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는 아프간인들의 절규 "한국이여, 우리를 버리지 말아주오"
조선닷컴ㅣ정지섭 기자 입력 2021. 08. 16. 07:01 수정 2021. 08. 16. 10:15 댓글 723개
탈레반 집권 소식 전해진 뒤 만난 주한 아프간인들
"탈레반은 생업종사도 못하게 한 나쁜 사람들"
"썩을대로 썩은 정부가 무너져 차라리 속시원" 일갈도
"누가 집권하든 평화와 안정만 가져다주면 지지할 것"
탈레반, 2007년 샘물교회 피랍사건으로 한국과 악연도
2021년 8월 15일 한국에 거주하는 아프가니스탄인들은 지독하고 엄혹한 현대사의 아이러니에 몸서리를 쳐야 했다.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일구고 살아가는 나라의 독립기념일에 모국의 정부가 극단주의와 테러로 악명을 떨쳐온 반군에 전복되고 수도가 함락됐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가짜뉴스가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탈레반의 진군과 아프간 정부의 몰락은 전광석화처럼 이뤄졌다. 한국 주재 아프간인들에 따르면 현재 한국에는 최대 1만여명의 아프간인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코로나 대유행 이전에는 2만5000여명까지 있었다가 줄어든 숫자라고 한다.
▲ 15일(현지시각) 아프간 대통령 망명후 카불을 점령한 탈레반들이 대통령궁을 장악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결코 적지 않은 아프간인들이 비즈니스 등의 목적으로 단기 체류하거나 이주자, 혹은 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들도 다른 이슬람권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한국 이슬람 중앙성원이 있는 서울 용산구 이태원 일대를 기반으로 생활하고 있다. 카불 함락 소식이 들려진 직후 만난 두 명의 아프간인은 한숨, 절망, 분노, 일말의 기대감 등 다양한 심경을 내비쳤지만 “한국이 아프간을 외면하지 말고 도와달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한남동의 상점에서 근무하는 40대 후반의 A씨는 올해로 한국 생활 11년째인 난민이다. 아프가니스탄 인구 중 가장 인구가 많은(42%) 파슈툰족 출신이다. 지금의 가게에서 일한지는 6년차. 매 6개월마다 난민지위 유지를 위한 심사를 받아야 하는 그는 “탈레반이 오늘 카불에 입성했고, 아프간 정부가 항복의사를 밝혔다”는 기자의 말에 처음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벌써 그렇게 됐느냐”며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어제, 그제 계속 뉴스를 봐왔지만…”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그가 조국을 등지고 난민이 되도록 원인 제공을 한 주체가 바로 탈레반이다. 그는 탈레반에 대해서 “아주 아주 나쁜 사람들”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 15일(현지시각) 탈레반의 카불 입성 뒤 아프간 주민들이 황급히 피신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그는 “탈레반이 나쁜 점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생업에 종사하는 것을 막았다는 것”이라고 했다. 일을 하는 것 자체를 죄악시하며 무조건 이슬람 교리에 복종하며 살아갈 것만 강요했다는 것이다. 이어 그는 마스크를 벗고 맨 얼굴을 보였다. “보시다시피 저는 매일 아침 면도를 합니다. 그런데 탈레반은 이렇게 면도를 하는 것도 반이슬람적이라는 이유로 못하게 했어요.” A씨가 이어서 탈레반의 모습을 회상했다. “무슬림들은 하루에 다섯 차례 신께 예배를 드립니다. 나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하죠. 하지만 탈레반은 이 예배마저 집에서 하는 것은 불법이라면서 모스크에 갈 것을 강요했어요.” 탈레반 재집권에 대해 국제사회에서는 미국의 책임론도 거세게 일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의 전격 철수 결정이 탈레반에게 자신감을 심어줘 예상을 뛰어넘는 조기 정권 장악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A씨에게 “미국에 대한 감정은 어떠한가”고 물었더니 “좋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적어도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하는 동안은 서로 싸우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나 탈레반에 대한 아프간인들의 감정이 한결같지만은 않다는 것은 A씨의 상점으로 물건을 사러온 B씨의 일성(一聲)이 증명해줬다.
▲ 2021년 8월 15일 아프가니스탄 낭가르하르주에서 잘랄라바드를 장악한 탈레반 무장세력들이 깃발을 꽂고 있다. /EPA 연합뉴스
30대 초반의 그는 한국생활 9년차를 맞은 사업가로 아프가니스탄에서 두번째로 인구가 많은(27%) 타지크족 출신이다. 그는 “탈레반이 정권을 잡았는데 걱정이 되지 않느냐”는 물음에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힘을 줘 말했다. “아프가니스탄은 40년의 모진 세월을 건뎌내왔어요. 치안(Security)과 평화(Peace), 이 두 가지만 가져올 수 있다면 어떤 세력이 집권을 하든 상관이 없어요. 나는 안정과 평화를 가져오는 정권을 지지합니다.” “탈레반이 전국을 장악했는데 걱정되거나 무섭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내 고향은 마자르-이-샤리프입니다. 어제 탈레반에 넘어간 북부 지역 대도시죠. 매일 고향 가족들의 안부를 확인하는데 달라진 것은 없다고 해요. 예전처럼 평온하고요. 탈레반과 관련한 외신은 서구 시선으로 편향되거나 왜곡된 정보들도 있습니다.” B씨는 기존 아프간 정부가 전복된 것에 대해 후련한 감정까지 내비쳤다. “정부는 썩을대로 썩어있었습니다. 미국·한국·일본에서 원조하는 돈이 정부로 간 다음에 모조리 사라졌어요. 우리 고향 지방 정부도 마찬가지였어요. 부패를 일삼다 탈레반 입성이 임박하니 그들이 취한 행동이 뭐였는지 아십니까? 제일먼저 도망친 겁니다.”
B씨는 “이 사람들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며 기자의 수첩에 도망친 지방정부 지도자 두 사람의 이름을 꾹꾹 눌러쓰기까지 했다. 그는 탈레반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도 내비쳤다. “탈레반이 무조건 여성의 권리를 억압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여성 의료진과 공직자가 필요해요. 단지 이슬람 율법의 테두리 안이라면 여성의 사회생활도 허용한다는 겁니다.” 함락된 카불과 아프간 정부를 뒤로 하고 철수작전에 본격 돌입한 미국에 대해서는 “탈레반을 쫓아낸다고 들어오고, 다시 탈레반을 불러들였다. 결국 그 20년 시간이 허비된 것(wasted time)이라고 단언했다. “한국이 앞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 같냐”는 물음에 날카롭던 그의 눈매가 풀리더니 절규하듯 말했다. “한국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제발 아프가니스탄을 이대로 내버려두지 말아주세요.”
▲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이 공세를 강화하고 있는 가운데 14일(현지시각) 철수 작전이 개시된 수도 카불의 미국대사관 주변 지역의 모습. 외신은 미국 관리를 인용해 이날부터 대사관 직원의 철수가 시작됐다고 전했다. 탈레반은 미군 철수 후 대규모 공세를 펼쳐 수도 카불을 제외한 대도시를 사실상 모두 장악했다. /연합뉴스
주 아프가니스탄 한국 대사관의 철수 절차 등이 긴급 현안으로 떠오른 가운데, 한국과 탈레반의 과거 악연도 회자되고 있다. 2007년 7월 분당 샘물교회 신도들이 아프간에 선교활동을 하러 입국했다 탈레반에 납치돼 40여일동안 감금당하며 2명이 살해됐던 사건은 그 해 한국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한국이 근대 올림픽 중에 유일하게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불참한 것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인한 미국 주도 서방세계 집단보이콧의 일환이었다. 당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친소 공산 세력에 맞설 전사들의 양성을 물밑에서 후원했다. 그 전사들이 주축 세력이 돼 탈레반을 결성했고, 20년간 끈질기게 저항하다 미국에 베트남전에 이은 두번째 패배를 안겨주며 이슬람 근본주의 체제로 시계바늘을 되돌렸다.
[ⓒ 조선일보 & 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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