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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불교·죽음

[천주교전래] 가톨릭의 전래(1784년)와 순교 성지

잠용(潛蓉) 2013. 6. 1. 13:01

◇ 천주교(天主敎 가톨릭)의 한국 전래 ◇

 

한국 가톨릭 순교자 103위 성인 시복(1984년)을 그린 성화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때는 지금부터 200여 년 전이다.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 샤를르 달레(Claude Charles Dallet, 1829~1878)의 저서 <한국천주교회사 韓國天主敎會史 Histoire de L'Église de Corée 1874>에 따르면 1784년,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서 프랑스 사람 그라몽(Grammont)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돌아오면서 본격적인 신자들의 신앙모임이 시작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 서학(西學)을 연구하던 학자들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자생적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이승훈은 귀국하자마자 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드디어 지금 명동성당 부근의 명례방(明禮坊)에서 정기적인 신앙집회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외국인 선교사가 천주교를 전해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는 세계 교회사에 그 유례가 없는 유일한 일이었다. (서울 자양동성당)

 

◇ 조정의 천주교(가톨릭교) 박해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 천주교회가 시작된 해는 이승훈이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북경에서 영세한 1784년이라 한다. 그러나 천주교는 그 이전부터 이미 들어와 있었다. 우선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게 잡혀갔던 우리 백성들 중에서 일본에서 영세한 사람들이 많았고 1777 ~1779년 사이에는 천진암과 주어사에서 당시 석학이었던 이벽, 정다산, 권철신 등이 개최한 천주교리강학회가 있었다. 물론 본격적인 발전은 역시 이승훈의 영세 후부터다. 그러나 이들의 신앙은 채 꽃이 피기도 전에 모진 박해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이승훈이 영세한 그 이듬해인 1785년 을사추조적발 사건이 일어나 김범우가 순교하였다. 이 사건은 서울 명동에 있는 김범우 집에서 종교집회를 하는데 관헌들이 급습하여 집회자들을 체포한 것으로, 그때 모였던 10여명이 체포되었지만 대부분 양반계급이었기 때문에 훈방되고 중인이었던 집주인 김범우만 충청도로 귀양가게 된 사건이다. 이것은 비록 소규모이지만 우리나라 천주교에 가해진 최초의 박해사건이였다.

 

이어서 천주교 박해사건는 맹렬하게 일어났는데 두드러진 것만 열거하면 신해박해(1791),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 병인박해(1866) 등이고 대략 100여 년 동안 순교하신 분들은 대체로 1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모진 박해 중에도 천진암과 주어사의 강학회를 통해 선교사 없이 이 땅에 천주교 신앙을 들어오게 한 하느님의 은총과 우리 만족의 진리를 찾고자 하는 열의는 결코 꺼지지 않고 타올라 신자 수는 오히려 증가되었다. 그러던 중 1795년에는 중국 북경애서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천주교의 포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831년에는 조선 교구가 창설되었고 1836년과 그 이듬해인 1837년에는 불란서인 모방신부와 샤스땅 신부가 입국하였는데 모방신부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관심을 가져 김대건, 최양업, 최방지거를 뽑아 마카오로 신학공부를 보냈다. 이 세 젊은이 중 김대건은 한국 최초의 신부가 되었고, 최양업도 두 번째로 신부가 되었지만 최 방지거는 수학 중 병사하였다. 그리고 1838년에는 불란서인 범주교가 입국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 속에서도 박해는 끊이지 않았고 종교의 자유는 1882년 미국과 한미수호통상 조약에서 싹트기 시작하여 1886년 불란서와 한불수호통상조약에서 완전히 얻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도 초기에는 어느 정도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듯 했으나 이내 비열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계속되는 박해 중에서도 천주교회는 굳건히 일어섰고 해방의 기쁨과 함께 교세는 불같이 확장되어 오늘날 400만의 신자와 2300여 개의 성당이나 공소, 그리고 3200여 명의 성직자와 1만여 명의 성직 수도자가 있다. (네이버에서)

 

◇ 한강변 ‘새남터’ 순교 성지
새남터 서울 용산구 이촌동 199의 1번지에 있는 한강의 모래사장으로, 이곳은 옛날부터 “새남이굿”(죽은 사람의 영혼을 천도하는 굿)을 하던 굿터가 있었던 곳이란 뜻에서 “새남이터” “새남터”라고 부르던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1846년 김대건, 주문모 등의 로마 가톨릭 신부들이 순교한 장소라서, 1987년 순교를 기념하는 천주교 성당이 건축되었다. 한국 천주교회 창립 2백주년 기념의 해인 1984년 공사를 시작해 3년 만에 순교성지 새남터에 기념성당이 준공되었다.

 

새남터는 한국교회 역사상 순교한 성직자 14분 중 11분이 순교한 성지로 이 11분 중 8분과 교회의 지도급 평신자 3분이 성인품에 오른 한국의 대표 순교성지다. 조선인 최초의 신부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 최초로 한국에 들어왔던 중국인 주문모 신부, 최초로 한국에 들어왔던 주교 앵베르 성인, ‘기해일기’ 의 현석문 가를로 성인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9분의 성인유해가 새남터 성당에 모셔져 있다.

 

원래 한양성 밖 남쪽 한강변에 있던 새남터는 본래 노들 혹은 한자로 음역(音譯)해서 사남기(沙南基)라고 불리었다. 이 자리는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으로 사용되었고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곳은 1456년(세조 2년)에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던 사육신(死六臣)이 충절의 피를 뿌린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1801년부터 1866년까지 무려 10명의 외국인 사제를 포함해서 11명의 목자가 이곳에서 순교의 피를 흘린다. 서소문 밖 네거리를 ‘평신도들의 순교지’라고 한다면 이곳은 ‘사제들의 순교지’라고 말할 수가 있다.

 

새남터를 순교의 성혈로 물들이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치명(致命)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부터다. 목자 없이 스스로 교회를 세운 조선의 교우들을 위해 북경 교구는 1795년에 주 신부를 조선 땅에 파견한것이다. 조선이 맞이한 첫 사제인 주 신부는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한양에 입성, 최인길의 집에 여장을 푼 이래 6개월 만에 한 배교자의 밀고에 의해 쫓기는 몸이 된다. 가까스로 몸을 피해 여교우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하지만 그의 영입에 주역을 담당했던 윤유일, 지황은 각각 36세, 29세의 나이에 곤장을 맞고 치명하고 거처를 제공했던 최인길 역시 장살(杖殺)로 순교(殉敎)한다.


이런 박해의 와중에서도 6천여 명의 신자가 새로 생기는 등 조선 천주교회의 교세는 크게 신장되었다. 하지만 주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지 6년 만인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辛酉迫害)는 또다시 수많은 교우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명도회 회장인 정약종(丁若鍾)을 비롯해 선구적인 이 땅의 지식인들은 칼 앞에서도 주 신부의 소재를 대지 않았고 그 때문에 더 많은 희생자가 생겨났다. 주 신부는 자신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 받는 것을 보고 중국으로 되돌아가려고 북행길을 나섰다. 하지만 자기 양 떼들과 생사를 함께 하고자 하는 각오로 도중에 발길을 돌려 자진해서 의금부로 나갔고 마침내 새남터에서 순교한다. 그의 시체는 닷새 동안 형리(刑吏)들이 지켰다는데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1839년에 일어난 기해박해(己亥迫害)는 이들 세 명의 외국인 사제를 새남터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다. 교우들은 포졸들의 엄중한 감시를 뚫고 이들의 시체를 거두어 노고산(老姑山)에 가매장했다가 4년 뒤 삼성산(三聖山)에 안장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병오년(1846년)에는 한국 최초의 조선 사제인 김대건(金大建) 신부와 그 동안의 순교를 기해 일기로 남긴 현석문(현석문)이 이곳에서 참수된다. 그리고 20년 뒤, 병인박해(丙寅迫害)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새남터에서는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 등 6명의 프랑스 사제들과 우세영, 정의배 두 평신도들이 순교의 피를 뿌린다.

 

1950년 순교기념지로 지정되었고, 1956년에는 여기에 '가톨릭 순교성지'라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1981년에는 한강 본당에서 새남터 본당이 분리 독립했고 1987년에는 한국순교복자 성직수도회에서 현재의 기념성당을 건립해 봉헌했다. 2006년 9월 3일에는 성당 지하 주차장을 개조해 '새남터기념관'을 새로 건설 축복식을 거행하고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다. (위키백과)





◇ 한국 천주교 4대 박해

[가톨릭신문] 2009-09-27

 


△ 103위 성인 시복 감동·의미 되새겨... (가톨릭대사전에서)

 

신유박해 辛酉迫害(1801, 순조1년)

 

천주교는 당시 조선후기의 성리학적 지배원리의 한계성을 깨닫고 새로운 사상을 추구하던 일부 진보적 지식인과, 부패하고 무기력한 봉건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들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면서, 18세기 말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특히, 1794년 청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국내에 들어오고 천주교도에 대한 정조(正祖) 국왕의 관대한 정책은 교세 확대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801년 정월 나이 어린 순조(純祖)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노론벽파(老論僻派) 정순대비(貞純大妃)는 천주교도들과 남인 시파(時派)를 일망타진하려고 사교(邪敎)인 ·서교(西敎, 천주교)를 엄금 근절하라는 금압령(禁壓令)을 내렸다.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에 의거, 전국의 천주교인 중 회개하지 않는 자는 역적으로 다스려, 뿌리째 뽑도록 하라는 전국에 엄명을 내렸다 이 박해로 2월 정약종을 비롯한 5명이 참수당했다. 이가환과 권철신은 옥사했으며 이기양과 정약용, 정약전은 유배됐다. 박해는 3월 주문모 신부의 자수로 더욱 가열된다. 주 신부는 조선에 입국해 강완숙의 집에 숨어 활동했다. 그러나 자신의 도피로 신자들이 잡히자 자수해 4월에 순교했다. 전주에서도 3월부터 박해가 시작돼 유항검, 유관검, 윤지충 등이 체포됐고, 9월 사형선고를 받아 처형당했다. 주문모를 비롯한 교도 약 100여 명이 처형되고 약 400여 명이 유배되었다. 이 박해는 ‘척사윤음(斥邪倫音)’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 숫자는 지방에서 희생된 신자는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해박해 己亥迫害(1839, 헌종5년)
1839년 3월~10월까지 계속된 박해. 이 박해로 인해 참수된 천주교 신자는 70명이고, 옥중에서 죽은 신자는 60여 명인데 이 중 70명이 시성됐다. 기해박해의 표면적 원인은 사학이라 불리던 천주교를 배척한다는 것이었지만, 시파(時派)인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도를 빼앗기 위해 벽파(僻派)인 풍양조씨(豊壤趙氏)가 일으킨 정치적 갈등이라고 볼 수 있다. 5월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던 박해는 일단 누그러져 평온을 되찾는 듯했지만 7월, 천주교 신자 색출에 노력하라는 대왕대비의 전교가 있게 되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샤스탕 신부의 복사로 있던 현석문, 조선교회의 지도자 역할을 하던 조신철, 정하상, 역관 유진길 등이 체포됐다. 이에 따라 피신해 있던 앵베르 주교는 자수를 결심하고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도 자수한다. 9월 21일, 이들은 새남터 형장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로 순교하고 정하상과 유진길, 조신철도 참수된다.

 

순교자는 이호영 베드로, 정국보 프로타시오, 김아기 아가다, 박아기 안나, 이 아가다, 김업이(金業伊) 막달레나, 이광헌(李光獻) 아우구스티노, 한(韓)아기 바르바라, 박희순(朴喜順) 루시아, 남명혁(南明赫) 다미아노, 권득인(權得仁) 베드로, 장(張)성진 요셉, 김 바르바라, 이 바르바라, 김 로사, 김성임(金成任) 마르타, 이매임(李梅任) 데레사, 김장금(金長金) 안나, 이광렬(李光烈) 요한, 이영희(李英喜) 막달레나, 김 루시아, 원귀임(元貴任) 마리아, 박 큰아기 마리아, 권희(權喜) 바르바라, 박후재(朴厚載) 요한, 이정희(李貞喜) 바르바라, 이연희(李連熙) 마리아, 김효주(金孝珠) 아녜스,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 허계임(許季任) 막달레나, 남이관(南履灌) 세바스티아노, 김 율리에타, 전경협(全敬俠) 아가다, 조신철(趙信喆) 가롤로, 김제준(金濟焌) 이냐시오, 박봉손(朴鳳孫) 막달레나, 홍금주(洪今珠) 페르페투아, 김효임(金孝任) 골룸바, 김 루시아, 가타리나, 조(趙) 막달레나, 유(劉)대철 베드로, 조증이(趙曾伊) 바르바라, 한영이(韓榮伊) 막달레나, 현경련(玄敬連) 베네딕타, 정정혜(丁情惠) 엘리사벳, 고순이(高順伊) 바르바라, 이영덕(李榮德) 막달레나, 김 데레사, 이 아가다, 민(閔)극가 스테파노, 정(鄭)화경 안드레아, 허(許)임 바오로, 박종원(朴宗源) 아우구스티노, 홍병주(洪秉周) 베드로, 손소벽(孫小碧) 막달레나, 이경이(李瓊伊) 아가다, 이인덕(李仁德) 마리아, 권진이(權珍伊) 아가다, 홍영주(洪永周) 바오로, 이문우(李文祐) 요한, 최영이(崔榮伊) 바르바라,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 등이다. 이들 중에는 1839년을 전후하여 이미 1838년에 순교한 이도 있고, 또 1840년과 1841년에 순교한 이들도 있다. 그러나 ‘기해박해’의 순교자라고 할 때는 이들까지 포함해 하는 말이다. 

 

병오박해 丙午迫害(1846, 헌종12년)

기해박해 후 7년이 지난 1846년 6월 5일, 김대건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시작된 병오박해는 9월 20일 종결됐다. 이 박해로 형벌을 받고 순교한 사람은 성직자 1명, 평신도 8명 등 모두 9명으로 1984년 모두 시성 됐다. 순위도 등산진에서 선주와 사공 등과 함께 체포된 김대건 신부는 9월 16일 어영청을 거쳐 새남터로 끌려가 군문효수를 받았다. 그로부터 3일 뒤인 19일, 신앙을 굳게 지켜오던 현석문도 군문효수형을 받고 임치백, 남경문 등도 장사(杖死)로 순교했다. 병오박해의 여파는 그다지 크지는 않았다. 여러 차례의 박해를 겪어온 신자들은 박해소문을 듣고 피신했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도 교우촌으로 피신했다. 순교자는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를 위시하여 현석문(玄錫文) 가롤로, 남경문(南景文) 베드로, 한이형(韓履亨) 라우렌시오, 우술임(禹述任) 수산나, 임치백(林致百) 요셉, 김임이(金任伊) 데레사, 이간난(李干蘭) 아가다, 정철염(鄭鐵艶) 가타리나 등이다.  

 

병인박해 丙寅迫害(1866~1873, 고종3년)

조선조 말기인 1866년 초에 시작돼 1873년 흥선대원군이 정계에서 실각할 때까지를 박해 기간으로 설정한다. 1866년 베르뇌 주교 등이 3월 새남터에서 순교하며 시작된 박해는 서울뿐만이 아니라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후 병인양요로 인해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열됐다. 병인박해로 순교한 천주교 신자는 대략 8천명에서 1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그 중 대부분이 무명 순교자이고 이름을 알 수 있는 순교자는 유정률(劉正律) 베드로, 남종삼(南鍾三) 요한, 전장운(全長雲) 요한, 최형(崔炯) 베드로,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 장주기(張周基) 요셉, 황석두(黃錫斗) 루가, 손(孫)자선 토마스, 정(鄭)문호 바르톨로메오, 조화서 베르로, 손(孫)선지 베드로, 이명서 베드로, 한원익(韓元益) 요셉, 정(鄭)원지 베드로, 조윤호 요셉, 이윤일 요한 등 이름을 알 수 있는 순교자 중에서 24명만이 시성됐다.

 

한국교회 103위 성인 시복

순교자(martyr) 103위 성인 중 79명은 1925년에, 그리고 24명은 1968년에 시복(諡福)된 후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에 즈음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5월 6일 모두 시성(諡聖)됨으로써 성인품(聖人品)에 올랐다. 한국 성인의 축일은 9월 20일이고, 축일의 명칭은 ‘성 안드레아 김대건과 바오로 정하상과 동료 순교자 대축일’이다. 103명의 성인 중에는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 10명의 선교사(3명의 주교와 7명의 신부)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의 국적이 비록 프랑스일지라도 그들은 한국의 선교사로서, 한국인의 구원을 위해 그들의 목숨을 바쳤으므로 그들 역시 당연히 한국 교회에 속하는 성인들이다.  이상 10명의 선교사를 제외한 93명을 순교시기로 구별할 때 1839년 즉 기해박해 때의 순교자가 67명, 1846년 즉 병오박해 때의 순교자가 9명, 1866년 즉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가 17명이다. 

 

한국 성인들의 신분과 직업은 아주 다양하다. 신분으로 말하면 양반, 중인, 상민 등이 골고루 섞여 있어 승지(承旨)나 선공감(繕工監)과 광흥창(廣興倉)의 관리, 군인, 궁녀 등이 있는가 하면, 상업, 농업, 약국, 인쇄, 서사(書寫), 심지어는 짚신을 삼고 길쌈과 삯바느질 등으로 생계를 간신히 유지한 사람들도 많다. 집안 형편은 거의가 가난하고 궁핍한 편이었으나 최경환, 김효주, 유진길, 김제준, 정화경, 김성우, 임치백 등과 같이 부유한 집안도 있었다. 한국성인 93명 중 성직자는 유일하게 김대건 신부뿐이고 나머지 92명은 모두 평신도이다. 그러므로 한국 성인의 교회활동과 순교는 그 자체가 한국 교회 평신도상이요, 평신도적 영성(靈性)을 나타낸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그들의 용기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서울톡톡] 사종민 | 2013.03.28

 

 

추억의 명화로 로마시대 네로황제의 기독교 박해를 다룬 <쿼바디스> 영화를 보면 로마에서 큰 화재가 나는데 방화범인 네로는 자신의 죄를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씌우면서 이들을 원형경기장에 몰아 넣고 사자들의 먹잇감이 되게 한다. 처형의 시간이 다가오자 감옥에 갇혀 두려움에 떨고있는 신자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찬송을 부르자 감옥 전체로 울려 퍼지기 시작하고, 굶주린 사자들이 으르렁거리는 원형경기장으로 내몰린 그들은 찬송가를 부르며 기꺼이 사자들의 먹이가 된다. 물론 작가적 상상력이 총동원된 픽션이지만 육체가 받는 고통은 잠시뿐이고 이제 곧 하나님을 만난다는 기쁨에 그들은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음을 볼 수 있다.

 


△ “겁내지 마시오. 성모께서 우리와 함께 여기 계시오” (1845.7.23 김대건 신부의 편지에서)

 

200여 년 전 서울의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를 앞둔 천주교인들의 심정은 마치 로마의 원형경기장에 내몰린 기독교인들과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피를 부른 순교의 역사가 있었기에 오늘 한국 천주교회가 굳건히 반석 위에 설 수 있었던 중요한 단초가 된 곳이 바로 한강변 새남터 형장이고, 새남터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교회가 새남터 성당이다. 한양도성 밖 남쪽 한강변 모래사장에 위치한 새남터는 일명 '노들' 혹은 '사남기(沙南基)'라고 불리던 곳으로 조선 초부터 군병들의 연무장(演武場)으로 쓰였으며, 때로는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었다.

 


△ 한강변 새남터에서 김대건 신부의 처형 (조창원 그림)

 


△ 교살형으로 목을 졸라 죽임 (조창원 그림)

 


△ 서울 양화진 절두산에서 목을 잘라 시신을 한강에 버림 (조창원 그림)

 

세조 2년(1456)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된 사육신이 이곳에서 형을 받았고, 순조 1년(1801) 신유박해 때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처형되어 첫 순교자가 된 뒤 주로 천주교 신자들의 사형장이 되었다. 헌종 5년(1839) 기해박해 때 제 2대 조선 교구장 앵베르 ․ 모방 ․ 샤스땅 신부가, 헌종 12년(1846) 병오박해 때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와 현석문 등 신자들이, 병인년(丙寅年)인 고종 3년(1866) 3월 7일부터 11일 사이에 제 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와 브르트니에르 신부, 볼리외 신부 등 프랑스 사제들과 수많은 한국 천주교도가 죽임을 당하였다. 이 박래사건 계기로 프랑스 극동함대의 군사적 보복을 가져왔으니 이것이 병인양요(丙寅洋擾)이다. 병인양요에 대한 응징으로 단행된 한강변 양화진 절두산에서의 대대적인 천주교 신자 처형의 발단은 바로 병인년 초 새남터에서의 천주교인 박해였던 것이다.

 

1950년 한국천주교회 순교 사적지로 지정된 후 1956년에 '가톨릭 순교성지'라는 순교자 현양비가 세워졌고, 이듬해부터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가 사적지를 관리하고 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는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을 맞아 새남터 본당을 건립하였으며, 1987년에는 한국순교성자성직수도회가 한국 전통양식으로 기념 성당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성당에는 새남터에서 순교한 아홉 분의 성인 유해를 안치하고 있으며, 목숨을 바쳐 그리스도를 증거한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모든 신자들이 순교 정신으로 살아가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2006년 9월 3일 순교자 기념관을 개관하였다.

 

새남터에서 순교한 이들의 모습에서 눈 여겨 보아야 할 점은 바로 사제들의 자세와 헌신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는 중국에서 신부 서품을 받고 24세 되던 1845년 8월부터 서울에서 활발한 전교활동을 하였다. 1846년 5월 체포되어 문초를 통해 국법을 어기고 해외에 유학한 사실 및 천주교회의 중요한 지도자임이 밝혀졌고, 같은 해 9월 16일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는데 사실 김대건의 성직자로서의 활동은 1년여의 단기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인 성직자의 자질과 능력을 인정받아 조선교구의 부교구장이 되었고, 투철한 신앙과 신념으로 신도들로부터 존경과 칭송을 한몸에 받았다. 특히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교인들에게 "겁내지 마시오, 우리를 도우시는 성모님이 여기 계시오"라면서 안심을 시켰으며, 신도들과 함께 형장에서 끝까지 배교(背敎)하지 않고 신앙의 순결을 지켰던 것이다.

 

1801년부터 1866년까지 60여 년 간 이어진 박해기간 동안 프랑스 신부들 상당수가 죽임을 당하였는데 외국인이니까 이 나라를 떠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조선 정부의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교인들과 운명을 함께 하겠다며 순교의 대열에 기꺼이 동행하였다. 1883년 10월 서울을 방문하였던 독일인 마엣(P.Mayet)은 <한국의 수도 서울 견문기>에서 "이들 프랑스 선교사들이 고집을 부리지 않고 이 나라를 떠나겠다고만 했더라면 꼭 생명을 잃을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끝까지 굳건한 신앙심으로 한국 신자들을 두고는 이 나라를 떠나지 않겠다고 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새남터는 현재 서울 용산구 이촌로 80-8 (이촌동 199-1)에 있으며, 홈페이지는 www.saenamteo.or.kr이다. 지하철 1호선 용산역 앞에서 17번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 6호선 효창공원앞역 2번 출구에서 2016번 버스를 타고 이촌2동 대림아파트 앞에서 하차 도보로 2분 거리이다. 승용차로는 이촌2동 대림아파트 골목으로 들어가 아파트 정문 앞에서 좌회전하여 직진하면 새남터성당 표시판이 보인다. (서울톡톡)




‘내 영혼 바람되어’ 
(김효근 작사 작곡/ 양준모(바리톤) 노래)
 
그 곳에서 울지마오, 나 거기 없소,
나 그곳에 잠들지 않았다오.
그 곳에서 슬퍼마오, 나 거기 없소,
나 그곳에 잠든게 아니라오.
 
[ 나는 천의 바람이 되어
찬란히 빛나는 눈빛 되어
곡식 영그는 햇빛 되어
하늘한 가을비 되어
 
그대 아침 고요히 깨나면
새가 되어 날아올라
밤이 되면 저 하늘 별빛 되어
부드럽게 빛난다오.
 
그 곳에서 울지마오. 나 거기 없소,
나 그곳에 잠들지 않았다오.
그 곳에서 슬퍼마오, 나 거기 없소,
그 자리에 잠든 게 아니라오. ](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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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을 떠난 게 아니라오,
나 거기에 없소
이 세상을 떠난 게 아니라오.
    
[원어] “A Thousand Winds”
 
Do not stand at my grave and weep.
I am not there, I do not sleep.
I am a thousand winds that blow.
I am the diamond glints on snow.
I am the sunlight on ripened grain.
I am the gentle autumn's rain.
 
When you awake in the morning's hush
I am the swift uplifting rush
Of quiet birds in circled flight.
I am the soft stars that shine at night.
Do not stand at my grave and cry
I am not there, I did not die.
 
(http://cafe.daum.net/arisoosar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