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용의 타임머신... 영원한 시간 속에서 자세히보기

칼럼· 기념일

[개천절] '하늘이 열리고 환웅천왕이 이 땅에 내려오신 날'

잠용(潛蓉) 2013. 10. 1. 12:52

 

(단군의 아버지 환웅천왕의 태백산 하강 - 민족문화콘텐츠)

 

 

// 우리의 始祖 檀君을 하찮은 신화나 미신이라고 스스로 저버리면서
남의 시조와 종교는 열심히 믿고 따르는 나라 !! 그들에게서 어찌
民族의 傳統과 獨立精神과 自主意識을 찾을 수 있을까?


日帝가 훼손한 民族聖地 圓丘壇, 나라를 되찾은 지 70년이 되어도
쓰레기처럼 露天에 그냥 버러져 있다 !!

나라 일을 맡아서 처리하겠다고 나선 爲政者라면

매년 똑같은 기념사나 하고 끝내는 形式的 행사보다

훼손된 민족의 聖地부터 되살려야 하지 않을까? //

---------------------------

 

[고종 대황제의 조서 高宗 大皇帝 詔書 1864]
대한제국 선포를 기념하여 광무 원년(1864 갑자년) 십월 십삼일에 하느님을 받드시고 국운을 이으신 황제께서 조서를 내리셨다.

 

“짐이 생각컨데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래로 강토가 나누어져 각각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서로 다투다가 고려 때에 이르러 마한과 진한과 변한을 합쳐 아울렀으니 이것이 삼한을 통합함이라. 우리 태조(太祖)께서 용흥(龍興)하시는 처음에 이르러 밖으로 개척한 땅이 더 넓어 북으로는 말갈(靺鞨)의 국경을 다 차지하심에 그 치적과 염사가 나고, 남으로는 탐라국을 거두심에 귤유(橘柚)와 해착(海錯)을 공물로 바치는지라 4천리의 땅에 하나로 다스리는 치적을 세우시며, 예악과 법도는 당우(唐虞)를 조술(祖述)하시고 산하가 공고함에 복을 우리 자손 만세 반석의 종에 드리우셨거늘 오직 짐이 부덕하여 마침 어려운 때를 당하였는데 상제(上帝)께서 권고하여 위태로움을 편안함으로 바꾸시고 독립하는 기초를 창건하여 스스로 주장하는 권리를 행하라 하시니 군신과 백성과 군대와 시정(市井)이 하나의 말과 하나의 소리로 규혼 제유(규혼제유)하여 장계를 수십번 올려 반드시 황제(皇帝)의 칭호를 추존코자 하매, 짐이 사양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그리하여 더 이상 사양할 수가 없어 음력으로 금년 구월 십칠일에 백악산(白岳山) 남쪽에서 천지(天地)에 제사를 고하고, 황제의 자리에 나아감에 국호를 정하여 가로되 ‘대한(大韓)’이라 하고 이 해로써 광무(光武) 원년을 삼고,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을 고쳐 쓰고 왕후민씨(王后閔氏)를 책봉하여 황후(皇后)를 삼고 왕태자를 황태자로 삼아 오직 이에 경명을 비이하고 비로소 거전을 칭하고 이에 역대 고사를 상고하여 따로 큰 제사를 행한다” 하셨더라.

 

“하나는, 조정에서 높은 벼슬과 넉넉한 녹봉으로 신하를 기르는 것은 원래 그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위하게 하고자 함이니 나라가 편안하고 위태로움은 전적으로 관료의 탐학하고 청렴한 데 달렸는지라, 만약 관리가 간사하고 탐학하면 뇌물이 횡행하고 용열하고 사나운 자들이 요행으로 출세하여 공이 없어도 상을 받으려 무릅쓰고 이서(吏胥)가 무문(舞文)하여 백성들이 피해를 입을 것이니 정사의 문란함이 사실은 여기에서 비롯할 것이다. 금년 십월 십이일 이후로는 서울에 있는 대소 각 아문과 지방에 있는 관찰사와 부윤과 군수와 진위대장과 이서, 조역 등이 다만 뇌물을 탐하고 법을 어겨 백성들을 괴롭히는 자는 죄를 지사(指使)려 사전에 발생하지 못하게 하며,

하나는, 조정관리는 나이 팔십 이상과 사서인으로 나이 구십 이상인 자는 각각 한 자급(資級)을 더하고,
하나는, 출중(出衆)한 병정을 고하면 그 집 식구는 해당 부(部)에서 후하게 대우하고,
하나는, 옛날 과오를 가지고 초라한 집에 은거하고 있는 선비가 찾아내고, 쓸만 하며 무략이 출중하고 담력이 보통사람보다 뛰어난 자는 그 사람이 있는 곳의 관찰사가 사실을 적어 천거하면 해당 부에서 복해하여 불러서 채용함을 편리하게 하고 ...,
하나는, 각처에 주인이 없는 땅은 해당 지방관이 사세히 살펴 보고하면 관찰사가 두번 더 살펴서 마감하여 과연 허날(虛捏)이 없거든 바로 전령을 제면하고 그 땅은 백성을 불러 개간케 하고,
하나는, 무음 무조관의 7품 이하는 각각 한 계급을 더하고,
하나는,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중한지라 역대에 세번 복(服)하여 아뢰는 조목이 있는데 실출지 벌이 경어실입하니 무릇 문형 관원은 자기의 소견만 고집하지 말고, 뇌물과 청촉을 따르지 말고 힘써서 독정을 하고,
하나는, 모반 강도 살인 간통 편재 절도등 육범(六犯) 외에는 각기 한 등을 감해주고,
하나는, 각도 민인이 고혈하고 간난하고 피잔하고 병이 있어 도와줄 사람이 없는 자는 그 지방관이 뜻을 더하여 어루만져 구완하여 때를 잃지 말게 하고,
하나는, 무릇 산과 해변에 있는 당집이 기우러지고 무너진 것이 있으면 그 지방관이 경비를 계산하여 해당 부에 보고하고, 때를 맞추어 수리하여 정성과 공경함을 밝히고,
하나는, 각도에 도로와 교량이 헐어지고 무너진 것이 있으면 지방관이 실상을 조사하여 밝혀 수리하여 다니는 데 이롭게 하고,
하나는, 조서 내에 각 관청을 그 지방의 관원이 모두 실상 마음으로 받드러 행하여 힘써 짐의 은덕이 백성에게 고루 미치게 하여 짐이 민망히 생각하는 원원(源源)한 지극한 뜻을 저버리지 말라. 만일 옛날의 버릇에 연연하여 한갓 헛된 문구로 조칙을 해석하는 것은 해당 관찰사가 능히 깨닫고 살펴서 참주치 못하거든 내부에서 일병 규참하여 엄중하게 처리하라.

 

아, 기쁘도다. 하느님께서 도우심을 입음이라. 대호를 환함은 이로써 솔토의 마음을 믿게 함이라. 옛 것을 개혁하고 새로움을 도모하며 덕화를 행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하고자 하여 천하에 폐여 고하니 모두 듣고 알라.”고 하셨더라. (<독립신문> 광무 원년 11월 19일자, * 현대 표기법으로 고침)

 

(고종황제가 세운 단군의 원구단 위용 - 사진: 서울시사편찬위)

 

[원구단의 유래와 연혁]

원구단의 건립 유래
원구단은 제왕이 하늘에 제사드리는 단으로서 이름 그대로 단을 둥근 언덕 모양으로 쌓은 것이다. 이렇게 원단(園壇)을 쌓고, 그 위에 신위를 모시고 제사드리는 일은 우리나라에서도 오랜 옛날부터 있었다. 고종이 황제위에 나아간 것은 건양 2년 10월의 일인데, 이에 앞서 황제 즉위의 의식 절차 등을 마련하면서 조정에서는 이 원구단(圓丘壇) 축조 문제를 논의하게 되었다. 즉 그 해 9월 21일에 장례원경(掌禮院卿) 김규홍(金圭弘)이,


“천지(天地)를 합제(合祭)하는 일은 사전(祀典)에 있어서 제일 큰 것인데 원구(圓丘)의 의제(儀制)를 아직 마련하지 못하였습니다. 증전(曾前) 남교(南郊)에서는 다만 풍운(風雲) 뇌우(雷雨)만을 향사하였는데 단유(壇유) 폐급(陛級)이 척도에 맞지 않으니, 제사 의식에 있어서 실지 미안한 일입니다. 동지절(冬至節) 향사에 있어서 그대로 일을 볼 수 없는 일이니 개축하는 등의 절차에 대해 주상의 재가(裁可)를 바라옵니다. 호천상제(昊天上帝) · 황지기(皇地祇) 신위판(神位版) 및 종향(從享)하는 일월(日月) 성신(星辰) 풍우 뇌우 악진(嶽鎭) 해독(海瀆)의 신패(神牌) 조성과 생뢰(牲牢) 변두(邊豆)의 제반 의문(儀文)을 널리 역대의 예(禮)를 상고하여 일정한 제도가 있어야 하겠는데, 신원(臣院)으로부터 감히 편리할 대로 할 수 없아오니 시(時) · 원임(原任) 의정(議定)과 밖에 있는 유현(儒賢)들에게 하순(下詢)하여 처리하심이 어떨가 하옵니다.”고 아뢰니 왕이, “천지를 합제하는 일이 막중하다. 경(卿)은 영선사장(營繕司長)으로 더불어 상지(相地) 택정(擇定)하여 복일(卜日) 축단(築壇)하며, 제반의문(諸般儀文)은 서울에 있는 원임의정에게 수의(收議)하여 들이라” 하였다.

 

따라서 원구단 축조의 준비는 진행되었으며, 왕명에 의하여 장례원경 김규홍(金圭弘)은 영선사장 이근명(李根命)과 함께 상지관(相地官) 오성근(吳聖根)을 데리고 원구단 설치할 곳을 성심(省審)하여 남별궁(南別宮) 옛 터인 남서(南署) 회현방(會賢坊) 소공동의 해좌사향(亥坐巳向)의 곳을 길지(吉地)로 정하고 경계를 정하였으며, 10월 1일에는 단을 쌓는 여러 가지 일을 영선사로 즉시 거행하게 하였다. 또 시역(始役)하는 날을 음력 9월 7일로 정하며 경복궁 근정전에서 정위(正位) 및 종향(從享)의 위판(位版)을 조성하게 하니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달 7일에는, 다른 종묘 · 사직의 경우와 같이, 원구단의 일을 맡아보는 관청으로 사제서(司祭署)를 설치하기로 하고 제조 1인, 영(令) 1인, 참봉 1인의 직제를 반포하기도 하였다.

 

한편 10월 11일까지는 정위(正位) 서사관(書寫官) 민병석(閔丙奭), 종향위(從享位) 서사관(書寫官) 이범찬(李範贊) 및 영선사장(營繕司長) 이근명(李根命), 기사(技師) 김완식(金完植) 등에 의하여 위판(位版)과 단의 조성이 끝났으며, 10월 12일(음 9월 17일)에는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위의(威儀)를 갖추어 새로 조성된 원구단에 나아가 친히 천지에 고제(告祭)한 다음 황제위에 나아가니 이로부터 원구단은 국가에서 높여 받드는 중요한 시설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 해인 광무 2년에는 다시 이 원구단 경내 북쪽에 천 · 지 신위를 모시는 황궁우(皇穹宇)를 짓기로 하였다. 따라서 8월에는 상량문(上樑文)의 제술관(製述官)으로 윤용선(尹容善: 의정부 참정)이, 서사관으로 서정순(徐正淳)(법부대신)이 임명되고, 음력 7월 18일(양 9월 2일)을 정초(定礎) 길일로 택정하여 공사를 시작하게 하였으며 9월에는 공역비 32,875원을 예비비 중에서 지출하여 공사가 진행되었다.

 

화강암으로 기단(基壇)과 난간을 축조하고 8각 3층의 정교한 구조로 이루어진 이 황궁우의 건축은 이듬해까지 완공되었으며 그 해 즉 광무 3년 12월 22일에는 동지일 예제(例祭)를 겸하여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의 신위를 하늘의 배위로 모시는 배천대제(配天大祭)를 거행하고 대사(大赦)를 반포하니 근래에 있었던 한 성사(盛事)였다. 그리고 광무 6년(1902)에 고종황제의 망육(望六) 및 즉위 40년을 경축하는 양대 행사가 진행됨과 함께 다시 황궁우 동쪽에 고종황제의 성덕(聖德)을 북 모양으로 된 돌에 새겨 송축(頌祝)하는 석고단(石鼓壇)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양위, 순종의 즉위와 함께 일제(日帝)의 세력이 만연됨에 따라서 황제국(皇帝國)으로서 하늘에 제사드리는 원구단의 의례도 크게 간소화하였다. 융희 2년(1908) 1월에는 종묘 · 사직 대제(大祭)와 함께 원구단 대제시에도 3헌관(獻官)을 1인으로 겸행(兼行)하게 하고 그 아래의 제집사(諸執事)도 혹 겸행, 혹 감수(減數)하였으며 그 해 7월에는 다시 제사를 연 2차로 제한하였다. (서울600년사)

 

 ○ 원구단의 연혁
원구단은 이름 그대로 둥근 언덕같이 쌓은 단으로서 원단(圓壇)이라고도 호칭하였다. 옛날에는 ‘천원 지방(天圓 地方)’이라 하여 하늘에 제사드리는 단을 둥글게, 땅에 제사드리는 단을 네모나게 쌓은 것이다. 국왕으로서 정결한 곳에 제천단(祭天壇)을 쌓고 기원 ·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은 동양에서 오랜 옛날부터의 일이며, <고려사(高麗史)>에도 성종 2년(983) 정월에 왕이 원구단에 기곡(祈穀) 즉 풍년 기원제를 드렸다는 기사가 보인다.

 

근세조선의 한양 천도와 함께 모든 국가적 시설을 갖출 때에 이 원단도 이루어졌다. 왕조실록에 보면 태조 7년(1398) 4월 가뭄이 심할 때에 종묘 · 사직 · 원단과 여러 용추(龍湫)에 비를 빌었다고 하였으며, 태종 4년(1404) 1월에는 원단의 기곡제를 한경(漢京)에서 거행하였다고 한 것으로서 고려를 계승하여 조선에서도 이 원단제천(圓壇祭天)의 행사가 진작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침략과 그들의 원구단 훼손]

대한제국의 신성한 제천단을 일제가 그냥 놓아둘 리 없었다. 한일합방후 1913년 일제는 원구단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건평 580여평의 조선총독부 부속 철도호텔을 지었다. 광복 후에는 철도호텔이 조선호텔로, 다시 지금의 웨스틴 조선호텔로 되었는데 신위를 모셔둔 황궁우(皇穹宇)만 덩그렇게 남아 고층빌딩에 사이에 갇혀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고종(高宗 1852∼1919) 황제가 즉위식을 앞두고 건축했던 원구단. 고종은 1897년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는 국호를 선포하였다. 고종은 명실 공히 천자(天子)임을 만방에 선포하기 위해 이를 미리 상제께 고해야만 했다. 이로써 고종은 왕이 아니라 황제가 된 것이다.

 

고종의 칭제건원(稱帝建元)은 우리 민족이 그동안 잊고 있던 상제(上帝)를 회복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민족 역사의 뿌리, 민족의 혼을 되찾은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나라의 통치자는 하늘의 최고신 상제께 천제를 올리고 통치권을 받아야만, 정통성이 인정되어 비로소 땅위의 백성을 통치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울 소공동에 원구단을 세우고, 그 원구단 제단에서 천제에게 제사를 올린 후 황제에 즉위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를 격하시키고 왜곡시키기 위해서 일본은 어떤 짓을 했던가? 일제의 한국혼 말살의 현장이, 지금도 바로 수도 서울 한복판 장사꾼이 범람하는 심장부에 방치되어 있다. 사적 제157호인 원구단(圓丘壇-서울 중구 소공동 87-1) 이 거기에 있다. 밑둥은 두더지 소굴처럼 뻥뻥 뚫려 지하 주차장으로 쓸쓸히 방치되어, 대한제국과 민족혼이 그대로 방치되고 국민의 자존심을 밟고 다녀도 누구 하나 거들떠 보는 사람이 없다.(그 유래를 모르니까)

 

이렇게 만든 장본인은 물론 일본제국이다. 바로 그 일제가 원구단을 훼손시켰다. 1913년 그들에 의해 원구단이 철거됐다. 그리고 그 자리에 다음해에 호텔이 들어서면서 민족의 성지는 사라지게 되었다. 지금은 황궁우와 석고, 그리고 3개의 아치가 있는 석조 대문만이 호텔 경내에 남아 있을 뿐이다.

 

원구단은 1897년 10월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즉위식을 마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 역사적인 장소로 사대문 안의 명당으로 꼽힌다. 소유는 국유. 1967년 7월 15일 사적 제 157호로 지정됐다. 「Mestimes」는 2005년 3.1절을 이틀 앞둔 27일 ‘역사교훈실천 시민운동연합’의 정준영 대표와 ‘우리말과 예절찾기운동’ 대표 최훈영, 두 분을 모시고 옛 사진을 중심으로 현장을 답사했다. 겹겹으로 지하 차도와 상가를 뚫어 마치 불법 건축물의 경연장을 방불케 하는 현장이 괴로운 역사의 숨결을 토해내고 있었다.

 

정준영씨의 설명이 이어졌다. “원구단은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천단(祭天壇)을 말한다. 일명 원구단 (圓丘壇) 또는 줄여서 원단(圓壇)이라고도 한다. 이 명칭은 지신(地神)에 제사드리는 사직단(社稷壇)이 음양론(陰陽論)에 따라 방형으로 쌓는 것과는 달리, 고대 중국의 전통적인 의례와 원이상천(圓以象天)이란 관념에 따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단을 둥글게 쌓은 것과 관계가 있다."

 

여기에 최훈영씨가 덧붙인 내용은 이렇다. 우리나라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풍습은 농경문화의 형성과 더불어 시작됐으며, 삼국시대부터는 국가적인 제천의례(祭天儀禮)로 시행됐다.《삼국사기》에 인용된 <고기(古記)> 에 의하면 ‘고구려·백제가 다같이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지냈다, 단(壇)을 설치하고 천지에 제사지낸다’라는 내용으로 미루어, 이때부터 이미 제천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성종 2년(983) 정월조에는 ‘왕이 圓丘에서 祈穀祭를 올리고, 몸소 籍田을 경작했다’는 고려의 원구제는 5방의 방위천신(方位天神)과 전체 위에 군림한다는 황천상제(皇天上帝)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천자국인 중국과 다름없는 제도로 시행됐다. 그러나 고려말 우왕(禑王) 11년(1385) 고려의 국가적인 의례는 제후의 의례에 따라야 한다는 주장에 의해, 당시 친명정책(親明政策)을 펴 나가던 중이어서 부득이 제천의례는 폐지됐다.

 

조선초 제천의례는 천자가 아닌 제후국으로서는 행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사대론과, 이와 달리 농업국가로서 전통적 기우제(祈雨祭)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의견이 갈려 설치와 폐지를 거듭하게 됐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태조 3년(1394)에 제후국의 예에 준하여 조선의 동방신인 청제(靑帝)에 제를 올리기 위한 원단이 설치되었고, 세종 원년(1419)에 실시된 원구제(圓丘祭)도 오랫동안 계속되던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시행했다.

 

조선초부터 억제된 제천의례는 세조 2년(1456년) 일시적으로 제도화되어, 《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에 실려 있는 고려의 원구단(圓丘壇)을 참작하여 1457년 원구단을 신설하여 제를 드리게 됐다. 그러나 이 원구제도 세조 10년(1464)에 실시된 것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는데, 문헌에 보이는 원단의 위치는 오늘날 한남동ㆍ보광동 부근으로 추정된다.

 

원구단이 다시 설치된 것은 고종 34년(광무 원년, 1897) 조선이 대한제국이라고 국호를 바꾸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여 제천의식을 봉행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이다. 이 해에 의정(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천신(天神)에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상소에 의해, 규모와 체제는 역대의 예전(禮典)을 기초로 하여 영선사(營繕使) 이근명(李根命) 등을 시켜 길지인 남교(南郊) 회현방, 바로 지금의 소공동으로 터를 선정한 후에 단(壇)을 건립했다.

 

광무(光武) 원년(1897) 10월 고종 황제의 즉위를 앞두고 남별궁(南別宮) 터에 원구단을 쌓았고, 10월 11일 고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원구단에 나아가 천신에 고제(告祭)한 후 황제에 즉위했다. 이 때에 건립된 원구단의 체제를 보면 황천상제위(皇天上帝位)는 단의 제1층 북쪽 동편에서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황지지위(皇地祗位)는 단의 제1층 북쪽 서편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있고, 대명천(大明天)과 야명성위(夜明星位)는 각각 제2층의 동·서쪽에 있으며, 제3층 동쪽에는 북두칠성(北斗七星)·오성(五星)·이십팔수(二十八宿)·오악(五岳)·사해(四海)·명산(名山)·성황(城隍)의 자리를 두고, 서쪽에는 운사(雲師)·우사(雨師)·풍백(風伯)·뇌사(雷師)·오진(五鎭)·사독(四瀆)·대천(大川)·사토(司土)의 자리를 두었다. 그러나 한일합방후 1911년 2월부터 원구단의 건물과 집터는 조선총독부 관리 하에 들어갔고, 이어서 1913년 마침내 원구단을 헐고 그 자리에 건평 580여평의 철도호텔(후에 조선호텔)을 지었다.

 


(조선호텔 뒤편에 쓰레기처럼 버려진 원구단 잔해들)

뭘좀 아는 일본 관광객이 보면 뭐라 비웃을까? 모범적 기독교국가라고 칭찬할까?

 

[해방후 원구단 복원을 위한 각계의 건의]

“원구단 일대를 민족 번영의 성지로 가꾸자”
원구단을 포함한 경운궁(덕수궁)과 경희궁으로 이어지는 서울 정동일대는 조선시대 이후 근대 서울 역사의 주요 무대가 되었었다. 한양도성의 서부 서소문과 서대문 사이에 위치하여 한양도성의 서쪽 성벽이 보호막을 이루어 일찍이 왕실과 조정 관료의 주거공간이 되었고, 왕궁과 왕비능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14세기 초 경운궁 터에는 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수양대군 시절 살았던 잠저(潛邸)로 알려져 있는 명례궁(明禮宮)이 위치하였다.

 

이곳에는 세조의 세자였던 의경세자(懿敬世子, 德宗)의 비 소혜왕후(昭惠王后)가 한때 궁에서 물러나 머물렀는데 이때 의경세자의 큰아들인 월산대군과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잘산군, 山君)과 함께 살았던 것이다. 이후 자을산군이 왕위에 올라 성종이 되니 이 집은 자연히 월산대군의 집으로 이어졌다.

 

임진왜란 직후 선조 임금이 불 탄 궁궐에 대신하여 월산대군 집이었던 이곳에 잠시 시어소(時御所)로 행궁을 정하니, 정릉동 행궁이라 하였다. 나아가 광해군과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하여 명실공히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궁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이 일대는 왕실의 집터에서 잠저·행궁으로 이어져 조선왕조 5대 궁궐 가운데 하나인 경운궁이 자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광해군 때의 정치적 혼돈은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永昌大君)과 그 외조부 김제남(金悌男)을 죽게 하고, 인목대비를 이곳에 유폐하자 한때 서궁(西宮)이 되어 서궁유폐(西宮幽閉)의 역사현장이 되었다. 인조반정으로 인목대비로부터 옥새(玉璽)를 물려받은 인조는 이곳에서 즉위하여 창덕궁에 나아갔고 인목대비는 경덕궁(경희궁)으로 옮겨졌다.

 

그 후 1896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던 고종은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경운궁을 중건하면서, 원구단에 나아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을 하늘에 고하고 경운궁을 황제궁으로 삼았다. 이렇게 하여 대한제국이 등장하는 시점에는 황제의 제단인 원구단과 황제궁인 경운궁이 마련됨으로써 서울의 시가지가 이곳을 중심으로 설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운이 약해진 대한제국은 광무개혁 등을 통하여 부국강병과 자주독립을 추구하였으나, 서구열강과 일본제국의 침탈을 이겨내지 못하였다. 청일전쟁·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 침략에 우위를 차지한 일제는 헤이그 특사사건을 핑게로 강제로 고종에게 황제 자리를 물러나게 하여 경운궁에 머물게 하였으며 그 대신 순종을 경운궁 돈덕전(惇德殿)에서 즉위시키고 창덕궁에 머물게 함으로써 경운궁 정치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동시에 경운궁은 단순히 상왕의 덕과 장수를 기원한다는 뜻의 덕수궁(德壽宮)으로 전락하였다. 덕수궁은 조선 초 상왕 태조 이성계가 머물던 곳으로 개성에도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경운궁의 본 이름을 회복하여 생명력을 불어 넣어야 할 책무가 있다.

 

한편 원구단 터 역시 남별궁이 있던 곳으로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慶貞公主)와 부마 조대림(趙大臨)의 집이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 이 집을 작은 공주댁, 또는 소공주댁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소공동’ 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그리고 선조 때 이 집을 화려하게 보수하여 셋째 아들 의안군(義安君) 성(珹)에게 주었다. 임진왜란 때는 일본군의 지휘본부가 되었다가 한양 수복 후 명나라 군사의 사령부가 이용하였고, 그 뒤 중국 사신이 오면 국왕을 알현하기 전에 잠시 머물러 남별궁이라 칭해졌던 것이다.

 

또 미국 대사관저(영국대사관 터 일부 포함) 일대에는 일찍이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정릉(貞陵)이 마련되어, 오늘날까지 정동이라는 지명이 남게 되었다. 정릉의 원찰(願刹)인 흥천사(興天寺)가 자리하여 조선 불교의 선·교(禪敎) 통합과정에서 선종의 수찰 구실을 하였다. 이곳에서는 경순공주(敬順公主)가 비구니가 되어 비운에 간 두 동생 방번(芳蕃, 撫安大君)·방석(芳碩, 宜安大君)과 더불어 어머니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대가 흘러 중종 연간에는 유생들의 방화로 불에 타고 흥천사 동종(銅鐘)만 남게 되었다. 정릉은 태종 때 지금의 성북구 정릉동에 이장되어 한때 그 종적을 찾기도 어려웠다가, 선조 때 변계량(卞季良)의 정릉 고천문(告遷文)을 찾아내 능을 정비하였고, 현종10년(1669)에 송시열의 주장으로 종묘에 배향되었다. 이는 왕위계승을 놓고 신덕왕후와 태종과의 정치적 갈등의 결과로 해석되는 사건이라 하겠다.

 

또한 이장되고 남은 정릉의 병풍석 등 석물은 청계천에 처음 놓여진 돌다리인 광통교의 교각으로 사용되어 조각된 석상이 익사하기 직전의 상태로 보이는 등 정권 다툼의 냉혹함을 보는 듯하다. 그 석물들은 최근에 청계천 복원공사가 진행됨에 따라 빛을 보게 되어 경희궁터 방공호 앞 서울역사박물관 주차장 서쪽에 임시 보관되고 있으며, 앞으로 광통교가 복원되면 시민들에게 돌아올 것이다.

 

이렇게 역사의 현장으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던 정동 일대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들어 서구 근대 문물의 유입과 그 실험장이 되었다. 배재학당·이화학당·독립신문사·정동교회 등이 들어서서 근대교육과 근대언론의 터전이 마련되었다. 또한 미국 대사관·러시아 공사관·불란서 영사관·영국 영사관·독일 영사관 등이 이 일대에 자리하였고, 손탁호텔과 정동구락부등 모임이 활발하게 움직여지면서 친일·친러·친구미 세력이 형성되어 열강의 외교적 각축 터전이 되기도 하였다. 급기야 중명전(中明殿)에서는 을사늑약이 고종의 서명날인도 없이 외무대신에 의해 사기 행위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근대 역사의 외교무대 현장은 지금도 여러 문제를 안고 있으니, 경기여고 자리에 추진 중인 미국 대사관저의 확장공사는 급기야 시민의 힘에 의해 중단되었고 용산 미군기지로 옮겨갈 듯하다. 더욱이 우리 스스로가 문화유적지를 파괴하고 있는 인근 고층빌딩의 건축 등이 현안 문제로 대두되고 있으며, 구세군본영의 문화재 지정과 같이 현명한 지혜를 발휘하여 우리의 역사 문화유적을 지켜야 할 것이다. 나아가 이곳 정동일대를 부국강병과 자력경제 및 민주번영의 터전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그 실천의 장으로 이끌어 내어야 할 것이다.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원회, 한국사)

 

원구단 천제와 함께 해온 우리 민족”
- 원구단(圓丘壇) 천제(天祭) 터의 경세사적(經世史的) 위상(位相)-
지금 조선호텔이 깔고 앉아 있는 원구단 천제 터는 원래 서울 한복판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동산, 인체에 비유한다면 생명의 젖줄인 여성의 유방에 해당된다. 태양의 불덩이가 비화하여 생긴 지구의 탯줄, 배꼽자리, 우주의 빛이 내린 바로 그 길목인 강화도 화도면에 있는 마니산의 참성단과 기를 함께하는 원구단 천제터는 1. 여러 사악함을 제거하고, 2. 흐린 물을 맑게 하며, 3. 재앙과 화를 미리 예방하는 천하의 복지요 명당 길지이다. 이를 알고도 칩입, 더럽히는 자, 시험해보는 자는 모두 운세가 소진함을 면치 못하리라!

 

(마니산 참성단)

 

역대에 거행해 온 원구단 천제를 1464년 청나라 천자에게 상납하고 강제 폐지시키면서 국운이 쇠태하여 433년이 지난 후 고종 황제께서 제천권 회복과 함께 대한제국 독립선언과 황제 직위식을 거행했으나 이번에는 일제와 친일파들이 또다시 일본 천황에게 강제 상납한 뒤 조선은 일본에게 강점당했다. 그뒤 광복 60년이 지난 오늘에도 일제의 망령을 대신한 삼성재단이 우리 민족의 천손국운(天孫國運)을 차단한채 541년 간을 하늘을 등지고 살아오고 있으니 이러한 민족에게 무슨 하늘의 축복을 바랄 수 있겠는가!

 

6.25 동란도 민족분단의 비극도 오늘의 혼란도 모두가 다 하늘이 내리는 준엄한 심판이 아니겠는가? 이제라도 하루 속히 원구단 천제를 복원해야 한다. 경복궁, 청계천 복원 등에 앞서 제일 먼저 원구단 복원부터 했어야 했다. 원구단 복원을 하늘에 고해야 비로소 참다운 광복, 새로운 시대가 와서 만물이 제자리로 돌아가 바로서게 되며, 세계 열강 가운데 우리 한국이 우뚝 솟아올라 세계평화의 중심국이 될 것이다! (천효성가족선교회 박영록 총재)


“원구단(圓丘壇) 천제의 유래”
청나라에 빼앗기고 433년, 일제에 빼앗긴지 108년! 원구단 천제의 유래를 살펴보면 한민족은 이 지구상에서 제일 먼저 하늘에 제사를 지내 온 천손장자민족(天孫長子民族)으로서 매년 10월 상순에 국중 대회를 열어 둥근 단을 쌓고 단군께서 친히 하늘에 제사를 올려 ‘국태민안(國泰民安)’ 을 기원하여 왔는데 이 제천단이 바로 원구단인 것입니다.

 

이 원구단 천제는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등으로 이어졌다. 「고려사」에 의하면 서기 983년인 고려 성종 2년 정월에 황천상제(皇天上帝)이신 삼신(三神)과, 흑제, 적제, 청제, 백제, 황제 즉 오방위의 신위를 모시고 왕이 친히 원구제 를 드렸으며,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조 3년인 1394년과 세종 원년인 1419년에 원구제를 올렸고, 세조 임금때는 천제를 나라의 최대 행사로 제도화하여 세조 3년인 1457년부터 매년 원구제를 올렸으나 천자가 아닌 왕이 하늘에 제를 올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중국의 압력과 사대주의자들의 강압에 의해 1464년 원구제를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

 

이로부터 433년이 지난 후 대한제국 고종 때 이르러 천제를 복원해야 한다는 의정 심순택의 상소를 가납하여 조선팔도에서 가장 명당 명소 길지인 소공동에 원구단를 세우고 천제 제천권 회복과 함께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제 즉위식을 올리고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이로써 원구단 지붕은 천지인 삼합일체의 천제의식을 우주의 빛의 상징인 황금으로 장식하여 그 찬란한 빛은 온 천하를 밝혀 전 세계가 우러러 경배하는 인류 최고의 장엄한 제천 성지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번엔 또 일제와 그 친일파들이 이를 시기 질투하여 천제는 천조대신의 만세일개인 일본 천황만이 지낼 수 있다면서, 또다시 원구단을 헐고 총독부 철도호텔을 세워 강제 폐지 상납하고 오늘까지 일본 천황이 단군 제천권을 대신 행사해 오고 있으니 이 얼마나 통탄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하늘은 무심치 않아 역천자 일본을 패망케 하고 순천자 우리 천손민족을 광복케 하였다. 그런데 광복 6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도 일본의 역천만행은 고스란히 민족 내부 친일파에게 인계되어 불행히도 오늘 조선호텔이 그 일제 망령을 대신하여 우리 천손민족의 정통국맥을 차단하고 있으니 이 무슨 역사의 희롱인가?

 

그러므로 일제망령의 본산인 현 조선호텔를 헐어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는 원구단을 원형 그대로 복원해야만 비로소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경세사관에 의한 인류사적 사명을 다할 때 우리 천손장자 민족은 반드시 천,지,인 삼합일치의 크나큰 축복을 영원히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천효성가족선교회 총재 박영록)


“원구단 제천권을 회복하자”
우리 민족은 이 지구상에서 제일 먼저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인류 시원의 정신, 종교, 정치, 문화 종주국을 꽃피웠던 개천개국의 천손 장자 민족입니다. 매년 10월 상순에 국중대회를 열어 둥근 단을 쌓고, 단군께서 친히 하늘에 제사를 올려 <국태민안>을 기원하여 왔는데 이 제천단이 바로 <원구단>인 것입니다. 이 <원구단 천제>는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고려사>에 의하면 서기 983년인 고려 성종 2년 정월에 황천 상제이신 삼신과 흑제, 적제, 청제, 백제, 황제 즉 오방위의 신위를 모시고 왕이 친히 <원구제>를 드렸습니다.

 

<조선실록>에 의하면 태조 3년인 1394년과 세종원년인 1419년에 <원구제>를 올렸고 세조임금 때는 <천제>를 나라의 최대행사로 제도화하여 세조3년인 1457년부터 매년 <원구제>를 올렸으나 천자가 아닌 왕이 하늘에 제를 지내는 것은 옳지 않다는 중국의 압력과 사대주의자들의 강압에 의해 1464년 <원구제>를 마지막으로 중단되었습니다.

 

이로부터 433년이 지난 후 고종 때에 이르러 <천제>를 복원해야 한다는 의정 심순택의 상소를 가납하여 팔도의 가장 명당명소 길지인 소공동에 <원구단>을 세우고 <천제제천권> 회복과 함께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제 즉위식을 올리고 자주 독립국임을 내외에 선언하였습니다.

 

<원구단>의 3동 지붕은 천,지,인 삼합일체의 천제의식을 나타내며 우주의 빛의 상징인 황금으로 장식하여 그 찬란한 빛은 온 천하를 밝혀 전 세계인이 우러러 경배하는 인류 최고의 장엄한 제천성지로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원구단 천제>는 불행히도 1913년 일제가 또다시 조선의 왕이 천제를 지내는 것은 하늘에 대한 불충이므로 천조대신 후예인 천황이 지내야 한다며 <원구단>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지금의 조선호텔 전신인 <철도호텔>을 짓고 그 일부인 <황궁우>만 남겨두었습니다.

 

일본 천황은 빼앗아간 우리 민족의 단군천제를 108년 동안 거행해 오고 있으며, 중국 또한 2008년 올림픽 성공을 기원하는 천제를 올리면서 한국이 자신들의 제후국임을 주장하고 있는데 정작 천제를 지내야 할 우리 민족이 천제 제천권마저 청나라와 일본에 상납하고 541년 동안 하늘을 등지고 살아오고 있으니 이런 못난 민족에게 무슨 하늘의 축복이 있겠습니까?

 

원구단 천제는 흔히 있는 죽은 신에 대한 천제가 아니라, 우리 인간을 존재케 하여 준 우주의 근본에 보답하기 위한 경, 천, 순, 조, 애, 인의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통치이념을 전세계에 재 구현하고자 함입니다. (원구단 천제 복원회)

 

"태백산 천제단의 유래"
단군이 즉위 원년에 사자를 보내 제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다(한단고기) -

태백산 천제단(天祭壇)은 신라 때부터 임금이 직접 제사를 드리던 곳이다. ‘한단고기(桓檀古記)’에는 단군이 즉위 원년에 사자를 보내어 이곳에 제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태백산 천제단)


‘삼국사기’는 “일성왕 5년 10월에 왕이 친히 태백산에 올라 천제를 올렸다”고 기록했으며, ‘동국여지승람’ 에는 “태백산은 신라 때 북악으로, 중사(中祀)의 제를 올리던 곳”이라고 전한다. 조선 성종 때의 학자 성현(成俔)의 ‘허백당집(虛白堂集)’에는 “삼도(三道: 강원도, 경상도, 충청도)의 사람들이 산꼭대기에 천왕당을 지어 단군의 상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데, 철 따라 천제를 모시고자 오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어깨가 서로 부딪치고 앞서 가는 사람의 발 뒤꿈치를 밟을 정도”라고 당시 천제단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천제단은 이렇듯 기도 터로서 유서가 깊으며, 겨울철에도 늘 기도객이 끊이지 않는다. 이런 연유로 태백산은 무속의 성지로도 불린다.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매일 수십명의 기도자들이 찾아들고 있다. 등산객의 수보다도 이들 기도자의 숫자가 더 많을 것이라고 현지 주민들은 말한다. 태백산 정상 동쪽 아래의 사찰 망경사(望景寺) 요사채는 늘 이들 기도객들로 북적거린다.

 

태백산 천제는 신라의 통일 이후 맥이 끊어졌다. 중국 천자만이 천제를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연호를 광무로 하고 원구단을 쌓은 뒤 천제를 지냈으나 일제 때 다시 폐지됐다. 그렇지만 나라가 위급할 때마다 사람들은 태백산에 올라 제를 드렸다. 구한말에는 의병장 신돌석 장군이 백마를 잡아 기도하니 하늘에서 뇌성이 울렸다고 전한다. 일제 때는 천평땅에 살던 윤상명, 유형호, 이낙림이 주동이 돼 이곳에서 독립만세 기원제를 지냈다.

 

을유년 첫날 천제단에 올라온 김규봉(57·서울 도봉구 수유동)씨는 “하늘과 제일 가까운 곳에서 새해 첫 일출을 볼 수 있는 희열 때문에 매년 이곳에 오른다”며 “새해에는 한민족이 2000년 전의 모습처럼 통합된 아름다운 모습으로 거듭나기를 빌었다”고 말했다.

 

태백산 최고봉 장군봉에 위치한 천제단은 높이 2.5m 정도의 사각형 제단이다. 태백산에는 장군단과 천왕단, 하단 세 개의 제단이 있는데 이를 통틀어 천제단이라 부른다. 천왕단은 하늘에, 장군단은 사람(장군)에, 하단은 땅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규모가 가장 큰 원형의 천왕단(해발 1561m)은 장군봉에서 300m쯤 더 가야 나온다. 이곳에서 300m 더 가면 작은 사각형의 하단이 있다. 해마다 10월 상순 살아 있는 소를 몰고 올라가 천제단에서 제사를 올렸고, 이를 ‘태우’라고 했다. 지금은 10월 3일 개천절날 소머리만 놓고 제를 올린다. (2005.01.03 조용호 기자)


[정부가 개천절을 국가기념일로 정한 이유]

개천절의 뜻:
홍익인간의 개국이념을 계승하고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문화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통일의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며 자손만대의 무궁한 번영을 기원함. 음력 10월 3일 ‘開天’의 뜻. 서력 기원전 2333년(단기 1년) 우리 민족의 시조(始祖) 단군왕검(檀君王儉)께서 최초의 민족국가인 단군조선(朝鮮)을 건국하신 날임. 단군의 아버지이신 환웅(桓雄)께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큰 뜻을 품고 하늘을 열고 이 땅에 하강하신 날이기도 함.

 

개천절의 유래:
【고대이후 대한제국까지】부여의 ‘영고’, 동예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 고려 의 ‘팔관회’ 등 민중 제천 축제, 고려 중엽부터 외세 침략으로 개천 의식(儀式)이 약화되었으나 몽고제국(蒙古帝國)의 침략을 받았던 때에는 이 단군고사가 민족의 대동단결 의식(大同團結 意識)을 깨우쳐 국난을 극복하는 힘으로 작용.

조선왕조(朝鮮王朝)가 새로이 개창(開創) 되자 우리 민족의 단군숭배사상(檀君崇拜思想)은 더욱 고양(高揚) 태종(太宗) 때의 문신 변계량(文臣 卞季良)은 “우리 동방(東方)의 시조 단군은 하늘로부터 내려와 나라를 세운 것이지, 중국의 천자(天子)가 분봉(分封)한 것이 아니다” 라고 하여 우리나라가 옛날부터 중국과 대등한 독립국가임을 천명. 세종(世宗) 때에는 평양에 단군사당(檀君祠堂)을 지었고, 중국의 황제와 마찬가지로 원구단(圓丘壇)을 세워 하늘에 제사를 지냄. 한말(韓末) 열강(列强)의 세력이 몰아치던 시련기(試鍊期)에 고종황제(高宗皇帝)가 대한제국(大韓帝國)을 내외에 선포하고 원구단(圓丘壇)을 설치하여 천제(天祭)를 올림.

【일제시대】1909년에 나철(羅喆)이 대종교(大倧敎)를 일으켜 음력 10월 3일을 ‘개천일’이라고 명명하고 종교의식 봉행. 1919년 3·1운동 직후 수립된 상해 임시정부에서 개천절을 국경일 (음10.3)로 경축.
【정부수립 이후】1948년에는 개국 기념일로서의 개천절 경축 행사를 음력 10월 3일에 거행.
1949년 <국경일에관한법률> 제정에 따라 개천절(양 10.3) 행사 거행. 


[개천절 노래]
(정인보 작사, 김성태 작곡)

1.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 나라 한 아버님은 檀君이시니
이 나라 한 아버님은 檀君이시니.


2. 白頭山 높은 터에 父子요 夫婦
聖人의 자취 따라 하늘이 텄다.

이 날이 시월 상달에 초사흘이니
이 날이 시월 상달에 초사흘이니.

3. 오래다 멀다 해도 줄기는 하나
다시 필 檀木 잎에 三千里 곱다.
잘 받아 빛내오리다 맹세하노니
잘 받아 빛내오리다 맹세하노니.

 

(개천절 노래 -정인보 작사, 김성태 작곡)

 


[출처] ☞ '고종 황제의 꿈이 서린 원구단(圓丘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