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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흔적의 역사] 페르시아 왕자, 신라공주와 혼인했다

잠용(潛蓉) 2019. 12. 22. 09:19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페르시아 왕자, 신라공주와 혼인했다

경향신문ㅣ2012.12.19 10:44 수정 : 2013.01.30 11:52

 


▲ 페르시아 왕자 아비틴과 신라공주 프라랑을 묘사한 <쿠쉬나메>의 내용. /이희수 교수 제공


“양금이, 양금이(Janggumi).”

2008년 초, 테헤란 등 이란 답사일정을 소화하고 있던 필자는 아주 흥미로운 광경을 목격했다. 일단의 이란 젊은이들이 필자와 함께 답사단의 일원이었던 한국 여성을 보고 반색하면서 몰려든 것이다.


이란 남성들이 한국 여성만 보면 ‘양금이 양금이’하고 외쳤던 것이다. ‘양금이’는 한국 드라마 <대장금>의 주인공인 ‘장금이’의 이란식 발음이다. 2006~2007년 사이 이란 국영 채널 2에서 방영된 <대장금>(이란에서는 ‘Jewel in the palace’)은 평균 시청률 85~90%에 달할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대장금>의 주인공역을 맡은 이영애는 ‘살아있는 인형’ 대접을 받았다. 지금도 한국 드라마, 특히 사극의 인기는 대단하단다. <대장금>의 후속작인 <주몽>과 <동이>도 60%의 시청률을 상회했다니까.


양금이 장금이

왜 이란에서 한국 사극은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을까. 전문가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우선 <대장금>을 비롯한 한국 사극의 흐름이 이란 역사와 비슷하다는 것을 꼽았다.

이란은 인류 이동 및 동서문명의 교차로로 끊임없이 외부세력과 충돌을 빚었다. 지금도 15개국과 국경 및 바다를 접하고 있다. 또한 이슬람에서도 다수파인 수니파의 협공 속에 외로이 시아파의 전통을 이어가느라 고난의 역사를 걸었다. 그런 만큼 역경을 딛고 일어서 마침내 꿈을 이루는 대장금과 주몽, 동이가 파란만장한 이란인들의 역사와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다. 또 한국 사극에서 보이는 여인들의 의상이 헤자브를 쓰고 몸 전체를 가리는 이란 여성과 닮았다는 점도 친근감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럴 듯 하지만 딱부러진 해석이라고 하기엔 어쩐지 부족했다. 사실 사극 뿐이 아니다. 한국인에게 이란은 ‘열사의 나라’로 상징되는 아랍세계의 일원이며, 축출해야 할 ‘악의 축’ 국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란은 결코 아랍의 일원도, 열사의 나라도 아니다. 더군다나 ‘악의 축’도 아니다. 한국과 이란간 교역 규모는 174억 달러(2011년)에 이른다. 서방의 경제제제가 무색하게 교역은 되레 급증한 것이다.

한국은 아랍에미리트·중국에 이어 이란의 3대 수입국으로 도약했다. 또 이란은 한국 원유의 4대 수입원이다. 이란의 태권도 인구는 종주국인 한국에 이어 세계 두번째로 많은 120만 명이다.

 


▲ 14세기 세밀화. 신라를 섬으로 표시했다. 페르시아의 왕자와 신라 공주, 그리고 궁녀들이 묘사돼있다. <쿠쉬나메>는 신라인과 신라여인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이며, 신라에서는 용연향이 풍긴다고 묘사했다. /이희수교수 제공

최근 일부 초등학교에서는 태권도를 정식교육 과목으로 채택하기도 했다. 대체 한국과 이란 사이엔 무슨 사연이 있기에 그 끈끈한 ‘친연의 DNA’를 서로 이어왔을까. 서방과 서방언론이 끊임없이 뿌리는 이간계의 술책에도….


‘Shilla의 현현’
2010년 5월 어느 날이었다. 중동 전문가인 이희수 한양대 교수(문화인류학과)에게 흥미로운 연락이 왔다.

“이 교수가 확인해야 할 것 같네요. 신라와 관련된 내용인 것 같은데….”

이란 국립박물관의 동아시아 담당 큐레이터이자 아자드대 교수인 다르유시 아크바르자데 교수였다. 고대 페르시아어 전공자인 다르유시 교수의 연락내용은 흥미진진했다.


즉 1998년 이란 학자 잘랄 마티니 교수가 오랫동안 구전으로 내려온 서사시를 모아 책으로 펴냈다는 것. ‘쿠쉬나메(Kush-name)’라고 하는 이 서사시의 원 편찬자는 11세기 대학자인 이란샤 이븐 압달 하이르였다. 그런데 다르유시 교수는 이 책 내용에 ‘shilla(실라)’, ‘즉 신라와 관련된 내용이 엄청난 분량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이희수 교수에게 알려준 것이다.


“2005년부터 한양대 문화재연구소는 이른바 ‘악의 축 프로젝트’를 가동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세계가 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30 여 년 간 경제제재에 나선 것에 일종의 오기를 부렸다고 할까요. 어쨌든 다르유시 교수가 사장되다시피 한 ‘쿠쉬나메’를 보고, 그 속에 신라를 다룬 내용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의미는 큽니다. 한양대 연구소와 이란 측의 공동연구 결실이라 할까요.”


무슨 말이냐. 1998년 잘랄 마티니 교수가 ‘쿠쉬나메’를 정리해서 책을 펴냈다지만, 그 속에 포함된 의미는 사장되다시피 했다. 이란 학자들이 대부분 ‘쿠쉬나메’ 속에 있는 ‘신라’를 ‘일본’으로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신라’라는 고대국가를 아는 학자들은 드물었다. 하기야 최근까지도 한국인이라 하면 일본인이나 중국인으로 보는 게 다반사였지 않은가?

그런데 한국-이란의 공동연구 과정에서 새삼스럽게 ‘신라’의 존재를 인식하고 주목했다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의미있는 작업이었다는 것이다.


쿠쉬나메, 파천황의 자료

자료를 입수한 이희수 교수는 깜짝 놀랐다. ‘페르시아와 신라가 혈맹관계’ 였음을 알리는 방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멸망한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족이 신라의 공주와 혼인, 왕자를 생산하고, 그 왕자가 이라크로 귀국해서 폭정자를 물리친다는 것이다. 현재 이 교수를 비롯한 국내학계와 다르유시 교수를 비롯한 이란 학계가 ‘쿠쉬나메’ 해독 및 번역작업을 벌이고 있다. 총 243쪽에 달하는 필사본 원본은 현재 영국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쿠쉬나메는 총 1만129 쿠플레(대구·對句)가 넘는 방대한 양을 자랑한다. 이란내에서도 가장 중요한 구전 서사시이다. 그 가운데 신라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구절은 1만219절 중에서 2011~5925절 사이를 구성한다. 역사기록으로 살펴볼 때 사산조 페르시아는 637년 카디시야 전투에서 아랍군에게 패배한 뒤 모술·니하반도·하마드한·라이·이스파한 등 주요도시들을 잇달아 잃으면서 멸망한다.


사산조 페르시아의 마지막 황제 아즈데기르드의 왕자 피루즈는 끝까지 저항했으며, 중국으로 망명한 뒤에는 이란인 잔존세력과 공동체를 이뤘다. 대서사시인 ‘쿠쉬나메’의 역사적인 배경은 바로 이 무렵(7세기 중반), 마지막 왕자 피루즈가 중국으로 망명한 뒤 사망한 시점인 것으로 보인다. ‘쿠쉬나메’에서 ‘쿠쉬’는 실존인물이라기 보다는 구전상의 영웅이다. 7세기말 아랍의 침공을 받아 멸망한 사산조 페르시아 말기의 중국 왕으로 묘사된다. ‘나메’는 ‘서(書)’이다. 말하자면 ‘쿠쉬나메’는 ‘쿠쉬서(書)’인 것이다.


신라로 망명한 페르시아 왕족


 

▲<쿠쉬나메>에서 신라관련 내용을 알려온 다르유시 아크바르자데 교수(오른쪽)과 이희수 교수(한양대). /이희수 교수 제공

다음은 이희수 교수가 지금까지 번역한 ‘쿠쉬나메’의 내용이다. 이희수 교수는 한국·이란 학자들이 한창 번역 중인 내용을 조심스럽게 필자에게 전했다.
7세기 중반, 사산조 페르시아의 멸망 이후 중국에 망명한 이란인들의 공동체를 지휘하던 인물 가운데 아비틴(Abtin)이 있었다. 그런데 아비틴은 중국 내의 정치적인 대혼란기에 이란 공동체가 도륙을 당하게 되자 망명을 결심한다. 아비틴이 이끄는 이란 공동체는 마친(Machin·중국의 주변국)왕의 주선으로 신라로 망명한다. 마친왕은 “신라 왕 타이후르(Tayhur)를 추천한다”면서 “신라는 낙원이나 다름없으며, 침략이 불가능한 안전한 나라”라며 신라를 망명지로 추천한 것이다.


신라왕 타이후르는 아비틴 일행이 신라에 도착하자 극진하게 영접한다. 우선 두 아들이 인솔하는 대군대를 항구로 보내 아비틴 일행을 환대한다. 망명단은 타이후르의 성(城)으로 향한다. 음악이 흐르고 성대한 축제가 열린다. <쿠쉬나메>의 저자는 타이후르의 성과 골목, 길가, 정원, 도시의 주변 모습, 신라의 아름다운 음악과 연주자들, 정원의 새들, 왕의 환대 등을 자세하게 묘사한다. 타이후르는 이비틴과 함께 황금왕좌에 앉아 연회를 베풀며 긴밀한 대화를 나눈다. 아비틴이 ‘중국으로의 송환’을 걱정하자 타이후르는 “신라는 중국의 속국이 아닌 독립국”이라며 “당신 일행을 도울 것”이라고 다짐한다. 그 증표로 진귀한 선물을 건네준다. 아비틴과 타이후르는 이란의 스포츠인 폴로(격구)를 즐긴다. 원래는 ‘신라 대 이란’으로 팀을 나눠 경기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아비틴은 국가간 경기가 과열양상으로 치닫을 것을 우려한 나머지 양국 선수들을 섞어 경기를 치른다. 타이후르는 “이란인들의 폴로실력이 대단하다”고 격찬한다.


신라의 해상봉쇄에 나선 중국


 

▲ 이란 남성들이 이란 유적을 답사하던 한국여성에게 ‘양금이’하면서 다가와 사진을 함께 찍고 있다. 필자 일행이 2008년 2월 이란답사 중 겪은 흥미로운 광경이다.

중국의 쿠쉬(왕)는 이란인들이 신라로 망명했다는 소식에 분노한다. 신라왕과 아비틴은 협박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낸다. 타이후르는 모욕감이 치를 떨며 아비틴에게 “가장 강경한 어조로 답장을 보내라”고 요청한다. 중국 왕은 대대적인 침공에 나선다. 하지만 신라-이란 연합군은 곧 중국 침공군을 대파하고 대륙으로 쫓아낸다. 허겁지겁 도망간 중국왕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다시는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신라를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대신 신라를 계속해서 포위하고 타이후르가 스스로 항복하게 해라.”


말하자면 직접 공격 대신, ‘해상봉쇄를 통한 경제제재’가 효과적인 공세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마치 요즘 서방의 이란 경제제재를 방불케 하는 대목이다. 중국왕이 이란인들의 신라망명을 주선한 마친왕을 핍박하자 신라-이란 연합군은 중국 원정길을 떠난다. 아비틴이 지휘하는 연합군은 중국의 심장부를 점령한 뒤 전리품의 반을 신라에 보낸다.


신라 공주와 결혼하면?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끈 아비틴은 다시 신라왕 타이후르의 환대를 받는다. 아비틴은 타이후르의 딸인 신라공주 프라랑(Frarang)과 혼인할 마음을 갖는다. 측근들로부터 “신라 소녀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덕까지 갖췄으며, 그 가운데 신라공주가 최고”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비틴은 타이후르를 만나 조심스럽게 “따님과 혼인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신라왕은 주저한다.

“신라법에 이방인에게 딸자식을 내주지 않아요. 내가 딸을 내준다면 귀족들이 우습게 볼 겁니다.”

아바틴은 자신이 이란의 전설적인 왕인 잠쉬드(Jamshid)의 후예임을 강조하면서 “절대 우스운 혼인은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고민하던 타이후르는 마침내 혼인을 승락한다.


▲ <쿠쉬나메> 인쇄물. 사시의 원 편찬자는 11세기 대학자인 이란샤 이븐 압달 하이르였다. /한양대 문화재연구소 제공

하지만 조건을 단다. 아비틴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공주 프라랑을 10명의 처녀들 틈에 섞어 놓고는 “찾아보라”고 시험한 것이다. 아비틴은 좌절하지만, 몰래 공주의 인상착의를 가르쳐 준 측근들의 기지 덕분에 공주를 찾는다. 우여곡절 끝에 혼인이 성사됐다. 성대한 혼인식을 치른 아비틴-프라랑 커플은 아이를 임신한다.


그런데 아비틴의 꿈에 “장차 태어날 왕자가 바그다드의 자하크(아랍의 폭정자)을 물리치고 이란인의 복수를 해줄 것”이라는 계시가 나타난다. 신라왕은 낙담했지만 부부를 떠나 보낼 수밖에 없었다. 프라랑은 이란으로 가는 배에서 왕자를 생산한다. 왕자의 이름은 파리둔(Faridun)이다. 이란에 도착한 아비틴은 자하크의 맹공세에 그만 전사하고 만다. 너무 어렸던 파리둔은 아버지의 죽음을 모른채 신하들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자란다.


중국대륙을 점령한 신라

한편 신라도 6년에 걸친 중국왕 쿠쉬의 맹공에 말려 누란의 위기에 빠진다.

타이후르의 아들 가람은 이 전투를 대승으로 이끈 주역이 된다. 이 무렵 신라왕 타이후르는 이란에 있는 딸 프라랑의 편지를 받는다.

“아버지, 저의 아들, 파리둔이 자하크를 패배시키고 철끈으로 묶어 산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모든 군대를 죽였습니다.”


타이후르는 매우 기뻐하며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타이후르는 마친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바하크의 땅으로 남아있던 곳을 차지하고, 중국의 수도 호마단(Khomadan)까지 점령한다.

타이후르는 중국과 마친에서 7년을 보냈고, 결국 병들어 신라로 돌아와 신라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타이후르의 아들 가람이 왕좌를 이어 신라를 다스린다.


이상이 이희수 교수가 전한 <쿠쉬나메>, 대강의 내용이다. 이희수 교수의 말마따나 이 서사시에 역사적인 정당성을 주기는 쉽지 않다.

“쿠쉬나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음역이 당시 신라사회의 지명이나 인명과 일치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당시 신라 왕실이나 사회를 정확하게 묘사한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신화나 서사시, 전설은 그 민족의 문화원형이자 역사원형이다. 그리스 로마신화가 서구문화의 원형이 됐고, 단군신화가 한민족 역사의 원형이 됐듯, 쿠쉬나메는 페르시아 문화와 역사의 원형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이희수 교수는 “기존 학계의 고고학, 민속학, 역사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용한 해석의 길잡이임에는 분명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쿠쉬나메는 새빨간 거짓의 기록인가, 아니면 뭔가 흥미롭게 해석할 여지가 있는가. 이제 <쿠쉬나메>에 숨겨진 비밀의 단서를 하나하나 살펴보자.

“신라를 표현한 내용 같은데…. 이 교수가 한번 확인해야 할 것 같아서….”


2010년 5월 어느 날, 이희수 한양대 교수(문화인류학과)에게 연락이 왔다. 이란의 다르유시 아크바르자데 아자드대 교수였다. 오랫동안 구전으로 내려온 이란의 대서사시인 <쿠쉬나메(Kush-name)>에서 방대한 ‘Silla’ 관련 내용이 들어있다는 것이었다. 이 교수는 깜짝 놀랐다. 과연 7세기 중반 아랍에 의해 멸망당한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족이 중국을 거쳐 신라로 망명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더욱이 이 페르시아 왕족은 신라 공주와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았으며, 이 아이가 훗날 아랍인을 물리치고 이란의 영웅이 됐다는 것이었다.(사진)

 
즉 사산조 페르시아가 멸망하자 중국으로 망명한 이란인들의 지도자 중에 아비틴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중국 내 정치적 대혼란기에 이란인들의 안전이 위협받자 주변국왕(마친왕)의 주선으로 ‘낙원이나 다름없는 신라’로 망명한다. 아비틴은 신라왕인 타이후르와 폴로(격구) 경기와 사냥을 즐긴다. 심지어는 신라·이란 연합군을 결성, 침략해온 중국군을 물리치고 세력을 대륙까지 떨친다. 신라로 돌아온 아비틴에게 측근이 속삭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라 공주(프라랑)와 혼인하라”고…. 아비틴은 마음을 굳혔지만, 신라왕은 주저한다. “귀족들이 이방인과의 혼인을 반대한다”면서….


그러나 아비틴은 신라왕 타이후르가 낸 시험문제를 주변의 도움으로 풀고는 마침내 국제결혼에 성공한다. 프라랑은 아비틴의 아들을 잉태한다. 신라에서 꿈같은 신혼생활을 즐기던 아비틴의 꿈에 신의 계시가 현현한다. “너의 아들이 자하크(아랍의 폭정자)를 처치하고 (페르시아의) 복수를 할 것”이라는…. 아비틴은 임신한 프라랑을 데리고 이란으로 귀국한다. 둘 사이에 신라와 페르시아의 피를 나눈 아들(파리둔)이 태어난다. 아비틴은 자하크에게 잡혀 처형당하고 만다. 하지만 신라·페르시아 양국동맹의 결실인 파리둔은 훗날 자하크를 죽이고 이란의 영웅이 된다. 신라 공주 프라랑은 아버지(타이후르)에게 승전보를 전한다.

“아버지, 저의 아들, 파리둔이 자하크를 철끈으로 묶고 그의 군대를 죽였습니다.” 

  
사위와 딸의 승전보에 기뻐한 신라왕은 성대한 연회를 펼친다. 이상 <쿠쉬나메>의 대강만 훑어보아도 흥미진진한 내용이다. 2006~2007년 사이 이란에서 방영된 드라마 <대장금>이 80%를 넘는 경이로운 시청률을 자랑했다. 신라와 페르시아 시절부터 흘러온 핏줄이 지금도 당기고 있기 때문일까. <쿠쉬나메>에 담겨진 수수께끼를 풀어보자. 경주 구정동 무덤의 네 모서리에 눈이 깊고 코가 큰 무인상의 모습이 이채롭다. 전형적인 서역인이다. 그런데 가죽장화를 신은 이 무인이 나무 하나를 들고 있다. 무슨 나무일까?


“<쿠쉬나메>에서 페르시아 이주민들과 신라인들이 폴로(격구) 경기를 벌였다는 기록이 있잖아요. 바로 폴로 경기용 스틱(사진)을 연상시킵니다.”(이희수 한양대 교수).
이 교수는 최근 이란에서 발굴된 대서사시(<쿠쉬나메>·7세기)를 언급하고 있다. <쿠쉬나메>는 신라로 망명한 페르시아 왕족(아비틴)이 신라 공주와 혼인해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훗날 이란의 영웅으로 성장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구전으로 전해진 이 서사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허황된 이야기일까. 그렇지만은 않다. 우선 5~6세기 신라 황남대총 북분에서 나온 ‘커트 글라스’, 즉 무늬를 새긴 유리는 전형적인 사산조 페르시아 계통의 유물이다. 또 출토된 은잔에는 고대 이란의 중심 여신인 아나히타를 연상시키는 여신상이 조각돼 있다.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국가의 정신적인 통합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여신이 그릇이나 도구에 조각돼 있다면 그것은 일반교역품으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최고위층의 신앙의례나 국가통치의 상징으로 사용됐을 겁니다. 그렇다면 신라와 사산조 페르시아 왕실 사이에 고도의 교류행위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이희수 교수)

신라에서는 또 페르시아산 에메랄드인 ‘슬슬(瑟瑟)’과 페르시아 카펫인 ‘구수’와 ‘탑등’ 등이 해외 명품으로 대유행했다. <쿠쉬나메>는 “신라왕이 페르시아 왕족과 ‘황금왕좌에 앉아’ 담소를 나눴다”고 했다. 황금왕좌에 앉았다? 이 역시 심상치 않은 대목이다. ‘신라=황금나라’였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신라의 전성기 경주엔 39개의 금입택(金入宅·금으로 치장한 저택)이 있었다”(<삼국유사>)고 했을까?


중세 아랍 지리학의 거장인 알 이드리시는 “신라에서는 개목걸이도, 원숭이의 목테도 황금”이라고 했다(1154년). 지리학자 알 카즈위니는 한 술 더 떴다(1250년).

“신라인의 외모는 가장 아름답다. 집에선 용연의 향기가 난다. 한번 들어온 이주민은 정착하고 싶어한다.” 

페르시아 왕족이 신라에 정착,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라’ 공주와 혼인했다는 <쿠쉬나메>의 내용은 그렇게 허황된 것만은 아닌 것이다. 이 순간부터 남의 장단에 맞춰 이란을 ‘불량국가’ ‘악의 축’으로 폄훼해서는 안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혹 1400년 전 맺은 ‘혈맹’일 수도 있지 않은가?



<참고자료>
이희수, <이슬람과 한국문화>, 청아출판사, 2012
<중동지역 한국학 관련 고문헌 및 역사 어문자료 기초조사>,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세계지역종합연구 협동연구총서’. 대외경제정책연구원, 2011
<고대 페르시아 서사시 쿠쉬나메(Kush-nameh)의 발굴과 신라관련 내용>, 한국연구재단 인문한국지원사업 지원연구소, 2009
정수일, <한국 속의 세계 하>, 창비, 2005 .


[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 lkh@kha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