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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학·설화

[고전산책] '선비가 죽어야 할 날을 준비하다' - 매천 황현(黃玹)

잠용(潛蓉) 2015. 8. 17. 13:22

[번역문]
융희 4년(1910) 7월 일본이 마침내 대한제국을 병합하였다. 8월에 황현이 그 소식을 듣고 비통해하여 음식을 먹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절명시’ 4수를 짓고, 자제들에게 이러한 유서를 남겼다.
“나는 죽어야 할 의리가 없다. 다만 국가에서 선비를 길러온 지 5백 년이 되었는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국난에 죽는 자가 없다면 어찌 통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위로는 하늘로부터 타고난 양심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평소에 읽은 글을 저버리지 않으며 영원히 잠들어 버린다면 참으로 통쾌함을 느끼리라. 그러니 너희들은 너무 슬퍼하지 말라.”

이 글을 다 쓰고 바로 독약을 마셨는데, 다음 날에야 가족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생 황원이 달려가 형을 보고 할 말이 있는지 묻자, 황현이 말하기를, “내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다만 내가 써놓은 글을 보면 알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죽는 일이란 쉽지 않은가 보다. 독약을 마실 때 세 번이나 대었다 떼었다 하였으니, 내가 이처럼 어리석었단 말인가.” 하였다. 얼마 있다 운명하니 향년 56세였다.

[원문]
隆煕四年七月. 日本遂倂韓. 八月. 玹聞之悲痛. 不能飮食. 一夕作絶命詩四章. 又爲遺子弟書. 曰吾無可死之義. 但國家養士五百年. 國亡之日. 無一人死難者. 寧不痛哉. 吾上不負皇天秉彝之懿. 下不負平日所讀之書. 冥然長寢. 良覺痛快. 汝曹勿過悲. 書訖引毒藥下之. 平明. 家人始覺. 弟瑗奔視之. 問有所言. 玹曰吾何言. 但可視吾所書也. 因笑曰. 死其不易乎. 當飮藥時. 離口者三. 吾乃如此. 其痴乎. 俄而氣絶. 年五十六.

 
- 김택영(金澤榮, 1850~1927), 『소호당집(韶濩堂集)』 권9, 「황현의 전기[黃玹傳]」

 

 

 
▶ 1911년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이 그린 매천 황현의 초상화. 개인 소장.

 

[해 설]

소호당 김택영(1850~1927), 매천 황현(1855~1910), 영재 이건창(1852~1898)은 한말 3대 시인이면서 우국 지사였다. 서울에서 교분을 쌓아 갔던 김택영과 이건창은 과거 보러 상경한 구례의 선비 황현을 만나 의기투합했다. 황현은 부정과 비리로 얼룩진 과거시험에 환멸을 느끼고 얼마 있지 않아 낙향하였지만, 지역을 달리하면서도 세 사람의 교유는 지속되었다.

  강화도에 내려가 살던 이건창이 먼저 세상을 떴다. 그즈음 열강의 침략이 거세지면서 개화나 척사 등 지식인들의 대응도 본격화되었다. 을사늑약으로 국운이 다했다고 판단한 김택영은 망명을 택하였다. 김택영이 황현의 순국 소식을 들은 것은 중국 상해 인근의 남통에 있을 때였다. 동생 황원으로부터 매천의 자결 상황을 자세히 전해 들은 김택영은 친구를 회억하며 「황현의 전기」를 썼다. 또 황원에게서 매천의 유묵을 넘겨받아 자신이 일하던 ‘한묵림서국’에서 『매천집』을 간행했다. 김택영은 「황현의 전기」를 자신의 문집 『소호당집』에 넣고 「본전(本傳)」이라는 이름으로 『매천집』에도 실었다.

  일본과 한국 사이에 합병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것은 1910년 7월 25일(음력)이었다. 매천이 구례에서 합병 소식을 접한 것은 8월 3일, 자살을 결행한 것은 8월 5일이었다. 매천은 아편을 술에 타서 마셨다. 약효가 발휘되어 숨을 거두기까지는 만 하루가 걸렸다. 김택영은 황현의 전기를 작성하면서 특히 죽음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궁벽한 시골에 사는 선비가 목숨을 끊은 이유는 무엇일까. 김택영은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한말의 의병장 유인석(1842~1915)은 국권이 강탈당하는 것처럼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때에 처신하는 방법으로 ‘처변삼사(處變三事)’를 내놓았다. 첫째는 의병을 일으켜 적과 싸우는 일[擧義掃淸]이요, 둘째는 해외로 망명하여 옛 정신을 지키는 일[去之守舊]이요, 셋째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뜻을 이루는 것[自靖遂志]이다.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그것마저 여의치 않자 만주와 러시아로 망명해 독립에 투신한 유인석은 첫째와 둘째 두 가지를 함께 사용하였다.

  유인석과 동시대를 살았던 매천도 이러한 세 가지 상황에 직면했다. 매천은 의병항쟁에 대해서는 긍정하지 않았다. 승산이 적고 오히려 더 큰 화를 부를 것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그는 고광순이 의병 모집을 위해 격문 찬술을 부탁하고, 임병찬이 의병항쟁 대열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였을 때 모두 완곡히 거절하였다. 그에게 의병은 대안이 아니었다. 을사늑약 후 김택영은 중국으로 망명을 떠나기에 앞서 매천에게 망명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가난한 시골 선비가 해외에서 망명 생활을 하기에는 치러야 할 비용과 대가는 만만치 않았다. 망명도 매천이 가야 할 길은 아니었다.

  매천에게 남은 마지막 선택은 국가와 운명을 같이하는 일이었다. 그의 죽음은 예비된 것이었다. 그는 친구 이건창이 타계하자 통곡하며 조문하는 시를 지었다.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순절했을 때도 그러했다. 민영환, 조병식, 홍만식 등 을사늑약 때 순국한 우국지사들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시를 지어 애도를 표했다. 『매천집』에는 다른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시(挽詩)’가 53편이나 실려 있다. 그는 남의 죽음을 자신의 일처럼 여겼으며, 이런 글을 남기기도 했다.

  “만약 한 몸을 헛되이 버리는 것을 수치로 여겨, 경중과 이해를 따지고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헛되이 죽지 않으려 한다면, 꼭 죽어야 할 상황이 되어도 죽지 못할 것이다.[若復恥其七尺之虛捐 計較重輕利害 轉輾思量 欲無浪死乎 則必至當死亦不死]”

  그는 『매천야록』에서 동아시아를 비롯한 세계사의 흐름과 존망의 위기에 처한 조국의 실상을 하나하나 기록했다. 일제의 강제합병으로 지켜야 할 나라는 사라졌다. 그는 일본의 한국 합병을 ‘꼭 죽어야 할 상황’으로 파악하였다. 그는 이를 예상했고, 피하지 않았다. 그가 옛글에서 절의로 목숨을 잃은 열사들의 전기를 찾아 읽고, 같은 시대 우국지사들의 죽음을 기록하고 조문한 것은 자신의 죽음을 예비하기 위한 작업이었는지 모른다. 오죽했으면 어머니 노씨가 항상 황원에게 “국난에 죽을 사람은 반드시 네 형일 것이다.”라는 말을 하였을까. 매천의 순국은 우연이나 한때의 의분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오랫동안 준비해 온 필연의 사건이었다.

  ‘죽어야 할 의리가 없는’ 매천이 자결한 것은 선비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유서에서 “국가에서 선비를 길러온 지 5백 년이 되었는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죽는 자가 없어서야 되겠는가”라고 말했다. 또 절명시에서는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지난 역사 헤아리니,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되기 어렵다[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者人]”라고 했다. 그가 죽은 것은 군주나 나라에 충성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는 망국을 당하여 ‘글 아는 사람’, 즉 지식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매천은 자기를 성찰하며 역사와 현실을 읽어낸 100년 전의 지식인이었다.

 

 


 글쓴이 : 조운찬

 

 경향신문 후마니타스연구소장
 경향신문 편집국 문화부장과 문화에디터, 

 베이징특파원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