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1966)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하는 이별이게.
蓮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 ※ 섭섭하지만 결국에는 영영 이별이 되고마는 진리... 그러나 내생에서 꼭 다시 만날 것을 서원하며 쓴 만시(輓詩)다. - 잠용 -
(연꽃 위에 내리는 비, 한태주 작곡)
<해설> '바람'이 빚어낸 만남과 이별의 변주곡 - 장석남·시인·한양여대교수 -
◇ 바람이 선선하다. 이마에 이 바람이 와 닿는 날들이 되면 별은 초롱히 가깝고 눈빛은 젖는다. 더불어 모든 사물들의 그림자가 길어진다. 일 년을 살아낸 보람은 무엇이었나, 이렇게 묻는 것만 같은 서늘함이다. 무엇을 거쳐 온 바람이기에 우리를 자꾸만 사색의 국면으로 이끄는 것일까. 가을이면 이별의 모습이 유난하다. 여름 철새들도 돌아가고 봉숭아도 분꽃도 또 청춘과도 이별해야 한다. 무성하던 숲도 들판도 해변도 다 휑하니 빈다. 사랑하는 늙으신 부모님은 한차례 더 늙는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이별을, 인생이 겪는 가장 큰 아픔을 암시한다. 하여 가을엔 그 소슬한 바람 속으로 입산(入山)하는 사람도 많다 한다.
미당 서정주(1915~2000)는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자화상〉이라고 당시 식민지 청년으로서의 방황과 고아의식을 절묘하게 계량화하였다. 이후 그 명구절은 모든 청춘들의 동의를 얻었다. 하여 우리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며 이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바람의 변주(變奏)가 위의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이다. 키운 것도 바람이요, 영원으로 이끄는 것도 바로 그 바람인 셈.
만남과 이별은 이승에서의 가장 큰 주제다. 그 중 이별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모든 사랑하는 것들과의 이별을 어떻게 마음에서 삭혀낼 것인가.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과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 사이에 우리네 전 인생이 들어있다고 이 시는 제시한다. '연꽃', 오 그것, 만나러 가는 바람의 설렘과 기대와 꿈으로부터, 만나고 가는 바람의 섭섭함과 괴로움과 아쉬움들, 그 중 우리에게 더 소중한 것은 뒤의 그 슬픔 쪽의 것이라는 제시는 영원을 생각하는 자세를 촉구한다. 바람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것, 그러나 그 한가운데 연꽃이라는 컬러풀한 상징 사물을 배치함으로써 범연한 우리들의 눈 앞에 명징하게 드러내 준다. 비유의 계단만으로 된 위의 시는 그래서 무한천공 가을 하늘 같은 여백을, 여운을 남긴다.
바람에게 들었던 극비 에피소드 하나. 미당은 한 여성을 몰래 사모하였다고 한다.(미당은 사랑의 감정에서 일생 헤어나지 못하며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어느 날 시내 모처에서 둘이 만나기로 했는데, 여자가 마침 오고 있는 미당을 보니 흰 고무신 바닥에 지푸라기를 잔뜩 묻히고 어기적 어기적 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지푸라기가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차린 이 여성은 급히 달아날 수밖에. 마구 뒤쫓아 따라오며 외친 미당의 말씀, "저기 저 나비처럼 달어나는 저 여자 좀 붙잡아 주소…" 역시 그 상황에서도 시인은 시인이었다는 것! 하하하하하…. [장석남-시인 한양여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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