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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불교·죽음

[불교전래] '한국 불교의 전래(372년)와 이차돈의 순교

잠용(潛蓉) 2013. 5. 31. 11:34

한국의 불교 전래와 이차돈의 순교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2년)

 

(통일신라 때 이차돈의 순교로 세워진 최초의 불교성지 경주 흥륜사터)

 

한국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 6월 전진(前秦)의 왕 부견이 순도(順道)스님을 통해 불상과 경전을 보내오면서부터다. 고구려에서는 이때 성문사(省門寺)를 지어 순도를 머물게 했으며 다시 2년 뒤에 아도(阿道)스님이 오자 이불난사(伊佛蘭寺)를 지어 머물게 했다. 《삼국사기》고구려 본기에 있는 이 기록은 한국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된 것을 말해 주는 최초의 기록이다.

 

백제에는 침류왕 원년(384년)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으로부터 배를 타고 건너왔다. 《해동고승전》은 이때 왕이 몸소 교외에까지 나가 마라난타를 맞았으며 궁중에 초청해 공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같은 사실들은 고구려나 백제가 국가적 차원에서 불교를 받아들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초기 사찰들이 거의가 흥국(興國)․흥복(興福)의 사명(寺名)을 보이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신라의 경우는 고유신앙의 반발 등 약간의 난관을 거쳤으나 법흥왕 14년(527)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계기로 왕실을 중심한 귀족들이 불교를 받아들임으로써 어려움을 쉽사리 극복할 수 있었다. 고구려․백제․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뒤 한국의 고대 불교는 찬란한 황금기를 구가했다. 전국 곳곳에 사찰이 세워지고 국왕으로부터 일반 민중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불교를 신앙했다. 승려들은 중국이나 인도로 유학을 가서 불교의 깊은 뜻을 공부했으며 한편으로는 일본으로 건너가 불법을 전해주었다. 중국으로 유학을 간 승려들 가운데는 중국승려들을 제자로 가르칠 정도로 뛰어난 사람도 있었다.

 

고구려의 승랑(僧郞: 413~491)은 중국에 가서 구마라습 계통의 삼론학(三論學)을 연구하고 이를 더욱 체계화시켰다. 중국의 무제(武帝)는 중국승려 10명을 뽑아 그가 거주하는 섭산(攝山)에 보내 학문을 계승하게 했다. 또한 신라의 왕손인 원측(圓測: 613~696)은 15세에 중국으로 건너가 범어․서장어 등 6개 국어를 통달하고 유식학(唯識學)을 깊이 연구하여 존경을 받았다.

 

신라의 의상(義湘: 625~702)도 당에 유학해 화엄학을 깊이 연구하여 방대한 화엄사상을 법계도(法界圖)에 간략하게 요약해 스승을 놀라게 했다. 그는 나중에 귀국해 신라 화엄사상을 크게 선양했다. 의상(義湘)보다 앞서 선배인 자장(慈藏)․원광(圓光)광 같은 신라의 고승들은 호국신앙과 현세이익사상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 불교가 한국사회에 정착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신라에서는 '이 땅이 곧 불국토(佛國土)'이기 때문에 호국(護國)이 호법(護法)이라는 불연국토사상(佛緣國土思想)이 깊게 뿌리내림으로써 불교는 국가의 보호아래 화려하게 발전할 수 있었다. 또 혜숙(惠宿)․대안(大安)․혜공(惠空)․원효(元曉)와 같은 신라의 고승들은 민중 속에 직접 파고들어 그들과 호흡을 같이하면서 교화에 힘씀으로써 불교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불교정착기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인물은 한국불교사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를 차지하고 있는 원효(617~686)다. 그는 99부 2백 40권이라는 방대한 저술을 남긴 사상가로서 원효는 당시 중국의 불교가 경론(經論)을 중심으로 한 종파가 생겨 자기 종파의 입장만 고수하려는 경향에 대해 일대비판을 가하고 불교 본연의 일미(一味)로 귀일시키려는 화쟁불교(和諍佛敎)를 제창했다.

 

그가 쓴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을 비롯한 많은 저서들은 중국불교에서도 자주 인용했을 정도다.

669년 신라 한반도를 통일하고 917년 고려왕조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2백 50년이라는 긴 세월을 유지했다. 통일신라는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전 ․후기로 특징이 나누어진다. 전기는 원효․원측․의상은 물론 의적․도증․승장․둔륜․대현․현일․신방 등이 활약했던 시기다. 이들의 저술로 보면《반야경(般若經)》《법화경(法華經)》《화엄경(華嚴經)》《무량수경(無量壽經)》《범망경(梵網經)》《유가론(瑜伽論)》《임명론(因明論)》《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등 광범하다. 

 

◇ 통일신라 이차돈(異次頓, 501~527)의  순교(殉敎)

 

(이차돈 표준영정)

 

<삼국유사>에 인용된 일념(一念)의 <촉향분례불결사문 髑香墳禮佛結社文>에 의하면 이차돈(異次頓)은 속성이 박(朴)씨며 아버지는 알 수 없고, 할아버지는 아진종랑(阿珍宗郞)으로 습보 갈문왕(習寶葛文王)의 아들이다. 그러나 같은 책에 인용된 김용행(金用行)이 찬한 <아도비문 阿道碑文>에는 아버지는 길승(吉升), 할아버지는 공한(功漢), 증조부가 걸해대왕(乞解大王)이라 했다. 그의 이름은 거차돈(居次頓)·염촉(厭觸 : 또는 猒觸)·이처(伊處)·처도(處道)라고도 한다. 순교 당시 국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내사사인(內史舍人)의 직책에 있었다.

 

범행(凡行)이 빛나고 착실한 사람으로서 심지(心志)가 곧고 심중(深重)하며 의로움에 분발하는 용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신라 법흥왕이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는 마음을 늘 갖고 있었는데 귀족들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이차돈이 왕과 함께 그 상황을 타개할 방안을 강구했다. 이차돈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불교를 융성시키고자 했으나 왕은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부처의 뜻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비록 제가 죽더라도 도를 펴게 된다면 유감이 없겠다"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그는 왕과 비밀리에 약속한 뒤 왕명을 가장하여 도성내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지었다. 공사가 시작되자 신하들의 논란이 분분했다. 왕이 신하에게 물으니 모두 "지금 승려를 보니 깎은 머리에 옷차림이 누추하고, 하는 이야기가 괴이하니 이를 따르면 후회가 있을 것이므로 죽을 죄를 짓더라도 명을 받들지 못하겠다"고 했다. 이차돈은 "비상한 사람이 있은 뒤에 비상한 일이 있다. 내가 들으니 불교의 이치는 오묘하여 불가불 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왕은 "너 혼자만 다른 이야기를 하니 양쪽을 좇을 수가 없다"고 하여 죽이려 했다.

 

이에 차돈은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기를 "내가 불법을 위해 형장에 나가지만 의리(義利)를 일으키려 한다. 부처가 만일 신통력이 있다면 죽은 뒤에 반드시 이적(異跡)이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의 목을 자르자 머리가 하늘을 날아 금강산(金剛山: 경주 북쪽)에 떨어지고 잘린 목에서는 흰 젖이 한 장(丈)이나 솟아났으며, 순간 주위가 어두워지고 하늘에서는 기묘한 꽃들이 떨어지며 땅이 크게 진동했다. 그러자 귀족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유해를 금강산에 장사지냈다.

 

그 이후로는 불법을 받들고 귀의할 것이라고 맹세했다. 이로써 신라에 불교가 널리 퍼져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인용된 <향전 鄕傳>에 의하면 이차돈은 왕과 비밀리에 약속하고 실행에 옮긴 것이 아니라 자의적으로 절을 짓도록 한 것으로 되어 있어 차이가 있다. 순교 당시 이차돈의 나이는 22세 혹은 26세로 전한다.

 

그의 순교를 계기로 법흥왕은 529년(법흥왕 16) 살생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고, 신라 최초의 불교사찰인 흥륜사(興輪寺)를 천경림에 짓기 시작해 544년(진흥왕 5)에 완성했다. 절을 지을 때 사용된 재목은 모두 천경림에서 구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곳은 수목이 울창하여 재래신앙이 행해지던 장소였다고 짐작된다. 그런데 흔히 이차돈의 순교와 동시에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었다고 간주하지만, 반대 의견도 있다.

 

즉 <삼국유사>에서는 흥륜사를 짓는 것이 527년 에 비로소 시작하여 534년에 천경림을 베어내어 공사를 일으켰다고 했고, <고승전>에서도 534년에 천경림의 나무를 베어내고 절을 지었는데 이것이 신라 창사(創寺)의 시작이라고 한 것이 그 근거가 된다. 이렇게 여러 가지 전승이 전하는 것은 신라에서 불교가 공식적으로 수용되는 과정이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리 순탄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차돈의 순교 이전에도 이미 묵호자(墨胡子)나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신라에 와서 불교를 펴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던 사실이 있었다. 이는 신라 귀족들의 폐쇄성이라든지 재래신앙의 강고함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불교의 공인은 기본적으로 신라의 정치체제에서 왕권의 강화과정과 함께 이해되고 있다. 즉 신라의 발전과정에서 분화되고 보다 복잡해진 사회를 일원적으로 포괄하는, 한 차원 높은 규범과 이를 뒷받침하는 지배이념이 필요했고, 불교는 그에 적합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것은 다원적인 귀족세력을 강력한 왕권 아래에 두는 것과 밀접한 연관을 가졌다. 상대등(上大等)이 설치되어 귀족세력과 왕권의 완충역할을 맡게 되는 것도 불교가 공인된 직후라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후 불교는 왕실의 초월적인 권위를 나타내는 데 적극적으로 이용되었고, 법흥왕과 왕비는 만년에 승려가 되기도 했다. 따라서 이차돈의 순교와 관련된 설화는 불교가 융성한 뒤에 꾸며진 신비한 내용이지만, 불교 수용을 전후한 시기의 왕실과 귀족세력 간의 갈등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도 잇다. 이차돈이 순교한 뒤 왕실의 나(內人)들이 명복을 빌기 위해 자추사(刺楸寺)를 지었는데, 집집마다 이 절에서 치성을 드리면 반드시 대대로 영화를 얻고 여러 사람이 도를 행하여 불교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817년(헌덕왕 10)에 그의 순교장면과 함께 사적을 새긴 6각석당(六角石幢)이 경주 백률사(柏栗寺)에 세워졌다. 이 석당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이관 소장되어 있다. 9한국문화콘텐츠)


이차돈(異次頓: 501~527) 또는 거차돈(居次頓)은 불교의 승려이자 신라의 법흥왕(재위 514~540)의 근신이다. 속성은 박(朴) 또는 김(金)이다. 습보 갈문왕의 후손이라는 설과 흘해 이사금의 후손이라는 설이 전하며, 이찬 길승(吉升)의 아들이다. 이차돈은 일찍부터 불교를 신봉했으며, 관직이 내사사인(內史舍人)에 올랐다.

아도가 신라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파하려 할 때, 모든 신하가 이를 반대하였다. 당시 법흥왕은 불교를 국교(國敎)로 하고자 했으나 재래의 무교(巫敎)에 젖은 귀족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직 이차돈만이 불교의 공인을 적극 주장하여, 당시 불교에 관심이 있는 법흥왕으로부터 절 짓는 일을 허락받았다. 그런데 절을 짓기 시작한 그 해부터 가뭄과 장마가 겹쳤으며, 질병이 돌기 시작하여 많은 백성이 죽었다. 그러자 불교를 반대하던 신하들이 이차돈 때문이라고 왕을 충동하여 처형하게 하였다.

 

이때 이차돈은 혼자 불교의 공인(公認)을 주장하다가 순교를 자청하여 마침내 주살되었다. 그는 죽을 때 "부처가 있다면 내가 죽은 뒤 반드시 이적(異蹟)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과연 목을 베니 피가 흰 젖빛으로 변하여 한 길이나 솟구쳤고, 하늘이 컴컴해지더니 꽃비가 내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에 모두 놀라고 감동하여 528년 드디어 불교를 공인하기에 이르렀다. 전설에는 그가 죽을 때 머리가 날아가 떨어진 곳이 경주 북쪽에 있는 금강산이며, 그곳에 817년 헌덕왕 때 승려 혜륭이 무덤을 만들고 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차돈(501~527)의 가계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왕족인 것으로 추정되며, 성씨는 김씨라는 설과 박씨라는 설이 혼재한다. 김씨 설에 의하면 내물왕(재위 356~402)의 아들 습보 갈문왕(?~?)의 후손이고, 박씨 설에 의하면 흘해왕(재위 310~356)의 후손이 된다. 그러나 흘해왕과는 무려 200년의 차이가 나므로 4대손이 되기에는 연대적으로 맞지 않아 오류가 발생하기도 한다. 증조부는 종(宗)이고 아진찬을 역임했고, 조부는 공한(功漢), 아버지는 길승(吉升)이다. (위키백과)

 

◇ 이차돈의 순교 설화 (삼국유사)

 

(이차돈의 순교비 탁본)

 

<촉향분 예불결사문 髑香墳禮佛結社文>에서

통일신라 때 경주 남간사(南澗寺) 승려 일념(一念)이 이차돈(異次頓)의 묘에 예불하는 결사문을 지은 글이다. 그 내용은 <삼국유사> 권3 원종흥법(原宗興法)· 염촉멸신조(厭觸滅身條)에 수록되어 있다. 이차돈 순교로부터 250여 년이 지난 9세기 초에 들어와 신라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여러가지 사업이 추진된다. 817년(헌덕왕 9)에 흥륜사(興輪寺)의 영수선사(永秀禪師)는 이차돈의 무덤에 예불할 향도(香徒)를 모아 매월 5일 그 영혼의 묘원(妙願)을 위해 단을 만들고 법회를 개최하였다. 또 818년에는 국통(國統) 혜륭(惠隆)과 법주(法住) 효원(孝圓), 김상랑(金相郎)과 대통(大統) 녹풍(鹿風), 대서성(大書省) 진서(眞恕)와 파진찬 김의(金嶷) 등이 이차돈의 무덤을 수축하고 비를 세웠다. 일념(一念)이 지은 이 결사문은 영수선사가 이차돈의 무덤에 예불할 향도를 모아 법회를 개최할 때 지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결사문은 이차돈의 순교에 관한 일을 자세히 기록한 중요한 사료로서 한국 불교사와 신라문화사 연구의 중요한 사료가 된다. 다음은 이 <촉향분 예불결사문 髑香墳禮佛結社文>을 번역한 것이다. 촉향분(髑香墳)은 이차돈의 묘를 지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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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본기(新羅本記)에 보면 법흥대왕 즉위 14년(527)에 소신(小臣) 이차돈(李次頓)이 불법을 위하여 제 몸을 죽였다. 곧 소량(簫梁=梁武帝) 보통 8년 정미년(527)에 서천축(西天竺)의 달마대사(達磨大師)가 금릉(金陵)에 왔던 해다. 이 해에 또한 낭지법사(郎智法師)가 처음으로 영추산에서 법장(法場)을 열었으니, 불교의 흥하고 쇠하는 것도 반드시 먼 곳(중국)과 가까운 곳(신라)에서 같은 시기에 서로 감응했던 것을 여기서 믿을 수가 있다. 원화 연간(元和年間)에 남간사(南澗寺)의 사문 일념 (一念)이 촉향분예불결사문(髑香墳禮佛結社文)을 지었는데, 이런 사실을 자세히 실었다. 그 대략은 이렇다.

 

통일신라 법홍대왕이 자극전에서 등극(登極)했을 때에 동쪽의 지역을 살펴보시고,

「예전에 한나라 명제(明帝)가 꿈에 감응되어 불법이 동방에 유행하였다. 내가 왕위에 오른 후로부터 인민을 위하여 복을 닦고 죄를 없앨 곳을 마련하려 한다.」

고 말씀하셨다. 이에 조신(朝臣)들은 그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다만 나라를 다스리는 대의만을 지켜 절을 세우겠다는 신략(神畧)을 따르지 않았다. 대왕은 탄식하면서 말했다.
「아 ! 내가 덕이 없는 사람으로서 대업(=왕업)을 이으니, 위로는 음양의 조화가 모자라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즐거움이 없구나. 정사를 보살피는 여가에 불교에 마음을 두고 있으니 누가 나와 같이 일하겠는가?」

 

이 때, 내양자(內養者=小臣) 성은 박(朴), 자(字)는 염촉(厭髑)이라고도 하고 또는 염도(厭覩) 등으로도 하는데 그의 아버지는 자세히 알 수 없고 할아버지는 아진(阿珍) 종(宗)으로서 곧 습보(習寶) 갈문왕(葛文王)의 아들이다. 신라의 관작(官爵)은 모두 17등급인데 그 제 4위는 파진찬(波珍飡)이라고도 한다. 종(宗)은 그 이름이요 습보(習寶)도 또한 이름이다. 신라 사람은 대체로 추봉(追封)한 왕을 모두 갈문왕이라 했는데, 그 이유는 사신(史臣)도 또한 자세히 모른다고 했다.


또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비(阿道碑)’를 살펴보면, 사인(舍人)은 그 때 나이가 26세며 아버지는 길승(吉升), 할아버자는 공한(功漢), 증조는 걸해대왕(乞解大王)이라 했다. 염촉(厭髑)은 죽백(竹柏)과 같은 자질(姿質)을, 수경 (水鏡)과 같은 심지(心志)로, 적선(積善)한 집안의 증손으로서 궁내(宮內)의 무신(武臣)을 희망했고 성조(聖朝)의 충신으로서 성세(盛世)의 시신(侍臣)되기를 바래왔다.

 

그때 그는 사인(舍人)의 자리에 있었다. 왕의 얼굴을 쳐다보고 그 심정을 눈치채어 왕에게 아뢰었다.
「신(臣)이 듣자오니 옛 사람은 비천(卑賤) 한 사람에게도 계책(計策)을 물었다 하옵기 신은 중죄(重罪)를 무릅쓰고 아뢰겠습니다.」

왕은 말했다.
「너의 할 일이 아니다.」
사신은 말했다.
「나라를 위하여 몸을 죽임은 신하의 큰 절개이오며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바침은 백성의 바른 의리(義理)입니다. 거짓으로 말씀을 전했다고 하여 신을 형벌하여 머리를 베시면, 만민이 모두 굴복하고 감히 왕명을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
왕은 말했다.
「살을 베어 저울에 달아 새 한 마리를 살리려 했고, 옛날 부처님께서 본생수행(本生修行)하실 때 매에게 쫓겨 오는 비둘기를 숨겨주시더니 매가 “비둘기만 사랑하고 나는 사랑하지 않느냐?” 하면서 생살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대신 자기 몸을 베어 매에게 주고 비둘기를 구원한 일이 있었다. 피를 뿌려 생명을 끊고 짐승 일곱 마리를 스스로 불쌍히 여겼었다. 또 전생에 왕자로 있을 때 굶어 죽게 된 호랑이 새끼들을 보고 자기 몸을 주어 살게 하였다. 내 뜻은 사람을 이롭게 하는데, 어찌 중죄한 사람을 죽이겠는가? 너는 비록 공덕을 끼치려 하지마는 죄(=죽음)를 피하는 것이 좋겠다.」

사인은 말했다.
「일체를 버리기 어려운 것은 자기의 신명(身命)입니다. 그러하오나, 소신이 저녁에 죽어 아침에 불교가 행해지면 불법(佛法)은 다시 일어나고 성주(聖主)께서는 길이 편안하실 것입니다.」

왕은 말했다.
「난새와 봉새의 새끼는 어릴 때부터 하늘을 뚫을 마음이 있고, 홍곡(鴻皓)의 새끼는 날 때부터 물결을 헤칠 기세가 있는데, 네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보살(菩薩)의 행(行)이라 할 수 있겠다.」
이에 대왕은 임시로 위의(威儀)를 갖추고 무시무시한 형구(刑具)를 사방에 벌여놓고, 뭇 신하들을 불러 물었다. 「 그대들은 내가 사원(寺院)을 지으려 하는데 고의로 지체시켰다.」

 
―향전(鄕傳)에서는 염촉(厭觸)이 왕명이라 하면서 그 역사(役事)를 일으켜 절을 세운다는 뜻을 전했더니 여러 신하들이 와서 간했으므로 왕은 이에 염촉에게 책임을 지어 노하면서 왕명을 거짓으로 꾸며 전달했다고 처형한 것이라고 했다. ―


이에 뭇 신하들은 벌벌 떨면서 황급히 맹세하고 손으로 동서(東西)를 가리켰다. 왕은 사인을 불러 이 일을 문책했다. 사인은 얼굴빛을 변하면서 아무 말도 못하였다. 대왕은 분노하여 베어 죽이라 명령했다. 유사(有司)가 그를 묶어 관아(官衛)로 끌고가니 사인이 맹세를 했다. 옥리(獄吏)가 그의 목을 베니 허연 젖이 한 길이나 솟아났다. 이에 하늘은 어둑침침해져 사양(斜陽)이 빛을 감추고, 땅은 진동하는데 천화(天花)가 무수히 내려왔다. 임금은 슬퍼하여 눈물이 곤룡포를 적셨고 재상(宰相)은 상심하여 진땀이 관에까지 흘렀다.


도성의 감천(甘泉)이 문득 마르니 고기와 자라가 다투어 뛰고, 곧은 나무가 부러지니 원숭이가 떼지어 울었다. 동궁에서 말 고삐를 나란히 하던 동무들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서로 돌아보고, 월정(月庭)에서 소매를 맞잡던 친구들은 창자가 끊어질듯이 이별을 애태웠다. 관을 바라보고 우는 소리는 부모의 상을 당한 것 같았다고 말했다.


「개자추(介子推)가 다릿살 베인 일도 그 염촉의 고절(苦節)엔 비할 수 없을 것이며, 홍연(弘演)이 배를 가른 일인들 어찌 염촉의 장렬(狀烈)함에 견줄 수 있으랴? 이는 곧 임금(法興王)의 신력을 붙들어 아도(阿道)의 본심을 이룬 것이니 성자(聖者)로다.」


드디어 북산 서쪽 고개 ―곧 금강산이다. 향전(鄕傳)에서는 머리가 날아가 떨어진 곳이므로 그 곳에 장사했다 했는데, 여기서는 그것을 말하지 아니하였으니 무슨 까닭일까?― 에 장사했다. 나인(內人)들은 이를 슬퍼하여 좋은 곳을 가려서 절을 짓고 그 이름은 ‘자추사(刺秋寺)’라 했다.

 
이에 집집마다 부처를 공경하면 반드시 대대의 영화를 얻게 되고 사람마다 불도를 행하면 마땅히 불법의 이익을 얻게 되었다. 진흥대왕 즉위 5년 갑자년(544)에 대흥륜사(大興輪寺)를 지었다. 양 무제(梁武帝) 태청(太淸) 초년(547)에 양(梁)의 사신 심호(沈湖)가 사리(舍利)를 가져왔고, 진문제(陳文帝) 천가(天嘉) 6년[565]에는 진(陳)의 사신 유은(劉恩)이 명관(明觀)과 함께 불경을 받들고 왔다.

 
절(寺)들은 별처럼 벌여 있고 탑들이 기러기 행렬처럼 연이어 섰다. 법당(法堂)을 세우고 범종을 달았다.
용상(龍象)의 중은 천하의 복전(福田)이 되고,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의 불법은 경국(京國=수도)의 자운(慈雲)이 되었다. 타방(他方)의 보살이 세상에 출현하고 ―분황(芬皇)의 진나(陳烈), 부석(浮石)의 보개(寶蓋), 낙산(洛山)의 오대(五坮) 등이 이것이다― 서역(西域)의 명승(名憎)들이 이 땅에 오시니 이로 말미암아 삼한은 합하여 한 나라가 되고 온 세상은 어울려 한 집이 되었다. 그러므로 덕명(德名)은 천구(天拘)의 나무에 쓰이고 신적(神跡)은 은하물에 그림자를 비추니 이것이 어찌 세 성인의 위덕(咸德)으로 이룬 것이 아니랴! ―세 성인은 아도와 법흥왕과 염촉을 이른다― 훗날 국통(鬪統) 혜융(惠隆)과 법주(法主) 효원(孝圖)·김상랑(金相郞)과 대통(大統) 녹풍(鹿風)과 대서성(大書省) 진서 (眞恕)와 파진찬(波珍飡) 김의(金儀) 등이 사인의 무덤을 수축하고 큰 비를 세웠다. 원화(元和)는 12년 정유[817] 8월 5일로, 곧 제 41대 헌덕대왕(憲德大王) 9년이다. 흥륜사의 영수선사(永秀禪師) ―이때 유가(瑜伽)의 여러 스님을 모두 선사라 일컬었다― 는 이 무덤에 예불할 향도(香徒)를 결성하고 매달 5일에 혼의 묘원(妙願)을 위해 단을 만들어 법회(法會)를 열었다. 또 향전(鄕傳)에는 고을의 늙은이들이 매양 그의 죽은날을 당하면 사(社)를 만들어 흥륜사에서 모였다고 하였으나 금월(今月=8凋) 초 5일은 곧 사인이 목숨을 버리고 불법에 순응(殉應)하던 날이다.


아 ! 이 임금[법흥왕]이 없었으면 이 신하(염촉)가 없을 것이고, 이 신하(염촉)가없었으면 이 공덕이 없었을 것이니, 유비 (劉備)와 제갈량(諸葛亮)의 물고기와 물 같은 관계며, 구름과 용이 서로 감응한 아름다운 일이라 할 수 있겠다. 법흥왕은 이미 폐지된 불법을 일으켜세워 절이 이룩되자 면류(冕旒=임금의 관)를 벗고 가사를 입으며 궁에 있는 왕의 친척을 내놓아 절 종으로 삼고 ―절의 종은 지금까지도 왕손이라 일컫는다. 후에 태종왕 때에 이르러 재상 김양도(金良圖)가 불법을 믿었다. 두 딸이 있었는데 화보(花寶), 연보(蓮寶)라 했다. 몸을 던져 이 절의 종이 되었다. 또 역신(逆臣) 모척(毛尺)의 가족을 잡아와서 절의 노예로 삼았는데 이 두 가족의 후손이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았다― 그 절에 살면서 몸소 불법을 널리 폈다.


진홍왕은 선덕(先德=법흥왕)을 이은 성군이었으므로 임금의 직책을 잇고 임금의 자리에 처(處)하여 위엄으로 백관을 통솔하니 호령이 다 갖추어졌다. 왕은 이내 이 절에 대왕 흥륜사(大王興輪寺)란 이름을 내렸다.
전왕(=법흥왕)의 성은 김씨요, 출가한 이름은 법운(法雲)이요, 자는 법공(法空)이다. ―승전(憎傳)과 제설(諸說)에서는 왕비도 출가하여 이름을 법운(法雲)이라 했다. 또 진흥왕도 법운(法雲)이라 했고, 진흥왕비도 법운(法雲)이라 했다 하니 자못 혼동됨이 많다― 책부원구(冊府元龜)에서는 법흥왕의 성은 모(募)요, 이름은 진(秦)이라 했다. 처음 역사(役專)를 일으켰던 을묘년에 왕비도 또한 영흥사(永興寺)를 세우고, 사씨(史氏=毛祿의 누이동생)의 유풍을 사모하여 왕(법흥왕)과 같이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어 법명(法名)을 묘법(妙法)이라 하고는 또한 영흥사에 살더니 몇 해 만에 세상을 떠났다.


국사(國史)는 건복(建福) 31년[614]에 영흥사의 소상(塑像)이 저절로 무너지더니 얼마 안가서 진흥왕비 비구니(比丘尼)가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살펴보건대 진흥왕은 법흥왕의 조카요, 왕비 사도부인(思刀夫人) 박씨는 모량리(牟梁里) 영실각간(英失角干)의 딸로서 또한 출가하여 여승(女僧)이 되었다. 그러나, 영흥사를 세운 주인은 아니다. 아마도 진(眞=眞興왕비의 眞)자는 마땅히 법(法)자로 고쳐야 될 것 같다. 이는 법흥의 왕비 파초부인(巴焦夫人)이 여승이 되었다가 세상을 떠난 것을 이름이며 이가 곧 그 절을 짓고 불상을 세운 주인이기 때문이다. 또 대통(大通) 원년 정미(丁未)년에 양제(梁帝=武帝)를 위하여 옹천주(甕天州)에 절을 세우고 그 절 이름을 대통사(大通寺)라 했다.

 

“성인의 지혜는 원래 만세계를 위한 것,

구구한 여론이야 조금도 따질 것이 없도다.

법륜(法輪)이 풀려 금륜을 좇아 전해지니,

요순(堯舜)시대가 바야흐로 불교로 높아지네”

 

성지종래만세모(聖智從來萬世謀)

구구여의만추호(區區輿議慢秋毫)

법륜해수금륜전(法輪解遂金輪轉)

순일방장불일고(舜日方將佛日高)

 

이것은 원종(原宗 :법흥왕)에 대한 찬사다.


“義를 따라 生을 버림도 족히 놀라운데
하늘꽃과 흰 젖은 더욱 다정하구나.
별안간 한 칼에 몸이 죽으니
절마다 울리는 종소리 서라벌을 흔드네”

 

循義輕生已足驚 (순의경생이족경)
天花白乳更多情 (천화백유갱다정)
俄然一도身亡後 (아연일도신망후)(도-金+刀)
院院鐘聲動帝京 (원원종성동제경)

 

이것은 염촉(厥髑=이차돈)에 대한 찬사다.

<三國遣事>에서 출처:http://cp0433.culturecontent.com 

 

◇ 이차돈의 순교비 (통일신라)

 

 

△ 불교를 선교하다 순교한 이차돈의 순교 모습을 새긴 통일신라시대의 백률사 석당기(柏栗寺石幢記).

(높이 104㎝, 각 면의 너비 29㎝.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원래는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 소금강의 백률사(柏栗寺)에 있었으나 1914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네모난 대좌 위에 놓여진 6각 기둥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위에는 옥개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없어졌다. 제1면에는 이차돈의 순교 장면이 저부조로 새겨져 있다. 527년(신법흥왕 14) 이차돈이 불사(佛事)를 일으키고 왕명을 거역했다는 죄목으로 참수형을 당했는데 그의 목을 베자 흰 젖이 수십 장(丈)이나 치솟아 올랐으며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지더니 하늘에서 꽃이 떨어지고 땅이 크게 진동하였다. 이에 왕과 군신들이 마침내 불교를 공인했다는 내용이다.


아래쪽에는 땅을 상징하는 물결과 같은 무늬가 있고 그 위에 관을 쓴 이차돈의 머리가 떨어져 있다. 목이 잘린 채 비스듬히 서 있는 몸체는 원통형에 가까우며 옷주름은 세로선으로 간략하게 표현했다. 제2~6면 사이에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었으나 지금은 마멸(磨滅)이 심해 해독이 어렵다. 그러나 <삼국유사 권3 원종흥법 염촉멸신 原宗興法厭觸滅身>조에 의하면 이 비의 건립연대는 817년(헌덕왕 9)으로 추정된다. 이 비상(碑像)은 우리나라의 불교 순교상(殉敎像)으로 유일한 예로서 한국 불교사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 가치가 매우 크며 아울러 9세기초 불교 조각사 및 복식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왕생극락의 노래
정완영 작시/ 김회경 노래
 
(1) 뻘흙 같은 이 세상에 목숨으로 뿌리내려
곧은 줄기 추스려서 목마름도 달래었고,
푸른 바람 받아내려 연잎으로 실었거니
왕생극락 히신 날에 연화대에 오르소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2) 저 하늘 한장 구름 이는 것이 삶이라면
깊은 물 달그림자 잠긴 것이 죽음이라,
구름과 달그림자 본래 실상 없는 것을
한 줄기 푸른 연기 열반경에 드옵소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정완영 (1919년생, 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