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불교 전래와 이차돈의 순교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2년)
(통일신라 때 이차돈의 순교로 세워진 최초의 불교성지 경주 흥륜사터)
한국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 6월 전진(前秦)의 왕 부견이 순도(順道)스님을 통해 불상과 경전을 보내오면서부터다. 고구려에서는 이때 성문사(省門寺)를 지어 순도를 머물게 했으며 다시 2년 뒤에 아도(阿道)스님이 오자 이불난사(伊佛蘭寺)를 지어 머물게 했다. 《삼국사기》고구려 본기에 있는 이 기록은 한국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된 것을 말해 주는 최초의 기록이다.
백제에는 침류왕 원년(384년)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으로부터 배를 타고 건너왔다. 《해동고승전》은 이때 왕이 몸소 교외에까지 나가 마라난타를 맞았으며 궁중에 초청해 공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같은 사실들은 고구려나 백제가 국가적 차원에서 불교를 받아들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초기 사찰들이 거의가 흥국(興國)․흥복(興福)의 사명(寺名)을 보이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신라의 경우는 고유신앙의 반발 등 약간의 난관을 거쳤으나 법흥왕 14년(527)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계기로 왕실을 중심한 귀족들이 불교를 받아들임으로써 어려움을 쉽사리 극복할 수 있었다. 고구려․백제․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뒤 한국의 고대 불교는 찬란한 황금기를 구가했다. 전국 곳곳에 사찰이 세워지고 국왕으로부터 일반 민중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불교를 신앙했다. 승려들은 중국이나 인도로 유학을 가서 불교의 깊은 뜻을 공부했으며 한편으로는 일본으로 건너가 불법을 전해주었다. 중국으로 유학을 간 승려들 가운데는 중국승려들을 제자로 가르칠 정도로 뛰어난 사람도 있었다.
고구려의 승랑(僧郞: 413~491)은 중국에 가서 구마라습 계통의 삼론학(三論學)을 연구하고 이를 더욱 체계화시켰다. 중국의 무제(武帝)는 중국승려 10명을 뽑아 그가 거주하는 섭산(攝山)에 보내 학문을 계승하게 했다. 또한 신라의 왕손인 원측(圓測: 613~696)은 15세에 중국으로 건너가 범어․서장어 등 6개 국어를 통달하고 유식학(唯識學)을 깊이 연구하여 존경을 받았다.
신라의 의상(義湘: 625~702)도 당에 유학해 화엄학을 깊이 연구하여 방대한 화엄사상을 법계도(法界圖)에 간략하게 요약해 스승을 놀라게 했다. 그는 나중에 귀국해 신라 화엄사상을 크게 선양했다. 의상(義湘)보다 앞서 선배인 자장(慈藏)․원광(圓光)광 같은 신라의 고승들은 호국신앙과 현세이익사상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 불교가 한국사회에 정착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신라에서는 '이 땅이 곧 불국토(佛國土)'이기 때문에 호국(護國)이 호법(護法)이라는 불연국토사상(佛緣國土思想)이 깊게 뿌리내림으로써 불교는 국가의 보호아래 화려하게 발전할 수 있었다. 또 혜숙(惠宿)․대안(大安)․혜공(惠空)․원효(元曉)와 같은 신라의 고승들은 민중 속에 직접 파고들어 그들과 호흡을 같이하면서 교화에 힘씀으로써 불교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불교정착기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인물은 한국불교사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를 차지하고 있는 원효(617~686)다. 그는 99부 2백 40권이라는 방대한 저술을 남긴 사상가로서 원효는 당시 중국의 불교가 경론(經論)을 중심으로 한 종파가 생겨 자기 종파의 입장만 고수하려는 경향에 대해 일대비판을 가하고 불교 본연의 일미(一味)로 귀일시키려는 화쟁불교(和諍佛敎)를 제창했다.
그가 쓴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을 비롯한 많은 저서들은 중국불교에서도 자주 인용했을 정도다. 669년 신라 한반도를 통일하고 917년 고려왕조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2백 50년이라는 긴 세월을 유지했다. 통일신라는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전 ․후기로 특징이 나누어진다. 전기는 원효․원측․의상은 물론 의적․도증․승장․둔륜․대현․현일․신방 등이 활약했던 시기다. 이들의 저술로 보면《반야경(般若經)》《법화경(法華經)》《화엄경(華嚴經)》《무량수경(無量壽經)》《범망경(梵網經)》《유가론(瑜伽論)》《임명론(因明論)》《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등 광범하다.
◇ 통일신라 이차돈(異次頓, 501~527)의 순교(殉敎)
(이차돈 표준영정)
<삼국유사>에 인용된 일념(一念)의 <촉향분례불결사문 髑香墳禮佛結社文>에 의하면 이차돈(異次頓)은 속성이 박(朴)씨며 아버지는 알 수 없고, 할아버지는 아진종랑(阿珍宗郞)으로 습보 갈문왕(習寶葛文王)의 아들이다. 그러나 같은 책에 인용된 김용행(金用行)이 찬한 <아도비문 阿道碑文>에는 아버지는 길승(吉升), 할아버지는 공한(功漢), 증조부가 걸해대왕(乞解大王)이라 했다. 그의 이름은 거차돈(居次頓)·염촉(厭觸 : 또는 猒觸)·이처(伊處)·처도(處道)라고도 한다. 순교 당시 국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내사사인(內史舍人)의 직책에 있었다.
범행(凡行)이 빛나고 착실한 사람으로서 심지(心志)가 곧고 심중(深重)하며 의로움에 분발하는 용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신라 법흥왕이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는 마음을 늘 갖고 있었는데 귀족들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이차돈이 왕과 함께 그 상황을 타개할 방안을 강구했다. 이차돈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불교를 융성시키고자 했으나 왕은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부처의 뜻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비록 제가 죽더라도 도를 펴게 된다면 유감이 없겠다"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그는 왕과 비밀리에 약속한 뒤 왕명을 가장하여 도성내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지었다. 공사가 시작되자 신하들의 논란이 분분했다. 왕이 신하에게 물으니 모두 "지금 승려를 보니 깎은 머리에 옷차림이 누추하고, 하는 이야기가 괴이하니 이를 따르면 후회가 있을 것이므로 죽을 죄를 짓더라도 명을 받들지 못하겠다"고 했다. 이차돈은 "비상한 사람이 있은 뒤에 비상한 일이 있다. 내가 들으니 불교의 이치는 오묘하여 불가불 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왕은 "너 혼자만 다른 이야기를 하니 양쪽을 좇을 수가 없다"고 하여 죽이려 했다.
이에 차돈은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기를 "내가 불법을 위해 형장에 나가지만 의리(義利)를 일으키려 한다. 부처가 만일 신통력이 있다면 죽은 뒤에 반드시 이적(異跡)이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의 목을 자르자 머리가 하늘을 날아 금강산(金剛山: 경주 북쪽)에 떨어지고 잘린 목에서는 흰 젖이 한 장(丈)이나 솟아났으며, 순간 주위가 어두워지고 하늘에서는 기묘한 꽃들이 떨어지며 땅이 크게 진동했다. 그러자 귀족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유해를 금강산에 장사지냈다.
그 이후로는 불법을 받들고 귀의할 것이라고 맹세했다. 이로써 신라에 불교가 널리 퍼져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인용된 <향전 鄕傳>에 의하면 이차돈은 왕과 비밀리에 약속하고 실행에 옮긴 것이 아니라 자의적으로 절을 짓도록 한 것으로 되어 있어 차이가 있다. 순교 당시 이차돈의 나이는 22세 혹은 26세로 전한다.
그의 순교를 계기로 법흥왕은 529년(법흥왕 16) 살생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고, 신라 최초의 불교사찰인 흥륜사(興輪寺)를 천경림에 짓기 시작해 544년(진흥왕 5)에 완성했다. 절을 지을 때 사용된 재목은 모두 천경림에서 구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곳은 수목이 울창하여 재래신앙이 행해지던 장소였다고 짐작된다. 그런데 흔히 이차돈의 순교와 동시에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었다고 간주하지만, 반대 의견도 있다.
즉 <삼국유사>에서는 흥륜사를 짓는 것이 527년 에 비로소 시작하여 534년에 천경림을 베어내어 공사를 일으켰다고 했고, <고승전>에서도 534년에 천경림의 나무를 베어내고 절을 지었는데 이것이 신라 창사(創寺)의 시작이라고 한 것이 그 근거가 된다. 이렇게 여러 가지 전승이 전하는 것은 신라에서 불교가 공식적으로 수용되는 과정이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리 순탄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차돈의 순교 이전에도 이미 묵호자(墨胡子)나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신라에 와서 불교를 펴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던 사실이 있었다. 이는 신라 귀족들의 폐쇄성이라든지 재래신앙의 강고함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불교의 공인은 기본적으로 신라의 정치체제에서 왕권의 강화과정과 함께 이해되고 있다. 즉 신라의 발전과정에서 분화되고 보다 복잡해진 사회를 일원적으로 포괄하는, 한 차원 높은 규범과 이를 뒷받침하는 지배이념이 필요했고, 불교는 그에 적합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것은 다원적인 귀족세력을 강력한 왕권 아래에 두는 것과 밀접한 연관을 가졌다. 상대등(上大等)이 설치되어 귀족세력과 왕권의 완충역할을 맡게 되는 것도 불교가 공인된 직후라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후 불교는 왕실의 초월적인 권위를 나타내는 데 적극적으로 이용되었고, 법흥왕과 왕비는 만년에 승려가 되기도 했다. 따라서 이차돈의 순교와 관련된 설화는 불교가 융성한 뒤에 꾸며진 신비한 내용이지만, 불교 수용을 전후한 시기의 왕실과 귀족세력 간의 갈등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도 잇다. 이차돈이 순교한 뒤 왕실의 나(內人)들이 명복을 빌기 위해 자추사(刺楸寺)를 지었는데, 집집마다 이 절에서 치성을 드리면 반드시 대대로 영화를 얻고 여러 사람이 도를 행하여 불교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817년(헌덕왕 10)에 그의 순교장면과 함께 사적을 새긴 6각석당(六角石幢)이 경주 백률사(柏栗寺)에 세워졌다. 이 석당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이관 소장되어 있다. 9한국문화콘텐츠)
아도가 신라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파하려 할 때, 모든 신하가 이를 반대하였다. 당시 법흥왕은 불교를 국교(國敎)로 하고자 했으나 재래의 무교(巫敎)에 젖은 귀족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직 이차돈만이 불교의 공인을 적극 주장하여, 당시 불교에 관심이 있는 법흥왕으로부터 절 짓는 일을 허락받았다. 그런데 절을 짓기 시작한 그 해부터 가뭄과 장마가 겹쳤으며, 질병이 돌기 시작하여 많은 백성이 죽었다. 그러자 불교를 반대하던 신하들이 이차돈 때문이라고 왕을 충동하여 처형하게 하였다.
이때 이차돈은 혼자 불교의 공인(公認)을 주장하다가 순교를 자청하여 마침내 주살되었다. 그는 죽을 때 "부처가 있다면 내가 죽은 뒤 반드시 이적(異蹟)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과연 목을 베니 피가 흰 젖빛으로 변하여 한 길이나 솟구쳤고, 하늘이 컴컴해지더니 꽃비가 내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에 모두 놀라고 감동하여 528년 드디어 불교를 공인하기에 이르렀다. 전설에는 그가 죽을 때 머리가 날아가 떨어진 곳이 경주 북쪽에 있는 금강산이며, 그곳에 817년 헌덕왕 때 승려 혜륭이 무덤을 만들고 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차돈(501~527)의 가계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왕족인 것으로 추정되며, 성씨는 김씨라는 설과 박씨라는 설이 혼재한다. 김씨 설에 의하면 내물왕(재위 356~402)의 아들 습보 갈문왕(?~?)의 후손이고, 박씨 설에 의하면 흘해왕(재위 310~356)의 후손이 된다. 그러나 흘해왕과는 무려 200년의 차이가 나므로 4대손이 되기에는 연대적으로 맞지 않아 오류가 발생하기도 한다. 증조부는 종(宗)이고 아진찬을 역임했고, 조부는 공한(功漢), 아버지는 길승(吉升)이다. (위키백과)
◇ 이차돈의 순교 설화 (삼국유사)
(이차돈의 순교비 탁본)
<촉향분 예불결사문 髑香墳禮佛結社文>에서 통일신라 때 경주 남간사(南澗寺) 승려 일념(一念)이 이차돈(異次頓)의 묘에 예불하는 결사문을 지은 글이다. 그 내용은 <삼국유사> 권3 원종흥법(原宗興法)· 염촉멸신조(厭觸滅身條)에 수록되어 있다. 이차돈 순교로부터 250여 년이 지난 9세기 초에 들어와 신라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여러가지 사업이 추진된다. 817년(헌덕왕 9)에 흥륜사(興輪寺)의 영수선사(永秀禪師)는 이차돈의 무덤에 예불할 향도(香徒)를 모아 매월 5일 그 영혼의 묘원(妙願)을 위해 단을 만들고 법회를 개최하였다. 또 818년에는 국통(國統) 혜륭(惠隆)과 법주(法住) 효원(孝圓), 김상랑(金相郎)과 대통(大統) 녹풍(鹿風), 대서성(大書省) 진서(眞恕)와 파진찬 김의(金嶷) 등이 이차돈의 무덤을 수축하고 비를 세웠다. 일념(一念)이 지은 이 결사문은 영수선사가 이차돈의 무덤에 예불할 향도를 모아 법회를 개최할 때 지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결사문은 이차돈의 순교에 관한 일을 자세히 기록한 중요한 사료로서 한국 불교사와 신라문화사 연구의 중요한 사료가 된다. 다음은 이 <촉향분 예불결사문 髑香墳禮佛結社文>을 번역한 것이다. 촉향분(髑香墳)은 이차돈의 묘를 지칭한 것이다. ----------------------------------
신라본기(新羅本記)에 보면 법흥대왕 즉위 14년(527)에 소신(小臣) 이차돈(李次頓)이 불법을 위하여 제 몸을 죽였다. 곧 소량(簫梁=梁武帝) 보통 8년 정미년(527)에 서천축(西天竺)의 달마대사(達磨大師)가 금릉(金陵)에 왔던 해다. 이 해에 또한 낭지법사(郎智法師)가 처음으로 영추산에서 법장(法場)을 열었으니, 불교의 흥하고 쇠하는 것도 반드시 먼 곳(중국)과 가까운 곳(신라)에서 같은 시기에 서로 감응했던 것을 여기서 믿을 수가 있다. 원화 연간(元和年間)에 남간사(南澗寺)의 사문 일념 (一念)이 촉향분예불결사문(髑香墳禮佛結社文)을 지었는데, 이런 사실을 자세히 실었다. 그 대략은 이렇다.
통일신라 법홍대왕이 자극전에서 등극(登極)했을 때에 동쪽의 지역을 살펴보시고, 「예전에 한나라 명제(明帝)가 꿈에 감응되어 불법이 동방에 유행하였다. 내가 왕위에 오른 후로부터 인민을 위하여 복을 닦고 죄를 없앨 곳을 마련하려 한다.」 고 말씀하셨다. 이에 조신(朝臣)들은 그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다만 나라를 다스리는 대의만을 지켜 절을 세우겠다는 신략(神畧)을 따르지 않았다. 대왕은 탄식하면서 말했다.
이 때, 내양자(內養者=小臣) 성은 박(朴), 자(字)는 염촉(厭髑)이라고도 하고 또는 염도(厭覩) 등으로도 하는데 그의 아버지는 자세히 알 수 없고 할아버지는 아진(阿珍) 종(宗)으로서 곧 습보(習寶) 갈문왕(葛文王)의 아들이다. 신라의 관작(官爵)은 모두 17등급인데 그 제 4위는 파진찬(波珍飡)이라고도 한다. 종(宗)은 그 이름이요 습보(習寶)도 또한 이름이다. 신라 사람은 대체로 추봉(追封)한 왕을 모두 갈문왕이라 했는데, 그 이유는 사신(史臣)도 또한 자세히 모른다고 했다.
그때 그는 사인(舍人)의 자리에 있었다. 왕의 얼굴을 쳐다보고 그 심정을 눈치채어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말했다. 사인은 말했다. 왕은 말했다.
“성인의 지혜는 원래 만세계를 위한 것, 구구한 여론이야 조금도 따질 것이 없도다. 법륜(法輪)이 풀려 금륜을 좇아 전해지니, 요순(堯舜)시대가 바야흐로 불교로 높아지네”
성지종래만세모(聖智從來萬世謀) 구구여의만추호(區區輿議慢秋毫) 법륜해수금륜전(法輪解遂金輪轉) 순일방장불일고(舜日方將佛日高)
이것은 원종(原宗 :법흥왕)에 대한 찬사다.
循義輕生已足驚 (순의경생이족경)
이것은 염촉(厥髑=이차돈)에 대한 찬사다. <三國遣事>에서 출처:http://cp0433.culturecontent.com
◇ 이차돈의 순교비 (통일신라)
△ 불교를 선교하다 순교한 이차돈의 순교 모습을 새긴 통일신라시대의 백률사 석당기(柏栗寺石幢記). (높이 104㎝, 각 면의 너비 29㎝.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정완영 작시/ 김회경 노래 곧은 줄기 추스려서 목마름도 달래었고, 푸른 바람 받아내려 연잎으로 실었거니 왕생극락 히신 날에 연화대에 오르소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깊은 물 달그림자 잠긴 것이 죽음이라, 구름과 달그림자 본래 실상 없는 것을 한 줄기 푸른 연기 열반경에 드옵소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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