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차 동서독 정상회담에서의 인권문제 논의
1970년 3월 및 5월 개최된 1․2차 동서독 정상회담 시 서독측은 국제적인 일반원칙을 들어 인권존중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그 후 1972년 12월 체결된 동서독 기본조약에 인권조항을 삽입토록 했다.
1970년 3월 동독 에어푸르트에서 개최된 제1차 정상회담에서 빌리 브란트 총리는 “자유로운 왕래와 인권신장을 이룩하는 관계발전이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임을 분명히 했으며, 그해 5월 서독 카셀에서 개최된 제2차 정상회담에서는 “국제법의 일반원칙으로서의 인권, 평등권, 평화적 공동번영 및 차별금지의 기반 위에서 관계를 맺겠다는 의사를 공포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기본조약 제2조에 ‘인권보호’ 조항을 삽입하는데 성공했다.
동서독 관계 정상화 이후의 정책
1973년 동서독 관계 정상화 이후 동서독이 모두 유엔인권협약과 유럽안보협력회의(CSCE)에 가입했고, 동서독 기본조약에도 인권조항이 삽입되어 있어 기본조약 상의 내정불간섭 원칙에도 불구하고 서독이 동독의 인권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근거는 충분히 갖고 있었다.
또한 1973년 7월 31일 서독 연방헌법재판소가 동서독 기본조약에 대한 위헌소청 판결문에서 서독정부가 대동독 관계에서 인권보호를 위해 준수해야 할 5가지 원칙을 부과함에 따라 화해․평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동독주민의 인권문제는 서독의 대동독 정책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고, 서독 정부는 유엔인권협약을 근거로 국제기구 등에서 서독정부의 기본입장을 표명하고 동독의 인권개선을 촉구하는 활동을 계속해 왔다.
그러나 브란트의 동방정책 이후에는 기본법의 명제에 따른 원칙적 입장표시는 주로 국제기구를 통해서 하고, 실질적 인권개선 문제는 동독과의 직접 협상을 통해 해결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동독에 대해 인권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공개적으로 인권개선을 촉구하거나 ‘정당한 분노’를 표시하는 것은 상호관계를 경색시켜 대화를 통한 해결을 어렵게 하고 동독정권의 주민통제의 강화를 유발한다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 동독인의 서독이주, 동서독 주민의 방문여행 확대, 상호간의 경제교류 확대를 통한 동독주민의 생활수준 향상이 실질적인 인권개선을 가져온다고 판단하여 인도주의의 실현에 치중했으며, 이를 위해 민간단체의 활동을 지원하거나 동독정부와의 비밀교섭을 통해 대가를 지불하고 특정문제에 양보를 받아내는 방법을 주로 사용했다. 1983년 6월과 1984년 7월 서독은행이 동독에 총 19억 5,000만 마르크의 차관을 제공한데 따른 대가로 동독정부가 국경지역에 설치된 자동발사장치를 제거하고 동서독 주민에 대한 여행규제를 완화토록 한 것은 이러한 노력이 거둔 성과였다. 그러나 사민당 정치인들이 동독측에 대해 주민의 인권보장이 정부와 주민간의 신뢰강화 계기가 되므로 체제위협 요인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했으나, 상호간의 교류가 확대될수록 동독 측이 자기 체제의 취약성을 더욱 강렬하게 인식하게 되어 일정선 이상으로는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서독정부는 자유와 인권의 보장 문제를 포기할 수 없는 대원칙으로 설정해 놓았으면서도 동독주민의 실질적 인권개선을 위해 온건하고 조심스러운 방법으로 ‘곡예’를 할 수밖에 없었다. 국제사회에서의 문제제기를 통해 동독의 인권문제가 개선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경제협력을 동결시키는 전략은 동독주민의 경제적 고통을 심화시키고 이산가족의 방문․교류를 저해할 뿐 아니라, 동독정부로 하여금 점진적인 인권개선 마저 포기케 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독 측의 반응과 대처
동독 측은 서방의 인권보장 요구를 동독 내 반체제 세력을 지원하려는 이데올로기 공세로 인식하면서 서방과 공산권은 인권개념이 서로 달라 서방측의 요구는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서방측은 정치적․시민적 권리를 중시하지만 자신들에게는 인권실현을 위한 정치․경제․사회적 구조가 더욱 중요하며, 모든 인권은 동독 헌법의 기본정신과 목표에 합치되는 경우에만 보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독측은 동서독 관계가 정상화되고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체제가 정착되는 것과 비례하여 가급적 국제규범을 준수하고 동독주민의 생활개선을 위해 더욱 노력하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CSCE 회의에서 인권문제와 정보교류 문제가 자주 거론됨에 따라 1970년대 후반 이후 서독 방송과 텔레비전 청취를 허용하고 1987년 사형제도를 폐지한 것, 서독과의 협상을 통해 경제적 대가를 받은 후 국경 자동발사장치를 제거한 것, 동독주민의 이주와 여행 허가범위를 확대한 것 등은 국제여론을 의식한 결과로 해석되며, 특히 동서독 관계 정상화 이후 동독정부가 주민의 정치적 자유를 확대하고 생활수준 향상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서독과의 체제경쟁을 의식한 것으로 서독정부의 화해․협력 정책이 거둔 성과로 평가된다.
8. 동독의 정치적 악행기록 보존을 위한 중앙기록보존소는 어떻게 해서 설치하게 되었는가?
서독은 1961년 동서독 국경지역인 잘츠기터(Salzgitter)에 동독의 악행기록과 인권탄압 사례를 수집, 보존하기 위해 중앙기록보존소(Erfassungsstelle)를 설치하여 통일시 까지 30여 년간 약 80,000건의 기록을 유지해 왔다.
그 동안 동독정부와 서독 사민당 인사들이 이 기구의 폐지를 강력히 요구했으나 서독 정부는 동독 공직자에 대한 경고적 목적과 불법행위 기록유지를 위해 이 기구를 계속 유지해 왔으며, 통일 후 이 기록보존소의 자료는 동독의 사법제도 정착과 판․검사 및 공직자들의 임용여부 심사를 위한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설치 배경
1961년 8월 13일 동독의 베를린 장벽 설치로 왕래가 차단된 후 동독 내부의 사정은 더욱 알기 어렵게 되었고 국경 탈출자들에 대한 총격 및 가혹한 처벌로 동독주민에 대한 인권침해 상황은 더욱 심각해 졌다.
이에 대응하여 1961년 11월 15일 서독 각 주 법무장관들은 동독에서 자행되는 반 법치국가적, 정치적 폭행 사례를 기록하기 위해 니더작센주 법무성 산하에 중앙기록보존소를 설치하기로 결의했다. 서독측이 이 기구를 설립한 것은 ①동독주민의 인권보호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점, ②통일 후 법치국가적 질서 확립을 위해서는 정치적 목적으로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을 처벌할 근거를 마련해 놓을 필요가 있다는 점, ③언젠가 동독지역이 자유민주국가가 되면 자연법적 질서를 어긴 악행은 처벌 받는다는 점을 경고함으로써 가해자들이 정치적 폭력행위를 자제토록 한다는데 목적을 두었다
이 기록보존소는 2차 대전 이후 나치전범들을 지속적으로 추적하여 처벌하기 위해 설립한 나치만행기록소(Zentrale Stelle der Landesjustizverwaltung)를 모델로 삼았으며, 그 외에도 스탈린주의 희생자 협회, 베를린장벽 설치 관계자 조사협회, 국제인권연맹 등의 조직과 활동내용을 참고하여 설립되었다. 이 기록보존소가 니더작센주 잘츠기터(Salzgitter)에 설치된 것은 니더작센주가 동독과의 국경이 가장 긴 주이고 국경근방 도시 중에서는 잘츠기터가 지방법원이 소재하고 있는 비교적 큰 도시였기 때문이다.
조직, 임무․기능 및 운영
이 기록보존소는 검사 2명, 주 법무성 공무원 1명, 4명의 계약직 공무원 등 총 7명의 소규모 조직으로 운영되었다. 검사 가운데 1명은 부장검사로서 소장직을 맡아 주 1회 근무했고 평검사는 주 2회 근무했으며, 실무책임을 맡은 법무성 공무원과 기록전문 요원인 계약직 공무원들은 상근요원이었다. 예산과 인사문제는 니더작센주 법무성이 관할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실제 임무수행은 완전히 독립기관의 형태로 운영되었다. 각 주에 협조사항이 있을 경우 니더작센주 법무장관을 통해 각 주 법무장관회의에서 제기했으며, 개개 사건의 자료수집 업무는 해당 주 경찰과의 직접 접촉을 통해 수행했다.
기록보존소에 파견된 검사들은 형사소추권이 없었으며 동독에서 정치적 목적으로 자행되는 4가지 폭력 및 인권침해 행위에 대해 사례별, 인물별로 기록을 유지하고 증거자료를 보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4가지 기록대상 행위 가운데는 ①국경탈출자에 대한 발포행위, ②동독 형법에 규정된 형량이라도 초실정법적인 견지에서 과도한 형량을 부과한 행위, ③수사기관원이나 간수들의 고문 등 가혹행위, ④비밀경찰(Stasi)이나 경찰에 밀고나 정탐을 하는 행위 등이 포함된다.
사례 수집을 위해서는 다양한 방법이 활용되었으며, ①정치범 석방교섭을 통해 석방된 정치범, ②서독으로 탈출한 동독 군인(장벽설치 후 약 2,600명), ③동독 발행 각종 간행물, ④동독인이 서독 친지에게 보낸 서신 및 통화내용, ⑤동독 방문 서독인, ⑥동독으로부터의 합법적 이주자, ⑦정보기관과 같은 연방기관 등 활용 가능한 대상은 모두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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