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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기념일

[오늘은]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 기념일

잠용(潛蓉) 2020. 6. 15. 12:34

6.15 남북공동선언

 

▲ 공식 한반도기

 

[요약]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2박 3일 동안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진행하고 마지막날 발표한 선언이다.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을 선언하고 남북의 통일 방안에 공통성이 있음을 인정하며 경제협력을 비롯한 교류 활성화에 합의했다. 이 정상회담은 1948년 한반도 분단 이후 남북의 대표가 만난 첫번째 회담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 정상회담과 햇볕정책을 통해 한반도 평화를 증진시킨 공로로 2000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예고 없이 평양 순안공항에 직접 나와 김대중 대통령을 비행기 트랩 바로 앞에서 영접하는 파격적인 예우를 보였다. 두 정상이 만나 두 손을 맞잡고 악수하는 역사적인 장면이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분단 55년만에 남북 정상이 처음으로 얼굴을 맞댄 순간이었다. 두 정상은 2박 3일간 무려 10시간 가까이 자리를 함께 하며 대화를 나눴고, 두 정상이 직접 서명한 6.15 남북공동선언이라는 성과도 만들어냈다.

 

6.15 남북공동선언문은 남북이 스스로 평화 통일의 방안을 제시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남과 북은 1항에서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 할 것을 선언하고, 2항에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했다. 3항에서 이산가족과 비전향 장기수 문제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기로 했고, 4항에서 경제협력을 비롯한 교류활성화를 선언했다.

 

이러한 선언문 내용은 1991년 12월 채택된 남북기본합의서각주1) 와 이어진다. 남북기본합의서는 1991년 12월 남과 북이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상대방을 공식으로 인정한 문서다. 이 합의서에서 남과 북은 서로를 주권국가로 인정하면서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셩되는 특수관계"로 규정했으며, "평화 통일을 성취하기 위해 공동의 노력을 경주할 것을 다짐"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사에서부터 "남북기본합의서의 실천"을 강조해왔다.

 

6.15 남북공동선언의 배경

김대중 정부 이전에도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시도가 있었다. 노태우 정부는 1990년부터 8차례의 남북 고위급 회담을 열어 남북기본합의서를 성과를 냈다. 그러나 92년 남한조선노동당 간첩사건이 불거지고 한미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에 북한이 반발하면서 대화가 단절됐다. 이어 1993년 3월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 사찰 결의에 반발해 NPT 탈퇴 선언을 하면서 북핵 위기가 고조됐다. 1994년 6월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해 '핵활동 동결'이라는 합의를 이끌어냈고 이는 같은해 10월 제네바 합의각주2) 로 이어졌다. 방북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통해 김일성 주석은 김영삼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제안했다. 남한 정부는 수락했고, 남북정상회담의 구체적인 일정도 잡혔으나 같은 해 7월 김일성 주석이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김영삼 정부가 조문을 거부하면서 남북정상회담은 무기한 연기됐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김정일 총비서와 정상회담을 할 것을 공식제안한다"(1997년 12월 19일 대통령 당선 기자회견)고 밝히며 적극적인 추진 의지를 보였다. 김 대통령은 2000년 3월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연설을 통해 남북이 직접 대화를 통해 경제협력을 논의하고 한반도 냉전종식과 평화 정착을 위해 협력하자는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다. 이 연설에는 '햇볕정책각주3) '의 핵심이 담겨 있었으며, 이에 북한도 긍정적으로 반응해 2000년 첫 남북정상회담을 이룬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햇볕정책으로 1998년 금강산 관광이 개시됐고, 북한에 대한 대규모 식량·비료 지원, 개성공단 개발 등의 정책이 시행됐다. 또 한국이 주도한 평화구상에 미국 클린턴 행정부가 호응해 만들어진 '페리 프로세스'도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페리프로세스

1998년 8월 북한이 대포동 미사일을 시험 발사한 것을 계기로 미 클린턴 행정부가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을 대북정책 조정관으로 임명해 대북정책 전반을 재검토하고 만든 포괄적 해결 방안이다. 페리 전 장관은 1999년 5월 북한을 방문한 후에 페리 프로세스를 내놓았으며, 훗날 '임동원각주1) 프로세스라고 해도 좋다'며 이 구상에 한국의 역할이 컸음을 밝히기도 했다. 페리 프로세스는 북한과 미국이 상호 위협을 줄이면서 호혜 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3단계 접근방식을 제시했다. 1단계로 북한의 미사일 발사 중지와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 해제, 2단계로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 중단, 3단계로 북미·북일 관계 정상화와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 등을 권고하는 내용이다.

 

6.15 남북공동선언의 영향

2000년 남북정상회담 직후 장관급 회담이 남북에서 수차례 열렸고, 5차례의 이산가족 상봉이 대규모로 성사됐다.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등 남북 교류도 크게 확대됐다. 그러나 2002년 6월에는 서해교전이 터졌고, 김 위원장의 답방도 이뤄지지 않았다. 또 대북송금 특검각주4) 으로 현대그룹이 정상회담 대가로 북한에 5억 달러를 불법 송금한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그러나 6.15남북공동선언은 서해교전 등의 물리적 충돌과 거듭된 북핵 위기에도 2000년 10월 북미 공동 코뮈니케(US-DPRK Joint Communique) 채택, 2002년 최초의 북일 정상회담, 한반도 비핵화의 목표를 설정한 2005년 9.19 공동성명, 2007년 10.4 남북 정상선언으로 이어지는 뚜렷한 성과를 낳았다.

 

2000년 10월 당시 북한과 미국은 상호 특사방문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 관계의 전면적 개선을 추진하는 '북미공동 코뮈니케'를 채택하는 한편 클린턴 미 대통령의 방북과 북미 정상회담을 추진했다. 2005년 6자회담에서는 북한이 핵무기와 핵프로그램을 포기하는 대신 체제보장과 경제적 지원을 얻는다는 내용의 9.19 공동성명, 이를 위한 구체적인 이행계획을 담은 2007년 '2.13 합의'가 이뤄졌다. 1차 정상회담 7년 뒤인 2007년 10월 2~4일에는 평양에서 2차 정상회담이 성사되어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났다.

 

이때 육로 방문이 합의 되어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원수 최초로 걸어서 군사분계선을 넘어갔다. 남북 정상은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 공동선언)'을 발표해 6.15 남북공동선언을 재확인하고 경제협력 확대, 군사적 신뢰구축 등 구체적인 협력사업에 합의했다. 그러나 정상회담이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 말에 열렸기 때문에 후속 조치는 탄력을 받지 못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과 햇볕정책을 통해 한반도 평화를 증진시킨 공로로 2000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김 대통령은 2009년 6월 11월 열린 6.15 남북공동선언 9주년 기념 연설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6.15와 10.4 공동선언을 지켜야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자'는 제목의 이 연설은 김 대통령의 생애 마지막 연설이 됐다. 아래는 6.15 남북공동선언 전문이다.

 


6.15 남북공동선언 전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숭고한 뜻에 따라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김정일 국방 위원장은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평양에서 역사적인 상봉을 하였으며 정상 회담을 가졌다. 남 · 북 정상은 분단 역사상 최초로 열린 이번 상봉과 회담이 서로 이해를 증진시키고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며 평화 통일을 실현하는 데 중대한 의의를 갖는다고 평가하고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①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②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③ 남과 북은 올해 8 · 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④ 남과 북은 경제 협력을 통하여 민족 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 문화 · 체육 · 보건 ·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⑤ 남과 북은 이상과 같은 합의 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빠른 시일 안에 당국 사이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도록 정중히 초청하였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2000년 6월 15일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

 

 

(우리는 하나 - 희망새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