶의 궤적이었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요상한 노래들(“고마우신 이 대통령 우리 대통령/ 그 이름 길이길이 빛내오리다” “그 이름 찬란하다 이기붕 선생/ 이 박사를 보필하실 애국자라네”)을 배웠고, 군인으로서 멸공의 노랫말(“쳐부수자 공산군 몇 천만이냐/ 우리 국군 진격에 섬멸뿐이다” “배낭 메고 구두끈을 굳이 메고서/ 힘 있게 일어서는 멸전의 행진”) 속에서 살았고, 농사꾼 목사로 살며 유행가의 노랫말을 바꿔 부르는 ‘노가바’(“비료 값 농약 값 모두 올라도 농민들의 쌀값은 오르지 않네”(‘고래사냥’))에 익숙해지기도 했다.


암울한 시절엔, 간혹 노랫말이 ‘사람 잡는 사건’을 만들었다. 1979년 ‘크리스천아카데미 사건’이 그렇다. 크리스천아카데미에서 연수교육을 받던 참가자들이 당시의 유행가 ‘아 미운 사람’을 개작해 “농민들이 얼마나 농사를 더 져야 아 살 수 있나/ 우리 모두 지금까지 피땀 흘려 왔는데 아 슬픈 현실”이란 ‘노가바’를 만들어 부른 것이 뒤늦게 화근이 돼, ‘남한 체제 전복을 위한 6인 서클 구성’이란 사건으로 발전했다고 지은이는 회고했다. 이 노래는 그에게 남산 중앙정보부, “속칭 남산 탁구장”에서 받은 고문의 기억과 함께 고생했던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노래는 그의 삶 속에서 여러 삽화를 불러내며 계속된다.


즐겁게 사는 것과 기쁘게 사는 것

"상학종을 쳤는데 어떻게 할까/ 집으로 돌아갈까 들어가 볼까/ 월사금이 없어서 학교 문밖에/ 나 혼자 설움 아닌 눈물 나오네"라는 일제 시대 야학에서 불렸다는 이 노래는 지은이한테 어린 시절의 가난과 함께 진학을 하지 않겠노라 결정했던 초등학생 임락경의 야무진 생각을 또렷이 되살린다.


"펄펄펄 휘날리는 재건의 깃발 아래서/ 조국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겠느냐"는 '재건의 노래'는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위원회장을 수장으로 한 군인문화 속에서 '재건합시다!'를 인삿말로 하라는 웃지 못할 공문까지 나돌던 시절을 말한다. 또 "양키 쪽발이 판치는 세상/ 매판과 파쇼에 지친 형제들"의 '우리 것 우리가 찾아서'에는 살기 힘들었던 1970년대 농촌의 임 목사 집을 안식처로 여겨 찾아들던 해고노동자들이 벌였던 한바탕 노래·춤판의 신나는 기억이 담겼다. 나이 예순에 접어든 그에게 지금 다시 불러보는 동요는 더욱 새롭다.


기름불조차 없어 밤이면 바느질도 못하는 순이네 엄마 방에다 달을 따다 달아드리자는 애틋한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달따러 가자', 올빼미족 세계 3위가 된 우리나라의 늦잠 버릇을 향해 호통을 치게 하는 '새나라의 어린이', 산천초목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는 국토 개발 바람과 함께 학교에서 없어진 노래 '뚝딱뚝딱 해는 저문다'라는 동요들은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것들'을 향한 아쉬움이 담겼다.


'노래하는 자서전'을 통해, 그는 이제 "즐겁게 사는 것보다 기쁘게 사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다. "자기를 위해 살면 즐거움이 있고 자기 가족을 위해 살면 더욱 즐겁다. 그러나 타인을 위해 살면 기쁨이 있다. 즐거움은 육에 필요한 것이기에 잠깐이요, 기쁨은 영원하다." 소개된 노랫말 72편 가운데 25편의 악보가 책의 말미에 실렸다. << 온라인미디어의 새로운 시작. [ⓒ 한겨레(http://www.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