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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흔적의 역사] 장희빈의 남자,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나쁜 남자

잠용(潛蓉) 2019. 12. 22. 13:49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장희빈의 남자,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나쁜 남자

경향신문ㅣ2013.01.09 09:35 수정 : 2013.01.30 11:51


▲ 왕을 낳은 후궁 7명의 신위를 모신 칠궁. 오른쪽에 청와대 영빈관과 맟닿아 있다.  

 
청와대 영빈관 서쪽을 걷다보면 고즈넉한 자하문 길의 풍취를 느낄 수 있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도심 한복판에 새소리가 제법 청아하고, 인적조차 드문 길이 나 있다니…. 청와대 경비를 위해 쳐놓은 바리케이트가 예사롭지 않은 풍경을 암시하고 있다. 무엇이 그리 예사롭지 않다는 건가. 영빈관의 건너편에 ‘무궁화동산’이라 해서 작은 공원이 있다. 입구에 만들어놓은 안내석에는 알듯 모를듯, 모호한 내용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국민과 더불어 살아 숨쉬는 공간을 만들고자 안가(안전가옥)를 헐어내고 조성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려웠던 민주화의 길을 되돌아보는 역사의 배움터로 사랑 받기를 바랍니다.”


칠궁에 서린 한(恨)

대체 무슨 말인가. 이곳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서거한 바로 그 궁정동 안가 터이다. 1993년 7월, 이 참담한 비극의 장소를 헐어버리고, 이른바 ‘무궁화 동산’을 조성하면서 선문답 같은 내용을 새겨 넣었던 것이다. 이 곳에서 자하문길을 따라 200m 가량 올라가다 보면 청운실버센터 건물이 있다. 그 건물 앞에 심상치않은 표지석이 있다.

“이 곳은 1968년 1월 21일 22시 10분 경 북한 124군 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기습공격하기 위해 침투했을 때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경무관과 정종수 경사가 육탄으로 저지하여 순국한 곳이다.”


이곳에서 청와대 경내와의 직선거리는 불과 200m나 될까. 지금 생각해봐도 모골이 송연한 장면이다. 요즘 세대가 보면 믿을 수 있을까. 무장공비가 서울의 심장부인 청와대 수 백m 앞까지 돌격한 미증유의 사건이 벌어진 것이 불과 44년 전의 일이라는 것을…. 돌이켜 보니 이곳은 11년 사이로 두 번이나 큰 변란이 일어났던, 시쳇말로 팔자가 센 동네였던 것이다.


장희빈 vs 인현왕후+숙빈 최씨

대체 무슨 곡절이라도 서려 있는 것일까. 필자는 청와대 영빈관과 맞붙어 있고, 1·21 사태와 10·26 사태의 그 참혹한 현장과 삼각대형을 이루는 궁궐을 곁눈질한다.

칠궁(七宮)이다. 조선시대 왕(추존왕 포함)을 낳았지만 정식 왕후가 되지 못한 7명의 후궁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사실 이 칠궁의 원주인은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였다.



▲ 칠궁 인근 지도. 1.21사태(1968)와 10.26사태(1979)가 벌어진 비극의 장소가 칠궁과 삼각대형을 이루고 있다. |이은지 기자

1725년(영조 1년), 영조는 무수리 출신 생모인 숙빈 최씨의 사당을 이곳에 세웠다. 그러다 1870년부터 차례차례 희빈 장씨(경종의 생모)를 비롯한 5명의 후궁들을 모셨고, 1929년 덕안궁을 이전함으로써 ‘칠궁’이 됐다. 이곳에 모신 또다른 후궁은 누굴까. 선조의 후궁이자 추존 임금인 원종의 생모인 인빈 김씨(저경궁)과 영조의 후궁이자 추존한 임금 진종의 생모인 정빈 이씨(연호궁), 영조의 또 다른 후궁이자 추존왕 장조의 생묘인 영빈 이씨(선희궁),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유비 박씨(경우궁), 고종의 후궁이자 순종에 이어 이왕(李王)이 된 순헌 황귀비 엄씨(덕안궁) 등이다.


그러나 필자가 주목하는 분들은 따로 있다. 바로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1670~1718)와 희빈 장씨(1659~1701)이다. 알다시피 두 분은 숙종(재위 1674~1720)의 후궁이었다. 희빈 장씨는 숙종과의 사이에서 경종(재위 1720~1724)을, 숙빈 최씨는 영조(재위 1724~1776)를 각각 낳았다. 그런데 잘 알려져 있듯 희빈 장씨와 숙빈 최씨는 숙종의 정비, 즉 정부인인 인현왕후(1667~1701)와 얽히고설켜 남편인 숙종을 사이에 두고 극적인 궁중암투를 벌였다. 즉 ‘인현왕후+숙빈 최씨+서인’ vs ‘장희빈+남인’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숙종은 조울증 환자

그런데 이 세 분 여인이 벌인 암투의 정점에는 숙종이라는 남자가 있었다. 숙종이 누구인가?

조선왕조를 통틀어 숙종은 영조(52년)에 이어 두번째인 46년이나 임금의 자리에 있었다. 숙종은 당쟁의 와중에서 ‘환국(換局)’, 즉 ‘국면전환용 카드’를 적절하게 사용해서 각 정파들을 자유자재로 주무르며 철권을 휘두른 ‘정치의 달인’이라는 평도 듣는다. 하지만 숙종에게 그런 거창한 평가만 내릴 수 있을까. 기록을 뜯어보면 숙종은 그저 변덕스러울 뿐 아니라 피도 눈물도 없는 ‘나쁜 남자’, 아니 ‘못된 남자’일 뿐이다. 이 때문에 인현왕후와 숙빈 최씨, 희빈 장씨가 암투를 벌였고, 서인과 남인들이 단칼에 죽어나가고 쫓겨난 것이다.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가 며느리인 인현왕후에게 아들(숙종)의 성품을 표현한 대목을 보면 의미심장하다.

“주상(숙종)은 평소에도 희로(喜怒)의 감정이 느닷없이 일어나시는데, 만약 꾐을 받게 되면 나라의 화가 됨은 필설로 다할 수 없습니다.”(<숙종실록>)


그러니까 아들의 변덕이 평소에도 죽 끓 듯하다는 것. 따라서 만약 장씨(장희빈)의 유혹에 빠진다면 걷잡을 수 없는 변고가 일어난다는 경고였다.

어머니 명성왕후의 우려는 한 치의 틀림없이 현실로 다가왔다. <인현왕후전>을 보면, 숙종의 변덕이 얼마나 죽 끓 듯 했으며, 자신을 사랑했던 여인들에게 못되게 굴었는지 알 수 있다.

 


▲ 칠궁의 원래 주인인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를 모신 육상궁이었다. 후에 6명의 후궁 신위가 옮겨왔다./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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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선발로 부인을 내쫓은 변덕스런 남편

장씨의 미모에 혼을 빼앗긴 숙종은 장씨가 왕자를 생산하자.(1688년) “빨리 원자로 세우라”는 아우성친다. 급하고 변덕스러운 성정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서인의 영수 송시열 등이 시기상조론을 펼치자 대대적인 숙청에 나선다. 그 와중인 1689년 5월 2일 인현왕후를 폐출시켜 사가로 내쫓는다.

“(인현왕후가 폐출명령을 받고 본가로 나오려 할 때) 궁중이 통곡하여 곡성이 낭자했다. 그러자 상감이 그 곡성을 들으시고 크게 노하여 그 궁녀들의 허물을 기록해 두라하고, ‘빨리 나가라’고 하시니, 이씨 조선 왕조에 이런 예절이 없던 고로….”


한 때의 본부인을 쫓아낸 것도 모자라 슬퍼하는 궁녀들의 잘못을 일일이 기록하고, ‘빨리 나가지 않는다’며 재촉했으니…. 아무리 다른 여인에게 눈이 팔려도 그렇지 일국의 중전을 이렇게 쫓아낼 수 있다는 말인가. <인현왕후전>의 필자마저도 “조선왕조에 이런 무례한 일이 없다”고 개탄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상감의 노하심이 급급하사 ‘빨리 나가라’고 재촉했다. 본가에 사람을 보내 ‘빨리 가마를 들이라’고 성화했다. ~미처 가마를 꾸미지도 못한 채로 벌써 창덕궁 북문까지 나오셨다는 말이 들리니…. 경황 없고 급하여 보통의 가마에 흰 명주보로 가마 위를 덮어 들어가니 왕후께서 벌써 경복당 앞에 내려와 걸어오시는지라….”


참으로 각박한 남편이 아닐 수 없다. 무엇이 그리 급한지 가마도 당도하지 않았는데 일국의 중전을 버선발로 내보낸 것이다. 설상가상의 일은 이어진다. .
“~선비 200여 명이 본가 문 밖까지 따라나와 우니 천지가 진동했다. 백성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길을 막고 통곡했고, 온 시내가 철시한 뒤 서러워 하니 초목금수의 일색이 빛을 잃었다.”


인현왕후가 창졸간에 사가로 쫓기던 날, 민심이 어땠는 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숙종도 이런 인심의 흐름을 궁중에서 다 듣고 있었다.
“이때 상감께서도 이 말을 들으셨지만 성총(聖聰)이 막혀 도리어 인심을 통탄하고, 상소한 선비 몇 사람을 잡아 엄형 추문하고 정배했다.”
반성은커녕 ‘민심이 잘못됐다’고 소리치고 잘못을 말하는 선비들에게 죄를 주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짐승의 소리를 질러대는 꼴’이 아닌가.



▲ 희빈 장씨를 모신 대빈궁. 역관의 가문에서 태어나 국모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5년만에 희빈으로 강등된 뒤 끝내 사약을 받고 죽은 비운의 여인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5년 만의 변심

인현왕후를 이렇게 쫓아낸 숙종은 불과 4일 만에(5월6일) 희빈 장씨는 중전으로 올린다. 어찌 그리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의 예견, 바로 그대로 였을까?

하지만 장희빈을 향한 숙종의 사랑은 5년 이상을 이어지지 않았다. 1693년 숙원 최씨(훗날 숙빈최씨·영조의 생모)가 책봉된 것이다. 숙종의 마음은 이제 최씨 쪽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1694년(숙종 20년) 3월29일, 유학 임인 등이 “중전 장씨의 오빠 장희재가 숙원 최씨를 독살하려 했다”는 고변을 하게 된다.(<숙종실록>)


숙종은 이 사건을 계기로 다시금 남인들을 쫓아내고 김익훈·김석주·송시열 등 서인들을 복관시킨다. 이것이 남인정권에서 다시 서인정권으로 복귀시킨 이른바 ‘갑술환국’이다.

중전 장씨도 급전직하한다. 고변 사건(3월29일) 이후 10여 일이 지난 4월12일 사가로 쫓겨났던 인현왕후를 다시 중전의 자리로 복귀시킨다.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된다..
아무리 지존인 임금이 벌이는 정치적인 행위라고 하지만, 상식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대목이다. 5년 전 본부인을 무자비하게 내쫓고 서둘러 중전으로 올린 여인을 불과 5년 만에 다시 내쫓고, 옛 본부인을 불러 올리다니….


정사인 <숙종실록>은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면서 ‘과거의 일을 후회하고 반성하는 글’을 싣고 있다.

“‘기사년(1689년)의 일(인현왕후가 폐출된 일)’을 생각해보건대 나도 모르게 마음 속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나라의 운수가 태평한 곳으로 돌아와 중전이 복위됐으니 백성에게 두 주인이 없음은 고금의 공통된 의리이다. 장씨의 왕후 인장를 회수하라.”



▲ 무궁화동산. 10.26사태가 발생했던 곳이다. 지금은 무궁화동산이 조성돼있다.


남편의 만행에 복수하는 인현왕후

과연 ‘조변석개의 달인’이다. 인현왕후도 희빈 장씨도 기막힐 따름이었다. 멋대로 중전을 내쫓고. 새로운 중전을 불러올린 뒤 다시 새 중전을 내쫓고, 옛 중전을 복위시키는 일을 밥먹듯 하다니…. 자신의 기분대로 남편만 바라보고 사는 여인들의 삶을 좌지우지하면서 짓밟은 것이다.

인현왕후는 5년 만에 복위의 꿈을 이뤘지만, 변덕스런 남편을 향한 분노의 마음을 쉽게 풀지 않았다. .


1694년 4월9일 숙종은 폐출된 중궁(인현왕후)의 무죄를 밝히며 별궁으로 모시라는 비망기를 내린다. 숙종은 상궁별감과 중사를 통해 자신의 어찰을 인현왕후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하지만 인현왕후는 “죄인이 어찌 외부 사람을 만나 어찰을 받겠느냐”며 사양한다. 상궁별감은 3일 간이나 밤낮으로 기다렸으나 끝내 문전박대를 당했다.


숙종은 예조당상과 승지 등을 보냈어도 끝내 문을 열지 않자, “이는 임금을 원망하는 일”이라고 다그쳤다. 하지만 인현왕후는 13일이 지난 21일이 되고서야 겨우 바깥 문만 열었다. 그 후에도 인현왕후는 “죄첩(罪妾), 즉 죄를 지은 아내가 답장을 올릴 수 없다”, “외람되니 분수를 지키겠다”는 등의 답신으로 거듭 복위를 사양했다.

왕후가 모든 고집을 꺾고 대궐로 돌아와 임금을 알현할 때도 가마에서 쉽게 내리지 않았다.

“죄인이 무슨 낯으로 전하를 뵙겠습니까.”


숙종이 친히 가마문을 열어 주렴을 걷은 뒤에야 왕후가 내려왔다. 이것은 왕후의 예절바른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남편을 향한 분노감과 복수심을 표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남편 앞에서 밥상 찬 장희빈 

희빈 장씨의 배신감도 필설로 다할 수 없었으리라.

하루 아침에 희빈으로 강등된 장씨는 “빨리 중전의 자리에서 물러나 자리를 옮기라”는 명을 받자 아우성쳤다.

“내가 만민의 어미요, 세자가 있거늘 어찌 너희가 무례하게 굴리요. 내 폐비(인현왕후)의 절을 받고 말리라.”


그러면서 세자를 마구 때렸다. 희빈 장씨는 그 말을 듣고 달려온 숙종 앞에서 먹던 밥상을 발로 차며 “민씨(인현왕후)의 절을 받아야겠다”고 아우성 쳤다.

화가 난 숙종은 “빨리 끌어내라”는 명을 내렸다. 희빈은 끌려가면서도 중궁전(인현왕후)을 꾸짖고, 욕설을 내뱉는 등의 악다구니를 부렸다.


희빈은 결국 신당을 차려놓고 밤낮으로 인현왕후를 저주하는 무고사건을 일으킨 혐의가 발각돼 사약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인현왕후는 시름시름 병을 앓다가 승하했고, 바로 그 희빈의 무고를 고변한 이가 숙빈 최씨였다고 한다. 겉으로 보면 여인들의 궁중암투극으로 치부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사랑했던 여인에게 사약을 세 사발이나 들이부은 비정한 남편

과연 그럴까? 인현왕후의 병이 희빈 장씨의 저주 때문에 악화됐다는 말이 과연 옳은가?
도리어 남편의 못된 변덕 때문에 버선발로 쫓겨나 5년 가깝게 비참한 삶을 살았던 후유증이 도졌던 것은 아닐까. <인현왕후전>은 인현왕후가 폐출된 뒤 머물렀던 사가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비로소 대문을 여니 수목이 무성하여 사람의 키와 같고~ 풀 이끼가 섬돌 위에 가득하고, 먼지와 창호를 분별치 못하니….”


이런 더러운 환경에서 5년을 살았던 인현왕후의 몸이 좋을 리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인을 벌레와 먼지가 가득한 곳에 부인을 방치해놓고는 모든 책임을 ‘희빈 장씨의 저주’ 탓으로만 몰아버렸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희빈 장씨가 사약을 내동댕이 치면서 단발마의 비명을 질러댔다.

“이 약을 먹여 죽이려거든 자식이나 보아 구천의 한을 없애 주소서.’ 이런 간악한 소리로 슬피우니 요악한 정리는 사람의 심정을 녹이고, 처량한 소리는 차마 듣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자 남편이었던 숙종이 이렇게 말했단다.
“내 앞에서 죽일 것이로되 네 얼굴을 보기가 더러워 약을 보내니 네 염치가 있을 텐데…. 이 약은 네게는 상인줄 알고 죄 위에 죄를 더하여 삼척지율(三戚之律·삼족을 멸할 죄)을 받지 말라.”


남편 숙종은 부인의 입을 강제로 벌린 채 세 사발이나 되는 사약을 들어부었다. 본부인 마저 쫓아내면서까지 그토록 사랑했던 새 부인(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먹이면서 이렇게 재촉했다지 않은가?
“빨리 먹이라!”면서….


<인현왕후전>의 필자 마저 “조금도 측은한 마음도 갖지 않았다”면서 숙종의 비정함을 꼬집었다. 숙종은 더욱이 “앞으로는 후궁이 절대로 왕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게 하라”는 법까지 만들었다.(<숙종실록> 1701년) 그야말로 모든 죄를 여인들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다. 하기야 망국의 원인으로 ‘여인’을 꼽는 사례가 어디 한 둘인가?


여자에게 모든 책임 뒤집어 씌운 못된 남편

주나라 무왕이 은(상·기원전 1600~1046)의 주왕(紂王)을 정벌하면서 이렇게 말했단다.

“‘옛말에 ’암탉이 새벽에 울지 않으니,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이 망한다‘고 하였소. 은왕 주는 오로지 부인의 말만 듣고 스스로 선조에 지내는 제사를 그만두고 나라를 어지럽혔소.”


은 주왕이 달기(달己)라는 여인 때문에 나라를 망쳤다는 것이었다. ‘허무개그’도 그런 ‘허무개그’가 없다.

다시 칠궁을 바라보며 자하문 길을 걸어본다. 이곳에서 불구대천의 원수인 숙빈 최씨와 희빈 장씨가 같은 곳에 합사한 탓일까. 피어린 역사가 반복되는 까닭이…. 그러나 필자는 고개를 내젓는다.


이 역시 ‘나쁜 역사’의 책임을 여인들에게 돌리는 ‘나쁜 습성’이 아닌가. 그보다 희빈 장씨가 죽으면서 했다는 마지막 말을 떠올린다.

“내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전하께서 정치를 밝히지 않으니 그것은 임금의 도리가 아닙니다.”


그렇다. 숙종은 자신의 여인들을 싸움 붙여놓고 살렸다 죽였다 했던 못난 남편이었던 것이다. 칠궁에 만약 한(恨)이 서려있다면 그것은 바로 못난 남편을 향한 한일 것이다. 

 “주상은 평소 희로(喜怒)의 감정이 느닷없이 일어나는데, 꾐에 빠지면 걷잡을 수 없습니다.”(<숙종실록>)


1686년(숙종 12), 임금의 어머니인 명성왕후가 며느리(인현왕후)에게 충고한다. “(조울증에 빠진) 숙종이 요악(妖惡)한 장씨(장희빈)의 유혹에 빠질 경우 큰 일”이라는 걱정이었다. 그 말이 맞았다. 장씨가 왕자를 생산하자 숙종은 중전을 폐출시켰다.(1689년 5월2일)

“상감이 얼마나 ‘빨리 가라’고 재촉하는지 미처 가마조차 마련할 틈도 없이 걸어야 했고….”(<인현왕후전>)

  
왕후를 버선발로 내쫓은 것이다. 그런 뒤 불과 4일 만에 장씨를 새 중전으로 올렸다. 숙종의 변덕은 5년을 버티지 못했다. 1694년 장씨의 오빠인 장희재가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를 독살하려 했다는 고변이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인현왕후의 복위가 결정되고,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된다. 장씨가 “폐비(인현왕후)의 절을 받고 물러나겠다”고 버티자, 숙종은 “빨리 끌어내라”며 앙앙불락한다.
     
중전 복귀를 명받은 인현왕후도 남편을 쉽게 용서하지 않았다. 숙종이 “잘못했다”는 어찰을 내렸다. 그러나 “죄인이 어찌 어찰을 받을 수 있겠느냐”며 버텼다. 예절을 빙자한 복수였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저주하여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죄목으로 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내린다. 그렇지만 왕후를 ‘먼지와 창호를 구별할 수 없는 더러운 집에서 5년이나 살게 한’(<인현왕후전>) 이가 누구였던가. 바로 숙종이었다. 또 숙종은 그렇게 예뻐했던 장씨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사약을 세 사발이나 들이부었다(<인현왕후전>). 그러면서 ‘이제 후궁은 왕후가 될 수 없다’는 법까지 선포했다(<숙종실록>). 모든 책임을 ‘후궁이 왕후가 된 탓’, 즉 여인에게 돌린 것이다. 청와대 영빈관과 붙어 있는 곳에 ‘칠궁(七宮·사진)’이 있다.


희빈 장씨(경종)와 숙빈 최씨 등 왕을 낳은 후궁 7명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주변의 반경 100m 사이에 1·12사태(1968)와 10·26사태(1979)가 났던 ‘변란의 현장’이 있다. “자식이나 보고 죽어 구천의 한을 없애 달라”고 구슬픈 눈물을 흘렸던 장씨의 한이 서렸기 때문일까. 아니 그 또한 ‘나쁜 역사’의 책임을 여인에게 돌리는 ‘나쁜 습성’일 것이다. 장씨는 죽어가면서까지 “내게 무슨 죄가 있냐”며 “전하가 정치를 밝히지 않으니 임금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쏘아붙였다. 그렇다. 칠궁에 만약 한(恨)이 서려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 못난 남편을 두었던 한일 터….


|문화·체육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lkh@kha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