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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애청곡

[민족가곡] '봉선화' (鳳仙花 1920) - 홍난파 작곡, 김봉임 노래

잠용(潛蓉) 2013. 8. 27. 07:38

 

 

'봉선화' (鳳仙花 1920)
김형준 작사/ 홍난파 작곡/ 노래 김봉임

(1)
울 밑에 선 鳳仙花야 네 모양이 凄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2)
어언간에 여름 가고 가을 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侵擄하니
落花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凄凉하다.
(3)
北風雪寒 찬 바람에 네 形體가 없어져도
平和로운 꿈을 꾸는 너의 魂은 예 있으니
和暢스런 봄 바람에 還生키를 바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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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帝에 노예가 된 우리 민족을 처량한 저 鳳仙花에 비유하며
句句節節 조국광복을 희구하는 마음으로 작곡했으니
'北風雪寒' 같은 그들에 의해 禁止曲이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하였다.<잠용>

 


('봉선화' - 메조소프라노 정영자)

 


'봉선화' (鳳仙花) 작곡 배경

 

경기도 화성군 남양읍에 있는 홍난파 생가


 

장독대 옆에 외롭게 피어있는 겨레의 꽃 '봉선화'

 

봉선화 꽃물 들이고 물든 손톱이 첫눈 내릴 때까지 남아 있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로 많은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봉선화(鳳仙花)가 장맛비에 젖어 홀연히 피었다. ‘봉숭아’라고도 불리는 봉선화는 4~5월에 씨를 뿌리면 6월 이후부터 꽃이 피기 시작한다. 그리고 씨를 뿌리지 않아도 작년에 스스로 터뜨린 씨앗이 올봄 자연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싹을 트고 꽃을 피운다. 그런데 봉선화의 꽃말이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Don't turch me)'인데, 그 이유는 가을날 잘 익은 봉선화 씨앗을 '툭!' 건드리면 씨앗 주머니가 '탁!' 터지면서 사방으로 터지기 때문dlek. 그 까닭은 다음 전설에서 유래하였다.

옛날도 아주 머언 옛날...
올림푸스 궁전에서 커다란 연회가 열렸는데 잔치를 준비한 주인은 손님으로 참석한 신들에게 무엇을 대접할까 고민하다가 황금 사과를 준비하기로 했다. 이 황금사과는 보통 사과가 아니라 먹기만 하면 가장 젊을 때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평생을 살 수 있는 신기한 사과였는데..

 

그런데 그 사과 한 개가 그만 없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어느 장난꾸러기 심술궂은 신이 장난을 치려고 숨긴 것이었는데,주인은 그날 음식을 나르던 여인을 의심하게 되었고, 주인이 너무 화를 내는 바람에 심술궂은 신은 그만 자기가 저지른 장난이었다고 고백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의심을 받은 그시녀는 궁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너무도 억울했던 그녀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누명을 벗고자 필사적으로 호소했지만 자기 결백을 증명하지 못하고 마침내 죽게 되었다. 마음 고생만 하다가 끝내 슬픈 최후를 맞이한 그 여인의 무덤에서 이듬해 아름다운 봉선화가 피어났다. 그래서 지금도 봉선화는 누가 그 씨앗을 살짝 건드리기만해도 자기의 결백을 증명하려고 씨 주머니를 터뜨려 자신의 속 마음을 내보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 가곡 ‘봉선화’는 국민 가곡이면서 우리나라 금지곡 제1호를 기록하였다. “울밑에선 봉선화”에 얽힌 사연은 다음과 같다. 일제시대 해외에 나가 음악공부를 하다 귀국한 홍난파는 서울에서 대중계몽에 이바지하려고 잡지를 발간했는데 자금난으로 그만 잡지가 폐간이 되자 우울한 심정을 안고 경기도 고향 마을로 내려 갔다. (사진: 젊은 시절 홍난파) 


그런데 그 사이 고향 마을도 많이 피폐해져 홍난파의 울적한 심사만 더해 주었다. 이때 이웃집에 사는 봉선(鳳先)이란 처녀가 찾아와 “오빠, 이젠 오빠의 바이올린 소리도 다 들었네” 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곡조만 듣고 싶다고 부탁했다. 집이 가난해서 학교도 가지 못하던 봉선이는 그 동안 홍난파에게 글도 배우고, 노래도 배웠다. 그래서 봉선이는 홍난파를 마치 친 오빠처럼 따랐던 것이다, 그녀는 봉선화를 누구보다 좋아해 해마다 자기집 뜨락은 물론 홍난파의 생가 울타리 밑에도 봉선화를 손수 심어 주었다. (사진: 생가 울밑에서 홀로 핀 봉선화)


그러던 그녀가 17살이 되는 해, 자기 아버지가 그만 병으로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살길이 막히자 그녀는 방직공장에리도 일하러 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별을 앞두고 홍난파를 찾아왔는데... 홍난파는 ‘아리랑’ 선율을 켜려고 활을 그으면서 정말 가슴 저미는 서글픔과 서러움, 그리고 울분을 안고 뒤엉킨 감정에 새로운 곡상이 떠올라 다시 활을 그어 나갔던 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듣고 있는 가곡 ‘봉선화’다. 작곡가는 울밑에 처량하게 피어 있는 봉선화를 볼 때마다 이 곡을 타면서 봉선이를 생각했고, 또 한편 일제의 강압에 못이겨 고향을 떠난 나라 잃은 민족의 슬픔을 통탄했다. 이 무렵 시인 김형준이 이 곡에 깃든 사연을 그대로 가사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이상은 <파란사전>에서 발췌한 것인데,  한편 나운영이 홍난파 선생님에 대한 글을 1965년 <사상계>에 기고한 원고는 <http://launyung.co.kr/write/su2-27.htm>에 게재되어 있다. 가곡 ‘봉선화’를 사랑하는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란다. (글: minbumkr 제공)

 

◇ 홍난파 (洪蘭坡) 약력 (1898.4.10 ~1941.8.30)

우리나라 개화기에 활동한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로 본명은 영후(永厚)다. 경기도 화성군 남양읍 활초리에서 홍순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마을 글방에서 한학을 배웠고 1910년 황성 기독교청년회 중학부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바이올린을 구입하여 열심히 음악수업을 했다. 15세 되던 해에는 한국 최초의 음악전문교육기관인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과에 입학하여 성악을 전공했고, 졸업 후에는 다시 기악과에 입학하여 김인식 선생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졸업 후 조선정악전습소의 보조교사가 되었다. 다시 1918년 일본에 유학하여 우에노(上野) 음악학교에 입학했다가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잠시 귀국했다. 3·1운동 후 일본으로 다시 돌아가 복학을 신청했으나 받아주지 않자 좌절하고 다시 귀국했다. 그는 도쿄[東京] 유학시절 비록 일본에서 발간한 것이지만 <삼광>이라는 한국 최초의 음악잡지를 발간했다. 귀국 후 <매일신문사>에서 기자생활도 했으며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1920년 4월 바이올린곡으로 작곡한 <애수>라는 곡의 악보를 그의 단편소설집 <처녀혼>의 끝에 실었는데, 1925년에 김형준에게 가사를 부탁하여 만든 노래가 바로〈봉선화〉이다. 1922년 경상악우회 주관으로 만들어진 연악회(硏樂會)에서 음악 보급에 힘썼다. 1925년 한국 최초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으며 국내 최초의 음악잡지 <음악계>를 창간했고 <창조>지에 <음악만필>을 집필하기도 했다. 1926년 일본 도쿄 고등음악학원에 편입하면서 도쿄 교향악단 (지금의 NHK 교향악단)의 제1 바이올린 연주자로 입단했다.

 

1929년 졸업 후 귀국하여 창작동요 100곡을 수록한 <조선동요 100곡집> 상권을 연악회를 통해 간행했다. 1931년 2월 조선음악가협회를 결성하고 그 상무이사를 역임했으며, 빅타레코드사의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홍성유, 이영세 등과 난파 트리오라는 한국 최초의 바이올린 3중주단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미국 시카고 셔우드 음악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933년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로 있으면서 <조선동요 100곡집> 하권을 펴냈다. 1936년 경성방송국 양악부 책임자로 취임하여 경성방송관현악단 (지금의 KBS 관현악단)을 조직하고 그 지휘자로 활약했다.

 

1937년 한국 최초로 교향곡 연주를 지휘했는데, 곡은 모차르트 교향곡 제41번 C장조 <주피터 교향곡>이었다. 1938년 경성음악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했고 연악회를 통해서 <음악만필>을 간행했다. 조선음악협회의 평의원으로 있으면서 이광수 작사의 국민가요 <희망의 아침>을 작곡하기도 했다. 1941년 늑막염이 재발하여 경성요양원에서 사망했다. 1954년 난파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조선동요 100곡집>을 재간행, 1968년 수원 팔달공원에 <고향의 봄> 노래비가 건립되었고, 1969년 난파음악상이 제정되었다.

 

주요 작품으로 바이올린 곡 <애수의 조선>· <로만스>·<여름밤의 별들>·<라단조 가보테>·<동양풍 무곡>, 가곡 <성불사의 밤>·<사랑>·<금강에 살으리랐다>, 동요 <병아리>·<고향의 봄>·<개나리>·<할미꽃> 등이 있다. 또한 <음악일화>·<동서음악의 비교>·〈조선문화 20년> 등의 평론과 <서울 계신 K 형께>·<첫 무대의 기억>·<악단의 뒤에서> 등의 수필과 <최후의 악수>·<처녀혼> 등의 소설도 썼다.

 

한때 홍난파가 <흥사단가>를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1996년 정부는 김세형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면서 그가 이 곡을 작곡했다고 밝힘으로써 <흥사단가>의 작곡자는 홍난파가 아니라 김세형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홍난파의 대표곡인 <봉선화>를 비롯해 그가 작곡했다는 여러 곡들이 친일 행위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논란을 빚고 있으나 그에 대한 평가는 아직까지 정립되지 않은 상태이다.

(자료: 브리태니커)

 

◇ 민족가곡 '봉선화'
홍난파(洪蘭坡)가 바이올린 독주곡으로 만든 <애수>의 선율에 김형준(金亨俊)이 시를 붙인 곡으로 1920년에 발표되었다. 당시 창가(唱歌)의 단계를 벗어난 한국 최초의 예술가곡이라고 음악계에서는 널리 회자되었다. 일제 강점기 비운에 처한 나라와 민족을 봉선화에 비유하여 일제에게 억압당하고 있는 민중의 울분을 표현한 노래로 형식은 9/8박자, 바단조의 곡이다. 일제의 압박에 수난당하는 민족의 설움을 상징한 노래라 하여 일제에 의해 가창이 금지되기도 하였지만 오히려 민족의 정신적인 저항 수단으로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널리 애창된 민족적 애창가곡이 되었다. 특히 소프라노 김천애(金天愛)가 이 곡을 불러 널리 보급하였고, 지금까지도 애창되고 있다. 

 

◇ '홍난파의 親日을 이제는 덮어다오'

지난 1992년 8월, 문화관광부(당시 문화부)는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된 난파 홍영후(1898∼1941)에 관한 자료를 각 언론기관에 나눠주었다. 이 자료에 의하면 홍난파가 '봉선화' 등 민족 가곡의 효시가 된 노래의 작곡자이고, 1936년 일본 앞잡이 흥사단 단가를 작곡했다는 까닭으로 수감된 뒤 고문받은 후유증 때문에 44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로부터 4년 뒤인 1996년 3월, 흥사단은 문화관광부(당시는 문체부)에 ‘흥사단 단가 작곡자에 관련한 본단의 입장’이란 공문을 보냈다. 이 공문에 의하면 해방 이전의 단가(지금의 입단가)와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단가(단우회 노래) 모두 전 경희대 음대 학장이었던 재미 작곡가 김세형이 일제 때 작곡한 노래임이 밝혀졌다. 

 

이에 문화관광부(당시 문체부)는 1996년 4월 2일 음악사가인 목원대 노동은 교수 등 관련 전문가들로 구성된 심의위원회를 열어 ‘흥사단가’의 작곡자가 김세형씨임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관보인 문화인물 관련 책자에 정정문을 실었다. 위에서 시간대 별로 늘어놓은 것은 지난 몇년 사이 난파 홍영후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들이다.

 

흥사단 단가의 작곡자를 바로잡는 것은, 어찌보면 작은 일이었으나 그 사안을 계기로 열린 심의위원회에서는 난파의 친일 행적이 드러난 관련자료들이 제출돼 그에 대한 정밀한 재평가가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했다. 난파를 한국 근대음악의 씨를 뿌린 작곡가로 삼는 만큼, 그의 일생을 바로잡는 일은 우리 근·현대 음악사의 기초를 제대로 다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난파는 1937년 결성된 친일단체 ‘조선문예회’에 가입한 뒤 이른바 시국가요인 '정의의 개가' '공군의 노래' '희망의 아침' 등을 발표했고, 창씨개명한 모리카와 준이란 이름으로 신문 등에 친일의 글을 쓰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의 친일행위는 한번도 제대로 조사되지 않았고, 기존의 역사적 평가만이 날로 확대되는 것이 현실이다. 위에 든 대로, 그동안 문화관련 정부기관은 세 번씩이나 그 이름이 바뀌었고, 바뀔 때마다 관계자 사이에 업무의 인수인계가 안 돼 늘 다시 시작하는 도돌이표를 그리고 있다.

 

이런 가운데 올해 난파 탄생 100돌을 맞은 난파기념사업회와 난파예술원은 예총 경기도지회와 한국방송공사 공동주최로 기념 대음악회를 3일에 걸쳐 마련했다. 4월11일 오후 7시 경기도 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12일 오후 3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14일 오후 7시30분 경기도 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난파가 작곡한 관현악· 기악곡과 가곡 등을 공연한다.

 

공동주최자로 나선 한국방송공사 장동선 사업부장은 “사업심의 위원회에서도 난파에 대한 평가가 엇갈려 곤혹스러웠으나 큰 문제가 없다고 봐 지원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친일 음악인들에 대한 자료 발굴과 연구를 계속해온 노동은 교수는 “난파가 우리 음악계에 남긴 업적은 평가하지만, 그의 친일행위는 분명하게 밝혀져야 한다. 만약 민족음악가로 기록된다면 그건 난파를 등에 업고 사는 자들의 집요한 역사왜곡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정재숙 기자/ 한겨레21 1998.04.16]    



'鳳仙花' - 북한가수 최삼숙 노래


'봉선화' - 탈북예술인 마영애씨 철금 독주


'봉선화' - 홍난파 작곡, 노래 김천애 (1940년대 녹음)


봉선화 - 홍난파, 노래: 김천애 (1940 년대 녹음)


봉선화 김천애 - 1972년 LA초청 그때 그 모습


'봉선화' - 북한 보천보 전자악단 (노래 모란봉)


‘봉선화’- 조용필 노래(1987 평양 공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