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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末 애국열사의 표상 梅泉 黃玹 (1855∼1910) “나라 잃은 선비가 무슨 낯으로 세상을 대할 것인가” 글·이재광 이코노미스트 기자 격동의 조선 말기를 살다 간 역사가이자 시인인 매천은 망국의 소식을 듣고 세 덩어리의 아편을 삼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아편을 먹기 전 세차례 망설인 것을 부끄러워하며 죽었다. 부패가 역병처럼 창궐하고 주변국들이 야수가 되어 잡아먹겠다고 덤벼드는, 그 나라를 걱정하다 결국 자신이 책임질 것도 없는 亡國의 비보를 듣고 그렇게 갔다. 그래서 그의 이름 앞에는 애국과 憂國, 殉國이라는 말이 따라 다닌다. 그가 남긴 저서 “매천야록”과 “오하기문” 등에서 그는 잠시도 나라 사랑과 나라 걱정을 멈추지 않고 있다. 가히 애국열사의 표상이라 할 만한 인물이다. 황현 선생은 한말의 순국지사이자 시인이며 문장가이다. 전라남도 광양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짓고 재질이 뛰어났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갑오경장·청일전쟁이 연이어 일어나자 위기감을 느끼고, 경험과 견문한 바를 기록한 『매천야록(梅泉野錄)』·『오하기문(梧下記聞)』을 지어 후손들에게 남겨 주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국권을 박탈하자 김택영과 국권회복 운동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10년 8월 일제에게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자, 절명시 4편과 유서를 남기고 아편을 먹어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으며 이건창, 김택영과 함께 한말삼재(韓末三才)라고 불린다. 난리를 겪어 허옇게 센 머리 (亂離滾到白頭年) 죽고자 했어도 죽지 못했던 것이 몇 번이던가 (幾合捐生却未然)
오늘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 (今日眞成無可奈)
바람 앞의 촛불이 하늘을 비추누나 (輝輝風燭照蒼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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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도 슬퍼 울고 강산도 시름한다 (鳥獸哀鳴海嶽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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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먼 옛일 생각하니 (秋燈掩卷懷千古)
세상에 글 아는 사람 구실하기가 이처럼 어렵구나 (難作人間識字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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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9월7일 새벽. 경술국치(庚戌國恥·1910년 8월29일)의 비보를 들은 지도 1주일이 지났다. 아편 세 덩어리를 앞에 두고 지긋이 눈을 감고 깊은 시름에 빠진 매천(梅泉) 황현(黃玹). 이미 시인으로서 삶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절명시(絶命詩) 4수(首)를 써놓은 상태다. 저승을 코앞에 둔 그의 생각은 시구(詩句) 그대로 천고(千古)를 돌아볼 만큼 깊기만 하다.
“이 아편 덩어리들을 삼키기만 하면 이제 저세상이다. 나라 잃은 선비가 무슨 낯으로 세상을 대할 것인가.
그런데 진정 이것을 삼켜야 하는 것일까. 죽을 수 있을까.”
망국(亡國)의 한을 달랠 길 없어 죽기를 각오하고 생을 끝내는 마지막 시까지 써 놓았건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손은 쉽게 아편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아편을 손에 들고 입에 대었다 떼었다 하기를 몇차례. 그러다 결국 소주와 함께 그것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다니….’ 선비로서, 사대부로서 매천은 오히려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매천은 죽음에 이르렀다. 숨이 막히고 머리가 어지러워지더니 증세가 점점 더 심해졌다. 지난 1주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으로 날을 보내지 않았던가. 몸은 허해질대로 허해져 아편 기운은 금세 몸을 휘감고 돌았다. 꿈인지 생시인지를 구분하지 못하고 혼절했다 깼다를 반복한 것도 여러 번. 그는 하루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보내다 결국 다음날 아침 한많은 세상을 등졌다. 그의 나이 쉰다섯.
역사가로서, 시인으로서 한창 완숙미를 뽐낼 때였다. 죽기 직전 가족들은 통곡하며 그를 살리려 애썼지만 매천은 살기를 거부했다. 오히려 죽음을 두려워했던 자신이 초라해질 뿐이었다. 마지막 죽어가는 자리에서 그는 동생 황원(黃瑗)에게 부끄러움을 토로한다.
“아우야, 내가 아편을 입에 댔다 떼었다를 세차례나 했다. 선비로서 도리를 지키지 못했구나.”
“매천의 붓 아래 온전한 사람이 없었다” 나라를 잃은 선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가 남긴 4수의 절명시(絶命詩)에는 슬픔, 고통, 절망, 수치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대궐이 침침하고 어둡다” (九闕沈沈晝漏遲)고도 했고 “해맑은 종이에 천가닥 눈물이 난다” (琳琅一紙淚千絲琳)고도 했다.
“나라 위한 벼슬아치가 아니니 (曾無支廈半椽功)
이 죽음은 도리일 뿐 충일 수 없다” (只是成仁不是忠)는 시구도 있다.
녹(祿)을 먹는 자가 그렇게 많아도 자기 배 불리고 자기 일가(一家) 편하기만 원했을 뿐이라는 말이다. 그만큼 썩은 나라라는 사실이 절망감을 부추기지만 한편으로 나라가 망한 날 죽은 자 있으니 아직 그 나라는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기도 했다.
절명시에 들어 있는 그의 심정은 그가 개인적으로 가족에게 남긴 유서 ‘유자제서’(遺子弟書)를 봐도 알 수 있다.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義理)가 없다. 그러나 나라가 선비를 기른 지 5백년이 됐는데도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 죽는 이가 없구나. 나는 다만 그것이 가슴 아플 뿐이다. 내가 위로는 하늘이 지시하는 아름다운 도리를 저버리지 않았고 아래로는 평소에 읽은 책 속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았다.
이제 길이 잠들려 하니 참으로 속이 시원하다. 그러니 너희들은 너무 슬퍼하지 말라.”』
'國家養士五百年'의 恩典에 보답하고, '難作人間識字人'의 사명을 자임한 心吐이기에
읽는 이로 하여금 절로 비분.강개함을 절감케 한다.
격동의 조선 말기를 살다 간 역사가이자 시인인 매천은 이렇게 한많은 세상을 떠났다. 부패가 역병처럼 창궐하고 주변국들이 야수가 되어 잡아먹겠다고 덤벼드는, 그 나라를 걱정하다 결국 자신이 책임질 것도 없는 망국(亡國)의 비보를 듣고 그렇게 갔다.
그래서 그의 이름 앞에는 ‘애국’과 ‘우국’(憂國), ‘순국’(殉國)이라는 말이 따라 다닌다.
그가 남긴 글을 보면 이들 수식어가 전혀 헛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1864년(고종 1)부터 1910년(순종 4) 경술국치일에 이르기까지의 조선 역사를 그린 “매천야록”(梅泉野錄), 19세기 동학혁명을 집중적으로 쓰고 있는 “오하기문”(梧下記聞), 한시(漢詩)를 중심으로 한 그의 유고집 “매천집”(梅泉集)이 그가 남긴 대표작들. 이 글들 안에는 나라사랑, 나라 걱정이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늘 ‘나라’를 앞세운 그였기에 나라에 누(累)를 끼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도 그의 붓 아래서 살아남지 못했다.
▲전남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에 있는 매천 황현(1855~1910) 선생의 위패를 모신 매천 사당(梅泉祠). 문화재자료 37호. 1864년(고종 원년)부터 1910년(순종 4)까지의 사건들을 적은 『매천야록』원본, 선생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 지구본, 벼루 등 선생의 유품이 보존되어 있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 최고 통치자인 고종과 그의 비(妃)인 민씨, 또 세도가로 악명이 자자했던 그의 친인척, 나라의 녹을 먹고 부정부패를 일삼는 고관대작들, 나라가 어지럽다며 남을 해하는 도적떼의 우두머리들….
누구 하나 성한 사람이 없었다.
“매천필하무완인”(梅泉筆下無完人),
즉 세상은 “매천의 붓 아래 온전한 사람이 없었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모든 역사 인물을 이해하기 위한 첩경은 당시 시대 상황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매천도 예외가 아니다. 어쩌면 누구보다 시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할지 모른다. 그만큼 그는 혼란과 격동의 시기를 살았기 때문이다. 1855년 생이니 그는 아편전쟁이 발발한 지 13년, 일본이 미국에 의해 쇄국의 빗장을 연 지 2년 후 태어났다. 이후 벌어진 사건들은 큰 것만 꼽아 봐도 그의 시대가 어느 정도 격변기였는지를 알게 된다.
◇ 전남 구례 매천사(梅泉祠)
“새와 짐승이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무궁화 이 땅이 이젠 물속에 가라앉았도다/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지난 역사를 되새겨보니/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가 어렵기만 하구나.”
구한말의 한학자이자 우국지사인 매천 황현 선생이 남긴 절명시의 한 대목이다.
매천은 1910년 일본이 이 나라를 강제합병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을 못이겨 다량의 아편을 먹고 자결했다.
전남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 월곡마을. 매천이 마지막 삶을 산 곳이다.
지역 유림들은 그의 뜻을 기려 이곳에 1955년 사당인 매천사를 지었다. 이곳엔 그가 1864~1910년 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술한 <매천야록>과 사용하던 유품·고서들이 보관된 유물전시관과 기념비가 들어서 있고, 한켠엔 생을 마감한 세칸짜리 건물이 조촐한 모습으로 이 땅의 봄을 다시 맞고 있다.
사당의 문은 잠겨 있으나 매천의 증손자 며느리 이유례(60)씨가 혼자 사는, 왼쪽 골목 오른쪽 첫집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061-782-5580). 구례읍에서 남원으로 가다
천은사쪽으로 우회전해 들어가면 왼쪽에 월곡마을이 있다.
▲매천 황현(1855~1910)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 문화재자료 37호 매천사(梅泉祠).
11세 때 한시 쓴 신동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한 ‘병인사옥’, 미국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올라가다 격침당한 ‘셔먼호 사건’,
프랑스 함대가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도를 습격했던 병인양요. 하나 하나가 쇄국을 고수하던 조선 사회에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충격을 안겨줬을 만한 이 세가지 사건들이 모두 그의 나이 11세 때 일어났다.
처음 한시를 지어 향리 어른들을 놀라게 한 바로 그때였다. ‘신동’ 소리를 듣던 명민한 그가 세상사 돌아가는 일, ‘역사’에 무심할 리 없었다.
19세기 중반 문호 개방을 요구하던 외세와 사사건건 충돌하면서도 조선은 철저하게 쇄국정책을 고수했다. 1863년 실권을 장악한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870년대 중반 조선의 정책은 쇄국에서 개국으로 급선회했다. 개국이 세계적 추세라는 인식이 지배층에 유포됐던 것도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1873년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포하며 철저한 쇄국주의자 대원군이 하야한 것이 정책 변화의 주요 동기였다.
조선이 마침내 일본에 문호를 개방한 1876년은 그의 나이 21세가 되던 해다. 피끓던 젊은이였다.
그는 외세의 압력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쇄국의 빗장을 연 것을 한탄했다. 극심한 사회 혼란이 그의 눈 앞에 어른거렸다. 개국파와 쇄국파의 분란에 굶주린 민중이 들고일어날 것이 뻔했다. 여기에 자기 몫만 챙기는 부패한 세도 권세가들이 있지 않은가. 어두운 앞날을 예견하며 시름에 잠긴 그가 방 한쪽 구석에서 시로 마음을 달래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꼼꼼히 기록으로 남기고자 했던 단심(丹心)에 이해가 간다.
매천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한 그가 정통 유생(儒生)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장수(長水) 황씨로 세종 대의 명 재상이요, 조선 성리학의 최고봉 황희의 후손임을 늘 자랑삼아 얘기했던 그였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에서 활약한 황진(黃進), 인조 때 정언(正言)을 지낸 황위(黃暐)는 가문을 빛낸 또다른 자랑거리.
하지만 그 이후로는 얘기가 달랐다. 8대조인 황위 이래 벼슬이 끊겨 ‘몰락양반’이라는 멍에를 지고 살아야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잔반(殘班)들처럼 끼니를 걱정해야 할 신세는 아니었다. 그의 집안은 전남 광양(光陽)에서 손꼽힐 만큼 거부였다. 모두 조부와 부친 황시묵(黃時默) 덕이었다. 조부는 조상이 물려준 가난을 딛고 부(富)를 모았으며 부친은 이를 잘 관리하여 영특한 아들이 아무 걱정 없이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줬다. 어느날 갑자기 그에게 서적 1천권을 사줬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오는 것을 보면 집안의 뒷받침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붓끝의 기백은 班固가 눈에 차지 않는다”
매천은 집안의 자랑이었다. 집안에서는 그의 영특함이 8대조 이래 벼슬한 사람이 없다는 가문의 ‘치욕’을 씻어줄 것으로 기대했다. 매천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총명함이 마을 어른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7세 때부터 서당에 다니기 시작한 그는 천자문을 간신히 떼어도 다행일 11세의 나이에 멋들어진 한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주자(朱子)의 “통감강목”(通鑑綱目)은 모두 암기했을 정도였다.
그가 벼슬에 대한 집안의 뜻을 처음부터 거슬렀던 것은 아니다. 14∼15세 때 본도시(本道試)에 응시했고 17세 때는 순천영(順天營)의 백일장에도 응시하면서 자신의 필력(筆力)을 떨쳤다. 글에 대한 욕심도 한껏 커지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시골 한 귀퉁이에서 그를 만족시키는 문장가와 새 학문을 찾기 어려웠다는 사실은 19세 되던 해 그가 무작정 상경했다는 것을 이해하게 해준다. 그는 “유림노사(儒林老師)의 진부한 학문(儒者陳腐之學)에 염증을 느낀다”며 그해 홀홀단신으로 서울을 찾았다.
이후 그의 행각은 장안을 떠들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시로써 세상을 논하자며 서울의 내로라하는 논객들을 찾아 다녔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 시골뜨기 선비가 서울의 최고 문인들에게 도전장을 낸 셈이었다. 처음에는 우습기도 했겠지만 그의 글은 이내 이들을 사로잡았다.
이때 만나 평생 뜻을 같이했던 동료들은 조선의 쟁쟁한 문인들인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추금(秋琴) 강위(姜瑋),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 등이다.
특히 이건창과의 교우는 ‘신교’(神交)로 알려질 만큼 애절한 것이었다. 영재는 매천의 글을 가리켜 “붓끝의 기백은 반고(班固·後漢의 역사가)가 눈에 차지 않는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천은 조선시대 선비의 최고 꿈인 관계 진출에 연연해 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마을마다 급제자가 나오고 집집마다 진사가 있을 정도”로 혼탁한 세상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그도 집안의 권유를 물리치지 못해 과거를 친 적이 꼭 두번 있다.
처음은 1883년(고종 20), 그의 나이 29세 때 일이었다. 정기 과거에 응시하지 못한 사람을 위한 특설보거과(特設保擧科) 초시(初試)에 응시해 차석을 차지한 것이 첫 시험 성적표다.
고향에서나 집에서나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시골 사람에게 수석 자리를 줄 수는 없었다”는 말에 분개해 낙향하고 말았다. 썩어빠진 관료들의 말도 안되는 이유 때문에 “다시는 과거를 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더러운 세상에서 입신출세란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또 한번 과거를 보게 된다. 8대 동안 급제자를 내지 못한 집안의 치욕을 씻어 보겠다는 부친의 뜻은 좀처럼 꺾일 기세가 아니었다. 매천의 부친은 그가 고향에 돌아온 후 늘 “내 생전에 너는 반드시 과거에 응시해야 한다”며 관계 진출을 부추겼다고 한다.
부친의 뜻을 이기지 못해 두번째 시험장에 나선 것이 1888년. 34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성균관 회시(會試) 생원시(生員試)를 치렀다. 여기서 그는 당당하게 장원(壯元)으로 합격, 금의환향의 영예를 누리게 된다.
시험감독 정범조(鄭範朝)가 재주를 인정했다 하여 기분도 좋았겠지만 부친의 뜻이 하도 강고해 그는 일단 성균관 생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비로소 중앙 무대에 진출한 것이다.
하지만 이도 얼마 가지 못했다.
무능력한 국왕, 추악한 세도가, 부패한 관료들 틈새에서 더이상 뜻을 펼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는 서울을 찾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가 할 일은 오직 책 읽기와 책 쓰기였을 뿐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왜 관료로서의 출세를 마다하고, 또 좋은 벗들이 그토록 만류했는데도 서울을 떠났을까.
“매천집”을 엮은 창강 김택영의 얘기를 들어보자.
귀신과 미치광이가 설치는 나라 조선
▲1933년 소화 8년에 간행된 "매천집". '삭제'라는 표시가 조선총독부의 검열 표시를 나타낸다. |
“당시에는 외세의 침략으로 국가의 우환이 날로 커지고 있었으며 정사(政事) 또한 날로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세상에 나설 뜻이 없었던 매천은 마침내 두문불출, 서울에 모습을 내놓지 않고 오직 책에만 마음을 두고 있었다.
서울 친구들이 가끔 편지를 보내 서울을 너무 오래 떠나 있는 것 아니냐며 책망의 말을 하니 매천은
‘자네들은 어찌 나로 하여금 귀신 나라의 미친 무리들 속에 끼어 미친 귀신 짓을 하게 하고 싶어 하는가’
(子奈何欲使我入於鬼國狂人之中, 而同爲鬼狂耶)라고 했다.”(매천집 1권)
귀국(鬼國)과 광인(狂人). ‘귀신나라와 미치광이들’이라는 이 말은 20세기를 전후해 외우내환(外憂內患)과 누란지위(累卵之危)의 조선에 대한 매천의 역사의식을 대변한다.
구미 열강들은 물론 청과 일본까지 잡아먹겠다며 나선 마당에 무슨 세도가요, 무슨 왕실의 친인척까지 나서 부정부패를 저지른다는 말인가. 역사가 매천의 눈에 조선은 귀신과 미치광이들이 날뛰는 세상이 아닐 수 없었다. 매천은 결국 이 사사로운 세상을 떠나 향리에 칩거하며 평생을 세상에 대한 ‘관찰자’로만 남았던 것이다.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빠짐없이 수집해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겨 후세인들에게 반성의 기회를 만들어 줬다.
고향 광양으로 돌아온 후 거처를 구례로 옮긴 그는 1890년 개인 서재를 마련해 본격적인 집필 작업에 들어갔다. ‘구안실’(苟安室). 서재 이름에조차 그의 생각이 묻어 있다. ‘구차하게 쉬는 방’이며 동시에 ‘구차하지만 편안한 방’이다. 또 ‘구차하게 편안함을 구하는 방’일 수도 있다. 바로 이 방에서 그는 자신을 역사가로 인정받게 한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을 썼다.
매천의 역사관을 보자.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그가 설정했던 가장 중요한 주제는 ‘망국’(亡國)이다. 누구 때문에, 왜 나라가 망했는지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 한자의 어법을 십분 활용한 풍자와 비판은 그를 더욱 확고부동한 ‘역사가’로 만든다. 누가 나라를 망하게 했는가. 그가 우선 꼽는 사람은 왕과 명성황후 민씨였다.
매천은 이들의 무능과 부패를 망국의 첫번째 요인으로 보고 있다.
그의 글을 본 현대 역사가들은 ‘매천이 왕과 비를 저주했다’거나 ‘일본보다 더 미워했다’는 등의 해석을 주저없이 쓸 정도. 매천의 붓 끝은 무엇보다 이들의 ‘인재등용’을 질타하고 있다.
무당이나 점술가 등을 요직에 배치했다는 사실은 매천이 조선을 ‘귀신나라’라고 부른 가장 중요한 이유다. “매천야록”은 무당 진령군(眞靈君)의 중용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다.
고종과 민비, 亡國의 최대 기여자
‘진령군이라는 무당이 충주에 피난가 있던 민비의 환궁일을 예언하여 중용되자 수령이나 병졸, 수사(水使)가 그의 손에서 나왔고 재상(宰相)들이 다투어 자매와 의자(義子·의붓아들)가 됐다. 그리고 한말에 법무대신까지 지낸 김해 출신의 이유인(李裕寅)은 궁핍한 무뢰배임에도 불구하고 귀신을 부릴 수 있다 하여 진령군의 추천을 받아 양주목사로 부임받기도 했다.’
그가 열거하고 있는 무당과 점술가의 중용 사례는 이 뿐만이 아니다.
‘점술가 안영중(安永重)은 현풍군수로, 거창 출신 차성충(車聖忠)은 요술을 부릴 줄 안다 하여 왕의 사랑을 받았다.’
‘왕은 진령군이 죽자 상복을 입었던 그의 의붓아들 김사묵(金思默)이 경무사(警務使)로 있을 때 탄핵을 받았으나 진령군을 생각해 그대로 유임시켰으며…’
‘충주인 성강호(成康鎬)는 귀신을 알아볼 수 있다 하여 왕이 죽은 민비를 보게 하고 그리하여 그 집의 문은 성시(盛市)를 이뤘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고종을 가리켜 ‘사사로운 일에 끌려 공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가 다만 그 일이 해결될 수 없을 만큼 착찹하게 된 후에야 적합한 인재를 기용하고는 했다’고 쓰고 있다. 그가 보기에 이것이 민란이 계속되는 이유였다. 민란이 끝난 후에도 그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 없애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함흥민란, 북청민란, 제주민란 등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있다가 문제가 더 커지자 민란을 잠재울 인재를 구했다고 했다. 일단 고종이 최종적으로 등용했던 서정순(徐正淳)·이규원(李圭遠) 등은 적임자로 본 것이다. 그러나 ‘민란이 평정되면 그대로 방치했다’고 쓰고 있다. 발본색원하지 않고 임시방편의 처리만 함으로써 사회 혼란이 가속화됐다는 말과 다름아니다.
고종의 야합과 편협, 우유부단에 대한 지적도 날카롭다.
우선 그는 “고종의 성품은 자신이 모든 일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남들과 영합하기를 좋하했다”고 말한다. 이건창이 충청감사 조병갑의 탐학(貪虐)을 조사해야 한다는 건의를 묵살한 후 그를 기피했으며 자신을 노론(老論)이라 하며 남인·북인·소론 등 3색을 노골적으로 천대함으로써 최고 통치자로서의 불편부당성을 망각하고 나아가 관료의 당파싸움을 부추기기까지 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각 대신들을 임명하고 1주일도 채 안돼 자리를 바꾸게 하는 등의 졸속행정으로 “부하직원들이 공문서를 들고 갈 곳을 모르더라”는 탄식은 오늘날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고종이 뇌물을 좋아했다는 말도 곳곳에서 나타난다.
“남정철(南廷哲)이 과거에 급제한 지 2년도 안되어 평안감사가 됐다. 왕가의 친척도 아닌 사람이 이렇게 빨리 출세한 것은 근세에 없는 일이었다. 그는 감영(監營)에 있을 때 고종에게 계속 뇌물을 바쳤는데 고종은 그가 충성한다고 생각하고 영선사(領選使)로 임명해 톈진(天津)으로 보내면서 크게 기용할 뜻을 보였다. 그러나 민영준(閔泳駿)이 남정철과 교체된 후 작은 송아지가 수레를 끄는 조각을 황금으로 만들어 고종에게 바치자 고종은 얼굴빛이 바뀌며 남정철을 꾸짖었다. ‘남정철은 알고 보니 큰 도적놈이로구나, 관서(關西)에 이렇게 금이 많은데 혼자 독식했다는 말이냐?’ 이때부터 그에 대한 총애는 쇠퇴했고 대신 민영준이 날로 중용됐다.”(매천야록)
명성황후, 상궁 장씨 아들 낳자 “칼 받아라”
▲매천시 내에 있는 매천이 살던 집. 오른쪽 끝방이 그가 아편 세 덩이를 먹고 자결한 방이다. |
명성황후에 대한 글 역시 여러 책 곳곳에서 등장한다. 물론 대부분 부정적인 내용들이다. 얼마나 탐욕스러운지, 시기와 질투와 미움이 얼마나 큰지, 얼마나 악독한 성품인지…. 매천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정말 ‘귀신 나라’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매천야록에 실린 다음과 같은 글은 그중에서도 압권이다.
“신묘년(1891년) 겨울 명성황후는 고종에게 강(堈)을 의화군(義和君)에 봉하자고 권했다. 의화군은 상궁 장씨(張氏)의 아들이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 명성황후는 화가 나서 날카로운 칼을 들고 장씨의 거처로 가 … 큰 소리로 ‘칼 받아라’고 외치며 방으로 뛰어들었다.
장씨는 본래 힘이 세어 한 손으로는 칼자루를 잡고 한 손으로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땅에 엎드려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명성황후는 … 칼을 던져 버리고 웃으며 ‘과연 대전의 사랑을 받을 만하구나. 지금 너를 죽이지는 않겠다만 다시는 궁중에서 거처할 수 없다’고 한 후 장정을 불러 그녀를 포박하게 했다. 그리고 그녀의 음부 양쪽의 살을 도려낸 후 …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그후 장씨는 형제들에게 10년 동안 의지하고 살다가 그 상처로 인해 죽고 말았다.”(매천야록)
명성황후와 함께 민씨 일가의 세도정치도 매천은 극히 싫어했다. 요직을 모두 차지한 후 온갖 부정부패를 다 저지르고 있었으니 ‘망국’의 또 다른 기여자였다.
“오하기문”에서 그는 ‘대개 성이 민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탐욕스럽다. 전국의 큰 고을이라면 대부분 민씨들이 수령 자리를 꿰찼고 평양감사와 통제사는 민씨가 아니면 할 수 없게 된 지가 이미 10년이나 됐다’고 쓰고 있다. 나라를 잡아먹는 귀신은 다름아닌 민씨 일가임을 알게 해 주는 대목이다. 그의 글 곳곳에서 민씨 가문에 대한 혐오증이 드러난다.
개화당, 동학혁명에도 부정적
현대 역사가들로부터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는 개화파나 동학혁명에 대해서도 매천의 평가는 결코 좋지 않았다. 현대 역사가들로부터 매천이 외면당하는 이유 중 하나다. 일부 역사가들로부터 메이지 유신에 비교되는 평가를 받고 있는 갑신정변에 대해 매천은 거의 ‘최악’인 해석을 내리고 있다.
그 중심 세력인 개화당을 가리켜 ‘도적’이나 ‘역당’(逆黨)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이들의 살육과 횡포를 집중적으로 그리고 있으며 동시에 ‘음모’의 실패를 ‘하늘의 뜻’으로 말하고 있다.
동학혁명에 대한 것은 개화당 이상이다. 매천에게 동학은 ‘굶주린 백성을 선동하는 술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동학도를 가리켜 서슴없이 ‘동비’(東匪)‘비도’(匪徒)‘비적’(匪賊)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모두 도적떼 라는, 적의에 찬 용어들이다.
심지어 ‘그들에게 교형(交刑)을 처하고 참형(斬刑)에 처하지 않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들에게 알맞은 처형을 시행하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고 쓰기까지 했다. 그는 동학농민군과 대치하다 전사한 김한섭(金漢燮)을 추모하는 시구에서 동학도를 가리켜 개미·뱀·돼지로 비유하고 있다. ‘지난해 호남의 적들 개미떼 같더니(往歲湖南敵如蟻)/눈 깜짝할 새 뱀·돼지떼가 됐구나(轉眼猖獗蛇而豚)’라고 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매천의 눈에는 도적이요, 모두가 미치광이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몇몇 인물들에 대해 그는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들이야말로 충신이요, 이들의 정신이야말로 유일한 나라의 희망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침략의 손길을 뻗치는 일제에 항거하다 목숨을 끊은 순국열사들.
이들에 대한 매천의 마음은 각별하다. 특별히 많은 분량을 할애하며 순국의 전후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우리 후대인들은 그의 사실적 묘사로 인해 정서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선열들과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905년 11월4일, 민영환(閔泳煥)이 자결했다 … 민영환은 탄식하기를 ‘어찌 집으로 갈 수 있겠는가’하면서 옛 하인인 이완식의 집으로 가서 하룻밤을 묶었다….
그는 일어나 화장실로 가 이완식을 부르며 ‘내가 설사를 하였으니 끓인 물을 조금 갖다 주게, 내 손을 조금 씻어야겠네’라고 하자… 그는 손을 씻은 후 통증을 느끼는 듯한 말로 ‘내가 무슨 죄가 있어 죽지 않고 이럴까’라고 했다. 이완식은 크게 놀라며 화급히 그를 끌어안고 문을 부수듯 방으로 들어갔다. 선혈은 이미 그의 다리까지 묻어 있었다.
… 그러나 그는 절명한 상태였다. 벽에는 피묻은 흔적이 있었다. 촛불을 밝혀 보니 손가락으로 문지른 자국이 완연했다. 차고 있던 칼이 짧아 첫번째 찌를 때 죽지 않고 피가 칼자루에 묻어 칼자루가 미끄럽자 손을 벽에다 닦은 후 다시 정신을 차려 찌른 것이다. 그는 후관(喉管·목구멍)이 다 베어진 채 죽어 있었다.
이완식은 큰 소리를 내어 통곡하였고 온 가족들도 그를 따라 울었다. 그 곡성(哭聲)은 서로 전달되어 삽시간에 성안으로 퍼져 산이 꺼질 듯이 요란했다.”(매천야록)
매천의 순국자에 대한 애정은 정말 남달랐다. 그의 붓은 단지 민영환과 같은 고관대작에서 일개 병졸에 이르기까지 나라를 잃어 비분강개한 마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애국지사에게는 특별한 마음을 전하고 있다. 아주 상세한 묘사를 통해 자손만대 후손들에게 전하는 것을 역사가의 의무로 알았음직하다.
그가 많은 양을 할애한 순국지사 김봉학(金奉學)은 평양에서 징집된 일개 병졸에 불과했다.
“어찌 왜놈을 때려죽이는 사람이 하나도 없느냐는 그의 말에 여러 장병들이 웃고 말자 그는 영문(營門)으로 달려가 입에 칼을 물고 한번 높이 뛰어 내려 엎어졌고 그 칼은 등을 관통했다”고 썼다.
순국의 전말을 잘 모른다면서도 학부주사(學部主事) 이상철(李相哲)의 죽음에 대해 아는 한도 내에서 기록을 남겼다. 힘이 닿는 한 반드시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심지어 그는 민영환의 사랑채에 살며 인력거를 끌던 인부가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목을 맸다는 사실까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가련타 , 어디에 님의 뼈를 묻사오리”
▲매천의 사당인 매천사 내부 모습. 위패와 사진 등이 걸려 있다. |
그러나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만큼 그의 마음을 비탄에 빠지게 만든 순국지사는 없었다.
면암은 잘 알려진대로 개항기 흥선대원군에 맞서 목숨을 걸고 자신의 길을 걸었던 유림(儒林). 1868년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한 후 삭탈관직당했다가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다시 기용된 후에도 끊임없이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해 제주도 귀양살이까지 한, 한말 쇄국을 주장했던 대표적 선비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라도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전하다 체포되어 쓰시마(對馬)섬으로 유배되어 단식 끝에 죽었다.
매천은 면암이 두번째 상소를 올려 옥에 갇혔다가 풀려났을 때 “한성의 사녀(士女)들은 술을 들고 다니기도 하고 향화(香火)를 머리에 이고 다니기도 하여 그 불빛이 거리를 찬란하게 비추었다. 그들은 이토록 최충신(崔忠臣)이 다시 살아난 것을 경축한 것이다”라며 그의 고결한 정신을 찬양했다. “매천야록”은 면암이 죽고 그 시신이 부산 동래를 찾던 날 풍경을 이렇게 쓰고 있다.
“11월17일 전 판서(前判書) 최익현이 쓰시마에서 사망했다.
… 그리고 21일, 그 상여가 부산에 도착하자 우리나라 상민들은 상점을 열지 않고 친척을 잃은 듯이 슬퍼하였다. … 그 상여를 따르며 미친 듯이 통곡하는 사람은 셀 수 없었다. 스님·기생·걸인들까지 영전에 바칠 제물 광주리를 들고 인산인해를 이뤘으며 … 그리고 그 부음이 전해지자 사람들이 모여 동래를 출발하던 날에는 상여가 거의 가지 못할 정도였다. 일본인들은 무슨 변이 생길까 싶어 매우 엄하게 호위하면서 … 이때 사대부로부터 가동주졸(街童走卒)에 이르기까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서로 조문하기를 ‘최면암이 죽었다’고 하면서 슬피 울었다.
나라가 세워진 이후 죽은 사람을 위해 이렇게 슬피 우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매천야록)
이 ‘조문객’ 안에는 매천도 있었다. 한을 품고 굶어 죽은 면암을 위해 사대부들은 만사(輓詞) 하나씩을 써 그의 저승길을 달랬다. 그의 빈소에는 만사 수천장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이중에는 매천이 써놓은 만사 6수도 있었다. 처음에는 사시(斜視)의 시골뜨기가 써놓고 간 만사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글을 펴는 순간 그가 매천임을 알고 놀랐다는 얘기도 있다.
그의 시적 재능을 알려주는 일화다. 당시 사람들은 “매천의 만사가 으뜸”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그의 만사 ‘곡면암선생’(哭勉庵先生)은 실로 보는 이의 가슴을 저민다.
이항로께 배움받은 꽃다운 나이로 (英年抱贄華溪門)
애타는 백성 구하고자 상소를 올리셨지 (救火人家位偶尊)
…
선비거나 재상이거나 이제는 모두 끝이구려 (宰相儒林都結局)
천년 만년 길이 길이 공론만 남았소 (海東千載有公言)
…
속 썩은 귀양살이 이역이라 만 리밖 (腐心萬里南冠)
빨간 신 신고 오신다기에 삼년을 손꼽으며 기다렸는데 (屈指三霜赤還)
소식조차 뜸했던 그 사이 바다 건너서 (海外光陰來雁少)
하늘 끝 큰 별 떨어졌다는 기별이니 (天涯消息落星寒)
초혼한다 하여 높은 곳 올라 바라볼 생각 마소 (招魂且莫登高望)
푸르른 대마도 보기조차 싫지 않소 (厭見靑蒼馬島山)
…
고국에 산 있어도 빈 그림자 푸르를 뿐 (故國有山虛影碧)
가련타 어디에 님의 뼈를 묻사오리 (可憐埋骨向何方)
▲면암 최익현 선생을 기려 지은 모덕사 전경.
◇ 충남 청양 모덕사
모덕사는 1906년 무장항일의병투쟁을 이끌다 전북 순창에서 잡혀 대마도로 유배된 뒤 단식 끝에 순국한 면암 최익현 선생을 모신 사당이다. 동래포구에서 대마도로 떠날 때 “왜놈 땅을 밟지 않겠다”며 버선에 흙을 담아 신고 간 면암은 유배지에서도 “목말라 죽을지언정 도적의 것은 물 한방울도 마시지 않겠다”며 식음을 전폐하다 끝내 주검이 되어 돌아와 만백성을 통곡케 했다.
면암은 대원군 실정 직격 비판, 강화도조약 반대 상소를 비롯해, 을사조약 매국노 처단 등을 거침없이 주장하다 제주·흑산도 등으로 잇따라 유배되기도 한 두려움을 모르는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1914년 면암이 살던 청양군 목면 송암리에 모덕사를 짓고 영정을 모셨다.
5천여평의 터에 모덕사와 면암이 기거하던 중화당, 선대 위패를 모신 영모재, 유물전시관, 4천여점의 서책 등을 보관한 춘추각 등 7동의 건물이 있다. 앞쪽에 우목저수지가 있어 경관이 아름답다. 울창한 숲과 장승이 많은 곳으로 이름난 칠갑산의 대치고개에는 1973년 세워진 4m 높이의 면암 동상이 서 있다.
묘소는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남쪽 야산에 있다. 4월13일엔 봄철 추모제향이 열린다.
국내 漢詩史에서도 ‘으뜸’
‘곡면암선생’은 면암 선생을 기리는 만사로 뿐만 아니라 국내 만사 중에서도 걸작으로 인정받는다.
한시학자 이병주(李丙疇)는 매천의 시가를 가리켜 “지극히 깔깔하고 꼼꼼해 우리 한시사에서도 손꼽힌다”고 평했다. 역사학자 박은식(朴殷植)은 또한 “한국통사”에서 매천을 두고 ‘기절(氣節)이 사림(士林) 중 으뜸’이라는 평을 남겼다. 그의 삶은 물론이요, 그의 한시에도 지조와 절개가 알알이 배어 있었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나라의 존망을 우려한 시, 나라의 영원을 기원한 시, 지배계급을 조롱한 시가 많지만 어디서고 그의 지조와 절개를 느낄 수 있다.
매천에 관한 연구는 아직도 진행중이다.
일제 치하에서도 이름은 알려졌지만 그저 ‘한시에 능한 순국지사’ 정도였다.
50년대 그의 “매천야록”이 출간되고서야 비로소 그와 그의 역사관이 세상에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많은 역사가들이 “매천야록”을 중시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정사(正史)가 아닌 야사(野史)여서이다. 그의 기록에는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내용도 담겨 있다. 거기에 기록의 진위 여부를 확인할 길도 별반 없었다. 자칫 떠도는 소문만으로 역사를 기술하는 우(愚)를 범할 수도 있었다.
더욱이 그의 역사관은 지극히 ‘부정적’이었다. 왕실이나 세도정치가들, 매국노가 난자당하는 것이야 그렇다고 쳐도 개화파에 동학군까지 ‘도적놈들’이라 부르는 그의 역사관을 수용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매천의 비판의식, 지금도 ‘귀감’
또한 그가 갖고 있던 현실인식에도 명백한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우선 청에 대해 의존적이었던 전통적인 ‘화이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청을 통해 부국강병해야 한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드러나 있으며 청의 내정간섭에 대한 부정적 시각도 찾아 보기 어렵다. 갑신정변에 대한 청의 태도를 긍정적으로 그리는 대목도 있다.
특히 서양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다는 점도 문제. 병인양요, 신미양요, 병자수호조규, 구미 열강과의 통상조규 등에 대한 언급을 하고는 있지만 대부분 그와 관련된 국제정세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서양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경계심만 나타낼 뿐이라는 것이 주류적 해석이다. 개화당이나 동학혁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국제관계를 비롯한 전체적인 이해가 결여된 상태에서 편견에 따르는 개인적 의견을 기술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문제점이나 한계를 지적받는다 해도 결코 폄하될 수 없는 매천의 그 무엇인가가 있다.
바로 ‘비판의식’이다. 그것도 지식인이 갖고 있는 비판의식이다. 매천은 뚜렷한 주관을 갖고 사물을 봤으며 그의 주관에 따라 옳고 그름을 명백히 했다. 부정부패는 그가 일본보다 혐오했던 ‘괴물’이다.
넘쳐나는 장원급제자, 돈에 팔고 팔리는 힘센 ‘자리들’, 가렴주구를 일삼는 관리들….
심지어 그는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을 것으로 여겨지던 왕과 비의 부정부패까지 증오했다. 민생의 피폐는 물론 망국까지 모두 이들의 책임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민중사관의 시각일 수도 있다. 폭력은 당연히 비판의 대상. 갑신정변이나 동학혁명에 대한 해석은 그같은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아가 그가 금과옥조처럼 여기던 유림까지 그는 비판의 도마 위에 올려 놓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해부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서원을 창설했을 때는 매우 좋은 뜻으로 시작했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는 사이 날로 폐단이 심해졌다’는 기록도 남겼고 피폐해진 사대부들을 가리켜 “이 어찌 사론(士論)이라 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며 한탄하기도 했다.
주자학 자체를 비판한 대목도 있다.
“조선왕조가 건국하면서 송(宋)과 같이 진짜 유림을 배출했지만 시간이 지나 지나친 흠모가 고질병이 됐고 … 근세에 선비라는 자가 … 장황하게 공허한 문자를 늘어 놓는다”며 질타했다.
그는 대신 실학을 높이 평했다. 정약용(鄭若鏞)에 대한 글은 거의 흠모하는 수준에 이른다.
“다산(茶山)의 심기는 고상하여 오직 좋은 점만 있으면 그 사람을 스승으로 여겼다”거나 “실용적인 학문에만 힘을 기울여 구태여 옛 학문을 따르지 않았지만 … 결코 그들의 문장력과 바꿀 만한 것은 아니다”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매천을 ‘민족주의적 실학자’로 보는 것은 여기에 근거한다.
그러나 그의 비판정신에 비춰보면 그의 시각이나 입장은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뚜렷한 주관을 갖고, 어떤 부정부패나 야합에도 반대하고, 어떤 세도가나 권력에도 물러서지 않는 그만의 비판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거기에 목숨까지 바쳤다. 그것을 바로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책무로 봤다. 예나 지금이나 ‘글 아는 사람 구실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매천의 말 그대로이다.
매천이 남긴 저작물들
“매천야록”은 1950년대, “매천집”은 1980년대 전모 드러나
매천이 남긴 저작은 “매천야록” “오하기문” “매천집’ 등 3종. 동학혁명만 집중적으로 다룬 것으로 추정되는 “동비기략”(東匪紀略)은 원전이 전하지 않는다. 매천의 저작은 종류로 보나 양으로 보나 결코 많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학 또는 한시학적으로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저작들로 취급받는다. 구한말의 시대상이나 한시의 발전을 말할 때 반드시 참고해야 하는 서적이 됐다.
매천야록은 1864년(고종 원년)부터 1910년(순종 4)까지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기록한 책이다.
조선 말기의 정치, 경제, 문화, 외교 등의 상황들을 사실을 토대로 솔직하고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유려한 문체와 다양하고 풍부한 내용, 사건의 이면을 꿰뚫어보는 예리한 눈과 비판정신 등 황현의 올곧은 선비정신과 높은 학문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걸작이다. 세도정권의 부패, 청·일 양국의 각축, 의병운동, 동학농민운동을 비롯한 구한말 조선의 위태롭고도 불안한 격동기의 역사적 상황이 시대를 냉철하게 바라보고자 한 역사가의 눈으로 바라본 역사서이기도 하다. 일제 식민지 시기를 거치는 동안 자손들이 원본을 숨겨 놓았다가 해방이 된 후 국사편찬위원회에 넘김으로써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1955년 3월 국사편찬위원회가 사료 총서 제1집으로 펴낸 것을 보더라도 이 야록이 지닌 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매천의 책은 한말 비사(秘史)에 반일(反日)정신이 농축되어 있어 출간과 번역에 많은 에피소드를 갖고 있기도 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매천야록”. 이 책은 누가 봐도 비사(秘史)나 야사(野史)의 성격이 짙다. 관보를 비롯해 각종 신문을 참고한 것은 물론 본인이 현장에서 보고 들은 것, 풍문으로 떠돌던 것, 요직에 있던 인물로부터 들은 것 등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고종과 민비의 첫 아들 세자가 고자(鼓子)였다거나, 명성황후가 직접 나서 궁비(宮婢)에게 잠자리를 갖게 했으나 실패했다거나, 궁녀 장씨가 고종의 아들을 낳자 민비가 칼을 들고 쫓아갔다는 등의 얘기는 “매천야록”이 아니고서는 어디서도 접할 수 없는 얘기들이다.
따라서 매천은 자손들에게 “이 책을 절대 외부인에게 보여주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고 자손들은 상당 기간 이 책을 비밀에 부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던 중 후손들이 원본의 훼손이나 분실을 우려해 다수의 복본(複本)을 만들고 이를 생전에 매천과 둘도 없는 친구로 지내던 김택영에게 교정을 부탁함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김택영은 상하이(上海)에 거주하였으므로 후손이 이 책을 운반하는 것도 꽤 조심스러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해방 후인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는 이 책의 사료적 가치를 높이 인정, ‘한국사료총서’ 제1집으로 간행해 비로소 일반인에게도 접할 기회가 생겼다. 그러나 한글로 번역된 것은 비교적 최근으로 1994년 교문사에서 한학자 김준의 번역으로 완역본이 발간됐다. “오하기문” 역시 94년 역사비평사에 의해 처음 완역(김종익 옮김)됐다.
“매천집”의 발간도 적지않은 고충이 따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매천집”은 매천 황현의 시와 글을 엮은 문집으로 황현이 순절한 이듬해인 1911년에 나라가 어지러움을 보고 중국 상해로 망명한 황현의 친구 김택영이 상해에서 직접 발췌하여 엮은 것이다.
제1권에서 제5권까지는 지은 연도별로 839수의 시를 수록하고, 제6권에는 그의 사상이 담긴 여러 글을, 제7권에는 상소문과 제문 등을 수록하였다. 매천이 순절할 당시 매천은 동생 황원에게 “김택영은 시문의 정리를 맡아준다 해도 너무 멀어 갈 수가 없을 것 같구나”라면서 김택영이 정돈해 주기를 원했고 “시는 연대에 따라, 문은 주제에 따라 나누어 글에 능한 사람에게 부탁해 정리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김택영은 상하이(上海)에서 매천의 글을 정리해 1911년과 1913년 초간본으로 간행했고 박형득(朴炯得)은 이를 기본으로 시문을 선별 편집해 “매천시집”을 발간했다. 이들 문집은 매천이 순국한 후 동생과 문인들이 통문(通文)을 돌려 2백70여명으로부터 출연받아 간행된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들어 이들 문집에 적지 않은 작품들이 빠져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건방(李建芳)과 황원이 “매천집”에서 빠진 글을 다시 정리한 시집이 발견된 것이다. 일명 총독부 검열본으로 이름붙여진 이 시집은 총독부의 검열 표시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어 일제 치하 문학 작품에 대한 검열 연구에도 일조하고 있다.
검열본에는 시문의 상당 부문에 ‘치안방해’‘일부분 삭제’‘삭제한 곳을 공란으로 두지 말 것’‘삭제한 내용의 요지를 기록하지 말 것’등의 표시가 곳곳에 묻어 있다. 매천은 죽어서도 일본의 압제를 밝히고 있는 셈이다.
“매천집”은 아직 완역되지 않았다지만 후학들의 연구서를 통해 그의 시향(詩香)을 느낄 수 있다. 이병주의 “한국 한시의 이해”(민음사, 1987), 민족문학연구소의 “한국고전문학 작가론”(소명, 1998)이 대표작. 간단하게나마 그의 일대기를 볼 수 있는 글은 정옥자 등이 쓴 “시대가 선비를 부른다”(효형, 1998)와 오가와 하루히사(小川晴久)가 쓴 “실사구시의 눈으로 시대를 밝힌다”(강, 1999) 등을 보면 좋다.
매천야록 梅泉野錄
매천야록'은 1865년부터 1910년 8월 까지 45년 동안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을 매천이 주관적 안목으로 정리하여 편년체로 구성한 책으로 모두 황현 자신의 견문을 기록한 것이나, 끝 부분인 10년 8월 29일부터 9월 10일 순절(殉節)할 때까지는 문인 고용주(高墉柱)가 추기(追記)한 것이다.
원본은 권1이 상·하 2책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내용은 대원군의 집정과 김씨세도(金氏勢道)의 몰락, 대원군 집정 10년간의 여러 사건 등 혼란한 정국과 변천하는 사희상 및 내정·외교의 중요한 사실을 거의 시대순으로 빠짐 없이 기록하고 있다. 55년에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한국사료총서(韓國史料叢書) 제1로 간행하면서 황현의 자손들이 작성한 부본(副本)도 실었다.
'매천야록'이 최근 역사의 중요한 자료로서 주목을 끌고 있는 점은 이 책이 중요한 정사를 빠짐없이 담았을 뿐만 아니라 비사와 야사 그리고 민중의 여론을 함께 실었다는 점이다. 또한 매천의 학문적 깊이와 예리한 비평의식이 그의 애국심과 배합되어 좋은 향기를 풍기는 책이기도 하다.
나라잃은 선비가 무슨 낯으로…
매천야록은 황현(黃玹)이 고종 원년(1864)부터 융희 4년(1910)까지 47년간의 한말 역사를 적은 책이다. 책은 모두 6권 7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갑오 이전 1책 반은 수문수록(隨聞隨錄)하여 명확한 연대는 표시하지 않았지만 대체로 연대순으로 정리하였다. 나머지는 정확한 연대를 표시한 편년체의 사찬비사(私撰秘史)이다.
책은 사회 전반적인 부문을 기록의 대상으로 삼았고,또한 자신의 시각에서 평가하여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이 책이 세상에 알려지기를 꺼려하였다. 한동안 극비에 부쳐져 있다가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한국자료총서 1'로 간행됨으로 그 빛을 보게 되었다. 그 후에 매천야록은 많은 사람들에게 필독 고전교양서로 읽혔고,황현이 '이달의 문화인물'(1999년 8월)로 선정됨으로 더 많은 관심을 얻게 되었다. 아울러 책은 번역사업 대상이 되고 대학강좌(2002년)까지도 개설되어 있다.
매천야록은 개인이 기록한 사찬서이기 때문에 사료수집에 한계가 있었던 반면,기사선택과 자신의 평가에 자유로움이 보인다. 황현은 서울에 유학하면서 강위(姜瑋) 이건창(李建昌) 김택영(金擇榮) 등과 교류하였고,1888년 생원회시(生員會試)에 장원급제한 후 다시는 과거를 보지 않았으며 그 후에 구례에 기거, 사료수집에 상당한 애로점이 있었다. 따라서 전해들은 것을 통해 자신의 사전지식과 평가를 가미하여 기록하였고,이 결과 연대가 바뀌기도 했다.
한편 이러한 사료수집의 환경은 기록의 대상이 다양하고 넓었으며,사안에 대한 비판의 자유로운 점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다른 역사서에서 잘 보이지 않는 개인 친인척 스승 교우관계 등과 같은 인물평가에서 과감하게 긍정적,부정적인 면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그가 실무관료출신이 아닌 점은 안동김씨 세도정치,민씨정권,대원군세력,개화파,위정척사세력,동학 등의 정치적 현실인식에서 좀 더 대국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비판과 칭찬을 아끼지 않게 하였다. 이 점은 이 책이 쉽게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없게 하였고,나아가 양서로 평가되는 부문이다.
한편으로 사회,경제 등 일상생활에 대한 애착을 보였다. 천주교,과거제도,개가(改嫁),서자,교육문제를 비롯하여 석유,장탕반(漿湯飯)과 같은 음식,전보,약령시,의복,풍속 등 사회문제와 화폐,조세문제 등 경제관련부문과 같이 당시 사회가 안고 있는 당면문제를 기록하여 생생한 생활사를 확인할 수 있다.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해 가는 전 과정을 기록하면서 그의 심경과 울분,일제에 대항하는 의병에 대한 활동과 기대,나아가 국운의 쇠함에 대한 원인과 지식인의 고뇌 등을 표출함으로 그가 얼마나 훌륭한 한말 애국열사였던가를 알 수 있다. '나라 잃은 선비가 무슨 낯으로 세상을 대할 것인가'라는 글과 죽음을 앞두고 쓴 절명시(絶命詩),그리고 1910년에 망국의 한을 안고 자결로 이어지는 그의 단호한 행동은 애국충절의 표상이었다.
망국으로 치닫는 격동기에 한 인간이 사회를 비판하고 고뇌하였던 것을 사관(史官)이 사초(史草)를 기록하던 것보다 더 어려웠던 조건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책으로 남겼던 것은 우리 후손에게 기록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 최진식, 부산정보대학 교수
출처 : http://boseong51.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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