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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흔적의 역사] 조선을 뒤흔든 명나라의 ‘역사 왜곡’

잠용(潛蓉) 2019. 12. 20. 22:00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조선을 뒤흔든 명나라의 ‘역사 왜곡’

경향신문ㅣ2012.07.04 09:38 수정 : 2013.01.30 15:46

 


▲ 서울대 도서관이 소장중인 <대명회전> 1509년 판. 중종 때 이계명이 가져왔다. ‘이성계=이인임의 후손’이며, ‘이성계가 고려의 4왕을 죽이고 나라를 찬탈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이 내용이 담긴 5행이 삭제됐다.(하얀 띠로 표시한 부분) 불경한 내용을 빼고 싶어한 당대 조선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서울대도서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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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고려 배신 이인임의 후사 이성계의 지금 이름인 이단(李旦)은~.”

1394년(조선 태조 2년) 4월 25일, 명나라 사신이 조선 땅을 위해 축문을 가져왔다. 그런데 축문 내용이 해괴했다. 이인임은 고려말 전횡을 일삼은 대표적인 친원파였고, 다름아닌 이성계에 의해 축출된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성계의 아버지=이인임’이라고 지칭한 것이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명나라의 역사 왜곡에 가슴 친 조선

조선은 자초지종을 풀어 명나라에 시정을 요구했다. 이것을 ‘종계변무(宗系辨誣)’라 한다. 즉 해괴한 무고 때문에 명나라에 잘못 기록된 이성계의 종계를 고쳐달라고 주청한 사건이다. 그것으로 해결된 듯 했다. 하지만 이것이 200년 가까이 조선의 속을 까맣게 태웠던 외교현안이 될 줄은 몰랐다.

8년 뒤인 1402년(태종 3년), 명나라를 방문한 조선 사신 조온(趙溫)은 명 태조 주원장의 유훈을 담은 <황명조훈(皇明條訓)>을 보았다. 깜짝 놀랐다.


다시 ‘조선 국왕(이방원)의 종계가 이인임의 후손’이라는 내용이 버젓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조선 조정이 또 발칵 뒤집혀졌다.

또 그로부터 110여 년이 지난 1518년(중종 13년), 사신 이계맹은 명의 행정법전인 <대명회전(大明會典)>(1509년 판)을 보고 억장이 무너진다.

“이인임과 그의 아들 이성계가 홍무 6~홍무 28년에 걸쳐 고려의 왕씨 4명을 죽였다.”


이성계와 그의 아버지 이인임이 공민왕-우왕-창왕-공양왕 등 고려왕을 4명이나 시해하고 나라를 찬탈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충효를 내세운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 왜곡사실이 명태조의 유훈과 명의 행정법전에 버젓이 기록돼있다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194년간 조선의 약을 올린 명나라

명나라의 의도는 뻔했다. 명나라는 원나라를 꺾고 천하를 통일했지만, 동북쪽인 랴오둥(遼東) 지역은 불안한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따라서 명나라는 역시 신생국인 조선을 길들이기 위해 이 ‘허위 종계 사건’을 일으킨 것이 분명하다. 약소국의 비애였다. 조선은 정통성 확보를 위해 명나라를 상대로 힘겨운 외교전을 벌여야 했다. ‘갑(甲)’인 명나라는 다급한 ‘을(乙)’은 조선을 뒤락펴락, 감질나게 만들었다.

 

▲ <대명회전> 1509년 판의 표지. /서울대도서관 소장


예컨대 1518년 이계맹이 ‘이성계=이인임의 후손’이며, ‘이성계가 고려의 4왕을 죽이고 나라를 찬탈했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대명회전>를 가져오자 조선 조정은 즉각 사신을 보냈다. 명나라는 황제의 칙서를 중종에게 보냈다.(1519년 3월15일) 하지만 그 내용이 문제였다.

“황제는 조선 국왕에게 칙유하노라. 그대 선조가 이인임의 종계가 아니라는 주장에 대해 황제께서 개정을 윤허했다. 그리 알라.”(<중종실록>)


어쩌면 더 중요한 일인 ‘고려의 4왕 시해’ 조항이 빠진 것이다. 조정이 또 한 번 혼란에 빠진다.

“우리는 ‘종계’와 ‘4왕 시해’ 문제를 주청했사온데, 황제의 칙서는 ‘종계’ 한 가지만 거론됐사옵니다. 만약 조선이 ‘종계’를 수정해주겠다는 황제의 칙서에 감사의 뜻을 표한다면 이는 도리어 ‘사왕 시해사건’는 사실로 인정하는 꼴이 됩니다.”(<중종실록>)


약소국인 조선으로서는 명나라의 눈치만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명나라는 이후에도 공수표만 남발했다. 종계변무를 둘러싼 끈질긴 조선의 외교전은 1588년(선조 21)에 비로소 마무리 된다. 무려 194년에 걸친 지루한 외교전을 거듭했던 것이다. 이 때의 마무리 외교를 보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조선 사신의 ‘읍혈궤청’

때는 바야흐로 1573년(선조 6년), 조선은 또 다시 명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명나라가 <대명회전>을 수정한 <속대명회전>을 편수한다는 소식을 듣고 득달같이 달려간 것이었다. ‘종계’와 ‘4왕 시해’ 조항을 빼달라고 호소한 것이다. 사신인 윤근수는 “예전 약조대로 2개 항목을 반드시 고쳐 달라”고 요구했다.

명나라도 더는 몽니를 부릴 수 없었다. 황제는 “조선의 주청 내용을 실록과 <속대명회전>에 기록해두라”고 명령했다.


1588년(선조 21년), 선조는 유홍을 사신으로 급파한다. <속대명회전>의 반포가 임박했음을 듣고 “완성된 책을 빨리 가져오라”고 조바심을 낸 것이다. 하지만 명나라 예부는 난색을 표했다. “책은 완성됐지만 아직 어람(御覽), 즉 황제가 책을 보지 않았으므로 미리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유홍은 포기하지 않았다.


“유홍은 사신단을 거느리고 ‘피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泣血궤請) 명나라 예부상서가 정성에 감동하여 즉시 책을 제본해서 황제의 허락을 얻어 부권(付卷)을 특별히 하사하고 칙서까지 내렸다.”(<선조실록>)

일국의 특사가 ‘피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애원하면서’ 받아온 것이다. 이 대목에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 명나라가 끝내 <속대명회전>의 본문에서 ‘종계’와 ‘4왕 시해’ 조항을 고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명나라는 문제의 조훈내용은 ‘명태조의 유훈’이라 고칠 수 없다고 고집했다.



▲ ‘이인임의 아들 이성계가 고려왕 4명을시해하고 나라를 찬탈했다’는 내용을 쓴 <중중실록>. 대신들이 이 문제의 외교적 방안을 찾기 위해 치열한 토론을 벌였다.


따라서 ‘본문’이 아닌 부록’에 조선의 주장을 상술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은 것이다. 말하자면 각주를 단 것에 불과했다. 200년 가까운 처절한 외교전은 이렇게 ‘절반의 성과’로 끝나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도 조선은 감격에 몸을 떨었다. 선조는 “이제야 금수(禽獸)의 지역이 예의(禮儀)의 나라로 변했고, 우리 동방이 재차 살아났다”고 기뻐했다. 사신으로 보낸 윤근수가 개정된 <대명회전> 전질과 명 황제의 칙서를 정식으로 받아 돌아오던 날이었다.


인조반정은 ‘일본의 사위 인조가 광해군을 불태워 죽인 사건?’

조선 조정은 마치 요즘으로 치면 ‘국경일을 선포한 것’ 같았다. 모든 잡범과 사형수 이하를 사면했다. 또 ‘읍혈궤청’이 주인공인 유홍과, <속대명회전>을 받아온 윤근수 등은 엄청난 상급을 받았다. 또 ‘종계변무’ 해결을 축하하는 과거시험(알성시)까지 열었다.

하지만 ‘왜곡’에 재미를 붙인 중국은 이후에도 조선 조정의 약점을 끈질기게 파고드는 ‘곡필’로 애간장을 녹였다.


예컨대 명 말에 간행된 <황명통기>, <황명십육조기>, <양조종신록> 등은 인조반정을 아주 요상한 필치로 표현하고 있다.

“평소 무예를 익혀 지모와 용맹이 소문난 인조가 광해군의 좌우에서 권력을 휘두르다가 계조모 왕대비와 밀약하여 궁실의 화재를 구한다는 구실로 군대를 이끌고 입궁, 광해군을 포박하여 불에 던져 죽였다. 그는 일본의 사위이기도 하다. 결국 그가 왜의 세력을 끌어들여 ‘반왜파’인 광해군을 제거하고 북으로는 여진과 남으로는 왜와 통모하려던 명백한 사건이다.”


‘인조반정’은 일본인의 사위였던 인조가 일본과 여진을 끌어들여 반왜파인 광해군을 불에 던져 태워 죽인 사건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말도 안되는 서술인가. 그렇지만 조선은 이같은 터무니없는 역사왜곡에도 이를 바로잡으려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1726년, 영조가 ‘왜곡된 인조반정’을 바로잡으려 청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주청문을 보자.(<영조실록>)


 


▲ 영조 47년(1771년) 간행된 <속광국지경록>. 선조가 ‘종계변무’ 외교의 성공을 기념하려고 엮었던 <광국지경록>을 보완해서 다시 만든 증보판이다. 영조가 주린의 <통기집략>을 바로 잡아 줄 것을 요청해서 청나라의 허락을 받고 기념으로 이 책을 펴냈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신이 머리를 들어 애처롭게 부르짖으며 감히 스스로 그만두지 못하는 것입니다.(此臣所以仰首哀號 而不自止者也)”

“잘못된 역사는 반드시 바꿔야 한다”며 이렇게 굴욕외교까지 감수한 것이다. 과연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너무 저자세 외교 아닌가. 하지만 그때야 중국 중심의 세력판도였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어떤가. 동등한 국가간 펼치는 동등한 외교가 아닌가. 그런데도 중국이, 일본이 교묘하고 체계적인 역사왜곡 프로그램을 감행할 때마다 ‘조용한 외교, 차분한 외교 운운’하기 일쑤다. 이것이야말로 ‘무기력, 저자세 외교’가 아닐까?


“옛날 고려 배신 이인임의 후사인 이성계는….”

1394년(조선 태조 2), 명나라 사신이 조선을 위해 가져온 축문의 내용이 해괴했다. 이인임은 고려말 대표적인 친원파였고, 다름 아닌 이성계가 축출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성계의 아버지=이인임’이라고 지칭한 것이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조선은 즉각 명나라에 시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이것이 200년 가까이 조선의 속을 까맣게 태우는 외교현안이 될 줄은 몰랐다.


1402년(태종 3), 조선 사신 조온은 명 태조의 유훈인 <황명조훈(皇明條訓)>을 보았다. 경악했다. ‘이방원의 종계(宗系)가 이인임의 후손’이라는 내용이 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조선 조정이 또 발칵 뒤집혀졌다. 그로부터 110여년이 지난 1518년(중종 13), 조선 사신 이계맹은 명의 행정법전인 <대명회전(大明會典)>(사진·서울대도서관 제공)을 보고 억장이 무너진다. “이인임·이성계 부자가 (공민왕-우왕-창왕-공양왕 등) 고려왕 4명을 시해하고 나라를 찬탈했다”는 내용이었다.

 

지긋지긋한 왜곡이다. 충효를 내세운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 명나라의 의도는 신생국인 조선의 ‘길들이기’였다. 불안했던 요동(遼東)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한 안전막이었던 것이다. 졸지에 ‘을’이 된 조선은 ‘갑’(명나라)을 상대로 힘겨운 외교전을 벌여야 했다.

명나라는 어지간히 조선의 애간장을 녹였다. 예컨대 ‘종계’의 개정만 허락하고 ‘4왕 시해’는 의도적으로 개정에서 누락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1588년, 조선의 주장을 담은 <대명회전> 개정판의 반포가 임박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선조는 “완성된 책을 가져오라”며 사신 유홍을 보냈다. 명나라는 “황제가 아직 책을 보지 않았으므로 줄 수 없다”고 난색을 표했다. 유홍은 ‘피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애원’(泣血궤請)해 겨우 책을 받아냈다. 그러나 명나라는 끝내 <대명회전>의 본문은 손대지 않았다. ‘명태조의 유훈’을 고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만 ‘본문’이 아닌 ‘부록’에 조선의 주장을 상술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200년 가까운 처절한 외교전은 ‘절반의 성과’로 끝나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선조는 이 정도로도 “이제야 금수(禽獸)의 지역이 예의(禮義)의 나라로 변했다”고 기뻐했다. 과연 ‘저자세, 굴욕외교’로 점철된 194년간의 외교전이었다고 돌팔매질을 던져야 할까. 아니 주변국의 집요한 역사왜곡에 속수무책인 작금의 외교와 견주면 그래도 노력은 가상했다 할 수 있을까?.



<참고자료>

<국왕의 선물>, 심경호, 책문, 2012
<명·청 사서의 조선 ‘곡필’과 조선의 ‘변무’>, 이성규,‘오송 이공범교수 정년기념동양사논총’, 지식산업사, 1993
<조선초기 종계변무의 전개양상과 대명관계>, 김경록, ‘국사관논총’, 국사편찬위, 2006
<명 중기 조선의 종계변무와 대명외교-권벌의 ‘조천록을 중심으로’>, 권인용, ‘명청사연구’ 제24집, 명청사학회, 2005
<명대 중국의 조선관 연구-‘명사· 조선열전’을 중심으로>, 전세영, ‘21세기정치학회보‘ 제21집 1호 , 21세기정치학회, 2011
<광국원종공신록권의 서지적 연구>, 송일기·진나영, ‘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 제41권 제4호, 한국도서관·정보학회, 2002


[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lkh@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