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인의 명상 '바르도' (Bardo) - 제 1부 <티벳 死者의 書>에 의거한 명상 <(원저: 파드마삼바바(Padmasambhava 717∼762 인도)
<티벳 사자의 서> 저자는 인도의 성자 파드마삼바바로 알려져 있다. 파드마삼바바(Padmasambhava, 蓮華生上師 717∼762)는‘연꽃에서 태어난 자’(蓮華生)라는 뜻이다. 티베트 불교에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로, 부처는 자기가 죽은 뒤 '파드마삼바바(蓮華生)'라는 이름으로 부활할 것이라고 예언했었다. 전설에 따르면 파드마삼바바는 연꽃 봉우리 안에서 태어난 제2의 부처님이라고 한다. 파드마삼바바는 8세기에 탄트라 불교를 부탄과 티벳에 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티벳에서는 구루 린포체(소중한 스승, Guru Rinpoche) 또는 로폰 린포체(Lopon Rinpoche)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파드마삼바바는 아미타불의 화신(化身)으로 여겨지며 전통적으로“두번째 부처”로 숭배되기도 한다. 사진은 인도 쿨루(Kullu) 근처에 있는 파드마삼바바의 좌상(坐像)이다. (wikipedia)
인간의 본질은 본래 형상(形像)도 실체(實體)도 없는 공(空)이다. 창조성과 지혜를 지닌 순수한 의식(意識)이다. 이것이 ‘존재 본래의 모습’이다.
이 순수한 의식은 물질세계의 시간의 흐름으로 들어감에 따라 여러 가지 환영(幻影)이나 상념(想念)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전체(全體)로부터 분리되어 ‘의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몸’ 즉, 상념체(想念體)가 된다. 그 전체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상태가 바로 ‘에고’(自我, ego)이다. 우리가 전체와 분리되어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우리 본래의 진정한 본성(本性)을 잊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본질은 ‘창조성을 지닌 의식’ 이다.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공포, 욕망 등을 투영하여 한 사람 한 사람 각자의 특유한 ‘현실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자기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은 물론, 우리에게 그러한 능력이 있다는 것조차 잊고 있다. 스스로가 만들어낸 세계에 완전히 동화(同化)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행하고 있는 ‘에고의 게임’에 빠져있을 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에고의 게임에도 역시 빠져있다. 이러한 에고의 게임은 집단적이며 동시에 개인적이기도 하다. 당신이 육체 안에 있는 것은 당신의 ‘에고가 육체를 원하기 때문’이며, 당신에게 있어 이 세계가 존재하는 것도 역시 ‘에고가 이 세계를 갈구(渴求)하기 때문’이다.
존재는 본래 ‘하나’이다. 그러나 의식이 삶과 죽음의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또 시간의 흐름 속으로 들어가고 다시 나오기를 되풀이하면서, 우리는 존재 자체의 영묘(靈妙)한 파동(波動)을 잃어간다. 인간은 ‘물질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실체가 없는 공의 존재’라는 것을 완전히 잊고 있는 것이다.
명상의 모든 목적은 자신이 ‘다차원적인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데 있다. 삶은 또다른 환생으로 이어진다. 생과 환생 사이, 에고와 공 사이에 빛과 상념의 세계가 존재한다. 그것을 바로 바르도(Bardo), 또는 중음기(中陰期), 또는 아스트랄계(The Astral space)라고 부른다.
그 세계는 물질적인 세계와 마찬가지로 실체와 비실체를 모두 지니고 있다. 그러나 더 섬세하고 유동적이고 고속의 파동으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이곳은 우리의 물질세계에 비해 훨씬 영묘한 세계이기 때문에 모든 상념이 즉시 전달된다. 그곳은 ‘물질의 근원인 상념’으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그대가 명상이 깊어지고 의식이 더 예민해 짐에따라 바르도의 세계를 이해하게 되고, 그 안에서 우리의 현실은 더욱 명확해질 것이다. 다양한 단계의 명상상태, 여러 층의 수면상태, 죽음의 경험, 자궁에 들어가고 다시 태어나는 경험 등 여러 상태 속에서 각성(覺醒)을 유지한다면 우리는 존재의 다차원적인 모습을 깨달을 수 있다. 또한 생과 환생 사이, 공과 에고의 사이를 계속 방황하는 우리들의 의식을 하나로 이어주는, 한 가닥의 끈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Tibet Mandara)
의식적인 에고의 죽음은 스스로의 투영과 에고의 게임으로부터 해방된 무심의 상태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해탈(解脫)이란 자기 자신이 지금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자각하고, 그것이 자기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정신적 개념을 넘어 자유롭게 되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깨달음을 얻게 되면 고차원의 각성이 생겨나고 에너지의 경로에서 상념이 사라져 에너지가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
바르도에 있을 때 어려움을 겪게 되는 이유는 물질적인 세계의 환영을 바르도라고 하는 섬세한 세계에서도 그대로 적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곳은 물질이나 형체가 없는 세계인데도 그것들에 집착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나는 것이다. 바르도에 들어가 에고가 그 모습을 잃게 되면 의식은 의식을 이루고 있던 기본 원소로 해체되어간다. 이에 따라 우리는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몸 마음의 심리적 신경학적 분해과정을 겪게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체험을 하기 위한 것이다. 체험은 각성을 가져온다. 그리고 각성은 삶과 죽음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이다. 삶은 죽음을 위한 준비이다. 그리고 의식적인 죽음은 완전한 삶을 위한 준비이다. 실제는,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 오직 그대만이 존재하며 그것을 아는 그대뿐이다.
바르도의 과정에서 존재의 진실을 단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깨닫기 위해, 그리고 모든 현상은 그대 자신이 만들어낸 것임을 자각하기 위한 준비로서
다음의 세 가지 명상이 있다.
첫 번째: 그대 스스로가 어떤 실체도 없는 공의 존재라는 것을, 투명한 빛이라는 것을 깨닫는 명상이다. 지금까지 그대가 자신과 동일시해 온 모든 것들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 그대가 누구인지 그 본질을 찾아내는 명상이다.
두 번째: 여러 가지 현상을 통한 명상으로, 울려퍼지는 천둥 소리, 종소리나 트럼펫 소리, 그리고 눈부시게 빛나는 밝은 빛, 에너지 등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그대는 모습과 형태의 변화, 현실의 변화 등에 익숙해져서 무슨 일이 일어나드라도 초연할 수 있게 되고 모든 현상의 배후에 있는 본질을 깨닫게 된다.
세 번째: 무슨 일에든 초연해지는 것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진짜와 그렇지 않은 것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명상이다. 이것은 바르도의 상태에서 자신이 원하는 세계로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자궁의 문을 닫는 것, 자궁을 선택하는 것, 그리고 자연히 발생되는 그대 자신의 무한한 에너지로 이런 상태를 극복해내는 것도 이 명상에 포함되어 있다.
이 바르도는 다양한 문헌으로부터 발췌하여 명상과 각성에 대한 현시대적인 새로운 이해와 <티벳 사자의 서>의 심리 신경학적인 관점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여기에 나오는 말들은 명상 속에서나 변화된 의식 상태에서 경험하게 되는 에고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바르도의 가르침은 ‘듣는 것을 통하여 영원한 해탈에 이르는 길’이라고도 했다. 단 한번 듣는 것만으로, 심지어 그대가 의식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해도 여기에서 나오는 영상이나 분위기, 소리, 형상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그대는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이 가르침을 모두 기억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르도의 상태에서 그대의 기억력은 아홉 배나 더 좋아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대는 죽음의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동요하지 않고 대처할 수 있다. 당신은 언제라도 자신이 투영한 드라마에서 벗어나 초월의 공간으로, 원초의 투명한 빛으로, 무심의 맑디맑은 공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 맑은 공간이 나타날 것이다.
이것은 의식이 육체에서 분리되어 해방된 생명 에너지의 기운이 최고조에 있을 때 나타나는 상태이다. 이 상태가 지나면 환생으로 향하는 바르도의 여정이 시작된다. 티벳을 비롯한 일부 문화권에서는 살아있는 동안 이 <사자의 서>에 익숙해짐으로써 죽음의 순간에 자신의 의식을 위로 끌어 올려 머리의 정수리의 중추를 통해 공(空)의 투명한 빛 속으로 직접 들어가거나, 또는 의식세계의 빛 속으로 들어가며, 원한다면 인간계의 빛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바르도는 죽음을 초월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 죽음이라는 과정을 해탈로 변형시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안내(案內)이다. 그러나 이것은 살아있는 동안 명상을 통해 의식적이 되고 준비를 갖춘 사람들에게만 도움이 될 수 있다.
이 바르도의 지시는 마음의 여러 영역에 영향을 주어 의식과 무의식, 집단 무의식과 우주적 무의식, 그리고 초의식, 집단 초의식, 우주적 초의식 등 마음의 모든 영역으로 침투해간다.
(신라인들에게 마음의 스승이었던 석굴암 본존부처님)
본래 이 명상은 석가모니 붓다를 마음에 그리며 행해왔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가슴으로부터 사랑과 신뢰를 느끼고 있는 각자의 영적인 스승을 생각하며 행한다면 그 효과는 한층 더 깊어질 것이다. 살아있는 스승이든 혹은 과거의 영적인 스승이든 상관은 없다. 만약 우리가 그들로부터 흘러넘치는 파동과 에너지에 대해 자신을 열 수 있다면, 그러한 스승들은 지금도 우리를 도울 수 있다.
이 바르도를 행함에 있어서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존재하는 마음의 심층영역 즉, 아스트랄체의 기억회로에까지 이를 수 있도록 육체를 이완하라.
이 명상을 행하는 동안 그대의 영적인 스승을 기억하라. 그대의 스승은 그대가 생과 생 사이에 바르도라는 과정을 지나갈 때 그대를 보호하고 인도해 줄 것이다. 스승과 함께 있다는 느낌은 그대에게 미지의 세계 속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는 신뢰와 용기를 줄 것이다. 그리고 바르도의 과정에서 어떠한 환영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마음의 투영에 지나지 않으며 단지 지켜보는 자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해 줄 것이다.
이 명상은 그대의 스승을 마음에 그리며, 혹은 그의 사진 앞에서 행하라. 고요히 스승에 대해 명상하라. 삶에서도 죽음에서도 그대를 지켜주는 스승의 모습을 떠올려라. 물에 비치는 달 그림자처럼 그의 존재는 비록 눈에 보인다해도 실체는 없다. 그 모습이 녹아 서서히 사라지게 하라.
무념 속에서 텅 빈 투명한 빛을 상상하라. 투명한 빛으로 이루어진 그의 현존을 느껴라. 그 빛이 다가와 그대를 감싸고 그리고 마침내 그대 속으로 녹아 드는 것을 느껴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