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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애청곡

[그리운 가곡] '그 집 앞'(1933) - 현제명 작곡, 오현명 노래

잠용(潛蓉) 2012. 10. 30. 15:35

 


(정세나 유화 작품 ‘그집앞’)

‘그 집 앞’(1933)
이은상 작시/ 현제명 작곡/ 바리톤 오현명 노래

 

(1)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띌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
(2)
오늘도 비 내리는 가을 저녁을
외로이 이 집 앞을 지나는 마음
잊으려 옛날 일을 잊어버리려
불빛에 빗줄기를 세며 갑니다.



(‘그집앞’- 바리톤 오현명 노래)

 

현제명(玄濟明, 1902~1960) -------------------------------------------

◀ 진 전주 신흥학교 교사 시절 /출처: 전주서문교회

일제강점기에서 건국 초기에 활동한작곡가로 아호는 현석(玄石)이다. 그는 1902년 12월 8일 경북 대구시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연주(延州) 현씨. 기독교 학교인 계성학교(啓聖學校)를 거쳐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특히, 성악과 피아노에 관심을 가지고 음악수업에 열중하였다. 1923년에 졸업하여 전주 신흥학교(新興學校)에서 음악교사를 역임한 뒤, 1925년 미국으로 가 시카고 무디성경학교(Moody Bible School)에 입학하였다. 이후 건음악학교(Gunn Music School)로 옮겨 1년간 수학한 뒤 귀국, 연희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9년의 귀국독창회를 비롯하여 1930년대에 주도적인 성악가로서 활동하며 빅타와 컬럼비아 레코드 등에서 자작 가곡과 이탈리아가곡 등을 취입하였다. 1933년에 홍난파(洪蘭坡)와 함께 한국 최초의 작곡발표회를 가졌으며, 1932년과 1945년에 작곡집을 발간하였다. 1950년에 우리 나라 최초의 가극 〈춘향전〉을 작곡, 지휘하고, 1958년에는 가극 〈왕자 호동〉 등을 작곡하였다. 또한, 1933년에는 조선음악가협회 창설의 주역을 맡았고, 1942년에는 후생악단(厚生樂團)을 조직하였으며, 1945년에는 최초의 본격적인 교향악단인 고려교향악단을 조직하여 1948년까지 운영하였다.

1945년에는 경성음악학교를 설립하였고, 1953년 음악인들을 규합하여 한국음악가협회를 창립하고 초대 이사장이 되었다. 1954년과 1955년에 미국 NBC교향악단의 내한공연 등을 주선하였고, 1955년 마닐라 아시아음악회의 참석과 1958년 유네스코국제음악회의 참가 등을 계기로 한국음악의 국제적 진출의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예술원 종신회원이 되었다.그리고 1960년 10월 16일 서울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간경변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9세)

그의 업적은 음악교육과 창작활동에서 두드러졌으며, 특히 연희전문학교 재직 때에는 관현악단·취주악단·합창단·중창단 등을 조직하였다. 교양과목과 특별활동의 음악부를 육성하고 이를 통해 우리 나라 양악 부문의 초석이 될 인재를 양성하여, 김성태(金聖泰)·김생려(金生麗)·이유선(李宥善) 등이 배출되었다. 한편 그가 일제강점기에 태평양전쟁에 대한 결전결의의 앙양을 위해 국민개창운동을 벌였고, 일본국민가요 보급을 위한 순회 가창지도 활동을 하는 등 친일적인 음악활동을 했다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져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대표작품으로는 가극 외에도 작곡집 제1집에 수록된 가곡 〈고향생각〉·〈산들바람〉·〈그집앞〉·〈희망의 나라로〉·〈나물캐는 처녀〉 등이 있다.
(출처: 한국민족대백과)

그는 광복 후 한국민주당 소속의 우익 음악인으로 활동하면서 서울대학교에 음악대학을 창설해 예술학부 초대 학부장을 맡았다. 그리고고려 교향악단을 창설하고 지휘자로 활동했으며, 창작 오페라를 무대에 올려 오페라 연출자로도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대한민국예술원의 종신회원을 지냈다.

그의 작품세계는 가곡에서 오페라까지 그 형식은 음악 전반을 포용하고 있다. 특히 그가 만든 곡 중 아직도 널리 애창되고 있는 <희망의 나라로>는 해방 후 진취적인 기상을 국민들에게 심어 자유, 평등, 평화, 행복이 가득한 신생 대한민국을 가꾸려는 국민적 의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그의 대표작품에 오페라으로는 <춘향전>과 <왕자 호동>이 있고, 가곡으로 <고향 생각>, <그 집 앞>, <뱃노래>, <진달래>, <바다로 가자>, <희망의 나라로> 등이 있다.대부분한국적인 소재로작곡한 그의음악은우리나라 음악 발달사에서 결코 빠뜨릴 수 없는자리에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춘향전] : 전 5막. 대본 이서구(李瑞求). 연출 유치진(柳致眞). 지휘 현제명. 출연 이관옥(李觀玉), 김혜란(金慧蘭), 이인범(李仁範), 이상춘(李想春) 등. 널리 알려진 한국의 고전 《춘향 전》을 이탈리아의 그랜드 오페라 형식에 바탕을 두고 구성한 작품으로 한국오페라의 효시이다. 1950년 5월 국립중앙극장에서 서울대학교 음대 주최로 첫 공연을 가진 후 1951년 부산 시민회관을 비롯, 작곡자와 연출자, 출연자를 바꾸어 가며 현재까지 50여 회가 넘는 공연을 하고 있다. 우리의 전래설화를 소재로 작곡에 고심한 현제명은 자신이 성악가였기에 더욱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 많은 청중을 동원한 대춘향전은 춘향과 이도령이 부르는 사랑가를 오래도록 대중에게 퍼뜨리기도 하였으며, 오페라를 통해 춘향전을 한층 사랑 받는 작품으로 굳혀 놓았다.

[왕자호동] : 현제명(玄濟明) 작곡. 전 4막 2장. 대본은 삼국사기에 실려 전해 오는 고구려의 설화를 바탕으로 하였으며 1953년 작곡되어 1954년 임원식(林元植) 지휘, 이해랑(李海浪) 연출로 서울시공관에서 초연되었다. 줄거리는 고구려의 왕자 호동이 사냥을 나갔다가 낙랑태수(樂浪太守)의 공주와 사랑을 하게 된다. 이때 낙랑에는 적의 침입을 저절로 알리는 자명고(自鳴鼓)가 있어 쳐들어가기가 힘들었는데 낙랑공주를 꾀어 자명고를 찢게 하고 군사를 이끌어 낙랑을 정복한다. 이 사실을 안 태수는 딸을 죽이고, 호동도 나라와 사랑 사이에서 번민하다가 끝내는 자살하고 만다는 비극으로 되었다. 극적 구성력과, 음악적 예술적인 면에서 수준높은 작품은 아니지만 민족오페라의 방향을 제시하고 관중에게 오페라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한 매개역할을 한 데 그 중요성이 있다.

[고행생각] : 현제명 작곡 작사. 1923년 작곡자가 미국에 유학하고 있을 때 고국을 그리워하면서 작곡하였다. 당시 일제의 지배하에 있던 민족의 슬픔과 조국에 대한 사랑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다…"로 시작되는 2절의 시에 곡을 붙였는데, 노래가 단순하면서도 품위를 지니고 있고, 아름다움과 동양적인 정적이 감돈다. 피아노 반주는[그 집 앞]과 같이단순한 밀집화음의 진행이지만 감상적인 이 곡의 악상과 너무도 잘 조화되고 있다.

[그 집 앞] : 이은상(李殷相) 작사, 현제명(玄濟明) 작곡의 가곡으로 1933년에 작곡되었다. 4분의 4박자로 느린 선율의 진행이 단조롭고 반주부도 밀집화음을 순차적으로 진행시켰지만 현제명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으며해방 이전 세대들에게 널리 불려진애창곡 중하나이다. 1933년 작곡자 자신의 독창으로 처음 발표되었는데 선율이 단조롭고 반주도 화음 위주이지만 옛날 일을 회상하는아담한 가곡이다. 이 가곡은 단조가 아닌데도 이흥렬의 <바우고개>처럼 몹시 서러움을 자아내며, 이런 성격은 한국 가곡의 거의 공통된 현상이다. 현제명의 가곡은 감상적인 것이 그 특색이다. 노래의 1절의 가사는 이렇다.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띌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

노래의 음역이 비교적 낮아 일반인들에게도 많이 불리며, 특히 여성 알토나 남성 바리톤 등 낮은 음역에서 사랑을 받고 있다. 현제명은 1930년대에 20여곡의 서정 한국가곡을 작곡하였으며, 선율이 그 시대상을 반영한듯 향수와 애조를 띠고 있다. 가곡 <그 집 앞>은 1933년 간행된 《현제명작곡집》 제2집에 수록되어 있다. (출처: http://www.koreastor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