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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애청곡

[유성기 가요] '가거라 초립동' - 이화자 노래

잠용(潛蓉) 2013. 1. 16. 13:30

 

"가거라 草笠童" (1941)
趙鳴岩 작사/ 金鈴波 작곡/ 노래 李花子
(앨범/ 1945년.5월 오케레코드 밞매 31027 SP)
(사진/ 혜원 신윤복 풍속도의 '초립동'- 가운데 붉은 옷 입고 초립을 쓴 젊은이)

 

< 1 >
어리광도 피웠소
울기도 하였소
紅甲紗 댕기를 사달라고
졸라도 보았소

아리 살짝궁 응응응
스리스리 응응응

聞慶 새재 넘어간다
草笠童이 아저씨
떠나간다

간다간다 응석쟁이
간다간다 草笠쟁이
아저씨 떠나간다~

< 2 >
가지 말라 잡았소
發狂도 부렸소
고무신 한 켤레 사달라고
응석도 부렸소

아리 살짝궁 응응응
스리스리 응응응

聞慶 새재 넘어간다
草笠童이 아저씨
떠나간다

간다간다 草笠쟁이
간다간다 草笠쟁이
아저씨 떠나간다~

< 3 >
路資 돈도 뺏었소
봇짐도 뺏었소
嶺 넘어 五百里 가는 사람
신발도 뺏었소

아리 살짝궁 응응응
스리스리 응응응

聞慶 새재 넘어간다
草笠童이 나를 두고
못 떠나요

못가못가 草笠쟁이
못가못가 草笠쟁이
날 두고 못 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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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로 듣는 옛노래] '초립동(草笠童)'에 얽힌 사연 ①
'서민의 恨 서린 문경새재 노래를 배경으로'

충청투데이ㅣ2006년 08월 04일 (금) cctoday@cctoday.co.kr

 

(이화자 1915~1950)

초립동(草笠童)
조명암 작사/ 김영파 작곡/ 노래 이화자 

<1>
어리광도 피였소 울기도 하였소
홍갑사 댕기를 사달라고 졸라도 보았소
아리살짝쿵-응- 스리스리-응
문경새재 넘어간다 초립동이 아저씨 떠나간다
간다간다 초립동이 간다간다 초립동이 아저씨 떠나간다

<2>
가지 말라 잡았소 발광도 부렸소
고무신 한컬레 사달라고 응석도 부렸소
아리살짝쿵-흥- 스리스리-흥
문경새재 넘어간다 초립동이 아저씨 떠나간다
간다간다 초립동이 간다간다 초립동이
아저씨 떠나간다

<3>
노자돈도 뺏었소 봇짐도 뺏었소
영(嶺) 넘어 오백리 가는 사람 신발도 뺏었소
아리살짝쿵-흥- 스리스리-흥
문경새재 넘어간다 초립동이 나를 두고 못 떠난다
못가못가 초립동이 못가못가 초립동이 날두고 못떠나요

 

'초립동' 이 노래는 1941년 5월 OK레코드사에서 조명암 작사, 김영파 작곡으로 이화자가 불러서 크게 히트한 또 하나의 명곡으로 알려진 노래다. 이 노래는 원제목이 '가거라 초립동'으로 발표됐다가 다시 '초립동'으로 제목을 바꿔 지금까지 널리 애창되고 있는 노래다. 처음에 이화자가 이 노래를 불러서 세상 사람들이 "이화자는 노래에는 신과 같은 여자"라고까지 그녀를 높이 평가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노래다. 그리고 이 노래는 현장감이 넘치는 가사로서 당시에 가요팬들은 이 노래를 듣고서 노래 가사에 나오는 지명을 알게 됐다.

당시에는 작가들이 특수한 곳을 찾아다니며 그곳에서 느끼는 감동을 받아 작사가들은 그곳을 배경으로 노래 작사를 많이 했다. 지금도 지명과 지역의 노래를 배경으로 하여 작사를 하지만 그 당시와 같이 가요 팬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질 못한 예가 많다. 필자도 여러 곳의 지명을 배경으로 하여 작사·작곡도 했지만 그렇게 좋은  반응을 얻질 못했다. 그러나 이 노래 '초립동'에 나오는 노래 가사 '문경'이라는 곳은 그만치 노래로서 국민들에게 알릴 만한 곳이다. 그래서 문경에 대한 노래 가사가 탄생하지 않았나 생각을 하게 된다.

문경이라는 곳은 원래는 경상북도 문경군이었다. 그러던 곳이 행정개편으로 인하여 지금은 문경시로 승격이 된 곳이며 이곳에는 여러 가지 사연들이 많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문경은 지역이 부분적으로 평야를 이루고 있으며 시내는 높은 산들이 뺑 돌아가며 병풍과 같이 시내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지형이기도 하다. 특히 문경새재는 해발 642m의 높은 산이다. 조선시대에는 영남 사람들은 이 길을 통하여 과거를 보러 서울로 가는 아주 중요하고 큰길이였다.

다시 말한다면 이 길은 영남사람들이 전용으로 다니는 전용 도로라고도 할 수 있는 길이다. 꾸불꾸불한 길을 따라 새재를 올라가려면 보통 힘든 길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빼곡하여 길 옆에 사람이 숨어 있어도 잘 보이질 않았다. 그런 산길이다 보니 산적들이 없을 리가 있으랴. 그래서 산적들에게 당하지 않으려면 산 밑 주막에서 술 한 잔씩 마시면서 서울가는 사람들을 기다리다 서울가는 사람들이 4-5명 정도 모여지면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술 한 잔씩을 주고 받으면서 그곳 문경새재에서 일어났던 지난날에 산적들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하며 대화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일 처음 만났지만 그날만은 서로 간에 오랫적 친구같은 감정으로 이들은 친해진다. 이렇게 만난 사람들은 문경새재를 넘어간다. 이렇게 사람의 숫자가 많을 땐 산적들도 감히 이들에게 덤벼들지를 못하고 오히려 사람들을 피하여 산 속으로 숨어버린다.

그러나 이것은 이날 문경새재를 잘 넘어간 운 좋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또 그와 반대로, 서울로 가는 사람이 없을 때는 문경새재를 넘질 못하고 같이 갈 사람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그러다 보니 해는 넘어가고 같이 갈 사람이 없을 때면 주막집에서 하룻밤을 자게 된다. 그리고 그 이튿날도 역시 서울 가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이렇게 기다리다가 서울 가는 사람이 한 사람 한 사람씩 모이게 되면 앞에서 이야기 하듯이 새재를 넘게되는 무척 험한 산길이였다.

그러다 보니 문경새재를 넘기 전에 으레히 그 산 밑에 주막에서 술도 먹고 때에 따라서는 그곳에서 하룻밤을 유하게 됨은 당연한 일이였다. 문경새재는 이렇게 험한 산길이며 영남에서 서울로 가려면 이렇게 어려운 고비를 겪게 되는 산길이다. 당시에는 앞에서 밝혔듯이 이 길이 아니면 다른 길을 선택해야 되지만 다른 길로 서울을 가게 되면 몇 곱절 돌아서 가게 되니 쓰나 다나 할 수 없이 문경새재를 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당시에는 필자가 말했듯이 문경새재는 그렇듯 우여곡절도 많았던 고갯길이다. 지금이야 사방으로 길이 나 있으며 또한 교통수단이 발달하였고 자동차 문화가 좋은 시절이라 문경새재를 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당시를 생각해 볼 때 얼마나 넘기 어려운 산길이며 또한 얼마나 험한 길인지는 이해가 갈 것이다. 그 당시 우리 선인들을 생각할 때 과거를 보러 서울로 갈 때 꼭 문경새재를 넘어야만 하는 어려움 때문에 평소보다 며칠 앞당겨서 집을 나서야 되는 어려움이 따랐다.

그래야만 가다가 피로하면 쉬었다 가며 앞에서 밝혔듯이 문경새재를 넘지 못할 때는 새재 밑 주막에서 며칠 밤을 투숙하면서 서울가는 사람이 모이면 그때에야 산을 넘게되니 집에서 출발을 앞당길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특히 이 길은 영남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넘게되며 이 길이 아니면 다른 길로 가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래서 이 고개 문경새재는 영남에서는 '청운(靑雲)의 고개'라고 하며 과거에 낙방하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는 '한(恨)의 고개'라고도 불렀다.

[글: 김명환/ 한국가요작가협회 작사·작곡가 kmh4647@yahoo.co.kr]

 

[이야기로 듣는 옛노래] '초립동(草笠童)'에 얽힌 사연 ②
'문경새재 넘어 움트는 슬픈 사랑' 
[충청투데이] 2006년 08월 11일 (금) cctoday@cctoday.co.kr

 

이렇게 문경새재는, 아니 조령(鳥嶺)으로도 불리는 이 고개는 우리들이 꼭 알아야 할 역사적인 고개다. 수많은 과객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웃으면서 이 고개를 넘어 서울로 갔다가 과거에 낙방하여 돌아오는 사람들에게는 한이 담긴 슬픔의 길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이 고개에 대해 여러가지 한맺힌 구전 민요들이 탄생하기도 한 고개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곳에는 구전민요인 노래비도 건립하여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눈길을 끈다.

 

이러한 문경새재를 우리 가요작가들이 그냥 넘어갈 리가 있으랴? 그래서 '초립동(草笠童)'이라는 노래가 탄생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런 험한 산길이 지금 우리들에게 좋은 신민요로서 '초립동'이라는 노래를 소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노래를 부른 이화자(李花子)는 당대 신민요가수로서 '화류춘몽'에 이어 또다시 히트를 친 노래가 되었기에 문경새재는 우리들에게 더욱 좋은 전설과 애절한 노래를 듣게 하는 것이다.

 

특히 이화자의 애절한 음색으로, 듣는 사람들에게 현실감이 강하게 다가와 지금도 우리들이 잊지 못하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문경새재는 당시에는 참으로 험한 산이었다. 필자가 험하다고 표현함은 산이 나빠서 험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산이 높고 굽이가 많다 보니 당시의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는 데 그만치 어려움이 뒤따랐기에서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고개를 넘는 데는 앞에서 밝혔듯이 산적이 간혹 출현하여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들을 위협하고 돈을 뺏는 등 각종 범행으로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고개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문경새재를 넘어야 할 선비나 또는 장사꾼들은 공포감에 떨면서 새재를 넘게 된다. 그래서 혼자는 이 고개를 넘는 일은 흔치 않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여러 사람이 모여서 떼를 지어서만 넘을 수가 있는 것이었다.

 

이처럼 산적 때문에 고개를 넘기가 어려운 시대에 '초립동'이란 노래가 탄생하여 공포감에 빠져 있던 사람들은 다소나마 안정감을 찾게 했다. 이 노래가 발표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가자 그렇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문경새재가 더욱 명성을 얻게 됨은 물론이요 말로만 듣던 산적들이 존재했던 사실을 알게 되였다. '초립동'이란 노래가 탄생한 것은 1941년 5월에 OK레코드회사에서 발표가 됐다. 이 노래는 당시 문경새재가 높고 꼬불꼬불한 굽이가 많다 보니 작가들이 보는 시적인 영감이 떠오르게 됐으며 또 산 밑에 는 주막들이 많이 있다 보니 거기에서 낭만적인 사건들이 머리에 떠올라 '초립동' 같은 가사가 나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초립동(草笠童)이란 뜻은 풀초자, 갓입자, 아이동자로 글자 그대로 해석된다. 초립은 당시에 머리에 쓰고 다니던 모자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자를 쓰고 다니는 사람은 장사꾼이 아니면 평민들이 많이 쓰고 다니는 모자였다. 그리고 양반들은 갓을 쓰고 다니던 시절이다 보니 이 모자의 뜻을 잘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이 노래에 나오는 초립동이란 장사하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여 노래가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당시 주막집에서는 으레 직업여성들을 고용하여 술을 팔던 시대였다. 그래서 화류계 여성들이 손님을 시중들며 접대를 할 당시였다.

 

화류계 아가씨는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 남자와 헤어짐이 아쉬워서 남자를 붙잡고 못 가게 사정을 하는 아주 순진한 여인의 마음을 그린 작품이 '초립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구체적으로 초립동이 노래를 설명하자면 남자는 장사꾼인 노총각이였으며 여자는 앞에서 밝혔듯이 술집 화류계 여자다. 이 두 사람은 하룻밤 풋사랑으로 인연을 맺고 총각은 그 주막을 떠나서 서울로 장사를 하러 가야 할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화류계 여자는 그 총각을 놓아주기가 싫어서 못 가게 애원하며 붙잡는 그 안타까운 여심을 잘 묘사한 노래다. 노래가사를 살펴보면 '어리광도 피웠소 울기도 하였소 홍갑사 댕기를 사달라고 졸라도 보았소 아리살짝쿵-응-스리스리응-응 문경새재 넘어간다 초립동이 아저씨 떠나간다 못가못가 초립동이 못가못가 초립동이 아저씨 떠나간다'

 

이 노래가사에서 보듯이 여인의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묘사를 한 노래다. '홍갑사 댕기를 사달라고 졸라도 보았소' 이 얼마나 여자의 솔직함을 잘 표현한 것인가? 얼마나 한 남자, 그러니까 노총각을 사랑했는지는 알 만한 일이다. 거기에다 이화자의 떨리면서 애띤 목소리에 흐느끼는 바이브레이션 하며 살짝 꺾어 넘기는 그야말로 숨막히는 그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자신도 모르게 숨이 멈추는 감을 실감할 것이다.

 

그리고 '못가못가' 떼 쓰는 한 여인의 애절한 호소는 현실적인 감정을 못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치 초립동(草笠童) 노래는 우리들에게 크나큰 감동을 준 노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초립동이 아저씨 떠나간다에서 떠나간다는 이 대목에서는 한숨과 눈물이 겹쳐서 잠시 멈췄다가 콧소리로 살짝 꺾는 데에서 우리의 가슴을 찡하니 울려주는 대목이다. 아니 어쩌면 노래를 듣는 사람의 심장을 잠시 멈추게 하는 대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글: 김명환/ 한국가요작가협회 작사·작곡가 kmh4647@yahoo.co.kr]

 

[이야기로 듣는 옛노래] '초립동(草笠童)'에 얽힌 사연 ③
'슬픈 이야기들이 잠든 문경새재'
[충청투데이] 2006년 08월 18일 (금) cctoday@cctoday.co.kr

 

이렇게 사람의 애간장을 녹이는 이화자의 목소리는 우리들 가슴을 촉촉하게 적시는 데 활력소라고나 해야 될까? 이것뿐 아니다. 아리 살작쿵-응 스리스리-응 여기에서는 이화자의 특이한 비음을 섞어서 살짝 꺾어 넘기는 목소리는 가슴이 간질간질하면서 듣는 사람의 마음을 또 한번 울려준다. 이렇게 이화는 노래를 자유자재로 부르며 가사와 곡조에 따라서 그녀의 노래는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가 없을 정도로 그녀만의 특이한 노래 철학이 있다. 그만치 이화자는 신민요에 있어서는 아주 대단한 창법을 가지고 있는 가수다. 지금 이 시대에는 이러한 가수가 나올 수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가수였다. 그러기에 이화자는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었어도 우리는 그녀를 잊지 못하여 다시금 그녀를 아쉬워 하는 것이다.

 

물론 민요가수는 많았지만 그녀를 따라갈 가수는 지금껏 한 사람도 발굴되지 않았다. 필자의 생각에는 앞으로도 이화자와 같은 가수는 없을 걸로 생각한다. 그만치 그녀의 노래 실력과 목소리는 대단한 가수였다. 지금도 그녀가 부른 노래는 황금심(黃琴心)이 독점하다시피 불러 사랑을 받고 있다. 필자가 대전MBC 문화방송에서 김명환의 추억의 가요프로에서 방송을 할 때다. 이화자의 노래화류춘몽을 방송한 적이 있었다. 이날 방송을 하면서 이화자의 지난 세월을 해설하다가 나도 모르게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것은 이화자가 아깝게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남을 생각할 때가슴이 뭉클하여 눈물이 흘렀던 것이다. 지금도 필자는 이화자를 생각하면서 이 글을 쓰는 심정은 그리 좋지가 않다. 누가 하던가 이화자는 그의 업적을 다시 재조명 할 필요가 있기에 필자가 이렇게 그녀에 대해 나름대로 아는 데까지 밝히는 것이다.

 

가수 이화자는 35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했어도, 그녀의 생에서 남긴 주옥 같은 노래들은 아직도 우리들에게 남아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녀의 목소리는 영원히 남아 후세대 가요팬들에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이화자는 그 구슬픈 목소리가 어찌보면 그녀의 운명을 슬프게 하지 않았나 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시 말하면 이화자는 이러한 목소리가 그녀를 비극으로 몰고 갔고, 이는 결정적인 신의 계시라 한다. 이 말은 무슨 근거가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도 청승맞다 보니 이러한 말들이 무성했던 것 같다. 이화자는 '초립동이'를 불러서 또 한번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게 된 것이 그녀의 타고난 목소리로 인한 것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초립동이란 노래에서 우리가 확인했듯이 그 얼마나 노래가 애절한 것인지는 이 노래를 들어 본 사람이라면 이화자의 노래철학을 잘 알 수가 있을 것이다.

 

특히 초립동[草笠童]이란 노래에서 더욱 그녀의 노래를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한 초립동[草笠童]을 사귀고서 그 남자를 보내는 것이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가지 말라고 붙잡고 애원하는 한 여인의 안타까운 심정을 거짓없이 토해내는 현실감 있는 이화자의 목소리를 누구가 감히 흉내낼 사람이 있단 말인가?

 

이 노래 2절에서는 가지말라 잡았소 발광도 부렸소 고무신 한켤레 사달라고 응석도 부렸소 아리살짝 쿵 응-스리스리 응-문경새재 넘어간다 초립동[草笠童]이 아저씨 떠나간다 간다간다 초립동이 아저씨 떠나간다. 이렇게 이화자는 흐느끼는 감정으로 노래를 불렀다. 사실 노래이지만은 현실과 너무나 똑같은 심정으로 이 노래를 소화했다. 당시 우리네 삶은 고무신 한 켤레를 마음 놓고 사서 신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였다. 그만치 우리는 가난한 생활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어려운 생활을 하다 보니 짚신이 아닌 고무신이라는 신발은 감히 사서 신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다시 말한다면 '그림의 떡'이라고나 할까? 그만치 우리 조선 민족들은 가난을 면치 못하고 그날그날 품팔이로 먹고 살기가 바빴다. 이런 시대이다보니 고무신이라는 존재가 대단했던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초립동이라는 노래도 고무신에 대한 동경심을 그린 노래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무신을 사달라고 졸라대는 것이다. 그만치 당시에는 고무신이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는 시대였다고나 할까?

 

아무튼 가난한 사람은 견이불식(見而不食)이다. 그래서 초립동이란 노래가 더욱 우리들에게 기억에 남게 되는 것일 줄도 모른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문경새재를 올라가기 전에 산 아래 주막집에 묵으면서 길손들이 모이기만을 기다리며 주막에서 잠을 자고 서울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주막집에는 아가씨들을 많이 고용하고 술을 팔았다. 이러다 보니 돈푼이나 있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아가씨와 사랑놀음에 세월 가는 줄도 모르고 흥청망청 놀아나다가 돈이 떨어져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는 일도 흔히 있었다. 특히 과거를 보러 서울로 가던 선비들도 이러한 일들은 예외가 아니였다. 그래서 술집에 인질로 잡혀서 심부름을 하면서 지내는 웃지 못할 일들도 있었다고 하니 참으로 양반의 꼴은 꼴이 아니였다고 하니 당시를 알 만할 것이다.

 

이렇게 술집에서 심부름을 하던 양반은 체통을 지키기 위해서 집에 알리지도 않고 외상값만큼 한 일년 머슴살이를 하다가 외상값을 다  때웠다 싶으면 겨우 빠져나가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치 못한 선비들은 염치를 무릅쓰고 고향집으로 사람을 보내 돈을 가지고 와서 술값을 갚아주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니 이 얼마나 웃지 못할 노릇인가? 이렇게 패가망신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런 것쯤이야 하는 배짱이 있었나 보다.

 

하기야 영웅호걸들은 주색을 좋아한다고 했던가? 아무튼 여자와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양반들만이 특허를 내어 행동하는 것은 아닌가 보다. 보통 사람들도 일년을 머슴살아 뼈빠지게 일을 해서 쌀 몇 가마 받아가지고 아가씨와 하룻밤 유흥비로 없애는 사람들도 있으니 술과 여자는 어찌보면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초능력을 가진 보이지 않는 힘이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알듯말듯 하는 것이 여자와 술이라고나 해야 하는 것인지 아무튼 술과 여자는 그냥 그렇고 그렇다고나 할까?

[글: 김명환/ 한국가요작가협회 작사·작곡가 kmh4647@yahoo.co.kr]

 

[이야기로 듣는 옛노래] '초립동(草笠童)'에 얽힌 사연 ④
화류계 여성, 애인 붙잡으려 몸부림
[충청투데이] 2006년 08월 25일 (금) cctoday@cctoday.co.kr

 

떠나는 남자 신발 감추고 … 눈물로써 애원
하룻밤 풋사랑 짧은 행복 여인에겐 고통으로 남아
후배가수 황금심이 다시 리메이크해 히트하기도

 

이러한 일들은 꼭 문경새재만을 지적해서 하는 말은 아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은 어디서든지 흔히 볼 수 있는 일들이다. 다시 말한다면 높은 산 밑에 길이 있으면 으레히 주막이 있으며 그 주막집에는 아가씨가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길손들은 술도 먹고 객고도 풀고 하는 것이 당시의 우리네 삶의 한 부분이었다.

 

이렇게 낭만이 풍부한 세상이지만 먹고 사는 데는 가난과 싸워야 하는 상반된 우리네 인생살이였다. 초립동(草笠童)이 노래가 당시의 참된 사랑에 대하여 아무리 몸을 파는 화류계 여자라고 하지만 그 나름대로 그 여인도 순진하고 소박한 여인의 참된 사랑이 있기에 무정하게 떠나는 초립동이를 붙잡고 가지 말라고 애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여자의 아름다운 마음을 속이지 않고 솔직하게 사귀다 떠나는 그 사람을 붙잡으려고 응석도 부리고 하소연도 하며 신발까지 감추고 애원하는 그 여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것뿐이 아니다. 남자를 못 가게 하기 위해서 노자돈도 뺏었소 영[嶺]넘어 오백리 가는 사람 신발도 뺏었소 아리살짝쿵 응-스리스리 응-문경새재 넘어간다 초립동이 나를 두고 못 떠난다 못가 못가 초립동이 못가못가 초립동이 날 두고 못 떠난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장면이란 말인가? 이처럼 한 여인의 슬픈 마음을 모르는 채 뿌리치고 떠나는 사람은 이 여인의 가슴에 크나큰 대못을 박고 떠나는 것이다.

 

아무리 화류계 여인이라고 할지언정 그들도 사랑도 있고 순정도 있었건만 화류계라는 직업 때문에 하룻밤 풋사랑으로 짧은 행복을 누리고 날이 밝으면 떠나버리는 무정한 사나이들 아니 하룻밤 달콤한 유혹으로 사랑을 하고서 나몰라라 하고 헌신짝 버리듯이 차버리고 떠나는 무정한 사람을 붙잡고 가지 말라고 애원하는 이 여인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생각을 안 할수가 없다.

 

몸은 비록 화류계[花柳界]지만 마음까지도 화류계란 말인가? 이 얼마나 안타까운 여인의 심정이란 말인가? 이것도 모르는 사나이들을 얼마나 원망하며 또 원망했으랴? 이런 것들이 화류계의 사랑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화류계 여인의 숙명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안타까운 이야기다. 문경새재는 이런저런 슬픈 이야기들이 잠든 고개이다. 그 숫한 이야기들이 구전민요에서부터 신식 유행가로까지 스며들어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 당시에는 영남 사람들이 서울을 가려면 문경새재를 넘어야만 가기 때문에 여러가지 사연들이 많이 생긴 고개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은 교통수단이 많이 발달하여 문경새재를 자동차로 왕래를 한다. 이렇게 교통이 발달되자 그 옛날에 아름다운 전설들이 하나씩 하나씩 잊혀져 가는 것이 너무도 아쉬웁고 그리워진다.

 

문경시에서는 그 옛날에 아름다웠던 전설과 기록들을 되살리는 데 온갖 정성을 다 쏟고 있다. 그리고 지금의 문경새재는 그 옛날 전설 못지않게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마음으로 지난 날에 묻혀서 발굴하지 못했던 유적들을 찾아서 다시 발굴하며 새로운 유적들을 잘 다듬어가고 있다. 그리고 문경새재는 험준했던 준령들이 지금은 아주 편리하게 잘 다듬고 가꾸고 있다.

 

문경새재는 조선시대에 영남사람들이 과거를 보러 서울을 가려면 문경새재를 꼭 넘어야만이 서울을 가게 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을 하자며는 선비들이 장원급제의 희망을 안고 넘던 장원급제의 길이기도 했다. 조선 초기에는 관료들과 양반들만이 넘어다니던 길이기도 했다. 그래서 지체가 낮은 서민들은 문경새재의 길을 꼭 한 번 걸어서 넘어보고 싶었던 동경의 고개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신립 장군이 이곳에서 왜군들을 막지 못해서 천추의 한을 남긴 한 많은고개이기도 하다.

 

문경새재는 해발 642m이며 총 길이가 10km이다. 문경새재는 조선시대 태종 때부터 문경새재길이 본격적으로 관로로 이용되기 시작했으며, 훗날 보부상도 다녔으며 산적들이 기승을 부렸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일제로부터 외침에 대비하여 세 개의 관문을 두었다. 제1 관문과 제2 관문 그리고 제3 관문을 관광하는 시간은 약 3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그리고 문경새재는 볼거리가 많으며 또한 교통편이 여러 갈래로 통하여 한번쯤 가볼만한 곳이기도 하다.

 

문경시에 들어가면 문경새재로 가는 길이 깨끗해서 좋다. 그리고 새재 밑에 도착하면 그곳에서부터 볼거리가 눈에 띈다. 거기서부터 쭉하니 문경새재 방향으로 가면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좌우 경치를 보면서 관광하면 더이상 좋은 곳은 없을 것이다. 특히 이곳에 가면 2000년도에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던 KBS드라마 <태조 왕건>의 촬영장소에 들려서 촬영했던 세트장도 감상할 수 있다. 그곳을 들러보고 제1 관문 제2 관문 제3 관문 등 두루 구경하다보면 느낌도 새롭고 아이들에게도 유익한 곳이 아닌가 싶다.

 

앞에서도 필자가 수차례 언급했듯이 유행가는 그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므로 작가들은 빼놓치 않고 노래로서 기록을 한다. 그리고 그 기록은 작곡가에 의해서 곡이 붙여지고 그 곡에 맞는 가수를 골라서 노래를 발표하게 된다. 그러기에 문경새재도 예외는 아니다. 산세가 수려하고 아름다우며 또한 산 밑에 주막이 있다 보니 그것이 작사가에게 느낌을 주게 되어 초립동이란 노래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 노래는 지금도 후배가수들이 리바이벌 하여 음반을 내놓고 있는 노래다. 특히 이화자가 부른 노래는 황금심이 다시 불러서 히트된 노래도 많다. 이화자는 세상을 떠났어도 그의 노래는 남아서 지금껏 우리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인생은 짧아도 예술은 길다고 했던가?

[글: 김명환/ 한국가요작가협회 작사·작곡가 kmh4647@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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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화자(李花子 1915~1950)- 경기도 부평출신으로 본명은 이원재. '민요의 여왕으로 불렸다. 1936년 '섬시악씨'로 데뷔하여 '꼴망태 목동', '목단강 편지', '어머님전 상백' '화류춘몽' 등 일제 말기에 많은 힛트곡을 남겼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는 마약 등으로 건강을 해쳐 35세로 요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