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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학·설화

[한시감상] "심은자 불우" (尋隱者 不遇) - 賈島 작

잠용(潛蓉) 2019. 8. 18. 20:55

 

[중국 근대화가 심수(沈燧) 그림]

 

"尋隱者 不遇" (심은자 불우)

(은자를 찾아 갔으나 만나지 못하다)  


松下問童子 (송하문동자) 
言師采葯去 (언사채약거) 

소나무 아래서

동자에게 물으니

선생님은 약초 캐러

산에 가셨는데


只在此山中 (지재차산중)

雲深不知處 (운심부지처)

지금 저 산속 어디엔가

계시긴 하갰지만

구름이 하도 깊어 

계신 곳은 모른다 하네.

 

(번역/ 잠용)

 


  가도(賈島, 779~843 唐) 

 

(賈島肖像 -조선 金得臣 作)


가도(賈島)는 중국 唐나라 때 시인으로 字가 낭선(浪仙)이고 지금의 허베이성인 범양(范陽)에서 태어났다. 여러 차례 과거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모두 낙방했다. 이에 낙담하여 무본(無本)이란 이름의 중으로 행세하기도 하였으며, 스스로 ‘갈석산인’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다 811년 낙양에서 당대의 명사 한유(韓愈)와 교유하면서 환속(還俗)하였다. 다시 관계 진출을 지망하여 진사(進士)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역시 급제하지 못했다. 837년 사천(四川)성 장강현(長江縣)의 주부(主簿)가 되어 간신히 관직을 얻었고, 이어 안악현(安岳縣) 보주(普州)의 사창참군(司倉參軍)으로 전직되었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대표작으로 『장강집(長江集)』외 작은 시집 3권이 있고, 그밖에 『시격(詩格)』『병선(病蟬)』『당시기사(唐詩記事』 등이 있다.

 

가도는 당 왕조 중기의 유명한 시인으로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출신이었지만 어릴 적부터 배우기를 즐기고 글쓰기를 매우 좋아했다. 과거에 몇 년 계속 실패하여 가진 돈도 다 떨어지고 극심한 절망감에 빠졌다. 이에 가도는 출가하여 중이 되어서는 이름을 무본(無本)으로 고치고 뤄양에 있는 절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지역 관청에서는 오후가 되면 중의 외출을 금지했다. 자유를 잃은 가도는 깊은 고뇌에 빠져 “날이 저물어 집으로 돌아오는 소나 양만도 못하구나!”라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가도는 슬픈 시로 이름을 날렸는데 구절마다 오랜 시간을 들여 정성껏 지어 참신하고 독특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상당 기간 그는 주위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극도로 상심한 그는 “두 구절을 3년 걸려 지은 시 한 번 읊으니 두 줄기 눈물이 흐른다. 그러나 이를 감상할 이 없으니 가을이 더욱 처량하구나!”라며 한탄했다. 가도는 그 뒤로 여러 곳을 전전하다 청룡사에 머물게 되었다. 그는 걸을 때도 앉아서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고통스러운 창작을 멈추지 않았으나 여전히 인정을 받지 못해 처지가  이만저만 곤란한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는 시 창작에 몰두하느라 경조윤 유서초(劉棲楚)의 수레와 충돌하였고 이에 대해 심문을 받고 심한 모욕을 당하는 바람에 마음에 큰 상처를 입기도 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그의 시는 원망 투의 내용이 많아서 ‘고음시인(苦吟詩人)’으로 불린다.

 

가도가 어느 날 당나귀를 타고 이유(李餘)의 집을 찾아 나선 길에 “조숙지변수, 승퇴월하문 (鳥宿池邊樹, 僧推月下門)”이라는 두 구절의 시를 지었다. 의식의 경지는 마음에 들었지만 ‘퇴(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 ‘고(敲)’자로 바꿀까 고민했다. 하지만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당나귀 위에서 아무 생각없이 손으로 밀고 두드리는 ‘퇴고’의 동작을 반복하는데 갑자기 꽝 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도가 정신이 번쩍 들어 주위를 살펴보니 어떤 조정 대신의 수레와 충돌한 것이었다. 조정 대신은 당대의 저명한 문학가이자 경조윤 자리에 있는 한유(韓愈)였다.

 

한유의 시종은 가도에게 충돌하게 된 이유를 물었고, 가도는 숨김없이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한유는 꾸짖는 대신 시의 한 글자를 놓고 집착하고 있는 이 요상한 중에 관심을 가졌다. 이에 한유는 수레를 멈추고 가도와 함께 ‘퇴’자가 나은지 ‘고’자가 나은지 토론한 끝에 ‘고’자가 더 어울린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가도는 ‘퇴’자 대신 ‘고’자를 넣었고, 바로 이 일화에서 ‘퇴고(推敲)’라는 유명한 고사가 탄생한

것이다.

 

이러한 만남을 통해 가도의 재능을 알게 된 한유는 가도의 처지를 동정하여 그가 승려로 지내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가도에게 머리를 기른 다음 다시 과거에 도전하길 권했다. 직접 문장법을 전수하고, 진사에 도전하게 했다. 한유는 가도와 너무 늦게 만난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친한 친구로 삼았다. 가도는 다시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고, 후에는 장강현의 주부 벼슬을 지내기도 했다. 이 때문에 가도는 자신의 호를 가장강(賈長江)으로 삼기도 했으며, 그 후로도 특색 있는 시를 많이 남겼다.

 

한유는 가도가 쓴 시 중에서 “병주 객사에 머물길 이미 10년, 돌아갈 마음에 밤마다 함양을 추억한다네. 무단히 상건수를 다시 건너보지만 보이노니 병주가 고향이로세”라는 대목의 처량함과, “가을바람이 위수에 부니 낙엽이 장안을 덮는구나”라는 대목의 경지를 가장 좋아했다. 그는 가도의 시풍이 맹교와 비슷하다고 생각하고는 그를 위해 “맹교가 북망산에 묻히니 해와 달과 별이 허전하네. 하늘이 문장 끊어질까 두려워 가도를 인간 세상에 내리셨나보다!”라는 시까지 지었다. 한유는 가도가 천하에 이름을 날리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가도와 맹교를 함께 놓고 ‘교한도수(郊寒島瘦)’라 불렀다.

 

관원의 의장대와 충돌하는 행위는 당 왕조의 법에 따르면 벌을 받아야하는 범법 행위이다. 가도가 유서초의 의장대와 부딪쳤을 때는 능욕을 당했지만, 한유의 의장대와 충돌하고는 그와 친한 친구가 되었다. 한유는 곤경에 처한 가도를 도와주었다. 이는 한유가 인재를 알아보고 아꼈음을 말하는 것이다. 한유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가도는 어쩌면 출세는커녕 한평생 한을 품은 채 살았을 지도 모른다. 인재를 아끼고 추천한 한유의 정신은 칭찬받아야 하고 또 따라 배워야 할 마음이다.

 

가도 관련 유적으로는 그의 무덤과 사당이 남아 있다. 무덤은 고향인 허베이성 베이징에 있지 않고 쓰촨성 안악현(安岳縣)에 있다. 그가 61세 때 보주(普州, 지금의 쓰촨성 안악현)로 이주한 다음 여기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무덤은 길이 12m, 폭과 높이가 각각 3m에 돌을 쌓아 담장처럼 둘렀다. 청나라 때 비석이 세워져 있고, 무덤 앞으로 역대 문인들이 가도에 대해 읊은 시들을 돌에 새겨 모아놓은 정자가 있다. 사당은 가공사(賈公祠)라 하는데 베이징 팡산(房山)구에 있다. 2005년에 다시 복구하여 준공한 건축물이다. 사당 안에는 가도와 그의 지기인 한유의 소상이 있고, 벽화는 ‘퇴고’ 고사를 재현하고 있다. <오똑이의 삶과 여정>

 

김영동 - 영혼의 소리/ 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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