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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폭격] '배후에 악랄한 일본 있었다' [KBS 파노라마]

잠용(潛蓉) 2014. 3. 1. 11:39

[KBS 파노라마] 독도폭격 배후에 악랄한 일본 있었다
[세계일보] 입력 2014.02.28 21:00:00, 수정 2014.02.28 21:00:00

 

 

‘KBS 파노라마’는 3.1절을 맞아 1948년과 1952년 두 차례 독도폭격의 배후를 추적한다. 지난 22일 일본 시마네현에서 다섯 번째 ‘다케시마의 날’ 기념식이 열렸다. 중앙정부에서 차관급 인사가 2년 연속 파견됐고 여야 국회의원도 다수 참석했다. 이날 행사장 주변은 물론 일본 각지에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극우파들의 집회와 선전전이 벌어졌다.

 

아베 정권은 최근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그동안 ‘분쟁지역’으로 표기했던 독도를 ‘일본 영토’로 명기하도록 한 상황. 또 1993년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한 ‘고노담화’를 수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등 일본의 역사 왜곡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역사적 진실을 외면한 일본의 대외 전략은 우리 국민의 안위를 위협할 수도 있다. 그런데 65년 전, 독도에서 충격적인 폭격 사고가 있었다.

 

 

 

[B-29 독도폭격 잰해물 -KBS 파노라마에서]

 

1948년 6월 8일, 독도에서 전복과 미역을 따고 있던 우리 어민들의 머리 위에 정체불명의 폭격기가 나타났다. 폭격기들은 어민들의 머리 위로 450킬로그램급의 폭탄을 투하했고, 11명의 어민이 현장에서 즉사했다. 나중에 미 공군기가 독도에서 폭격 훈련중이었다고 밝혔지만 우리 정부나 어민들은 독도가 폭격 훈련장으로 지정된 사실조차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이 비극적인 사고의 배후에 일본이 있었다는 사실이 이번 취재 중 최초로 밝혀졌다.

 

 

맥아더 연합국 최고 사령관 각서인 스캐핀에 따라, 독도는 명백한 한국의 영토로 규정됐고 일본인과 일본의 선박은 독도 근방 12마일(19킬로미터) 내에 접근조차 할 수 없게 됐다. 이제 일본은 국제적으로 더 이상 독도 영유권 주장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됐고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1946년 요시다 시게루 내각이 들어서면서 독도를 빼앗으려는 작업을 시작한다.

 

1947년, 일본 외무성은 ‘일본의 부속도서’라는 이름의 홍보문서를 비밀리에 제작한다. 독도와 울릉도를 일본의 섬이라고 소개한 황당한 문서는 독도에 대한 왜곡된 정보와 주장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런데 이 문서가 독도를 한국령으로 인정해왔던 연합군 사령부와 미 국무부에 비밀히 전달되면서 내부에서 엄청난 혼선을 초래하고 만다. 마크 로브모 미국 칼럼니스트는 “이 홍보 자료를 통해 미국은 독도를 한국 영토 목록에서 제외했다. 일본은 독도 뿐 아니라 울릉도까지 욕심냈다”고 밝혔다. 한철호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일본은 미국에 독도 폭격을 승인했고 이를 통해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는 것을 미국으로부터 간접적으로 인정받으려 했다”고 설명했다.

 

 

일본은 보다 위험한 계획을 준비중이었다. 오키나와에 주둔 중이던 미 공군이 당시 폭격 훈련장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고 미공군을 이용하기로 한 것. 즉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인양 거짓 홍보해서 미공군에게 독도를 폭격 훈련장으로 허락해주며 이 모든 승인 과정을 통해 독도의 영유권을 미국에게 인정받으려는 구상이었다. 이 모든 계획과 과정들이 독도를 일본 영토로 삼키기 위해 처음부터 정교하게 계획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다양한 일본 의회 증거문서들을 이번 취재로 최초 공개한다. 1953년 3월 5일 참의원 외무, 법무위원회 연합심사 회의록 중에는 “독도를 폭격 연습장으로 지정하게 된다면…독도가 일본의 영토라는 것을 나타내는 유력한 법률적 근거가 될 것이다”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일본은 왜곡된 비밀홍보문서제작과 전달은 물론 더 나아가 연합군 사령부 외교국장과 일본정치고문을 역임한 윌리엄 시볼드를 통해 전방위적인 로비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친다. 당시 일본 외무성 조약국장 시모다 다케소의 회고록을 입수, 어떻게 일본이 미국에게 로비를 집요하게 진행했는지 그 내용을 공개한다. 그리고 일본의 계획대로 1948년 독도가 일본영토안에 미공군폭격지로 지정되고 만다.

 

취재진은 1948년 폭격 훈련에 참여했던 329 폭격 비행대의 존 깁슨 대령의 육성을 입수했다. 그는 폭격 훈련 전 사전 정찰과 주민 대피 조치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 어민들은 폭격경고와 대피령을 전달받지 못했을까. 폭격당일날 경고는 독도와 울릉도 근방이 아닌 일본 땅 오키섬 근방에만 내려졌다. 왜냐하면 미공군은 독도가 일본영토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우리 어민들이 독도에서 조업을 하고 있는 실상을 외면해 엄청난 피해를 예상하고도 독도 폭격 훈련을 유도한 정황이 포착됐다. 심지어 당시 미공군조종사들간에는 무고한 어민들이 마약 조직원이란 뜬소문까지 퍼져 있었다.

 

왜곡된 정보와 홍보 전략 그리고 로비를 통해 끊임없이 독도 침략을 시도해 온 일본. 그 위험한 도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금도 더 철저하게 치밀하게 공개적으로 진행 중이다. 이를 방어할 수 있는 우리의 전략은 무엇인지, 그 동안 독도 폭격 사건의 숨겨졌던 진실을 밝혀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일본의 독도침략에서 우리의 독도를 지켜나갈수 있는지 그방법을 모색해본다. [28일 밤 10시 방송. 한준호 기자 tongil77@sportsworld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