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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기념일

[광복 70주년] 광복의 주인 없는 친일들의 잔치

잠용(潛蓉) 2015. 8. 13. 10:04

[광복 70년 독립운동家 70년] 최진동 장군의 손녀 최정선씨
할아버지가 지킨 고국… 반지하에 사는 칠순 손녀

[한국일보] 양진하 기자 2015.08.12 04:40

 

 

[사진] 최진동 장군의 친손녀인 최정선씨가 10일 인천 남동구 집에서 어려운 시절을 이야기하면 눈물을 닦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2010년 국적 회복했지만
유공자 연금 수급권자 제한 탓, 수입은 기초노령연금 등 50만원뿐

“오래 살다 보니 내 얘기를 들어주러 오는 사람도 있네.”

열린 방문 앞에서 이름을 여섯 번 부르고 나서야 보청기를 낀 최정선(76)씨가 인기척을 알아챘다. 10일 오전 인천 남동구의 한 주택 반지하방은 해가 중천인데도 빛이 들어오지 않아 어두컴컴했다. 최씨는 이날도 전기세를 아끼려고 전등을 켜지 않은 채 자투리 도라지 무침과 구운 김으로 늦은 아침을 해결하는 중이었다. “한겨울에도 두껍게 옷을 입고 지내면 가스비가 많아야 2만원, 여름에는 900원밖에 안 나와.” 전에 살던 사람들이 버리고 간 낡은 침대와 밖에서 주워온 전기장판, TV, 소파가 세간의 전부였다.


최씨는 중국에 남편과 자식이 있지만 굳이 한국에 머물 것을 고집했다. 할아버지가 평생을 바쳐 지켜낸 나라이기 때문이다. 1920년 한국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군을 대파한 ‘봉오동 전투’에서 사령관을 맡았던 최진동(1883~1941)장군이 바로 그의 할아버지. 최씨도 중국 지린(吉林)성 봉오동에서 태어나 2005년 한국에 오기 전까지 인근 석현에서 평생을 살았다. “할아버지는 1912년 봉오동학교를 설립해 학생들에게 반일계몽사상을 가르쳤고 3ㆍ1운동 직후에는 사재를 털어 사들인 무기로 항일무장단체인 군무도독부를 만들었어. 봉오동 지리를 잘 아니까 일본군을 무찌를 수밖에 없었지.” 최씨는 할아버지의 공적을 줄줄 꿰고 있었다.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벌인 최 장군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하지만 김좌진ㆍ홍범도 장군에 비해서는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최씨의 가족사는 무관심에 잊혀지고 있는 해외 독립유공자 후손의 빈한한 삶을 잘 보여준다. 생활은 늘 어려웠다. 광복 후 집안 재산이 중국 정부에 몰수돼 큰 언니(2012년 작고)와 오빠(79)는 학교 다닐 나이에 공장에 다니며 생계를 이었다. 최 장군의 둘째 아들인 아버지는 형과 동생을 찾으러 남한에 내려왔다가 1950년대 후반 병사했다는 얘기만 전해 들었다.

 

2010년 국적을 회복한 최씨의 수입은 기초노령연금 20만원과 기초생활급여 30만원 뿐이다. 5년 전부터 심근경색을 앓아 월 8만원에 이르는 약값과 건강보험이 적용 안되는 초음파ㆍ혈관검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악착같이 돈을 아끼고 있다. 2013년 여름에는 기초생활급여가 15만원 깎였는데 알고 보니 아들이 한국에 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중국국적인 아들은 불법체류 상태라 돈을 벌면 벌금을 내야 했다. 그는 구청과 공공기관 여러 곳에 전화를 걸고 ‘구청장님께’라는 제목으로 편지까지 보냈고 9개월 뒤에야 생계급여가 원상회복됐다. 최씨는 “최진동 장군 손녀라고 써 붙이고 있으면 이보다 나을까 싶다가도 할아버지의 명예에 누가 될까 봐 그럴 수도 없다”며 “오빠도 노령연금 20만원 외에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한숨을 쉬었다.

 

최씨 남매가 유공자 연금을 받지 못하는 것은 수급권자가 1명으로 제한돼 있어서다. 해방 이후 줄곧 한국에 머물렀던 셋째 삼촌이 연금을 받고 있다. 최씨는 “정부가 1980년대 국적을 회복시켜준다고 했을 때 한국에 들어왔으면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았을 텐데 당시엔 비행기삯도 마련하기 어려워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했다. 아직 국적 인정이 안된 아들 부부는 체류기간이 만료돼 지난달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최씨의 남편은 “이럴 바엔 차라리 중국에서 살자”며 아직도 설득하고 있다.

 

그래도 최씨는 할아버지가 항상 그리워했던 한국 땅에서 이 정도나마 치료와 지원을 받을 수 있어 고맙다고 했다. 최씨는 “돌아온 조국에 부담이 되기 싫어 일을 하고 싶지만 몸이 아파 그러지도 못한다”면서도 “반드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나라에서 눈을 감아야겠다”고 말했다. “남들 보기엔 제 삶이 ‘하루살이’처럼 힘겨울지 몰라도 최진동 장군이 대한민국에서 잊혀지지 않도록 손녀가 죽는 날까지 보초를 서고 있는 겁니다.” [양진하기자 realha@hankookilbo.com]

 

[광복 70년 독립운동家 70년] 안동 양반 후손의 수난사

뼈대 있는 명가도 풍비박산… 아래기로 배 채우며 버텼다

[한국일보] 김성환 기자 2015.08.12 04:40   

 

이상룡 등 천석꾼들 독립운동 투신

일제 압박에 집안 궁핍 시달려 자손들 고아원 가고 막노동까지

 

[사진] 안동 독립유공자 후손 프로필


“‘아래기’라고 들어 보셨소? 소싯적 아래기로 주린 배를 안 채워본 아가 없다 아입니까?”

10일 석주 이상룡(1858~1932) 선생의 생가인 경북 안동 임청각에 모인 60,70대 촌로 여섯은 배곯던 유년 시절 기억을 더듬으며 하나같이 손사래를 쳤다. 아래기는 소주를 곤 뒤에 남은 찌꺼기 ‘아랑’을 뜻하는 경상도 방언. 소주 지게미로 연명했던 지난 세월을 곱씹는 이들은 독립유공자의 후손이다. 안동은 동쪽의 내앞부터 북쪽의 하계와 원촌, 서쪽의 금계와 가일, 오미 마을까지 항일 독립운동가의 산실로 유명한 도시다.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353명은 시 단위 지방자치단체 중 단연 으뜸이다. 서훈을 받지 못한 무명의 투사까지 합하면 대략 1,000여명의 주민이 일제 때 직ㆍ간접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산한다. 그 중 독립유공자 후손 67명은 지금도 고향을 지키고 있다. 자긍심 하나로 버텨왔다는 이들이지만 광복 70주년을 맞는 소회에는 고단함의 울림이 더 크게 배어 나왔다.

 

고아원 전전하고 간장 행상에 급사 노릇까지

“중학교 졸업하고 여동생하고 대구 고아원에 들어갔제. 그래야 밥이라도 얻어먹고 학교라도 다닐 수 있었으니까.” 석주의 증손 이항증(76)씨의 기억 필름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인 1932년 석주가 만주에서 숨지고 가족이 다시 안동으로 돌아온 무렵부터 시작됐다. 어렵사리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강성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는 딱지가 붙으면서 일제의 핍박은 도를 더했다. 이씨는 “일제의 등쌀에 가족 모두가 세상을 등지고 여기(임청각)서 20~30리(8~12km) 떨어진 산 속에 들어가 10년을 살았다”며 “그랬는데도 괴롭힘에 지쳐 결국 가족이 풍비박산 났다”고 했다.

안동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였던 석주 집안은 1910년 한일 강제병합으로 나라가 망하자 가산을 모두 처분해 만주로 향했다. 석주는 서간도에서 신흥무관학교와 서로군정서를 결성하고 직접 이끌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까지 지냈다. 석주의 아들(준형)과 손자(병화)까지 3대는 물론, 종친 9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됐을 정도다. 그러나 일제의 변절 강요가 이어지자 할아버지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1942년 자결했다. 아버지까지 6ㆍ25 전쟁 와중에 숨지고 형님 4명도 잇따라 사망하면서 살림은 더욱 궁핍해졌으나 기구한 운명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이씨는 “어머니는 아버지 없는 조카 9명까지 거두며 한평생을 눈물 속에 살다 가셨다”며 “내가 곡절 끝에 스물 일곱살에 은행에 들어갔는데 그게 우리 집안에서 처음 월급쟁이가 나온 것”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대곡마을 대지주 출신으로 역시 1912년 만주로 망명했던 독립운동가 추산 권기일(1886~1920) 선생의 손자 대용(67)씨도 이씨와 진배없는 삶을 살기는 마찬가지였다. 추산은 한일 강제병합 뒤 쌀 1,500석이며 논마지기와 기와집 등 전 재산을 팔아 군자금에 보탰지만, 1920년 민간인을 상대로 한 일본군의 대규모 보복전 당시 피살돼 만주 땅에 잠들었다.

 

광복과 함께 금의환향을 꿈꿨던 아버지의 기대는 금세 산산조각 났다. 아버지는 간장 행상으로 식구들을 보살폈다. 권씨는 “오죽하면 당시 독립투사 아들이 간장 행상을 한다고 신문에 났겠느냐”며 쓴웃음을 지었다. 맏이인 권씨 역시 남의 집 허드렛일부터 시청 급사까지 닥치는 대로 일했다. 절망의 삶에 한 줄기 빛이 된 건 택시였다. 어렵사리 개인 택시 면허를 취득해 30년 넘게 바지런히 살며 3남매의 대학공부 뒷바라지까지 마칠 수 있었다. 권씨는 “얼마 전 어느 정부기관에 갔더니 ‘독립운동을 아저씨가 한 게 아니고, 아저씨 할배가 한 거 아닌교’라는 핀잔을 들었다”며 “‘지난 삶을 되돌릴 수는 없어도 독립유공자 후손이 부끄러운 훈장은 아니지 않느냐”고 기자에게 되물었다.

 

이념에 갇힌 후손들의 굴곡진 흔적

두 사람과의 대화를 곁에서 듣고 있던 중절모를 쓴 노인이 망설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이씨와 친구처럼 지낸다는 안우환(77)씨였다. 안씨는 이내 가족사를 쏟아냈다. 그의 집안은 원래 남흥에서 천석꾼으로 유명했다. 그랬던 집안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건 아버지 안상길 (1892~1958) 선생이 독립운동에 투신하면서다. 아버지는 1919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임시정부 경북 교통부장으로 임명된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임시정부 자금을 마련하고 3차 조선공산당 경북도 책임비서까지 지내다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안씨의 인생은 아버지의 독립운동보다 사회주의 활동이 부각되면서 꼬이기 시작했다. 그는 “연좌제에 걸려 검찰 사무직 채용 시험에 합격했는데도 발령이 안나 임용포기 각서를 썼다”며 “결국 할 수 있는 일은 막노동뿐이었다”고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의 독립운동 이력이 버젓이 남아 있지만 국가보훈처는 유공자 지정 문의에 묵묵부답이다.

 

안씨의 8촌인 안선열(71)씨도 아버지 안상윤(1911~1949) 선생이 신간회 활동에 힘썼으나 사회주의 노선을 택했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지정이 거부됐다. 그는 “자라면서 아버지의 이력은 멍에나 다름 없었고, 나 역시 취업이 안 돼 장사란 장사는 다 해봤다”며 “이제라도 아버지에 대한 공적이 제대로 평가 받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독립유공자 후손으로서 힘들게 살아 온 삶의 궤적은 비슷해도 사회주의 노선에 섰던 후손들의 목소리는 분명 결이 달랐다. 풍산에서 만난 이헌붕(72)씨의 조부는 2차 조선공산당 중앙간부을 지낸 이준태(1892~?) 선생이다. 이씨의 집 한 켠에는 할아버지의 공적을 기록해 놓은 사진과 문서가 수북했다. 같은 시기 조선공산당 활동을 했던 김재봉 권오설 선생 등이 서훈을 받은 것과 달리 이씨의 할아버지는 ‘월북’ 증언이 두 번 나와 보훈처 심사에서 탈락했다고 한다. 이씨는 “6ㆍ25 전쟁 이후 할아버지는 생사 불명이었는데 명확한 물증 없이 증언만 갖고 몰아 세우니 답답하다”고 억울해 했다.

 

독립운동가 손영학 선생의 손자 병선(63)씨의 말에는 좌우를 떠나 조국 독립을 위해 몸바친 선대를 둔 후손의 바람이 담겨 있었다. “안동이 독립유공자가 많다카지만 대문에 독립운동가 집안이라카는 문패 하나 붙일라 해도 무신 절차가 그리 복잡헌지. 건의 자체가 안 된다 안캅니까. 뭔 날만 되면 떠들게 아니라 평시도 신경을 쪼매만 더 써달라카는 깁니다.” [안동=김성환기자 bluebird@hankookilbo.com]

팔순에야 받게 된 유공자 연금… 고생한 세월 서럽기만

형제 독립군의 손자 한상조씨

[한국일보] 정준호 기자 2015.08.12 04:40

 

 

[사진] 한상조씨가 서울 고척동 자택에서 할아버지 한태석 선생의 훈장증(건국훈장 애국장)을 들어 보이고 있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독립운동 기록 겨우 인정받았지만 정부는 달랑 유공자 증서 한 장만…

올해 법 바뀌며 연금 156만원 혜택 "몇 해나 더 받을 수 있을까요?"

10일 서울 고척2동의 한 구멍가게. 10㎡(3평) 남짓한 비좁은 실내 한 귀퉁이에 대통령 3명의 이름과 직인이 찍힌 훈포장과 독립유공자 증서가 나란히 철사줄에 걸려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7년, 노태우 대통령은 1990년, 노무현 대통령은 2005년에 증서를 주었다. 이를 바라보며 ‘용감한 형제 독립군’ 할아버지들의 공적을 말하는 가게주인 한상조(79)씨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볼품 없는 가게 하나밖에 없는 내게도 이렇게 훌륭한 선대가 있어 뿌듯할 뿐입니다.” 그의 할아버지 한태석(1876~1949) 선생은 1916년 충남 청양 출신으로 의병 활동을 하며 대한광복회 군자금을 모금하고, 조선총독 암살 거사를 계획했다가 8년간 옥고를 치렀다. 동생 한훈(1890~1950) 선생도 광복단 대표로 활동하며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 무려 19년6개월간 감옥 생활을 했다.

 

한씨의 자부심은 거기까지였다. 나라만 알던 의병이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건 가난뿐이었다. 조부는 일제의 모진 고문에 오른팔이 잘려 외출조차 어려웠다. 아버지는 장티푸스에 걸려 광복을 2년 앞둔 어느 날 할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떴다. 열살 터울의 형 내외가 함께 살았지만 일제 수탈로 궁핍해진 동네에서 머슴이 되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였다. 한씨는 “자존심을 지키려던 할아버지는 닷새를 굶고서야 이웃에게서 겨우 보리밥과 열무김치를 얻어 먹었다”고 회상했다.

 

그토록 바랐던 광복이 와도 어찌된 일인지 가세는 갈수록 기울었다. 한씨는 할아버지가 숨진 뒤 친척집을 전전하며 연명하다 스무 살이 되던 해 고향인 충남 청양을 떠나 무일푼으로 상경했다. 독립유공자 후손이란 타이틀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한 ‘스펙’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독립운동에 매진한 집안 탓에 후손인 그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된 노동뿐. 과수원 농사부터 시작해 여름에는 남대문 주변에서 아이스크림 장사를 하고 겨울엔 신촌에서 화투를 팔았다. 20대 중반에 운 좋게 철강회사에 입사했으나 800도가 넘는 열기 속에 일하면서 졸도하기 일쑤였다. 냉수를 맞고 정신을 차리는 생활도 포항제철(현 포스코)이 생기면서 회사가 망해 5년 만에 끝이 났다. 그래서 서른 살에 아내와 차린 구멍가게가 오늘까지 그의 직장이 됐다. 한씨는 “중학교를 나온 아내가 자리를 비울 때면 덧셈을 못해 손님 앞에서 진땀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했다.

 

밥벌이의 무서움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란 사실도 잊게 만들었다. 생계에 쫓겼던 한씨는 1977년에서야 지인의 도움으로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기록을 인정받았다. 한태석 선생은 건국포장을 받고 1990년 애국장에 추서됐다.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정부는 독립유공자 증서 한 장만 달랑 건넸다. 당시 광복 후 사망한 ‘애국지사’는 자녀까지만 연금이 지급 됐다. “국가보훈처에 전화를 걸어 아무리 생활이 어렵다고 호소해도 ‘예산이 없을뿐더러 법률상 지급할 수 없다’는 말만 되돌아왔지요.”

 

지난해 이사하기 전까지 한씨 부부와 큰 딸은 비가 새는 반지하 집에서 스티로폼으로 바닥을 채운 채 10년 넘게 살았다. 가게도 적자를 면치 못했다. 할아버지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지만 한씨는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렸다. 8년 전 끝내 개인파산을 신청해 빚 6,000만원을 탕감 받았다.

 

그는 얼마 전 비로소 할아버지의 공훈을 보상받을 수 있게 됐다. 올해 1월부터 독립유공자 자녀가 혜택을 받지 못하면 손자 세대에게 연금을 주도록 법이 바뀌면서 한씨에게도 연금 156만원이 지급됐다. 여든을 바라보는 한씨가 얼마나 더 연금을 받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없는 살림에 한시름 덜게 돼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고생만 했던 80년 세월이 서럽게 느껴졌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면서 “나라가 망해가는데 할아버지가 후손에 대한 걱정까지 했을까요. 원망은 안 합니다. 나라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요”라고 했다. 그가 두려운 것은 독립운동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흐려지는 일이다. 한씨는 “젊은이들이 가게 벽에 걸린 건국훈장들을 보고는 ‘건축 관련 문서냐’고 물어오곤 한다”고 말했다. [정준호기자 junhoj@hankookilbo.com]

'독립운동 하면 3대가 망한다' 현실로

[한국일보] 김성환 기자 정준호 기자 2015.08.12 04:40 수정: 2015.08.12 15:08

 

 

[사진] 독립유공자 3대인 한상조씨가 10일 서울 고척동 자신의 구멍가게 벽에 걸린 조부 한태석 선생의 훈포장과 독립유공자 증서를 바라보고 있다. 독립군 후손에게 '벌'처럼 남겨진 밥벌이의 무서움을 평생 겪어야 했던 한씨는 지난 1월 광복 70년 만에 처음으로 유공자 보상금을 받았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도표] 독립유공자 세대별 월 개인소득과 2015년 가구별 최저생계비 비교.

 

가족 75%가 월소득 200만원 미만

본인보다 자녀·손자녀·증손자녀가 월소득 200만원 미만 비율 더 높아

인천 남동구 반지하방에 사는 최정선(76)씨는 1920년 봉오동전투에서 독립군 사령관을 맡은 최진동 장군의 손녀다. 독립운동가 3대인 그의 월 수입은 기초노령연금 20만원과 기초생활급여 30만원이 전부다. 겨울 난방비는 2만원, 여름 전기료는 900원을 넘지 않는다. 서울 고척동에서 10㎡(3평) 크기 가게를 하며 팔십 평생을 바람 잘 날 없이 산 한상조(79)씨의 조부는 독립운동가 한태석 선생이다. 역시 독립운동가 3세대인 그에게 남은 건 보증금 3,000만원에 월 30만원짜리 월세방과 구멍가게, 뒤늦게 올해 1월부터 처음 받기 시작한 독립유공자 후손 연금 156만 8,000원이 전부다. 근근이 꾸려 오던 구멍가게는 지난해 길 건너 편의점이 들어서면서 매달 적자다. 그래도 두 사람의 고단한 삶에서 버팀목이 된 건 독립유공자 후손이란 자부심 하나였다.

 

본보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최초로 독립운동가와 후손들 모임인 광복회 회원 6,831명 전원을 대상으로 한국리서치와 함께 생활실태 설문조사를 했다. 조사에는 생존 독립유공자 26명을 비롯해 배우자 32명, 자녀(2대) 469명, 손자녀(3대) 509명, 증손자녀(4대) 53명 등 모두 1,115명이 참여했다. 조사결과 한씨나 최씨처럼 평생을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치부가 실제로 확인된 것이다.

 

독립유공자 가족들의 경제적 어려움은 상당했다. 월 개인 소득을 분석한 결과 200만원 미만 구간에 전체 75.2%가 몰려 있었다. 100만원 이상 200만원 미만이 43.0%로 가장 많았고, 50만원 이상 100만원 미만이 20.9%, 심지어 50만원 미만도 10.3%였다. 더욱이 3대를 넘어 4대 후손들로까지 가난은 대물림 되고 있었다. 월 개인 소득을 세대별로 보면 200만원 미만 구간에 독립유공자 본인(38.4%)보다 자녀(72.2%)와 손자녀(79.2%), 증손자녀(62.2%) 비율이 더 높았다. 100만원 이하 구간으로 나눠봐도 독립유공자 본인(23%)보다 자녀(25.3%), 손자녀(37.9%), 증손자녀(24.5%)의 비율이 더 높았다. 설문에 참여한 많은 응답자들이 연금생활자란 점을 감안하면 이들의 소득수준은 올해 우리나라 4인 가구 최저생계비(166만 8,329원)와 비슷하거나 이 보다 못한 셈이다. 후손들이 받는 연금(52만~188만원)을 빼면 순소득은 올해 1인당 최저생계비 (61만 7,281원)에도 못 미치는 빈곤층이 대다수라 할 수 있다.

 

개인 총 재산 역시 국민 평균을 한참 밑돌았다. 5,000만원 미만이 28.3%로 가장 많았고, 이어 5000만원 이상 1억원 미만이 21.1%, 1억원 이상 2억원 미만이 20.9% 순이었다. 이는 한국은행과 통계청의 ‘2013년 국민대차대조표 작성 결과’에서 나타난 우리나라 가구당(2.61인 기준) 순자산(3억 3,085만원)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수치다. 이 같은 결과는 주관적 계층인식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응답자 중 자신이 ‘하층’에 속한다고 답한 비율이 73.7%를 차지했다.

 

경제적 어려움은 교육 수준으로 연결됐다. 응답자 중 고졸이 25.7%로 가장 많았고, 이어 초졸(22.8%), 중졸(12.8%), 무학(4.7%)의 순이었다. 교육기회 박탈이 이들을 우리 사회 하층으로 내모는 주된 요인이었던 것이다. 보훈정책 중 가장 필요한 것을 묻는 질문에서는 보훈 연금 및 대상 확대가 63.1%로 최다였고, 이어 의료서비스(14.3%)와 주거(10.0%), 교육(3.1%) 지원이 뒤를 이었다. 이와 함께 직접 독립운동을 전개한 생존 독립유공자가 현재 83명이고 평균 나이는 91세로 나타났다. 이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정부가 독립유공자들에 대한 처우에 속도를 내야 할 필요성이 커지는 이유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은 “독립유공자 후손의 경제적 어려움은 해방 직후부터 실시돼야 할 보훈 정책이 1962년까지 미뤄진 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며 “그 때부터 시작된 가난의 고리가 아직까지 이어진 결과”라고 분석했다. 이번 조사는 본보가 지난달 6일부터 31일까지 광복회 회원 전원에게 우편을 통해 설문지를 보내, 이중 회신한 1,115명의 답변 분석을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이뤄졌다. [김성환기자 bluebird@hankookilbo.com 정준호기자 junhoj@hankookilbo.com]


독립운동가 숨은 가족사 첫 공개
[한국일보] 최정복 본부장 수정: 2015.08.12 19:48 등록: 2015.08.12 17:42 


[사진] 매헌 윤봉길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 윤봉길이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홍구공원 거사를 앞두고 고향의 아들에게 남긴 편지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는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로 시작된다.

 

뿌리공원 족보박물관 특별전

전국 유일 효 테마파크인 대전 뿌리공원 내 한국족보박물관이 독립운동가의 족보와 가계 기록을 조명하는 특별전시회를 연다. 독립운동가의 투쟁사 등 공적 나열을 넘어 일반인에게 잘 드러나지않은 가족사를 처음으로 총정리해 벌써부터 관심을 끌고 있다. 14일 개막하는 특별전의 테마는 ‘애국애가(愛國愛家), 독립운동으로 가문을 세우다’ 대전 중구(청장 박용갑)는 광복 70주년을 더욱 뜻깊게 맞기 위해 연초부터 이 전시회를 기획한 뒤 독립운동가의 가계도를 수집하느라 7개월간 정성을 쏟았다.

 

전시대상은 수많은 독립운동가 가운데 최고영예인 대한민국장을 받은 인물 25명으로 압축했다. 이 가운데 중국인 5명을 제외한 20명의 성씨와 가문을 전시한다. 중구는 윤봉길과 김구 등 독립운동가 11인의 족보나 가계기록까지 세밀하게 파악해 흥미진진한 가족사를 담아냈다. 안중근의 조카딸과 김구의 아들이 혼인한 기록이나 안창호의 형제나 사촌까지 죄다 독립운동을 한 사실 등이 망라됐다. 족보 등 관련 유물과 사진 등도 물론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

 

박용갑 청장은 “독립운동가 및 가족에 대한 감사를 담아내려 전시회를 준비했다”며“이번 특별전이 그동안 사회적인 업적을 중심으로 인물을 조명하던 독립운동사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뿌리공원은 14일부터 사흘간 무료개방한다. 이번 특별전은 1년간 상설전으로 이어진다. [최정복기자 cjb@hankookilbo.com]


[광복 70년, 독립운동家 70년] 친일파 대물림은 진행형
친일 선조가 남긴 재산으로… 떵떵거리는 후손들

[한국일보] 정지용 기자 2015.08.13 04:40 

 

재산 환수 리스트 35%가 일왕으로부터 작위 받아
친일 대가로 받은 연금 기반,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재산 늘려
실제 국고 환원 재산은 극히 일부… 친일의 부와 권력 세습 이어져

대한제국 황족 이재완(1855~1922)은 일제의 해결사였다. 그는 1903년 경의선 철도 부설권을 일본에 넘겨주고 그 공로로 대한철도회사 사장에 낙점됐다. 2년 후엔 조흥은행 전신인 한성은행 행장이 돼 일본이 금융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발행한 제일은행권 통용에 앞장섰다. 친일의 대가는 두둑했다. 이재완은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자 일왕으로부터 후작 작위와 포상금 33만6,000원(현재기준 약 33억원)을 받았다. 그는 이 돈을 다시 한성은행에 투자해 막대한 이자 수익을 얻었다. 당시 조선총독부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이재완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겼다. “일본에 대한 공로가 경탄할 만하다. 이씨가 금전에 무한한 욕심이 있는 것을 간파해 이처럼 대성공을 이루게 됐다.”

 

부는 대물림됐다. 이재완이 숨진 뒤 후작 작위를 이어 받은 아들 이달용은 광산 개발, 생명보험회사 운영 등 아버지 못지 않은 수완을 발휘해 재산을 불렸다. 가족들은 서울 가회동 대저택에서 부유하게 살았고, 후손도 서울 명문대 교수를 지내는 등 사회 주류로 살았다. 이준식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위원은 12일 “선친의 재산이 있었기에 친일파 후손들은 좋은 교육을 받고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도표] 숫자로 보는 친일파 청산되지 않은 친일 재산

 

부와 권력의 공생. 친일파가 오늘날까지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는 비결이다. 한국일보와 민족문제연구소가 공동으로 조사한 결과 2010년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이하 친일재산조사위원회)의 재산환수 리스트에 오른 168명 중 58명(35%)이 일왕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친일 귀족’으로 나타났다. 일본에 협조한 대가로 훈장을 받은 이들은 무려 163명(97%)이나 됐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실장은 “일제가 친일파에게 지급한 부와 권력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친일의 역사는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발표된 당일 일본 정부는 친일파 76명에게 선물을 안겼다. 작위 부여와 함께 토지와 1억~4억원 규모의 은사공채증권(연금)을 지급한 것. 친일파는 이를 기반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산을 불렸다. ‘조선 최고의 갑부’로 불리던 민영휘는 민중의 논밭과 화폐를 강제로 빼앗았다. 작위를 받은 후에는 정부로부터 회사 설립과 합병에 대한 인ㆍ허가를 손쉽게 얻어내 부를 불렸다. 오미일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교수는 “민영휘의 후손들은 체계적인 자산 관리를 위해 가족 회사를 설립했는데 10년이 안 돼 서너 배 성장했다”며 “일제에 적극 협력한 대가는 경제적 특혜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친일파 168명이 후손들에게 남긴 재산은 총 1,113만9,645㎡, 2,106억원 규모다. 후작 이해승의 후손이 보유한 땅은 197만㎡(320억원), 남작 이근호 후손의 땅은 6만3,652㎡(154억원)에 이른다. 자작 고영희의 후손은 3대가 친일재산조사위원회 리스트에 오른 사실도 확인됐다. 아들(20만㎡ㆍ42억원), 손자(23만㎡ㆍ39억원), 증손자(1만5,000㎡ㆍ2억6,000만원)가 모두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다.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은 “참여정부 때 친일 대가로 받은 재산을 국고로 환원했지만 추적이 쉬운 토지에 국한됐고 제3자에게 팔아 치운 토지나 현금화한 재산, 귀중품 등은 제외됐다”며 “친일파로부터 회수한 재산은 극히 일부”라고 말했다.

 

후손도 부를 기반으로 권력 유지

1910년 대한제국의 경찰권을 일제에 넘기고, 한일병합조약에 협조해 자작 작위를 받은 민병석의 차남은 민복기 전 대법원장이다. 민 전 대법원장의 자제들도 기업인, 검사 출신 변호사로 활동했다. 민병석은 후손들에게 2만3,340㎡(3억8,000만원)의 토지를 남겼다. 유신정권은 1978년 정년 퇴임하는 민 전 대법원장에게 최고 국민훈장인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아버지는 일제, 아들은 독재정권에서 훈장을 받은 셈이다.

 

1907년 순종을 협박해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킨 자작 이병무의 증손자는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했고 대기업 부회장을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자작 민영휘의 손자는 한국은행 총재, 후작 이해승의 손자는 서울그랜드힐튼호텔 회장, 을사오적인 자작 이근택의 손자는 대학 총장을 역임했다. 현병철 전 국가인권위원장의 증조부는 조선총독부 자문기관 중추원의 참의로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현준호다. 친일재산조사위원회는 현준호의 친일행위를 인정, 소유 땅 3만2,000㎡(10억원)를 국가에 귀속시켰다.

 

신명식 민족문제연구소 이사는 “1~3공화국 시기 정ㆍ부통령을 포함해 414개 요직에 앉은 사람 중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친일파가 111명이나 된다”며 “광복 후 친일 청산이 이뤄지지 않아 부와 권력이 세습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정지용기자 cdragon25@hankookilbo.com]

 

특별법 이전에 소유권 넘겼으면 환수 불가…

4년간 친일파 168명 토지 1300만㎡ 회수 그쳐
[한국일보] 김관진 기자 2015.08.13 04:40

 

친일 재산 환수 상황

드라마 ‘겨울연가’ 촬영지로 국제적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강원 춘천시 남이섬은 이제 연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관광지다. 하지만 남이섬을 찾는 관광객 중에 이곳 소유자가 친일파 민영휘(1852~1935)의 후손이란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명성황후의 먼 친척 뻘인 민영휘는 일제의 조선병합에 조력한 공로를 인정 받아 1910년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와 함께 5만엔(현재기준 10억원)의 은사금을 받은 대표적인 친일파다. 민영휘는 은사금 외에 당시 중추원 의장이라는 직위를 이용해 ‘권력형 부정축재’에도 성공했다. 귀족 출신으론 거의 유일하게 대자본가로 변신했고 당시 조선 최대의 갑부로 이름을 떨쳤다. 남이섬은 바로 이때 민영휘가 불린 재산을 물려받은 후손이 사들인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조사위)는 2006~2010년 활동 당시 남이섬을 국가에 귀속하지 못했다. 조사위의 활동 근거법인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특별법)의 한계 때문이었다. 특별법 제3조는 “제3자가 선의로 취득하거나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고 취득한 권리를 해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해당 조항이 포함된 것은 친일재산을 되찾는 과정이라도 새로운 소유권자가 갖는 사유재산권을 침해할 수 없다는 이유가 컸다. 결국 조사위는 이 조항으로 인해 친일파 후손이 선조에게 물려받은 친일재산을 제3자에게 매매해 소유권을 넘기거나 공동소유 관계가 된 토지 등에 대해선 환수할 수 없었다. 남이섬도 이 같은 경우에 해당됐다.

 

 

남이섬은 1965년 민영휘의 손자 민병도(사망)씨가 매입해 이듬해 종합휴양지 개발 목적으로 경춘관광개발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법인화됐다. 대표이사는 민씨였지만 소유지분을 갖는 제3의 주주가 발생, 특별법이 명시한 ‘법 적용 제외대상’에 포함될 수 있었다. 1994년에는 증손자 민웅기(66)씨가 회사 명의를 ‘주식회사 남이섬’으로 변경하고 대표이사를 지냈다. 현재 전문경영인이 대표를 맡고 있지만, 회사의 최대지분은 여전히 민씨 일가가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남이섬 측은 “손자 민병도씨가 자신의 퇴직금으로 매입한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하지만 민병도씨의 재산 상당 부분이 조부 민영휘가 일제에게서 받은 재산을 기반으로 축적된 것이어서 논란의 여지가 많다는 것이 조사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조사위는 당시 남이섬을 제외한 민영휘 소유의 땅 51필지(73억원)에 대해선 귀속에 성공했다.

 

조사위는 4년의 활동기간 동안 재산환수 대상으로 특정된 친일파 507명 가운데 168명의 토지 약 1,300만㎡를 환수했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이마저도 친일파 후손들이 낸 토지 반환소송 137건 중 14건에서 국가가 패소하면서 여의도 면적의 4분의 1 크기에 달하는 199만3,366㎡가 원고 측에 되돌아갔다. 조선 왕실의 종친 출신으로 후작 작위를 받은 친일파 이해승이 가장 많은 189만4,274㎡를 찾아 갔다. 아직 진행 중인 소송은 2건인데, 모두 이해승 관련 소송으로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하나는 이해승의 후손이 국가를 상대로 친일재산 결정을 취소해 달라며 낸 행정소송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가 이해승의 후손을 상대로 친일재산 처분으로 발생한 부당이득을 반환하라는 소송이다. 행정소송은 1심에서 국가가 패소했지만 2심에서 뒤집혔고, 부당이득 반환소송은 국가가 1ㆍ2심 모두 228억원을 반환하라는 취지로 일부 승소했다.

 

재산환수 대상인 친일파 339명의 후손들은 민영휘 사례와 비슷한 이유로 아예 조사위의 서슬 퍼런 ‘칼날’을 비켜갔다. 친일파 정교원의 후손은 경북 성주군, 경기 평택시 등에 위치한 토지 28만여㎡를 제3자에 모두 매각하고 양도소득세마저 체납한 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조선병합에 찬성해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은 매국노 조중응(1860~1919)의 후손도 경기 남양주 등의 땅 70여만㎡를 이미 제3자에게 모두 분할 매각한 것으로 전해졌다. 조중응의 후손 대부분은 30여년 전 일본에 귀화했다.

 

조사위에서 사무처장을 지낸 장완익(52) 변호사는 “특별법 도입 후 재산도피 형태로 숨긴 재산에 대해서는 부당이익금 반환청구소송으로 환수할 수 있지만 도입 이전에 팔아 치운 재산은 환수가 불가능했다”며 “남은 친일재산 환수를 위해서라도 기획재정부 혹은 법무부 산하에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팀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관진기자 spirit@hankookilbo.com]


[광복 70년, 독립운동家 70년] (中) 대물림되는 친일 잔재
애국과 친일... 후손들 삶의 간극 더 벌어졌다

한국일보 | 박주희  | 입력 2015.08.13. 04:48
 

경북 영덕을 무대로
항일 의병장 신돌석과 친일 기업인 문명기 인생 갈려
그 후손들 삶도 극명한 대비

일제가 식민지 건설의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한 1878년, 경북 영덕을 무대로 엇갈린 일생을 살게 될 두 남자가 태어났다. 한 사람은 평민출신으로 항일 의병장을 지낸 신돌석(~1908), 또 한 사람은 일제치하 대표적 친일 기업인이던 문명기(~1968)다. 혼돈의 시대 애국과 매국이라는 정반대의 길을 택했던 두 사람의 운명은 당대에 끝나지 않았다. 이들의 후손은 광복 70년을 맞는 오늘날에도 극명히 대비되는 삶을 살고 있다. 12일 경북 청송군 진보면에서 신돌석 장군의 손자 재식(64)씨를 만났다. 그는 66㎡(20평) 남짓한 집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60여년을 살면서 그가 소유한 유일한 재산이다. 신씨와 아내는 이곳에서 노모(80)를 모시고 있다. 

 

신씨는 "집이 누추하다"면서도 "그래도 이 집에서 부모님과 6남매까지 8명이 살았다"고 말했다. 가족의 바람막이가 되어준 집 한 채가 내심 고마운 듯한 말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신씨는 평범한 마을, 안락한 집에서 살지 못했다. 경북 영양군 석보면의 한 산속에서 태어나 세 살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1906년 의병을 일으킨 신돌석 장군이 300여명 남짓한 병력으로 울진, 삼척, 강릉 등에서 일본 주둔군을 격파하고 이듬해 영해 경무서(지역경찰의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를 습격하자 일제는 영덕군 축산면에 있던 그의 집과 논ㆍ밭 등 전 재산을 몰수했다. 인근에 모여 살던 일가 친척들도 조사와 감시를 받아야 했다. 집과 남편을 잃고 생계가 막힌 신 장군의 부인 한재여(1878~1952)는 결국 1920년대 후반 아들 둘을 데리고 산속으로 들어가 화전을 일궜다. 화전 생활은 광복 이후까지 30여년 간 계속됐다.

 

광복이 찾아와도 신씨 일가는 고향인 영덕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신 장군 때문에 피해를 입은 친척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신씨는 "결국 청송군 진보면으로 내려와 아버지(신병욱)가 고추, 콩 등을 떼다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악착같이 돈을 모아 아내와 자식 6남매를 건사했다. 신 장군의 항일운동을 입증하기 위해 5년여 간 동분서주한 끝에 1962년 어렵사리 건국훈장 대통령장도 받았다. 하지만 간신히 생활이 안정돼 갈 무렵 일이 터졌다. 신씨는 "아버지가 조부의 비석을 세우는 등 기념사업을 준비했는데 추진위원장이 사업비를 몽땅 들고 도망갔다"며 "50년 전 돈으로 7,000여만원의 빚더미에 올라 앉았다"고 말했다. 신돌석 손자 신재식씨, 빠듯한 살림에 대학 진학 포기 입대 문명기 손자 문태준씨, 재력 바탕으로 엘리트 코스 밟아 교수·장관 등 고위직 두루 섭렵


당시 안동의 중학교에 입학하려던 신씨는 돈 한 푼 없이 전세방을 전전하는 가족들을 보며 결국 진보면에 남아 중ㆍ고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군대를 갔다. 다행히 제대 후 유공자 혜택을 받아 농협에 취직했고 32년간 직장생활을 하다 7년 전 정년퇴직 했다. 그는 "그래도 두 아들을 안동에서 공부시켰고, 조부 고향인 축산면에 기념관이 생기고 생가도 복원돼 고마운 일"이라며 웃었다.

 

신 장군의 후손들이 굴곡진 삶에 허덕일 때 문명기 일가는 승승장구했다. 평안남도 안주 출신인 문명기는 유년 시절 영덕으로 이주해 1907년 지품면에 제지공장을 차렸고 금광을 인수해 큰 돈을 벌었다. 1935년 금광을 처분한 돈 12만원 중 10만원을 일본 육ㆍ해군 비행기 구입비용으로 헌납해 비행기에 '문명기호'라는 이름이 붙었다. 자본력을 등에 업고 1941년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기도 했다.

 

 

광복 후에도 문명기는 막대한 자본력과 인맥을 활용해 자녀와 손주들을 지원했다. 종손 문태준(87)은 1950년 서울대 의과대를 졸업한 뒤 미국과 일본에 유학을 다녀와 연세대 교수가 됐다. 정통 엘리트 코스를 밟은 그는 정ㆍ관계로 발길을 넓혔다. 4선 국회의원, 대한의사협회 회장, 세계의사협회 회장,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 장관 등 고위직도 두루 섭렵했다.

 

항일 의병장 신돌석 장군의 손자 재식씨가 12일 경북 청송군 진보면의 자택에서 어머니 김분연씨와 함께 1962년 신 장군에게 수여된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들어 보이고 있다.

 

이날 찾은 영덕군 강구면 문명기의 묘 옆에는 노산 이은상의 글귀가 새겨진 비석이 자리잡았다. 비문에는 "국도 개통과 동해안 축항 공사에 정력 했으며 (중략) 장손 의학박사 국회의원 태준을 비롯하여 50여 명의 제제(濟濟) 명사들이라 이로써 덕을 쌓은 집에는 자손이 복을 받는다는 옛말이 빈말이 아님을 알겠다"고 쓰여 있었다. 일제치하 문명기의 친일 행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문명기의 친일전력이 묵인되고 있는 이유는 뭘까. 강구면에서 만난 박모(84)씨는 "군사정권 시절 손자(문태준)가 국회의원이었는데 누가 친일행적을 문제 삼으려 했겠느냐"며 "아직도 문씨 일가를 두려워해 다들 말을 아낀다"고 했다. 또 다른 주민 김모(79ㆍ여)씨는 "문씨 일가로부터 알게 모르게 혜택을 받은 사람들도 많아 자의반 타의반 그들의 행적을 들추지 않으려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반세기 전 숨진 친일파의 영향력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얘기다.

 

제지공장이 있던 지품면에도 문명기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후손들은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비석을 세운 것이라고 주장했다. 주민 요청으로 문명기 장례가 군민장으로 치러졌다는 말도 들렸다. 하지만 대다수 마을 사람들의 기억은 이와 조금 달랐다. 지품면에서 만난 김원형(77) 씨는 "갑진년(1964년)에 마을 유지 4명을 발기인으로 문명기 기념비를 세운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당시엔 문씨 일가의 위세가 대단해서 기념비 설립을 거북하게 생각했던 주민들도 대놓고 반대하기가 힘들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기념비에는 누군가에 의해 두 동강이 났다가 다시 붙여진 흔적이 남아 있었다. 다만 김씨는 "물론 문명기가 친일 의혹을 받고는 있으나 금광 덕분에 마을 사람들이 먹고 살만해졌고 그 자손들이 마을발전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한 것도 사실"이라고 문씨 일가를 평가했다.

 

문명기에 대한 지역사회의 평가가 분분했기 때문인지 일부 후손은 '문명기 미화작업'에 나서기도 했다. 문명기가 환갑에 얻은 딸 문모(77)씨는 2000년대 중반 아버지의 기념사업을 추진하러 영덕을 방문했다가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문씨는 안동사범대를 졸업한 뒤 대구에서 터를 잡고 초등학교 교장, 정부ㆍ여성단체 간부 등 지역의 유력인사로 살아 왔다.

 

그는 2006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금광을 인수하겠다던 일본사람이 계약금을 주지 않아)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문제 해결을 위해) 금으로 된 명함을 들고 일본 총독을 만나러 갔다" "(비행기 헌납은) 일본인을 최대한 이용해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우리의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라는 등 아버지의 과거를 왜곡 포장하는데 앞장섰다. 손자 태준씨는 조부로부터 물려받은 강구면 소재 땅 1만1,207㎡(3,390평)가 2009년 친일재산국가귀속 결정이 나자 이를 취소해달라는 취지로 서울행정법원과 서울고법에 소송을 냈다가 패소하기도 했다.

 

현재 태준씨는 서울 용산구에, 딸 문씨는 대구에 생존해 있다. 태준씨는 현역에서 물러난 뒤 서울 용산구에 있는 228㎡(69평)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중구의 일가 소유 건물을 관리하고 있고, 딸 문씨는 한 재단법인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태준씨는 건강을 이유로 인터뷰를 고사했다. 문씨는 아버지의 애국주의자 면모를 담지 않으면 인터뷰에 응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지인을 통해 전해 왔다. 기자는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 [영덕ㆍ청송=글ㆍ사진 박주희기자 jxp938@hankookilbo.com]

 

후손이 항일운동 증명해야 유공자… 연금은 1명만 혜택

해외 독립유공자 후손 지원 법안 표류

[한국일보] 정지용 기자 2015.08.12 04:40 

 


[도표] 후손 정착 실태 분석

 

독립운동가 양기탁(1871~1938)은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항일운동을 크게 보도했다. 한일병합 후 탄압이 심해지자 중국에서 활동을 이어 가다 이국 땅에서 그토록 갈망하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67세 나이로 눈을 감았다. 이후 후손들은 3대까지 혹독한 가난과 마주해야 했다. 부인 이경숙씨는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에서 날품팔이를 하고 쓰레기장에서 감자를 주워 먹으며 딸과 끼니를 때웠다. 외손녀 황대순(69)씨는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조국도 그들을 반기지 않았다. 황씨는 1997년 한국을 찾았지만 어머니가 호적에 할아버지의 딸로 등록돼 있지 않다는 이유로 국적 획득에 실패했다. 황씨는 천신만고 끝에 후손임을 증명할 수 있었고 2008년에야 한국 국적을 얻을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 항일 운동에 헌신한 해외 독립유공자 후손의 현주소다. 정착 지원금은 고사하고 일부는 후손임을 입증하지 못해 불법 체류자로 전락하는 신세다.

 

해외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고단한 삶을 엿볼 자료는 5년 전인 2010년 국가보훈처가 발표한 ‘해외 독립유공자 후손 국내 정착 실태조사’가 유일하다. 정부가 해외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정착금을 지원하기 시작한 1990년부터 2010년까지 영주귀국자 393명 중 38%(149명)가 무직자, 42%(167명)가 막노동과 식당, 가사도우미 등 일용직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대부분(89%)이 무주택자였고, 보훈처가 정한 생계유지층(기본생계비 50~100%) 이하는 무려 79%에 달했다.

 

지원금도 턱없이 부족하다. 보훈처가 지급하는 정착지원금 4,500만~7,000만원과 연금(52만~186만원)이 전부다. 그나마 후손 1명에게만 혜택이 돌아가고, 지원금이라도 받을 수 있으면 다행이다. 후손임을 입증하는 단계부터 벽에 부닥친다. 외국에서 항일운동을 한 경우 자료를 모으기 쉽지 않고, 선대(先代)의 고향이 북한이면 가족관계를 증명하는 문서를 구하기 어렵지만 그 입증 몫은 오로지 후손의 손에 맡겨져 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은 10일 “6ㆍ25전쟁 전사자는 정부가 유해 발굴에 나서고 희생자를 예우하는데 유독 해외독립유공자만 입증 책임을 후손에 돌리고 있다”고 꼬집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보훈처는 해외 독립운동가 규모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학계에서 추정하는 해외 독립운동가 수는 대략 10만명. 그러나 1995년부터 올해 8월까지 귀국한 해외독립유공자 후손은 1,695명에 불과하다. 보훈처 관계자는 “사료 부족과 해외 연구의 어려움 등 해외독립운동가 파악에 현실적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법안은 3년째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새누리당 황영철 의원은 2012년 해외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주거지원금을 지급하고, 정착에 필요한 직업훈련 지원 등을 골자로 하는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다. 김우회 영주귀국독립유공자 유족회 이사는 “올해 개정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법안이 폐지될 위기에 놓여 있다”며 “타지에서 독립을 위해 싸운 이들의 후손이 명예롭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달라”고 호소했다. [정지용기자 cdragon25@hankookilbo.com]


광복 70주년인데…

독도에 '블랙이글' 한 대도 못 띄우는 정부 광복절 행사 논란

[한국일보] 김광수 기자 2015.08.12 04

 

[사진] 국군의 날 리허설 에어쇼

 

외교부 "한일관계 악영향" 반대 결국 광화문 상공서 행사 열기로
광복 70주년을 맞아 공군의 특수비행팀 ‘블랙이글’이 독도 상공에서 이벤트를 벌이려 했지만 외교부의 반대에 막혀 무산된 것으로 전해졌다. 한일관계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이유에서다. 일본이 11년째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방위백서를 펴내고 있는데도 정부가 굴욕적 대응으로 일관해 비판이 커지고 있다.

 

11일 복수의 정부 소식통에 따르면, 당초 국방부와 광복절 경축식을 총괄하는 행정자치부는 블랙이글 T-50 편대가 15일 독도 상공에서 태극무늬를 그리는 방안을 추진해왔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욕이 여전한 독도에서 ‘태극’이라는 상징물을 동원한 퍼포먼스로 광복 70주년이 갖는 주권회복 의미와 자주국방 의지, 공고한 독도 영유권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다. 국방부는 매년 열리는 해병대의 독도 상륙훈련을 앞두고 일본을 의식해 신중모드로 일관하며 조심스러워했지만 이번에는 태도를 바꿔 적극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국방부는 지난 7월 방위백서 발표 직후 “독도에 대한 우리 주권을 빈틈없이 수호해 나갈 것”이라며 독도의 영토, 영해, 영공을 사수하겠다는 의지를 거듭 천명했다.

 

하지만 청와대를 중심으로 블랙이글의 축하비행에 대한 관계부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외교부가 강한 반대입장을 밝혔다. 한 관계자는 “올해 수교 50주년을 맞아 가뜩이나 한일관계가 민감한 상황에서 독도를 부각시켜 불필요하게 일본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편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청와대도 주저했고 결국 국방부와 행자부 모두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경축식 행사 관계자는 “온 국민이 경축하는 대규모 광복절 행사는 10년 마다 열리는데 이번에 못하면 언제 다시 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이에 따라 주최측은 광복절 행사 당일 독도 대신 광화문광장 상공에 블랙이글을 투입하기로 방향을 틀었다. 지상과 하늘에서 동시에 경축행사를 진행하는 방안이다. 축하비행에서는 ‘70’숫자와 태극무늬 등 다양한 형상을 선보일 예정이다. 블랙이글이 서울 도심 상공에서 비행을 하는 것은 2010년 9월 서울수복 60주년 기념행사 이후 5년 만이다. [김광수기자 rollings@hankookilbo.com]

 

"독립운동가의 아들" 80세 남성, 日대사관 앞 분신

[한국일보] 김현빈 기자 2015.08.12 22:59

 

[사진]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주최한 수요집회 참석자들이 분신을 시도한 최모씨의 몸에 붙은 불을 끄고 있다. 80대 고령인 최씨는 평소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을 돕는 시민단체 활동을 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수요집회 중에 시도… 3도 중화상

평소 위안부 문제 관심 '극한 선택' 가방엔 유서와 日정부 비판 성명서

광복 70주년을 앞두고 12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수요집회에서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80대 남성이 분신, 중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됐다. 경찰과 소방당국에 따르면 이날 낮 12시50분쯤 최현열(80)씨가 일본대사관 앞에서 자신의 몸에 인화물질인 시너를 바르고 분신을 시도했다. 최씨가 집회 장소 뒤쪽 제일모직 건물 앞 화단에서 분신하자 집회 참가자들이 달려들어 물과 플래카드, 소화기 등으로 불을 껐다. 최씨는 얼굴과 가슴 등에 3도 화상을 입고 서울대병원을 거쳐 화상치료 전문인 한강성심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대병원 관계자는 “기도가 목안으로 말려 들어가 정상호흡이 곤란한 상태여서 회복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말했다.

 

‘광주전남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 회원으로 광주에서 살고 있는 최씨는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8월 14일)을 앞두고 열린 수요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날 서울로 온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최씨가 근로정신대 할머니에 대한 보상과 사죄를 외면하는 일본 정부를 비판하기 위해 분신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은 최씨가 분신 직전 지니고 있던 가방에서 3장짜리 유서와 일본 정부를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견해 가족에 인계했다. 유서에는 대한민국 제단에 불타는 마음을 바치고 나라 살리는 길을 걸어가기로 결심했으니 뜻을 이해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보내 달라고 당부했다.

 

최씨는 2013년 5월부터 근로정신대 문제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졌다. 시민모임과 관련한 집회 등에 참석했으며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일본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 재판정에 직접 찾아갈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시민모임은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최씨의 아버지 최병수씨는 1932년 6월 ‘영암 영보 농민 독립만세 시위 사건’에 참여해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1년형을 선고 받았지만 해방 이후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지 않아 안타까워했다”고 밝혔다. 광주 서구 최씨의 이웃들도 3년 전 부인과 사별하고 아파트에서 살아온 최씨가 부지런하고 정갈한 성품이었다고 전했다. [김현빈기자 hbkim@hankookilbo.com]

 

[오늘의 한국 & 한국인] 서대문형무소 찾은 하토야마

"前 총리로서, 일본인으로서, 인간으로서… 사죄합니다"

[한국일보] 양진하 기자 2015.08.12 18:17 수정: 2015.08.12 20:56

 

 

[사진]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12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방문해 순국선열 추모비에 헌화한 후 무릎을 꿇고 조의를 표하고 있다. 추모비 뒤쪽 건물은 독립운동가들이 처형당했던 사형장이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아베 담화에 반성·사죄 포함 촉구 유관순 열사 투옥됐던 방도 방문

"만세운동 힘 다하신 영혼께 휴식을… 독립·평화·인권·우애를 위해"

방명록에 적고 日 방문객 수 묻기도

“오늘 저는 일본의 전 총리로서, 한 사람의 일본인으로서 또 한 명의 인간으로서 서대문형무소를 찾았습니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위해 많은 힘을 쓰셨던 분들이 고문을 당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 일이 벌어졌던 이 자리에서 그 사실을 다시 떠올리며 진심으로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12일 오후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ㆍ68) 전 일본총리가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신발을 벗고 두 손을 모아 묵념한 뒤 큰 절까지 올렸다. 다시 신발을 신고 일어서며 그는 고개를 두 번 더 숙였다. 그런 뒤 14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발표할 전후 70년 담화를 향해 “일본이 과거에 어떠한 일을 했는지, 한국 식민지 통치와 중국을 비롯해 여러 나라에 행한 침략 부분이 역사적 사실로 들어가야 한다. 반성과 사죄의 마음도 당연히 담겨야 한다”고 일갈했다.

 

 

[사진] 광복 70주년을 맞아 12일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은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유관순 열사가 투옥됐던 여옥사 8호 감방 앞에서 헌화한 후 합장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하토야마 전 총리는 13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리는 ‘2015 동아시아 평화국제회의’ 참석 차 한국을 찾았다. 하지만 회의 참석에 앞서 유관순 열사가 지하에 수감됐던 여성옥사에서 추도하고 싶다는 의사를 직접 전달해 이날 방문이 성사됐다.

 

그는 여성 투사 266명이 갇혀 모진 고문을 당했던 여성옥사를 먼저 찾은 뒤 30분간 서대문형무소 곳곳을 둘러봤다. 당초 바람대로 유관순 열사가 투옥됐던 8호실 앞에 백합 꽃다발을 헌화하고 방 안으로 들어가 5분간 머물렀다. 안내를 맡은 이혜훈 전 의원은 “하토야마 전 총리가 일본어로 적힌 설명문을 직접 읽어보면서 방 안에 투옥됐던 일곱 분의 이름을 일일이 불렀다”며 “유관순 열사가 감옥에 들어와서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는 설명에 강한 인상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고 전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이어 서대문형무소 전시관 1층의 방명록에 ‘만세운동에 힘을 다하신 모든 영혼들에게 편안한 쉼이 있기를 바라고, 독립, 평화, 인권, 우애를 위해'라고 적었다.

 

추모비 헌화까지 마친 하토야마 전 총리는 기자 간담회를 통해 “처음에 500명 정도였던 서대문형무소의 수용 규모가 점점 커졌다는 한 가지 사실만 보더라도 여러분의 선조분들께서 독립을 위해 얼마나 힘을 쓰셨는지 알 수 있다”며 “진심으로 사죄를 드리며 굉장히 무거운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서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모든 일정을 마친 뒤에도 한 해 형무소를 방문하는 일본인이 몇 명이나 되는지, 실제 고문이 이뤄졌던 지하 방이 어떤 곳인지 묻는 등 각별한 관심을 나타낸 것으로 알려졌다.

 

광복 70주년과 아베 총리의 담화를 코 앞에 둔 상황에서 일본 전직 총리가 일본 제국주의 만행이 자행된 역사의 현장을 찾아 현 총리를 향해 사과를 촉구한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는 평가다. 2001년 10월에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당시 일본 총리가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한 적이 있지만 반성이나 참회의 성격과는 무관했다.

 

일본 93대 총리(2009~2010)를 지낸 하토야마 전 총리는 야당의원 시절부터 일본의 전쟁범죄 조사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사죄 및 보상에 관한 법안을 제출하는 등 과거사 문제 해결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올해 4월에는 “식민지 지배, 침략이라는 말이 감춰지면 큰 문제가 된다”며 아베 총리에게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양진하기자 realha@hankookilbo.com]

 

오늘의 청년들에게 조국광복 70돌의 의미는?
[한국일보] 목상균 기자 2015.08.12 20:00


부산, 광복 70주년 대학생 영화제
다큐멘터리ㆍ극영화 등 7개 작품 내일 영화의 전당서 상영

오늘의 청년들에게 광복 70주년은 어떤 의미일까?

부산시는 지역 영화학과교수협의회 소속학과 학생들이 제작한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7개 작품으로 14일 저녁 7시 영화의 전당(소극장)에서 ‘광복 70주년 기념 대학생 영화제 - Again 1945! 대한민국 그리고 부산’을 개최한다고 12일 밝혔다. 광복과 분단 등 한국 근ㆍ현대사의 상징도시 부산의 가치를 재조명하기 위해 마련된 이번 행사는 특히 광복의 의미를 계승하고 세대 간 소통을 확대하기 위해 미래세대인 지역 대학생들이 대거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시는 7개 작품에 100만원씩 사전제작비를 지원했고, 지역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자문단을 구성해 완성도를 높였다.

 

자문단에는 김정렴 부산시 소통기획담당관을 비롯해 김형균 부산학연구센터장, 이근호 KNN 제작팀 부장, 최용석 부산독립영화협회 공동대표, 홍영주 부산국제단편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가 참여했다. 작품은 오늘을 사는 청년들의 다양한 소재와 실험정신이 망라됐다. 먼저 ‘타다 만 필름’(영산대)은 1940년대 초 조선영화령 공포 이후 억압적 상황 속에서 원하지 않는 창작활동을 펼쳐야 했던 한 영화인의 고뇌와 좌절을 그렸다. 학생들은 개인의 삶을 통해 광복 70년의 의미를 재조명하는데도 관심을 보였다. 새로운 삶을 꿈꾸며 아버지의 나라에 돌아온 조선족 여성동포들의 이야기를 담은 ‘단미회 여인들’(경성대), 1945년 해방둥이로 태어난 한 어르신의 인생회고를 담담한 영상미와 함께 표현한 ‘일흔’(부산대)은 광복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어떻게 개인과 삶과 맞닿아 있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공간을 통해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는 작품도 눈에 띈다. 상징적 공간인 ‘광복동’의 일상적 풍경을 일제시대 흑백사진과 대비해 보여주고 있는 ‘광복동’(부산외국어대), 역사적 사건을 재구성해 선보이고 있는 부산극단 자갈치의 무대를 통해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킨 ‘발자국’(동의대)은 평범한 삶의 공간을 역사적 의미로 재구성한 구성력이 돋보이는 작품들이다.

 

이밖에 일상의 일본 잔재를 포착해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게 한 ‘광복 70주년 그리고 무뎌진 기억들’(동명대)과 그간 역사에 무관심했던 자신과 우리들 모두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내가 사는 나라’(동서대)도 이 시대 청년들의 자기고백적 다큐멘터리로 관심을 끌만하다. 김정렴 부산시 소통기획담당관은 “열정을 다해 고생한 부산의 청년 영화인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후원을 아끼지 않으신 부산지역 영화학과 교수협의회 교수님과 자문위원들께도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면서 “이번 대학생 영화제가 세대 간 간극을 좁히고, 부산과 한국의 새로운 미래를 위한 소통의 장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목상균기자 sgmok@hankookilbo.com]

 

[광복 70년 독립운동家 70년] (中) 대물림되는 친일 잔재
"주홍글씨 두려워도 친일가족이라는 이유로 
오점 숨기지 말아야"
[한국일보] 박주희 기자 수정: 2015.08.13 04:40


친일 후손 조현정 목사·윤석윤씨
"괴롭지만 역사의 진실 바로 세워야"

“할아버지의 친일행적을 알고 굉장히 당황했죠. 미리 알았더라면 민족색채가 강한 교회의 목사로 부임하지 않았을 겁니다.” 서울 향린교회 조헌정(61·사진) 담임목사는 조부의 친일행적을 알게 됐던 2003년을 떠올리며 이같이 말했다. 당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 목록 작성을 담당하고 있던 후배 목사가 조부의 삶이 담긴 자료를 보여줬다. 그는 “‘대동아전쟁 승리를 위한 기도’ 명단에 할아버지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며 “조선장로교당 서기였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다”고 회고했다.

 

 

조부인 조승제(1898~1973) 목사는 1939~41년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 회의록 서기를 지냈고, 이후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총회 의장과 전남교구장을 겸임했다. 서기장이던 1941년 11월 장로회 창립 30회 기념사에선 “일본적인 기독교 건설에 매진하는 체제를 갖춰 바야흐로 국민적 자각을 촉진하여 신도실천(臣道實踐)의 정신, 종교보국의 이념을 철저화하자”고 주장했다.

 

조부의 부역 사실을 인지한 조 목사는 그 해 광복절 설교 도중 신도들 앞에서 조부의 잘못을 고백했다. 그는 “향후 통일운동과 설교를 계속 하려면 (조부의 친일행적을) 분명하게 매듭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물론 내적 갈등이 없지 않았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인간 조승제는 “흠 잡을 데 없던, 인격적으로 존경할만한 할아버지”였다. 그가 할아버지와 작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3대째 목사로 성장하는 데도 조부의 기도는 큰 힘이 됐다. 그런 할아버지의 손자, 그리고 향린교회 목사라는 서로 다른 정체성이 그의 마음 속에서 줄곧 맞부딪쳤다고 한다.

 

집안의 반대도 있었다. 조 목사는 “아버지와 고모는 ‘목회자는 신자를 돌보는 것이 최우선인데 이를 위해 한 (조부의)행위를 꼭 친일로 봐야 하느냐’고 되물었다”며 “결국 내 판단에 맡기긴 했지만 할아버지의 선택을 친일행위로 인식하지 못하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일제 치하에서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군수를 지낸 윤수병(1876~?)의 손자인 윤석윤(58·사진)씨 역시 조부의 친일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는 “할아버지의 행적에 대해 늘 궁금했는데 2011년 친일인명사전에서 조부의 이름을 발견하고 적잖이 당황했다”며 “사죄하는 마음으로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으로 등록하고 사과 글도 올렸다”고 말했다. 이후 조용히 독서운동을 하고 있는 윤씨는 그전까지 일본 유학을 다녀온 할아버지가 개화기 지식인으로 국가 발전에 힘썼다고 믿었다. 하지만 ‘한국병합기념장(강제병합에 기여한 사람을 대상으로 일제가 수여한 메달)’까지 받은 행적을 전해 듣고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그제야 윤씨는 잊혀진 기억이 하나 둘 떠올랐다. 그는 “어린 시절 장롱에 있던 할아버지의 예도(칼)와 공무원이던 형님이 전북 고창군청 벽에서 발견한 할아버지 사진 등 단편적인 사실들이 퍼즐처럼 맞춰졌다”며 “순간 ‘조부에 대한 해석은 후대가 할 일이고, 내 일은 사죄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조 목사와 윤씨는 친일 후손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조 목사는 “가족이라는 이유로 조상의 오점을 감싸려는 움직임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괴롭겠지만 개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밝혀야 역사의 진실이 바로 설 수 있다”고 말했다. 윤씨 역시 “한 마디 사과 없이 떵떵거리고 살고 있는 이들을 보면 ‘참 뻔뻔하다’는 생각이 든다”며 “‘주홍글씨’가 두려운 것은 이해하지만 과거를 숨기고 미화하는 행위가 옳지 않다는 인식만이라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강조했다. [박주희기자 jxp938@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