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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기념일

[송년인사] '갑오년을 보내고 을미년을 맞으며…' 잠용

잠용(潛蓉) 2014. 12. 31. 08:30


 


 

동학농민운동과 갑오개혁(1894)”

'갑오년'과 '을미년'은 120년 전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민중들에 의한 부정부패 척결운동이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약 120년 전 우리나라 5천년 민족사에서 최초로 민중들에 의한 민중을 위한 근대화의 외침이 있었으니 1894년1월부터 9월 사이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이었습니다. 갑오동학운동 또는 동학농민전쟁으로 불리는 이 운동은 동학 지도자들과 동학교도 및 농민들에 의해 탐관오리(耽官汚吏, 요즘의 부정부패 공무원)의 학정에 저항해 일어난 민중의 개혁봉기 운동를 말합니다. 

 

동학교조 최제우의 신원운동과 기존 양반 관리들의 탐학과 부패, 사회적 혼란에 대한 불만이 쌓여오다가,1882년(고종 19년) 전라도 고부군에 부임한 조병갑(趙秉甲)의 지나친 비리(非理)와 탐학 남형(耽虐 濫刑)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났습니다. 부패척결과 내정개혁, 그리고 교조의 신원 등을 기치로 일어선 동학교도 전봉준은 대원군을 반신반의 하면서도 명성황후와 민씨 세력의 축출을 위해 대원군과 손을 잡았습니다. 대원군 역시 명성황후의 제거를 위해 동학농민군과 제휴하게 됩니다. 동학농민군 중 일부는 탐관오리 처벌과 개혁 이외에 대원군의 섭정도 거병의 명분으로 삼았으니 결국에는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민씨 정권에서 청군과 일본군을 번갈아 끌어들인 결과로 말미암아, 농민운동 진압 후 청일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고 여기에서 일본군이 승리함으로써 조선의 개혁은 민중의 손을 떠나 마침내 일본제국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결국은 35년간의 뼈아픈 식민지배의 단초를 제공하고 말았습니다.

 

1차 갑오개혁은 1894년 7월부터 12월까지 일어난 개혁운동으로 독자적인 민중개혁운동이었습니다. 동학농민운동 이후 일본이 청일전쟁을 빌미로 조선에 내정개혁을 강요했는데 일본 공사가 고문이 되고 김홍집, 박정양, 유길준, 김가진 등 17명의 의원들로 소위 '김홍집 내각'을 구성하고 국왕과 대원군 간섭 없이 초정부적인 임시개혁기구를 만들었습니다. 개혁의 주요내용은 국가재정을 탁지아문으로 일원화 하고, 은본위제 채택, 조세의 금납화, 도량형 정비, 방곡령의 폐지, 서얼 신분제도 폐지, 연좌제 고문제도 폐지, 지나친 조혼 금지(남자 20세, 여자 16세 이상 가능), 의복제도 간소화, 여성재혼과 양자제도 개선, 개국기원 사용, 6조(六曹)를 폐지하고 8아문(八衙門)으로 정비, 과거제도와 삼사제도 폐지, 왕실을 위한 궁내부 기능 축소 등을 개혁하였습니다

 

 

이어서 1894년 12월부터 1895년 7월까지 단행된 2차 갑오개혁에서는 고종황제의 조선황국 선포와 홍범 14조가 발표되었는데 그 주요내용은 조선은 청나라에 의존하지 않는 자주 독립국가를 세운다(1조), 황실과 국가 행정을 분리한다(4조). 조세는 법률로만 정하고 관리와 토호의 사적 징세를 엄금한다(6조), 조세를 관장하기 위해 탁지아문을 창설한다(7조). 문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널리 등용한다.(14조) 등이었습니다. 그 밖에 의정부를 8아문에서 7부로 개편하고, 지방관제를 8도에서 23부 337군으로 개편, 관아의 사법권 퍠지, 군대의 통합(훈련대, 시위대), 근대적 학제와 신교육 실시, 한성사범학교와 왹국어학교 설립 등이 그것입니다. 3차 개혁(을미개혁)은 1895년 8월부터 1896년 2월까지로  훈련대를 폐지하고 중앙에 친위대와 평양 전주에 진위대 설치, 단발령과 양복 착용, 종두법과 건양연호 및 태양력 사용, 우편제도 실시, 소학교령 실시로 서울에 4개 소학교 설치 등이 있었습니다.

 

이상과 같이 비록 일본의 강요에 의한 개혁이었지만 그 이전에 이미 갑신정변과 동학운동 등 민중개혁 사상이 전개되고 있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1895년 을미년은 조선의 명성황후가 일본의 자객에 의해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있었고, 뒤이은 친일파 김홍집이 등장한 해로 어둡게 기록되었습니다.  비록 일본의 강압 하에 이뤄졌다고는 하지만, 한국사에서 이처럼 단기간에, 넓은 부문에 걸쳐, 개혁정책이 추진된 사례는 일찍이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갑오개혁은 한국 역사를 전근대와 근대로 구획하는 분기점으로 이해하는 시각도 바로 그 때문이다. [잠용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