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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흔적의 역사] 조선시대에도 만연했던 병역비리, 병역면제

잠용(潛蓉) 2019. 12. 22. 13:47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조선시대에도 만연했던 병역비리, 병역면제

경향신문ㅣ2013.01.02 10:29 수정 : 2013.01.30 11:51



▲ 조선 숙종대의 군역기록부. 요즘의 병적기록부이다. 총청도 관찰사 휘하의 병사 3878명의 신상명세가 기록돼 있다. /토지박물관 제공  

“마치 구덩이 속에 파묻혀 죽는 것처럼 여깁니다.(如坑穽)”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불과 4개월 전인 1636년 8월 20일, 대사간 윤황이 동료들을 대동하고 엎드려 고한다.

“백성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병역의 의무’을 모면하려 합니다. 그러니 10호 가운데 겨우 1~2명 만이 병역을 담당하고 나머지는 여러가지 핑계를 대어 빠졌습니다.”


윤황은 그러면서 “심지어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중이 되는 양민들이 10명 중 7~8명에 이른다”고 개탄하고 있다.
“전하께서도 말씀하셨잖습니까. ‘만일 이 도적을 막아내지 못하면 나라는 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면 경대부(고위관리)는 어찌 가문을 보전하며, 일반 백성(사서인·士庶人)은 어찌 몸을 보전하겠는가. 똑같이 망하고 죽을 뿐’이라고….”


윤황이 피눈물 섞인 상소를 올린 지 4개월 만인 그해 12월 초 조선은 병자호란의 불구덩이 속에 빠지고 만다. 윤황의 상소는 결과적으로 병란을 예고한 셈이 된 것이다.


60살까지 꼼짝없는 군인신분
병역, 즉 군역(軍役)이라. 예나 지금이나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태어난 이 땅 남자들의 ‘벗어날 수 없는 구덩이’인 것은 틀림없다.
물론 조선 사람들이 느끼는 ‘병역의 고통’은 요즘과 견줄 때 세발의 피였음에 틀림없다.


요즘의 복무기간은 21개월(육군)~23개월(해군)~24개월(공군)이지만, 조선시대 때 병역의 의무를 져야 하는 나이는 16~60살이었다. 1년에 2~6개월씩 교대하는 형식의 근무였지만, 청년기(16살)에 군대에 편입되어 호호백발 할아버지(60살) 때까지 병역의 의무를 져야 했으니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일반병(정병·正兵)의 대상자는 기본적으로 양인(良人)계급 남자들이었다.


병역면제의 기준은 물론 있었다. 지체장애인과 현직 관료, 그리고 학생(성균관 유생, 사학 유생, 향교생도)과 2품 이상의 전직 관료 등은 병역 면제 혜택을 받았다. 또한 70세 이상의 부모를 모신 경우는 아들 한 명, 90세 이상의 부모를 모신 경우는 아들 모두를 면제시키는 등의 규정도 있었다. 국가 유공자의 자손은 3대까지 병역면제의 혜택을 받았다. 도첩(승려자격증)을 받은 스님(僧)들도 마찬가지였다.


호호백발이 될 때까지 혹독한 병역의 의무를 져야 했으니 백성들이 느끼는 괴로움은 필설로 다할 수 없었다. 그랬으니 백성들은 너도나도 불법 및 편법으로 병역기피의 방법을 찾느라 혈안이 됐다.


스님은 쌀 도둑
그 가운데 조선시대 내내 골머리를 썩이게 만든 병역기피의 대표적인 예는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는 것이었다. 1479년 11월, 장령 구치곤은 “지금 전국적으로 놀고 먹는 중의 무리가 40만명이 넘을 것”이라고 개탄한다. 1483년 9월, 온 조정을 논란의 소용돌이에 빠뜨린 사건이 일어났다. 창덕궁과 수강궁에 비가 새고 기울어지는 일이 벌어지자 대대적인 수축공사를 벌이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이 국책사업에 동원된 2000여 명의 무자격 승려에게 도첩을 주었다는 것이다. 성균관 생원 이윤이 늑달같이 상소를 올린다.
“공사에 참여하는 중들에게 도첩을 주다니요. 이는 한 달 간 일하고 종신토록 병역을 면제해주는 꼴입니다. 이는 하나의 궁궐을 세움으로써 천만의 백성을 잃은 것입니다.”


급기야 성종 임금은 도첩제도의 폐지를 결정했다.(1492년) 그러자 성종의 어머니이자 불교에 심취해 있던 인수대비가 발끈했다. 인수대비는 추상같은 한글편지(언간)를 내린다.
“사람들은 술과 고기, 그리고 처자를 가진 즐거움을 누리지 않느냐. 중은 죽을 먹으며 어렵게 살고 있다. 제대로 정치를 했다면 어느 누가 중이 되겠느냐? (도첩폐지법은) 민심을 소동시킬 뿐이다.”


요컨대 백성들이 승려가 되는 것은 정치를 잘못한 탓이지, 병역을 피하기 위함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사간 권구가 들고 일어난다.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처자가 없는 중은 100명 중 한 둘입니다. 나머지는 놀고 먹으면서 병역을 피하는 자들입니다. 중들 가운데 굶어죽었다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정의 큰 의논은 모후(인수대비)가 할 바가 아닙니다.”


이후에도 승려를 둘러싼 병역기피 논란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1616년(광해군 8년) 11월, 서학생 박경준은 “중(僧)은 쌀을 훔쳐먹는 도적”이라고 주장한다. 나라에 양곡이 부족한 것은 놀고 먹는 자들이 많은 탓인데, 그 원흉이 스님이라는 것이다. 그는 “중들은 백성의 식량을 빼앗고, 백성들의 자제를 그물질로 쓸어담아 기른다”면서 “세상에서 병역을 피하고자 하는 자들은 모두 중이 되기를 원한다”고 쏘아붙인다.



▲ 거주지와 신장, 나이, 얼굴 생김새, 신체적 특징 등의 신상정보를 자세하게 담은 1697년(숙종 23년)의 병적 기록부 세부. 마맛자국과 얼굴흉터, 수염유무 등 자세한 신상명세를 담고 있다. /토지박물관 제공.


학교는 병역비리의 온상

학교도 끊임없이 병역비리의 온상이 됐다. 명종대의 사성 정희홍은 “학교가 군역을 피하려는 무뢰한들의 소굴이 되었다”고 개탄했다.
심지어 40~50대 임에도 병역을 피하려고 향교 학생으로 등록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그러자 1462년 세조임금은 “나이가 40살이 된 늙은 학생들은 충군(充軍·범죄자들로 구성된 군대)에 속하도록 하라”는 명을 내린다. 세조는 더 나아가 “비록 40이 되지 않은 학생이라도 공부가 지지부진한 학생들도 제적시킨 뒤 병역에 충당하라”고 지시했다.


1493년(성종 24년)엔 지방의 유생이 대리수강을 통해 훈도(訓導·학생들을 가르치는 교관)에 올라 병역을 회피한 일이 문제가 됐다. 현직관리가 되면 병역을 면할 수 있다는 특례규정을 이용한 것이다. 뇌물을 주어 병역을 기피한 케이스도 있었다. 1495년(연산군 1년)의 일이다. 충청도사 김일손이 상소문을 올린다.

“향교 훈도(선생)를 시험해보니 한심했습니다. 경전에 능통한 교생(학생)들도 즐비한데, 훈도 가운데는 경전 하나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스승이 학생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학생이 스승을 가리치는 꼴입니다.”


김일손은 “바로 뇌물청탁으로 훈도에 올라 병역을 기피하기 때문”이라고 고발한다. 심지어 소년들의 학습서인 <소학>의 첫구절도 외우지 못하는 이들이 성균관이나 항교, 서원의 명부에 올라있음을 개탄하는 상소가 올라오기도 했다.(1624년·인조 2년) 그래서 조정 일각은 ‘각급 학교의 교생(학생)과 훈도(교관)들을 대상으로 일정한 시험을 치른 뒤 낙방하면 병역에 편입시키는 강경책’을 발의하기도 했다.



▲ 조선시대 무관 중 하나인 선전관의 모습. 선전관은 형명(刑名)과 전령 등을 맡아보던 무관직이었다. /숭실대박물관 제공


"차라리 천민이 되련다’

조선시대 때는 천민의 경우 병역을 원천적으로 면제 받았다.

하지만 사족이 천민 여인을 처첩으로 삼아 낳은 아이의 경우 그 아비가 장례원에 고하면 보충대에 소속될 수 있었다. 보충대는 천인으로서 양인이 된 남자들로 구성된 군대이다.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한 신분계층인 천민이 양인으로 승격된다는 것은 감격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양인이 되면 반드시 겪어야 하는 병역의 의무였다. 이 병역의 고달픔 때문에 스스로 천민으로 떨어지기를 자처한 딱한 케이스도 있었다. 1473년(성종 4년)의 일이다. 손장수라는 사람이 있었다. 원래 천민이었다가 세조 시절 ‘이시애의 난’(1467년) 때 진압군에 자원 종군한 공로로 양인이 됐다.


감격스런 신분상승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손장수는 “환천(還踐), 즉 다시 천민이 되겠다”는 애절한 사연을 담은 소장을 병조에 제출했다.

“너무 가난하고, 미약해서 병역을 감당하기엔 합당하지 않습니다. 제발 성균관의 노비로 살게 해주십시요.”

딱한 사연을 들은 성종 임금은 “그러라”고 윤허했다. 얼마나 병역이 괴로웠으면 차라리 노비의 신분이 낫다고 했을까?


내시를 군대로 쫓아보내다.

죄인들을 군대에 보내는 경우도 많았다.

1466년(세조 12년)의 일이다. 정대희라는 못난 남편이 조강지처를 상습적으로 폭행하고, 첩비와 내연의 관계를 맺은 사건이 일어났다.
사헌부가 추국하자 정대희는 “아내의 행실이 방정치 못하며, 사내종과 친했다”며 되레 부인을 무고했다. 하지만 뚜렷한 증거를 대지 못했다. 그러자 단종 임금은 “아내를 폭행하고 심지어 무고까지 한 남편을 입대시키고, 아내와 다시 합치며, 첩비와는 헤어지라”고 명령했다. 아내를 구타하고 바람까지 피운 남편을 군대에 보낸다? 지금 봐도 아주 좋은 생각이 아닌가.


1452년 평안도 자성군에서 근무 중이던 이석철이라는 군인은 힘든 병역을 감당하지 못하고 탈령해서 서울로 잠입했지만 검거됐다. 이 탈영병은 곤장 100대를 맞고 다시 부대로 복귀했다.

연산군 때(1503년)는 내시(內侍) 박세당과 이회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곤장 100대를 때린 뒤 국경지대의 병졸로 편입시켰다. 거세한 내시들로서는 죽음보다 힘겨운 군대생활이었을 것이다.


 

▲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군에게 포로로 잡힌 조선 군인. 솜으로 아홉겹 겹쳐 만든 이른바 핫옷으로 방탄조끼를 대신하면서 악전고투했다.

조선시대 예비군 제도

요즘으로 치면 예비군도 있었다.

60세가 되면 병역의무가 끝나는 게 조선의 병역법이었다. 이와함께 ‘시정(侍丁)의 법’도 있었다. 부모의 나이가 70살 이상이면 아들 1명, 90살 이상이면 아들 2명을 면제시켜주는 제도이다. 그런데 “이렇게 병역면제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 한가롭게 놀면서 나라에 보탬이 안된다”는 불만이 쇄도했던 모양이다.(<예종실록>) 1468년이었다. 그러자 예종 임금이 단안을 내린다.
“나라에 보탬이 안되는 이들을 가만 둘 수 없다. 나라에 큰 변고가 생길 때를 대비하라. 60세가 넘어 제대한 자들은 ‘노장위(老莊衛)’에 소속하고, ‘시정의 법’에 의해 면제된 자들은 ‘충효위(忠孝衛)’에 소속시켜라. 이들을 1년에 한번씩 점고(點考), 즉 인원점검이라도 해서 관리하라.”


이 땅에 예비군 제도가 생긴 것은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등이 일어난 1968년이다. 남북관계가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빠지자 예비군 제도를 만든 것이다.
하지만 제대자들을 관리하고 정기적으로 인원을 점검한 일종의 예비군 제도가 생긴 것이 1468년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꼭 500년 만의 부활이었던 셈이다.


의학공부에 문서위조까지

병역을 피하려고 의학을 공부하려던 이들도 많았던 모양이다. 1472년(성종 3년)의 일이다. 예조가 의학제조와 함께 임금에게 아뢴다.
“병역을 피하려고 함부로 의학에 귀속하는 자가 많습니다. 앞으로는 매달 한번씩 시험을 치러 ‘불통(不通·불합격)’한 자는 임명장을 거두소서.”


병역회피를 위해 의대에 들어갔다는 것인데, 요즘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의과대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따기이므로…. 군대가 싫어 문서를 위조하는 일도 있었다. 1612년(광해군 4년)에 붙잡힌 문서위조범 김제세라는 자였다. 그는 어떻게 하든 병역에서 벗어나려고 지방 훈도(학교 교관)의 임명장을 위조하여 자신의 이름을 쓰고 봉산 군수에 제출했다가 적발당한 것이었다. 적발 당한 과정이 재미있다.


“훈도의 임명장은 반드시 이조의 명으로 발부돼야 하는데, 위조 임명장엔 예조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또 임명장에는 ‘예조참지(參知)’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예조에는 참지라는 직함이 없습니다. 또 위조임명장에는 ‘차례로 전달하는 관문(次次傳關)’이라 썼는데, 이는 군사의 중차대한 일에만 쓰지, 임명장에는 쓸 수 없는 표현입니다.”

얼마나 병역을 피하고 싶었으면 이같은 터무니없는 꾀를 냈을까.


귀화자·효자에게도 병역면제

귀화자는 어땠을까. <성종실록>을 보면 1487년 귀화자 병역혜택의 범위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인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귀화한 왜인, 야인(두만강 이북에 살던 종족)의 경우 증손자부터 병역을 감당하게 하라.”


귀화자의 경우 정착해서 살아갈 방도가 없으니 최소한 3대(손자대)까지는 병역의 의무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는 쪽으로 대신들의 의견이 모인 것이다.

‘병역면제 혜택’의 가장 큰 덕목은 유교사회 답게 ‘충효’였던 것 같다.


1610년(광해군 2년)의 일이다. 예조가 임금에게 함열(익산)사람 정팽수를 칭찬하는 상소를 올린다. 그 까닭은 ‘충효의 모범’이 됐기 때문이다.

“정팽수는 6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자 그 새어머니를 극진히 섬겼고, 아비와 새어머니가 돌아가자 6년간 산소 옆에서 여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1600년 선조비인 의인왕후가 돌아가자 3년상을 지냈고, 선조 임금의 상에도 3년간 상복을 입었습니다. 또 발인할 때도 산릉(山陵)을 따라 거처하려 했지만 병역 때문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새삼 놀라운 ‘충효의 모범’이다. 친어미와 아버지, 새어머니를 각각 3년씩, 왕후와 임금의 상을 각각 3년씩, 무려 15년을 부모와 임금의 산소를 지키고 상복을 입었다는 것이니 말이다. 광해군은 즉각 전교를 내린다.

“정팽수의 병역을 감면시키거라. 그 뿐이 아니다. 그에 해당하는 벼슬을 내려 (충효를) 권장하는 뜻을 보이거라.”


“너도나도 충신·유학자 후손이라 고합니다.”

고려 왕조의 후예로서 선조의 제사를 지내는 왕씨의 자손들에게도 면제혜택을 주었다.

또 병자호란의 ‘3학사’, 즉 오달제·윤집·홍익한의 후예들에게는 “대대로 병역을 면제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1681년·숙종 7년) 또 같은 해에는 고려시대 대유학자인 안향(1243~1306)의 후손에게도 대대로 병역을 면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유학에서 성인으로 꼽혔던 기자(箕子)의 후손이라는 한(韓)씨와 선우(鮮于)씨, 그리고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1329~1398)의 후손들도 병역면제의 혜택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런데 후유증도 만만치 않았다. 너도나도 “이 분들의 후손”이라고 나선 것이다. 1682년, 지사 김석주가 고했다.(<숙종실록>)

“근래 병역에 편입되는 자 가운데 선현의 자손이라고 거짓말 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안(安)씨 성을 가진 자는 다 안향의 자손이라 하고, 한(韓)씨 성을 가진 자는 모두 기자의 후예라 합니다.”


숙종은 고심 끝에 결론을 내린다.

“기자의 후손 가운데는 오로지 선우(鮮于)씨 만을 군대에 편입하지 마라. 안향의 후예 중에는 제사를 받들고 무덤을 수호하는 자 외에는 모두 병역에 포함시켜라.”


그럼에도 그 부작용은 끊이지 않았던 것 같다. 1710년, 민진후는 엣 선현들의 후예들이 일으킨 갖가지 병폐를 낱낱이 고한다.

“기자와 안향, 문익점의 자손은 병역 뿐 아니라 그에 따른 각종 부역까지 모면하려 갖가지 계책을 꾸밉니다. 또한 신라 경순왕의 자손은 병조의 하급관리와 짜고 임금이 내린 문서를 입수, 지방 사령들을 속여 병역을 면제받고 있습니다.”

숙종은 이 범상치않은 사안을 두고도 그저 “앞으로는 단단히 타일러 경계로 삼도록 하라”는 명령만 내릴 뿐이었다.


‘평역의 의무는 평등해야 한다’

공식 역사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만 해도 무려 4000건이 넘는 병역(군역)관련 이야기가 실려있다. 필자가 한국고전번역원의 ‘고전종합DB’를 두드려 보았더니 무려 7544건이 검색된다.

‘군대’와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와 고금을 막론하고 뭇 남성들의 ‘평생 이야깃거리’인 것은 틀림없다.


이번 기사도 이 풍부한 조선시대 군대 이야기의 깃털만 건드렸을 뿐이다. 따지고 보면 16살부터 60살까지 지긋지긋하게 병역의 의무를 견뎌내야 했던 조선시대와 21~24개월간만 ‘쿨’하게 버티면 영원히 제대하는 요즘을 견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군대생활은 1년을 하나, 10년을 하나 그저 고달픈 군대생활일 수밖에 없다.

예나 지금이나 금과옥조로 삼아야 할 말이 있다. 1659년(효종 10년) 병조참지 유계가 고한 말이다.

“우리 나라는 지역이 좁고 인민이 적은데…. 놀기만 하고 게으른 자가 10명 가운데 8~9명이 차지하고 간신히 남아 있는 선량한 백성에게만 유독 병역을 부담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공자님 말씀을 떠올린다,

“‘균등하면 가난하지 않고, 화합하면 부족함을 걱정하지 않으며 편안하면 나라가 위태롭지 않다’고 했습니다. 바로 지금 병역의 불평등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무슨 방법으로 민중의 마음을 화합시켜 나라를 망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 군역이 괴로운 것보다 불평등한 것이 더욱 백성을 피폐하게 만들고,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것이다. 과연 옳은 말이 아닌가?



<참고자료>

민현구, <사회구조와 군역제도의 정비>, ‘한국군사사문선집 4, 조선전기편, 국방군사연구소, 1999년

오종록, <조선초기 정병의 군역-15세기 후반을 중심으로>, ‘한국사학보’ 창간호, 1996년

천관우, <조선 초기 오위의 병종>, ‘사학연구’18, 한국사학회, 1964년

김태영·서정상, <조선초기 군역제도의 추이와 개혁방향>, ‘한국군사사문선집 4, 조선전기편, 국방군사연구소, 1999년

이기환, <분단의 섬 민통선>, 책문, 2009


 [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lkh@kha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