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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중국인은 출입금지"

잠용(潛蓉) 2021. 7. 10. 14:31

"개와 중국인은 출입금지"
한겨레21ㅣ2021. 07. 10. 11:08 댓글 834개

▲ 중국인에게는 제국주의의 아픈 상처가 남은 베이징 둥자오민샹 거리. /베이징관광국 누리집 갈무리

 

[북경만보] 어떤 '불법'도 허용되던 치외법권구역 '공사관 거리' 베이징 둥자오민샹
1894년 2월, 31살의 젊은 오스트레일리아 청년이 배를 타고 일본을 거쳐 중국 상하이로 왔다. 그는 창장(长江·양쯔강)을 거슬러 올라가 충칭으로 간 다음, 중국인처럼 변장하고 다시 중국 서부 지역으로 가서 미얀마(당시 버마) 국경지대까지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여행은 그의 인생을 뒤바꿔놓았고, 죽어서도 그의 묘비명에는 ‘베이징의 모리슨’으로 남았다. 그는 나중에 영국 일간 <타임스>의 중국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러시아의 만주철도 부설과 관련해 세계적 특종을 하며 중국에 대한 러시아의 야심을 폭로했다. 이 기사가 기폭제가 돼 러일전쟁이 폭발하자 사람들은 그 전쟁을 ‘모리슨의 전쟁’이라고도 불렀다. 1912년까지 <타임스> 특파원으로 일하는 동안 그는 중국 근대사의 가장 격동적인 순간을 모두 목격하고 취재했다. 나중에 그는 위안스카이가 초대 총통이 된 중화민국의 정치고문을 지냈고, 1918년 2차 세계대전 종결 뒤 ‘파리강화회의’에 중국 정부를 대표한 기술고문 자격으로 참가했다가 병을 얻어 1920년 영국에서 죽었다. 그가 바로 중국 근현대사에서 유명한 외국인 중 한 명인 조지 모리슨(George E. Morison. 1862~1920)이다.

훗날 <1894, 중국기행>이라는 책에서 모리슨은 첫 ‘중국 상륙’ 당시 느낌을 이렇게 썼다. “나 역시 다른 나의 동포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인에 대한 강렬한 종족 혐오감을 품은 채 중국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일찌감치 진심 어린 동정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중국인에게 ‘종족 혐오감’을 품었던 그가 나중에 ‘진심 어린 동정심’을 가진 것은 중국에 도착해 목격한, 당시 중국과 중국인이 제국주의 그늘에서 겪던 갖가지 참상 때문이다.

매일 저녁 고막을 찢는 듯한 외침
비슷한 시절 1895년 이른 봄, 베이징으로 과거 시험을 보러 간 캉유웨이의 말에서 그 참상을 짐작할 수 있다. 캉유웨이는 무술변법운동을 주도하며 중국의 자강과 정치개혁을 꾀한 인물이다. 캉유웨이가 목격한 수도 베이징의 첫인상은 이랬다. “베이징의 어느 골목이나 거지가 득실거린다. 돌봐줄 사람 없는 노인, 거지, 병자, 불구자들이 길바닥에 쓰러져 굶주리며 죽어가도 누구 하나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다.”(조너선 D. 스펜서, <천안문> 중)

그로부터 20년이 더 지난 뒤에도 베이징에는 여전히 거지와 굶어 죽어가는 사람이 득실댔다. 중국 공산당 창시자 중 한 명이자 중국에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들여오고 전파한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리다자오는 1921년 3월5일 발행된 잡지 <신생활>에 당시 베이징의 일상을 이렇게 묘사해놓았다. “베이징에서는 매일 저녁을 먹을 때마다 고막을 찢는 듯한 극도로 비참한 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부잣집의 남은 음식을 애달프게 구걸하는 소리다. 그 소리는 한밤중까지 쉴 새 없이 이어진다.” 1860년 2차 아편전쟁 패배 이후 제국주의 열강이 자신들의 입맛대로 중국을 갈라 먹을 때 대다수 중국인은 거지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었다.

당시 거지가 들끓는 베이징을 ‘천국의 도시’라고 여긴 사람도 있다. 베이징 공사관 구역 둥자오민샹(东交民巷)에 살던 외국인들이다. 1897년 3월15일 베이징 둥자오민샹 외교구역에 집을 얻은 조지 모리슨은 당시 그곳의 풍경을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11개국의 대사관이 다닥다닥 서로 맞붙어 있었고 삼면이 온통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대사관 안에는 자신들의 상점과 은행, 호텔, 교회와 성당, 구락부, 극장과 운동장 등이 있었다. (…) 그들은 각종 연회와 무도회, 잡담과 골프 등을 통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 그들은 중국인의 풍속 습관, 언어와 감정 등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다.”(시릴 펄, <베이징의 모리슨> 중)

세계적인 중국 연구 권위자인 존 킹 페어뱅크도 저서 <차이나 워치>에서 “1900년에서 1937년 사이, 베이징에 사는 모든 영국인은 가장 최대한도의 자유를 누리며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했고, 그 부작용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 20세기 초 베이징은 서양인에게 특별히 매력적인 장소였다”고 서술했다.

아편전쟁 이후 열강의 외교특구
둥자오민샹은 원래 ‘둥장미샹’(东江米巷)이라 부르던 곳으로, 원나라 때 이곳은 운하를 이용해 남쪽에서 운반된 양식을 보관하던 세무서와 해관이 있던 장소다. 이곳에서 양식을 매매하고 거래했는데, 중국 북방에서는 찹쌀을 장미(江米)라 불렀기 때문에 이 일대 동쪽과 서쪽 골목인 둥장미샹과 시장미샹을 합쳐 장미샹이라 했다. 그러다가 명나라 때부터 이 지역에 주로 외교 업무를 하는 정부기관이 들어섰고, 1840년 청조 시대에는 회통관(会同馆)이라는 외국사절단과 손님이 주로 머무는 장소가 생겼다.

둥자오민샹이 본격적인 외교특구가 된 것은 1860년 2차 아편전쟁 이후 영국, 프랑스와 맺은 ‘베이징 조약’ 체결 뒤다. 1861년부터 1873년까지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 미국, 독일, 벨기에, 스페인, 이탈리아, 일본, 네덜란드 등 총 11개 국가가 둥자오민샹에 자국 공사관을 설치했다. 그 후 1901년, 베이징과 화북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의화단운동의 여파로 청조 정부는 제국주의 열강과 신축조약을 체결했고, 둥자오민샹은 공사관 거리로 개명됐다. 그리고 신중국이 건국되기 전까지 이곳은 ‘개와 중국인은 출입금지’가 된, 외국인과 외교관 전용 특구가 됐다. 각국은 자국민과 외교인력 보호를 구실로 군대를 파병할 권리도 있었다. 모리슨이 일기에 썼듯 그곳에는 각국 은행과 호텔, 종교시설, 병원, 각종 오락장소 등이 들어섰고 어떤 ‘불법’도 모두 허용됐다.

한 예로 1988년 화재로 전소한 ‘육국반점’(六国饭店)은 당시 둥자오민샹에서 가장 호화롭고 유명한 호텔이었다. 영국 등 6개국 자본으로 건설된 그곳에서는 각국의 스파이 전쟁과 첩보전, 요인 암살 등 모든 ‘영화 같은’ 일이 펼쳐졌고 공산주의 혁명가들에게는 피난처가 됐다. 불타버린 육국반점을 제외하고 당시 둥자오민샹 안에 세워진 거의 모든 서양식 건물과 장소는 지금까지 보존돼 ‘애국주의 교육기지’로 활용된다. 이 거리를 걷는 중국인은 치욕스러운 역사를 ‘절대 잊지 말자’고 두 주먹 불끈 쥐며 자녀들에게 ‘강한 중국만이 살길’이라고 가르친다.

해방군은 반드시 둥자오민샹 앞을 지나가라

1949년 1월31일,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한 인민해방군은 국민당으로부터 베이징을 ‘접수’한 뒤 ‘해방’을 선언했다. 2월3일 인민해방군의 성대한 베이징 입성식을 앞두고 마오쩌둥은 중요한 지침을 하달했다. “해방군은 반드시 둥자오민샹 앞을 지나가라.” 마오쩌둥은 둥자오민샹이 가진 ‘상징적 의미’를 잘 알았다. 해방되기 전 그곳은 ‘중국 속 외국’이자 중국인과 중국 군대가 들어갈 수 없는 장소였다. 마오쩌둥은 둥자오민샹을 일컬어 ‘중국인의 얼굴에 난 상처’라고 했다. 그는 반드시 철저하게 그 상처를 도려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49년 사회주의 신중국을 선포한 뒤 마오쩌둥이 가장 먼저 한 것도 바로 둥자오민샹을 ‘청소하는 일’이었다. 마오쩌둥은 신중국의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외교 방침을 발표했다. 그것은 △집 안을 깨끗이 청소한 뒤 손님을 초대하기(打扫干净屋子再请客) △구정권과 맺은 모든 외교관계와 조약을 취소하고 새로운 외교관계 맺기(另起炉灶) △사회주의 진영과 세계 평화·민주 진영 편에 서기(一边倒)였다. 이 방침에 따라 그동안 외세가 점령한 모든 건물과 주둔 병력 등을 회수하고 기존의 모든 불평등조약을 취소한다고 선포했다. 신중국의 이 방침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는 둥자오민샹 안에서 일주일 내로 모든 인력을 본국으로 철수시켜야 했다.

영국은 가장 먼저 신중국의 방침을 인정해서 철수 기간을 3개월로 연장받았다. 하지만 당시 미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버티며 오히려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서한을 보내 “신축조약 체결 뒤 미국은 둥자오민샹에 병력을 주둔시킬 권리가 있다”는 으름장을 놓기까지 했다. 서한을 즉시 반송한 중국 정부는 미국에 “너희가 주장하는 그 권리는 제국주의 시기의 불평등조약이며 지금의 신중국과 관계가 없다”면서 “당장 중국을 떠나라”라고 호통쳤다. 결국 보따리를 싸고 떠난 미국은 그 뒤 약 20년이 지난 1972년 다시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베이징으로 돌아왔지만, 그때 베이징 둥자오민샹은 이미 ‘깨끗이 청소된 뒤’였다.

어딘가 ‘제국주의 닮아가는’ 얼굴
둥자오민샹은 베이징에 사는 외국인에게는 지상천국이었지만, 중국인에게는 제국주의의 아픈 상처가 남은 곳이다. 둥자오민샹 주변에는 천안문(톈안먼)광장과 자금성이 있고, 인민대회당과 역사박물관, 첸먼 등 중국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장소와 공간이 밀집해 있다. 또한 그 일대는 중국의 영광과 몰락의 역사가 응축됐고, 재건과 부흥 그리고 21세기 강대국으로 가는 시진핑 시대 ‘중국몽’의 서사가 깃든 곳이다.

2021년 7월1일 시진핑 국가주석은 둥자오민샹이 내려다보이는 천안문 성루에 올라 ‘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 연설을 하며 “그 어떤 외세도 (강국으로 가는) 중국의 앞길을 가로막을 수 없다”고 천명했다. 마치 120년 전인 1901년 신축조약 이후 제국주의 열강의 해방구가 됐던 둥자오민샹을 향해 퍼붓는 ‘분노의 일침’ 같았다. “중국 인민은 절대로 그 어떤 외세도 우리를 괴롭히고 억압하며 노예로 만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꾀하는 자들은 14억 넘는 중국 인민의 피와 살로 만든 강철 만리장성에 머리가 깨져 피가 낭자하게 흐르게 될 것이다.”

2021년, 모리슨과 캉유웨이가 다시 베이징에 ‘상륙’한다면 그들은 어떤 인상을 받을까. 120년 전 그들이 목격한 중국은 제국주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상처투성이 얼굴을 한 불쌍하고 모멸적인 존재였다. 120년 뒤 그들이 둥자오민샹 거리에서 다시 만난 중국은 어딘가 ‘제국주의를 닮아가는’ 얼굴을 하고 있다고 느낄까. 나는 잘 모르겠다. [베이징=박현숙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