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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민속·역사

[숭례문 미스터리] 다시 돌아온 숭례문, 3가지 미스터리

잠용(潛蓉) 2013. 1. 8. 11:50

5년 만에 돌아온 숭례문, 3가지 미스터리 <상> 현판 글씨 누가 썼나
추사도 감탄한 글씨… 양녕대군일까, 신장일까?
[중앙일보] 2013-01-01(화) 06:26:40    

 

▲ 문루(門樓)와 성곽 복구가 완료된 국보 1호 숭례문의 내부가 12월 31일 언론에 공개됐다. 문화재청은 숭례문 외부 가설 덧집 철거공사 등을 마친 후 2월 초 복원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화재로 소실된 지 5년 만이다. 사진은 숭례문 2층 내부 모습. [연합뉴스]

 

‘국보 1호’ 숭례문(崇禮門)이 2월 초 돌아온다. 2008년 2월 10일 화마(火魔)에 무너져 내린 지 5년 만이다. 문루(門樓)와 성곽 공사를 끝낸 숭례문은 한 달 후 공개를 앞두고 현재 마지막 단장에 한창이다. 그런데 우리는 숭례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달라진 숭례문의 모습과 함께 숭례문 615년 역사에 얽힌 미스터리를 3회에 걸쳐 풀어본다.

 

◇ 崇禮門(숭례문)=

조선 후기의 명필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는 자택이 있던 과천에서 한양에 올라오는 날이면 꼭 숭례문 앞을 찾았다. 숭례문의 정중앙에 걸린 현판(懸板) 글씨 석 자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며 해 저무는 줄 모르고 감탄했다고 한다. 명필도 반하게 만들 정도로, 숭례문의 현판(懸板) 글씨는 힘이 넘치면서도 자유로웠다. 조선 초 대자(大字) 글씨의 모범으로 여겨졌던 설암체(雪庵體)로 쓰여진 이 글씨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기상과 자부심을 상징했다.

 

5년 전 화재에서도 숭례문 현판은 살아남았다. 추락의 충격으로 일부 목재가 떨어져 나갔지만, 다행히 현장에서 95% 이상의 부재(部材)가 수습돼 무사히 원형을 되찾았다. 질긴 생명력으로 615년의 역사를 이어가게 된 숭례문 현판. 그러나 그 안에는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숨어있다. 수많은 궁궐 현판과 달리 숭례문 현판은 왜 세로형으로 제작됐을까, 그리고 현판에 적힌 글씨를 쓴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 보기 드문 세로형=


숭례문 현판은 소나무로 만들어졌다. 검은색 흑칠을 한 바닥판에 양각으로 글씨를 돋을새김하고 백분(白粉)을 칠한 것은 조선시대 궁궐 현판의 전형적인 제작방식이다. 하지만 3~4자로 이뤄진 현판이 대부분 가로글씨인 것과 달리 숭례문 현판 글씨는 세로로 쓰여져 있다. 조선시대 궁궐이나 도성 현판 중 세로형 현판은 창덕궁의 어수문(魚水門)을 비롯해 5건에 불과하다.

 

그 이유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은 관악산 화기설(火氣說)이다. 한양의 지세를 풍수학적으로 봤을 때 조산(朝山)인 관악산에 비해 궁궐이 있는 한강 북쪽의 지세(地勢)가 너무 약했다. 풍수가들은 예로부터 불의 산(火山)으로 불렸던 관악산의 화기가 왕이 있는 궁성을 범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 화기를 막아낼 목적으로 숭례문의 현판을 세로로 제작했다는 것이다.

 

불의 성격을 가진 글자인 례(禮)를 이름에 넣는 것으로 모자라, 불꽃이 타오르는 형상의 글자 숭(崇)을 세로로 세워 관악산의 화기에 맞섰다. 『세종실록』 세종 15년(1433년) 기록에는 경복궁의 미약한 지세를 보완하기 위해 이미 지어진 숭례문을 보다 높게 수리해야 한다는 조정의 논의 내용이 담겨 있다.

 

◇양녕대군인가, 신장인가=

▲ 화재로 파손된 현판(왼쪽)과 새롭게 복원된 모습.
 
숭례문 현판 글씨는 태종의 장남이며 세종의 맏형인 양녕대군 이제(1394∼1462)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판 자체에 글 쓴 사람의 낙관이 없고 실록 등에도 정확한 기록이 없어 신장·안평대군·정난종·유진동 등이 숭례문 현판 글씨를 쓴 인물로 꾸준히 거론돼 왔다. 그 중 주요 인물로 언급되는 이가 양녕대군과 신장, 그리고 유진동이다.

 

양녕대군은 태종의 명을 받아 경복궁 경회루(慶會樓)의 현판을 썼을 만큼 필력을 인정받았다. 고종 때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문지리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는 “정남쪽 문을 숭례문이라고 하는데, 양녕대군이 현판 글씨를 썼으며 민간에서는 남대문이라 부른다”는 기록이 있다. 19세기까지 양녕대군이 공식적인 숭례문 현판의 서자(書者)로 인식돼왔음을 보여준다. 이수광(1563~1628)이 광해군 6년(1614)에 낸 『지봉유설』(芝峯類說)에도 이 글씨가 양녕대군의 작품이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초기 문신 신숙주의 아버지인 암헌(巖軒) 신장(1382∼1433)이 숭례문 현판글씨를 썼다고 주장한 인물은 추사 김정희다. 그는 『완당전집』(阮堂全集) 제 7권에서 “숭례문 편액(扁額)은 곧 신장의 글씨인데 깊이 뼛속에까지 치고 들어 갔고…”라고 썼다. 지난해 그의 후손들이 펴낸 책 『암헌 신장전기』(태학사)에는 “숭례문 현판이 당시 조선시대 현판글씨의 전형인 설암체를 따르고 있었으며, 따라서 조선 초기 설암체의 대가였던 신장공의 글씨일 가능성이 크다”고 적혀 있다.

 

◇ 현판 교체 가능성도=

죽당(竹堂) 유진동(1497~1561) 역시 당대의 명필로 이름이 높았다. 조선후기 학자 정동유(1744~1808)가 쓴 백과사전 『주영편』(晝永編)과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1814~1888)이 펴낸 『임하필기』(林下筆記) 등에 그가 숭례문 현판글씨를 썼다는 기록이 있다.

 

이유원은 “남대문을 중수할 때 양녕대군의 사손(祀孫)인 이승보 대감이 윤성진 대감과 함께 문루에 올라가 판각을 개색한 것을 보았더니 후판대서(後板大書)는 공조판서 유진동의 글씨였다고 한다”며 “이것은 옛날 화재가 난 뒤 다시 쓴 것인가 싶다”고 했다. 다시 말해, 양녕대군이 쓴 것이 화재로 손상되면서 유진동이 고쳐 썼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유진동의 전기 『죽당 유진동』(한들출판사)은 이 기록을 토대로 “신장이 먼저 쓴 것을 양녕대군 혹은 안평대군이 고쳐 써 달았고, 세월이 지난 뒤 정난종, 유진동이 새로 고쳐 썼을 수 있다”고 추리하고 있다.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이동국 학예사는 “숭례문 글씨의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현존작품이 별로 없어 정확한 판단이 어렵다”며 “누가 썼느냐의 문제를 떠나 숭례문 현판은 조선초기 현판 글씨의 모범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5년 만에 돌아온 숭례문, 3가지 미스터리 <중> 사라진 전통 단청 안료

조선시대도 국내산 안료 부족 …  “중국·일본서 수입” 기록
[중앙일보] 입력 2013.01.03 00:22 / 수정 2013.01.03 08:10

 

▲ 지난달 31일 마무리 공사 중인 숭례문 2층 누각에서 내려다 본 서울 시내. 숭례문 내부는 조선 초기 단청의 느낌을 살려 청색과 녹색 위주로 장식됐다. 창문 위쪽의 평방(平枋·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건축 부재)에는 색을 칠하지 않고 5년 전 화마로 검게 탄 흔적을 그대로 남겨 두었다. 비극적인 화재 역시 숭례문 역사의 일부임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김성룡 기자]


단청(丹靑)은 목조건물의 옷이다. 어떤 재질의, 어떤 색깔의 옷을 입느냐에 따라 건물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2월 복원공사가 완료되는 국보 1호 숭례문은 5년 전 화재 당시에 비해 차분하고 단아해졌다. 눈에 확 띄는 강렬한 색감의 화학안료(顔料) 대신, 채도가 낮고 고풍스런 색을 내는 천연안료를 사용했다.

 

천연안료는 돌이나 흙, 조개껍데기 등을 곱게 갈아 만든다. 재료를 구하기도 어렵고, 손도 많이 가는 작업이다. 그런데 1900년대부터 서양의 화학안료가 수입되면서 국내 천연안료 제조 기술은 거의 사라졌다. 문화재 단청에도 화학안료가 사용된 지 오래다. 숭례문 단청작업에는 ‘전통기법 복원’ 원칙에 따라 100% 천연안료가 쓰였다. 하지만 국내에 관련 기술이 없어 안료 대부분을 일본에서 수입할 수밖에 없었다. “국보 1호의 상징성이 훼손됐다”는 지적이 나온 배경이다.

 

 

◇ 조선 초 분위기로 복원

숭례문 단청작업의 핵심은 조선 초기의 분위기를 되살리는 것이었다. 조선 초 양식이 많이 반영된 1963년 복원 도면을 기초로, 전남 강진 무위사 극락전과 창경궁 명정전 등 조선 초·중기 전각들의 단청을 조사했다. 청색과 녹색 위주의 수수한 색감에, 연꽃잎과 물결 무늬가 주로 쓰였다.

 

사용된 안료의 종류는 11가지. 이중 기둥에 칠하는 붉은 색 석간주(石間<7843>)와 조개껍데기에서 나온 흰색 가루 호분(胡紛) 일부를 제외하고 청색 계열인 삼청(三靑), 붉은 계열 안료인 주홍(朱紅) 등 9가지 색을 모두 일본에서 들여왔다. 접착력을 높이기 위해 안료에 섞는 아교 역시 전량 일본에서 수입했다.

 

문화재청은 우리 고유의 기술이 실종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입장이다. 최대한 국내산을 사용하기 위해 안료 전문가인 경주대 안병찬 교수팀을 중심으로 여러 차례 실험을 거쳤지만, 품질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단청작업의 총책임을 맡은 중요무형문화재 48호 홍창원 단청장은 “전통안료 제조 기술을 되살려 문화재에 사용해도 될 만큼 품질 좋은 안료를 만들어내려면 10년 이상이 걸릴 수도 있다. 숭례문 복원에 바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였다”고 밝혔다.

 

◇ 색깔 있는 돌과 흙 부족

조선시대에도 국내 천연안료 생산은 활발하지 못했다. 다양한 색깔의 바위나 흙이 부족해 뇌록(磊綠)·반주홍(磻朱紅) 등 서너 색깔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중국에서 들여왔다. 특히 붉은 색 안료 중 가장 많이 사용된 당주홍(唐朱紅)은 전량을 중국에서 수입했다.

 

실제로 『광해군일기』 광해군 9년(1617년)의 기록에는 창경궁 건설을 책임졌던 영건도감(營建都監·궁궐이나 성곽 등의 건축을 맡은 기관) 관리가 “당주홍 600근의 값을 헤아려보니 60동이나 되어 무역해 오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우리나라의 주홍으로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라고 말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조선시대 궁궐 단청의 바탕색으로 쓰인 삼청이나 삼록(三綠) 등도 중국산이었다. 『승정원일기』 인조4년(1626년) 기록에는 명나라에서 매년 삼청이나 삼록 등을 들여왔으나 다행히 비축량이 많아 올해는 사오지 않겠다고 보고한 내용이 있다. 『세종실록』 세종 11년(1429년)의 기사에도 검푸른색 안료인 심중청(深重靑)의 원석을 일본에서 들여왔으며, 화원을 일본에 보내 제조법을 배우게 했다는 대목이 있다.

 

◇ 천연안료 사용 늘려야=

예로부터 안료는 금은에 버금갈 정도로 귀한 것이었다. 화학안료가 쉽게 퍼져 나간 가장 큰 이유는 저렴한 가격 때문이다. 천연안료는 재료의 희소성에 따라 같은 색의 화학안료에 비해 10배에서 수백 배까지 비싼 것도 있다. 이번 숭례문 단청에 쓰인 안료 구입비는 약 1억 2000만원이다.

 

이번 기회에 천연안료 사용을 주요 문화재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일본의 경우 도치기현 닛코(日光) 사원과 교토의 기요미즈데라(淸水寺) 등이 지속적으로 천연안료로 단청작업을 하고 있으며 이 건축물들에 공급하기 위해 6~7개의 전통 안료 제조사가 맥을 이어가도 있다.

 

문화재청 조상순 학예연구사는 “문화재청은 외국에서 원석을 들여와 이를 안료로 제조하는 연구를 조만간 시작한다”며 “장기적으로 전통안료 제조기술을 확보하고, 그 사용 범위도 확대해나가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했다.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5년 만에 돌아온 숭례문, 3가지 미스터리 <하> 숭례문 성곽은 왜 없어졌나?
"日 왕세자 고개를…" 숭례문 성곽 헐렸다

[중앙일보] 입력 2013.01.08 00:08 | 수정 2013.01.08 06:05

 

 

조선시대 한양은 총 길이 18.6㎞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숭례문(남대문)은 외교사절 등이 왕을 만나기 위해 성 안으로 들어갈 때 통과해야 했던 한양도성(서울성곽)의 정문이었다. 그러나 동쪽으로는 남산, 서쪽으로는 소의문(서소문)으로 이어졌던 숭례문 양측의 성곽은 대한제국 말기인 1907년 헐려나간다. 이로 인해 우리 기억 속의 숭례문은 성곽을 떼어낸 깔끔한 사다리꼴의 석축(石築) 위에 2층짜리 문루가 올라선 모습으로 남아 있다.

 

2월 중 가설 덧집을 벗고 모습을 드러내는 숭례문의 가장 큰 변화는 양측 날개와도 같은 성곽의 부활이다. 문화재청은 주변 교통을 방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동측으로 53m, 서측으로 16m의 성곽을 되살렸다. 숭례문 성곽의 소멸과 부활에는 여러 이야기가 숨어있다. 1396년(태조 5년) 숭례문과 함께 완공됐던 성곽은 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까.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되돌아올까?

 

▲ 호주 사진가 조지 로스가 1904년에 촬영한 숭례문 주변의 모습. 남산으로 이어진 숭례문 동측 성곽의 모습과 주변 환경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다. 성곽과 주택가 사이에는 도성 안팎의 치안을 담당한 순라군(巡邏軍)이 밤마다 순찰을 위해 오가던 샛길이 나 있다. [사진 문화재청] 

 

◇ 일본 왕세자 맞으려 서쪽 헐어=

숭례문 성곽이 사라진 것은 1907년 10월 일본 왕세자 요시히토(嘉仁)의 조선 방문을 얼마 앞두고서였다. 당시 왕세자의 방문소식이 전해지자 일본 측이 "대일본 천황의 세자가 약소국 도성의 성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치욕스런 일"이라 주장했고, 이에 따라 서측 성벽을 헐어내 큰 길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일본 왕세자가 고개를 숙이고 홍예문으로 들어설 수 없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숭례문의 입구인 홍예문의 높이는 약 4.5m. 마차나 가마를 타고 들어갈 경우 천장에 닿지는 않지만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높이다.

 

이 설은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까. 사료에는 이에 대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일본에 대한 반감이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그러나 당시 한양을 둘러싼 성곽 중 숭례문 주변이 가장 먼저 헐렸고, 그 시기가 왕세자의 방문과 맞물렸다는 점에서 일본으로부터의 압력이 있었을 것이라는 예측은 가능하다.

 

숭례문 복구자문단으로 활동 중인 문화재전문가 윤홍로씨는 "정확한 기록은 찾기 힘들지만 당시 일본과 조선의 관계를 고려했을 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일본으로서는 이 기회에 조선왕조의 통치를 상징하는 성곽을 없애고, 자신들의 방식으로 근대화를 추진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전차 사고도 많아=

『고종실록』 고종 44년(1907년) 3월 기록에는 의정부 참정대신(參政大臣) 박제순 등이 고종 황제에게 숭례문 좌우 성곽을 8칸씩 헐자고 요청하는 내용이 나온다."숭례문 주변에 사람들이 붐비고 수레와 말 등이 복잡하게 드나들며, 전차가 그 복판을 가로질러 다니기 때문에 접촉사고가 많이 일어난다"는 것이 이유다. 이어 같은 해 6월에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등이 흥인지문(동대문)과 숭례문 주변의 나머지 성곽마저 모두 헐어버릴 것을 왕에게 청해 허락을 받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앞서 1899년 5월에는 돈의문(서대문)에서 흥인지문을 거쳐 청량리로 향하는 전차가, 12월에는 종로에서 숭례문을 거쳐 용산으로 향하는 전차가 개통됐다. 홍예문을 지나는 전차와 마차, 사람들로 숭례문 주변은 혼잡했다. 이에 따라 1907에서 1908년 사이 숭례문과 흥인지문의 양쪽 성곽이 헐렸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성곽 철거가 본격화돼 1913년 남산과 장충동 사이 성곽을 시작으로 한양도성의 성곽들이 차츰 사라지게 된다.

 

◇ 서울의 원형 살려야=

숭례문 성곽 복구공사는 2008년 화재 이전부터 계획돼 있다가 복원공사와 함께 본격적으로 시행됐다. 공사에 쓰인 1362m³(석축 복구공사분 포함)의 돌은 대부분 경기도 포천에서 캐 온 화강석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1900년대 초반 숭례문 사진 등을 참고해 높이는 4~6m로 쌓았고, 위쪽으로 갈수록 돌의 크기가 작아지는 축조 형식도 그대로 살렸다.

 

공사를 책임진 중요무형문화재 제120호 이의상 석장은 "남아있는 서울성곽의 돌과 포천에서 캔 돌의 성분은 95% 이상 일치한다. 성곽 복원은 성벽으로 둘러싸였던 서울의 원형을 살리는 중요한 작업"이라고 말했다.

성곽 복원 외에도 1963년 숭례문 해체·복원공사에서 짧아졌던 용마루(건물의 지붕 중앙에 있는 마루)의 길이를 0.9m 늘려 원형대로 바로잡았다.

 

1층 문루 지붕 위의 잡상(雜像·나쁜 기운을 물리치기 위해 기와지붕의 추녀마루 위에 놓는 흙인형)도 '잡상은 홀수로 놓는다'는 조선시대 원칙에 따라 8개에서 7개로 줄였다. 화재 방지를 위해 숭례문 내 외부에 불꽃감지기(16개)와 열감지기(총 길이 200m), 스프링쿨러(헤드 140여개)와 CCTV 12대 등도 설치된다. [이영희 기자misquic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