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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애청곡

[민족가요] '선창' (船艙 1941) - 고운봉 노래

잠용(潛蓉) 2013. 8. 12. 17:45

(선창: 사진 출처: kimerian)

 

'선 창' (船艙)
趙鳴岩 작사/ 金海松 작곡/ 노래 高雲峰

(1941년 오케레코드 발매)

< 1 >
울랴고 내가 왔던가?
웃을랴고 왔던가?
비린내 나는 埠頭 가엔
이슬 맺힌 百日紅

그대와 둘이서
꽃씨를 심던 그 날도
지금은 어데로 갔나?
찬 비만 나린다~

< 2 >
울랴고 내가 왔던가?
웃을랴고 왔던가?
울어 본다고 다시 오랴?
사나히의 첫 純情

그대와 둘이서
希望에 울던 港口를
웃으며 돌아가련다
물새야 울어라~



(선창 광고지 - 노래 고운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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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 해설]
선창(船艙)은 바닷가에 배가 닿을 수 있도록 다리처럼 만든 시설을 말한다. 지금은 흔히 ‘부두’라고 순화하여 사용한다. 가요곡 <선창 船艙〉은 1941년에 가수 고운봉이 오케레코드에서 발표한 한국의 트로트 곡이다. 극작가 겸 작사가였던 조명암이 가사를 쓰고, 천재 음악가로 유명한 김해송이 작곡했다. 가수 고운봉은 〈선창〉을 발표할 당시 데뷔한 지 2년이 된 신예급 가수였다. 고운봉은 이 노래를 히트시켜 가수로서의 입지를 굳혔고, <선창〉은 고운봉의 대표작으로 남았다.

그러나 광복 후 조명암은 좌익 활동을 하다가 월북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고위직을 거쳤고, 김해송 또한 한국 전쟁 중 행방이 묘연해져 월북설과 납북설이 동시에 떠돌면서 두 사람의 이름은 오랫동안 대한민국에서 언급할 수 없었다. 이 노래는 작사자와 작곡자의 이름을 다른 사람(고명기 작사, 이봉룡 작곡)으로 바꾸어 금지곡이 되지 않았다. 제6공화국 수립 이후 월북 예술인이 해금되면서 원래의 작사가와 작곡가를 밝힐 수 있었으며, 그동안 작자로 알려졌던 이들이 소송을 걸어왔으나 결국 원작자가 드러난 일화가 있다.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라는 도입부의 가사가 잘 알려져 있다. 김화랑이 연출한 1960년 영화 《울려고 내가 왔던가》는 이 유명한 가사에서 제목을 따왔다. 이어지는 가사 내용은 비 오는 날 선창가를 거닐며 헤어진 사람과의 행복했던 추억을 되새기는 것이다. 이별의 아픔을 절묘하게 묘사하여 큰 사랑을 받았다. 대한민국에서는 국민적 애창 가요로 남아 있으며, 일제 강점기 동안 발표되어 널리 알려진 곡이라 북조선에서도 '계몽기 가요'로 분류되어 계속 불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0년 고운봉의 고향인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온천에 노래 가사를 새긴 노래비가 세워졌다.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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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의 가요이야기 - 26]
船艙' 하나로 한국 가요사를 빛낸 高雲峰

 

[사진] 고운봉 독집음반 표지

돈궤 훔쳐 上京 가수 꿈 이뤄...
서민애환 달랜 200여곡 '대중가수 1세대'

초창기 가수들의 소년시절 이력을 두루 살펴보면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인물이 가수가 되기 위해 집안에서 돈을 훔쳐 달아난 경우가 많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가슴 속에서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예술적 욕망과 그것을 전혀 뒷받침해주지 못하는 냉혹한 환경 사이의 갈등과 괴리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식민통치하였던 1930년대 당시 부모들은 자신의 귀한 자녀가 판검사나 면서기가 되겠다면 적극 도와주었지만 만약 화가나 시인, 혹은 가수가 되겠다고 하면 크게 놀라며 만사를 젖혀두고 뜯어말리던 분위기였지요. [사진] '선창' 가사지 (위)

특히 가수지망에 대해서는 몹시 흉하게 생각하며 인간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풍각쟁이로 규정하던 관행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런 몰이해와 악조건 속에서도 자신의 뜻을 꿋꿋하게 관철시키며 대중예술의 길을 걸어간 경우가 더러 있었던 것입니다. 고복수와 남인수가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려는 가수 고운봉(1920∼2001)의 경우도 비슷한 사례였습니다. 1920년 2월9일 충남 예산에서 출생한 고운봉은 본명이 고명득입니다. 대중가요 작사가 고명기의 아우였지요. 1937년, 그러니까 나이 17세 되던 해에 예산농업학교를 마치고 고명득은 아버지의 돈궤에서 얼마간의 돈을 훔쳐내어 서울로 무작정 달아났던 것입니다. 상경 이유는 오로지 유명한 가수로 성공을 하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습니다. [사진] '국경의 부두' 광고지

 

서울로 온 고명득은 당시 자신이 좋아하던 강석연, 채규엽, 이난영, 이은파, 최남용 등 일급가수들이 많이 포진되어 있던 태평레코드를 찾아왔지요. 그 무렵 태평레코드를 지휘하던 분은 극작가이자 작사가로 활동하던 문예부장 박영호 선생이었습니다. 박 선생은 마침 한반도의 북부지역과 만주 일대로 악극단 공연을 떠나기 위해 몹시 바쁜 시간이었지만 작곡가 이재호와 함께 고명득의 노래실력을 테스트해주었습니다. 두 사람은 재능 있는 가수를 발굴해내는 탁월한 안목과 식견을 갖춘지라, 곧바로 고명득을 태평의 전속가수로 채용하고 '운봉'이라는 예명을 주었습니다. 그리곤 잠시도 쉴 틈이 없이 무려 3개월 동안의 악극단 순회공연에 참가하도록 했습니다.  그토록 가수가 되고 싶었던 고명득에게는 실로 꿈같은 세월이었습니다. 이제는 당당하게 태평레코드 전속가수의 신분으로 취입을 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던 것이지요. 드디어 1939년 여름, 고운봉은 자신의 첫 데뷔곡을 발표했는데 곡명은 '국경의 부두'(유도순 작사, 전기현 작곡, 태평 8640)였습니다. 이 노래를 작사한 유도순 선생은 이미 시인으로 데뷔하여 시집 '혈흔의 묵화'를 발간한 경력을 가졌지요. 작곡가 전기현 선생의 품격 높은 솜씨도 정평이 높았습니다. 여기에다 고운봉의 잔잔한 애수가 느껴지는 창법으로 압록강 국경 지역의 처연한 분위기를 노래했으니 대중들의 가슴이 설레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노래의 가사는 압록강, 농암포, 자후창, 신의주, 유초도, 진강산 따위의 지명을 떠올리며 우리의 잃어버린 고향, 눈물에 젖은 국토를 은근히 암시했던 것이지요. 뒷면에 실린 '아들의 하소'도 고향에 대한 짙은 그리움을 나타낸 애잔한 작품입니다. 당시 태평레코드 작품의 광고지에는 고운봉을 '순정가수'로 소개했습니다. 그만큼 맑고 청아하며 애수에 젖은 창법이라는 점을 부각시킨 것이지요. 고운봉은 이 두 곡으로 단번에 인기가수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연이어 1940년 초반까지 두루 발표한 곡들은 '홍루야곡' '남월항로' '님 찾는 발길' '남강의 추억' '달뜨는 고향' '고향생각은 병이더냐' '흐르는 트로이카' '한없는 대륙길' '안해야 울지 마라' 등입니다.

 

이 가운데서는 '남강의 추억'(무적인 작사, 이재호 작곡, 태평 8662)이 빅 히트곡입니다. 이 노래 한 곡으로 항상 오케레코드사에 뒤지기만 했던 태평은 마침내 라이벌로 평가를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작사자 무적인은 작곡가 이재호의 또 다른 예명입니다. 항상 당대 최고의 가수들을 거느려야만 직성이 풀렸던 오케레코드사 이철 사장은 1940년 가을, 고운봉을 오케로 스카우트했습니다. 그리고는 '홍등일기' '밤차의 실은 몸' '모래성 탄식' '결혼감사장' '할빈서 온 소식' '선창' '백마야 가자' '일월이 걸어간 뒤' '광명을 찾어' 등을 발표시켰는데, 탁월한 대중프로모터의 자질을 지녔던 이철 사장의 선택은 정확히 들어맞았습니다. [사진] 콜럼비아에서 발매된 '통군정의 노래' 상표

1941년 여름, 그 무더위 속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힘겹게 발표한 노래 '선창'(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 오케 31055)은 공전의 히트곡으로 떠올랐습니다. 행인들이 유행가 '선창'의 곡조를 흥얼거리며 다니는 풍경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
비린내 나는 부둣가엔 이슬 맺힌 백일홍
그대와 둘이서 꽃씨를 심던 그날도
지금은 어데로 갔나 찬비만 나린다.

유성기 위에 SP음반을 올리고 오랜만에 듣는 유행가 '선창'은 험한 세월을 힘겹게 통과해 오느라 서걱거리는 잡음이 절반입니다. 하지만 그 서걱거림 속에서 들려오는 고운봉의 슬픔을 머금은 창법과 쓸쓸한 여운은 가슴 밑바닥에 켜켜이 쌓인 우리들 젊은 날의 미련과 후회를 한 바탕 대책 없이 휘저어 놓고야맙니다. 지난날 우리는 얼마나 많은 꿈과 이상을 가졌고, 또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과 열정으로 가득 찼던 것입니까? 이제 그 살뜰한 젊음의 추억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요? 식민지 시절, 학생과 지식인층 사이에서 이 노래는 그렇게도 많이 애창이 되었다고 합니다. 노래 가사도 훌륭하고 작곡도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거기다가 가수의 창법 또한 최상의 수준에 이르렀으니 그야말로 작사, 작곡, 노래의 세 박자가 완전히 일치를 이룬 절창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었지요. 이런 본보기는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분단 이후 작사자와 작곡가가 월북, 혹은 납북돼 작사, 작곡이 다른 분으로 슬그머니 바뀐 괴기적 사례 중의 하나였습니다. 고운봉은 1942년에 다시 콜럼비아레코드로 소속을 옮깁니다. 이후 '통군정의 노래' '황포강 뱃길' 등을 비롯하여 대여섯 곡을 발표하지만 이 가운데는 친일적 성향의 작품들이 더러 포함되기도 했습니다.

 

광복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고운봉은 특이하게도 10여 년 동안 재즈와 록, 칼립소풍의 미국 대중음악에 심취하여 연습을 하다가 1958년에 돌아옵니다. 1950년대 후반 고운봉은 또 한 곡의 히트곡을 발표하게 되는데 '명동블루스'(이철수 작사, 나음파 작곡)가 바로 그것입니다. '명동블루스'는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명동, 그 폐허 위에서 다시 새로운 삶의 의지를 불태워가던 당시 지식인들의 내면풍경을 실감나게 다룬 명곡입니다. 1970년대로 접어들어 가수 고운봉은 흘러간 옛 노래를 자신의 스타일로 리바이벌한 음반을 발표하여 가요팬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2000년에는 충남 예산의 덕산온천에 '선창' 노래비가 세워졌는데, 고운봉은 이날 '선창'을 눈물로 열창했습니다. 짙은 우수를 바탕에 깔고 있으면서도 깔끔하고 점잖은 창법, 적절한 울림으로 깊은 호소력을 발휘한다는 평을 받았으며, 일생을 통해 200여곡의 작품을 발표했던 가수 고운봉. 그는 2001년 여름에 영영 이승을 하직했습니다. [글: 이동순/ 시인·영남대 국문과 교수]

 

고운봉 - 선창 (1941)


선창 - 고운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