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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흔적의 역사] 갑골 민주주의는 어떨까?

잠용(潛蓉) 2019. 12. 18. 11:38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갑골 민주주의는 어떨까?

경향신문ㅣ2011.11.23 20:52 .


▲ 갑골민주주의는 어떨까?


2008년 6월. 한성백제 왕성인 풍납토성 발굴현장에서 의미심장한 유물이 나왔다.
소의 견갑골로 점(占)을 친 흔적이 완연한 갑골(甲骨)이었다. 부여는 백제와 고구려의 조상이었다. <삼국지> ‘위서·동이전’은 “부여는 소를 잡아 그 굽으로 길흉을 점친다”고 했다. 이 유물은 백제가 부여에서처럼 갑골로 점을 쳤다는 증거가 됐다. 고구려·백제뿐인가. 신라 2대왕 ‘남해 차차웅(次次雄)’은 아예 ‘무당’이었으니까. <삼국유사>는 “차차웅은 무당이란 말의 사투리”라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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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문화는 동이계의 대표습속이었다. 동이계의 일파인 은(상)나라(기원전 1600~1046)에서 꽃을 피웠다. 점은 주로 신령한 동물인 거북(龜甲)으로 쳤다. 거북의 배를 불로 지지면 등은 열을 이기지 못해 소리를 내면서 터진다. 그 무늬를 보고 길흉을 판단한 것이다. 우리 말 ‘복(卜)’이나 중국 말 ‘부(卜)’는 모두 열받아 터지는 소리를 표현한 것이다. 점을 치는 이를 ‘정(貞)’이라 했다. ‘貞’은 ‘점(卜)을 보는(目) 사람(人)’을 뜻한다. 점을 친 후 점궤를 새긴 갑골판에 구멍을 뚫어 끈으로 꿰어 매달아 놓았다. 상형문자 ‘책(冊)’의 원형이다. <상서(尙書)> ‘다사(多士)’는 “오직 은(殷)나라 선인들만 ‘전(典)’과 ‘책(冊)’을 갖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물론 한(漢)족인 주·한나라도 갑골문화를 계승했다. 한 문제(유항·재위 기원전 180~157)는 창업주인 고조의 넷째아들이었다. 조정에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을 가까스로 진압한 군신들이 유항을 황제로 추대했다.


유항은 고민에 빠졌다. 반란을 진압한 무리가 자신을 허수아비로 만들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거북점에 기댔다. 그런데 ‘대횡(大橫)’, 즉 가로로 크게 갈라진 무늬가 나타났다. 천자(天子)의 조짐이었다. 그는 군말없이 황위를 받았다. 그랬던 문제였지만 사마천도 감탄할 정도로 어진 정치를 폈다.

“(문제는) 덕으로 백성을 교화했다. 전국이 번영했고, 예의가 일어났다. 아아. 어찌 어질지 않다고 하겠는가!(嗚呼 豈不仁哉)”  

  
최근 ‘과학적 통계방법을 통한 추첨으로 의회를 구성하자’며 이른바 ‘추첨 민주주의’를 제안하는 학자들이 있다. 일리가 있다. ‘갑골 민주주의’는 또 어떨까. “복서(卜筮·점)로 천명을 받은 이가 왕노릇을 한다”(<사기> ‘일자열전’)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과 같은 선거로 턱도 없는 무자격자를 양산하느니….


<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