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용의 타임머신... 영원한 시간 속에서 자세히보기

시·문학·설화

[스크랩] 밤 / 박이문

잠용(潛蓉) 2015. 5. 25. 16:32

 

 

 

 

 

밤 / 박이문

 

 

 

동지섣달 깊은 밤 장작을 때 따끈한 온돌방에서 등잔불 곁에 둘러앉아 엄마랑 아빠랑 콩엿, 깨엿을 깨먹던 기억을 지닌 사람은 행복하다. 안방에 갈아놓은 두꺼운 이불 위에서 잠이 들기 전에 언니랑 오빠랑 데굴데굴 구르며 깔깔거렸던 유년시절을 갖지 못한 사람은 커서도 허전할 것이다. 어릴 적 먹던 엿, 어릴 적 뒹굴던 이불, 어릴 적 서로 몸을 대고 느낄 수 있었던 가족들의 촉감은 기억만으로도 온돌방처럼 따뜻하다. 밤이 없었던들 어찌 이런 따뜻한 기억이 있을 수 있으랴.

 

깊은 밤 단 둘이서 속삭이는 사랑은 더욱 따뜻하다. 밤에 보호받지 못했던 연인은 사랑의 참맛을 모른다. 밤중에 이루어지는 사랑만이 진정 따뜻한 것이 될 수 있다. 칠흑같이 어둡고 고요한 밤에 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는 산 너머 초가집이나 도시의 아파트는 상상만으로도 따스하고 행복해 보인다.

 

늦게까지 불을 켜놓고 책상 앞에서 사랑하는 이로부터 받은 편지를 다시 읽어본다. 어수선한 낮에는 마음이 정리되기 어렵지만, 깊은 밤에 혼자 책상에 앉으면 고향을 떠난 귀여운 아들에게 혹은 멀리 두고 온 어머님께 긴 편지가 저절로 씌어 진다. 낮에 쓰는 편지가 사무적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따뜻한 정을 담을 수 는 없을 듯하다. 낮에 한 생각이나 느낌이 논리정연하고 투명한 것일 수 있을지 모르나 따듯한 생각이나 느낌은 역시 조용한 밤에만 풍겨질 수 있을 것이다.

 

낮이 활동이라면 밤은 휴식이다. 몸과 마음의 피로를 풀며 자리에 누워 고요히 잠든다. 그러기에 밤은 또한 평화이며 행복이다. 낮에 힘껏 일하고 지친 몸을 따뜻한 이불 속에 누일 때 흐뭇한 느낌에 젖는다. 개구쟁이 아들이 머리만 내놓고 등불 밑에서 잠이 든 모습을 볼 때 이런 것을 마련한 밤이 고맙기만 하다. 사르트르가 희곡 <닫힌 문>에서 보여주듯이 햇빛이 영원히 밝은 상황은 우리를 질식하게 한다. 밤을 동반하는 하루를 어찌 고맙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으랴.

 

밤은 아름답다. 이태백이 타고 갔다는 돛대를 단 반달의 배가 구름의 물결을 타고서 밤하늘 바다를 저어간다. 은하수, 헤아릴 수 없이 반짝이는 밤하늘의 별들, 그것이 이루고 있는 질서의 아름다움에 냉철한 이지의 철학자 칸트가 황홀감을 느꼈던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다. 그 누가 밤하늘에 떠가는 달, 밤하늘에 보석을 뿌린 듯한 무수한 별들의 아름다움에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웃 마을의 큰집에서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는 밤길, 수수밭의 개똥벌레들은 꽃가루처럼 날고 어둠침침한 산턱을 지날 무렵,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별똥의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짙은 풀밭에서 귀뚜라미 혹은 그 밖의 벌레들이 합창을 하고, 살짝 지나가는 여름바람이 상쾌하다. 눈 덮인 동지섣달에 산골마을 가난한 초가집 문풍지를 흔들며 지나가는 밤의 바람소리는 삼엄한 위엄을 자아낸다.

 

언덕 아래 작은 마을, 거기 아직도 꺼지지 않은 창문의 불빛이 포근한 감각을 불러내고, 네온사인 번쩍이는 서울은 낮에 보는 서울보다 한결 더 화려하고 깨끗하다. 밤늦게까지 웅성거리는 골목길 주점에서 술잔을 나누는 술꾼들의 인정이 아름답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뿐이랴, 밤은 해방을 뜻하기도 한다. 밤이 되면 옷을 벗어도 좋다. 때 묻고 무거워서 만이 아니다. 아무리 멋진 옷이라도 벗고 싶다. 육체를 보호하기도 하고 허영을 채워주기도 하여 편리한 것을 수도 있지만 옷은 아무래도 껍데기이다. 양발뿐만 아니라 속옷까지도 벗어 팽개치고 이불 속으로 들어갈 때 해방감을 느낀다. 밝은 햇살 아래 산, 나무, 집, 사람, 강아지, 책상, 잉크라는 개념 속에 답답하게 갇혀 있던 사물현상들이 풀려나 어둠 속에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으로써 자유를 찾는다. 개념의 철장에서 석방되는 것이다. 온종일 눈을 뜨고 있는 동안, 직장에서 일을 하는 동안, 돈을 벌기 위해서 길을 걸어가는 동안, 이것을 따지고 저것을 계산하면서 생존의 필요에 갇혀 급급하다가도 깜깜한 밤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 휴식하며 잠시나마 그런 걱정을 잊어버리고 긴장과 근심에서 석방된다. 몸과 마음, 정신과 의식이 자유를 찾는다.

 

밤은 풍요하다. 거기에는 미처 생각지도 못한 비밀들, 귀중한 생각의 보물, 깊은 영혼이 숨겨져 있다. 남을 해롭게 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음흉한 음모를 위해서도 아니지만,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밀을 혼자서 지키게 하고 혼자서 들여다보게 한다. 아무 비밀도 갖지 못한 영혼은 삭막하다 할 것이다. 이처럼 사람마다 비밀을 간직할 수 있게 해주기에 밤은 흐뭇하고 풍요하다. 아무도 몰래 두 사람만이 사랑을 속삭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는 밤은 얼마나 고마운가, 아무리 가까운 이웃이라도 알아서는 안 될 비밀 이야기를 가족끼리만 나눌 수 있게 해주는 것도 밤이다. 깊은 밤엔 생각이 저절로 깊어진다. 밤늦게 불을 밝히고 있는 시인의, 철학가의 모습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으랴, 밤에 잠을 자지 않고 경건한 기도 속에 파묻혀보지 못한 종교인의 모습을 상상할 수 는 없다. 새 생명이 깊은 밤에 잉태되듯 위대한 사상, 위대한 예술작품, 위대한 신앙도 깊은 밤에 잉태되고 창조되고 열매를 맺는다.

 

흰 수염을 늘어뜨리고 심오한 표정을 한 톨스토이가 꺼져가는 촛불 앞에서 위대한 소설을 집필하는 사진은 극히 인상적이다. 그런 모습이야말로 위대한 소설이 탄생하는 자연스러운 장면이다. 일상적 사고나 느낌의 테두리를 벗어난 깊은 밤에라야 시인은 자유롭게 상상의 날개를 펴고 위대한 영감을 얻게 된다. 많은 허식과 딱딱한 교리를 넘어서, 한없이 고요하고 한없이 깊은 밤중에 한 신앙인은 말로 또는 글로 전달될 수 없는 참다운 깊은 영적 세계에 비로소 접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속된 차원에서 성스러운 차원으로, 아니 속된 모든 것이 성스러운 것으로 승화될 수 있는 것도 밤, 깊고 조용한 밤에서이다. 밤은 귀중한것, 위대한 것 성스러운 것들이 탄생하는 시간이다. 밤은 그런 것들의 씨가 뿌려지고 싹이 뜨고 자라는 풍요로운 시간이다. 그래서 밤은 여자와도 같다 할까, 대낮에 위대한 사상을 저술하는 철학가를 상상하는 것은 좀 어색하다. 어찌 위대한 문학작품들이 대낮에 씌어 질 수 있으랴, 깊은 밤중 어디선가 잠들지 않고 책상 앞에 앉아 원고지를 메우는 소설가, 두꺼운 책자를 넘기며 생각을 더듬는 철학가, 십자가 앞에 무릎을 끓고 앉아 있는 신앙인의 자세는 풍요하고 든든하며 그윽해만 보인다. 자정이 넘어도 외로이 불이 켜져 있는 저 방, 그곳에는 생각과 저술에 잠겨 있는 창조자들이 있으리라, 그들의 풍요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으리라, 밤이 지나 해가 돋으면 그들은 부산한 세계를 잊고 지난밤 창조 작업에서 얻은 피로를 잊기 위해 잠자리에 들리라, 다시 풍요로운 밤이 돌아올 때까지.

 

밤은 방대하다. 또한 밤하늘은 무궁하기만 하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시야가 없는 칠흑의 공간이 끝없이 널려 있다. 아무런 상상도 미칠 수 없는 초월의 세계에 접할 듯하다. 크다는 것, 거대하다는 것을 밤하늘만큼 더 절실히 실감시켜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저 하늘 저 끝없는 어둠은 어디에 이를 것인가, 우주라는 말이 거대한 것을 상기 시킨다면 밤은 우주적이다. 밤의 경치를 보고 우주라는 말, 그 말의 뜻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고 궁극적 존재의 방대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이 방대한 밤하늘 아래 내가 차지하는 이 공간, 크다고만 생각했던 도시, 넓은 공간을 상징해줄 듯했던 바다, 이 지구, 낮에 떠 있던 태양이 얼마나 작은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이렇게 방대한 공간에서 우리는 시간의 무궁함, 그 시작과 그 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며 함부로 사용했던 “영원”이란 말의 의미를 피부로 실감한다. 밤의 배경이 되는 시간, 영원이라는 시간에 비추어볼 때 귀중한 한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짧고 무의미한 것인가, 그렇게 길어 보이는 인류의 역사가 얼마나 짧은 시간인가를 새삼 자각하게 된다.

 

이런 공간, 이런 시간 속에서 한 사람의 슬픔과 영광, 인류의 자랑스러운 업적이나 역사가 무슨 문제가 되며,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밤의 어둠 속에 퍼져 있는 무한한 시간과 공간에 접할 때, 비로소 우리는 참다운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고 살아가는 의미, 모든 존재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물리적으로 개개인의 존재는 너무나 작다. 우리가 크다고 생각하는 대륙도, 우리를 태우고 있는 지구도 무한한 공간에 비추어보면 있으나 마나 하게 작은 존재이다. 귀중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너무나도 무의미하게 보이는 것이다.

 

이처럼 광대하고 영원한 밤에 압도되어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며, 스스로의 진정한 모습을 재검토하고 참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어느덧 밖으로만 행했던 우리의 눈이 우리 자신으로, 우리 자신의 내적 세계로 옮겨간다. 밤은 자아발견의 자연스런 통로이다.

 

무한히 광대한 공간 속에서 파스칼과 더불어 위리는 우리의 존재가 무에 가까움을 ,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시간이 있으나마나 한 것임을 확인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파스칼과 더불어 우리가 의식을 갖고 있는 영적 존재임을 알게 되며, 무한한 공간과 시간을 의식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영적으로 무한한 공간과 시간, 우주보다도 더 방대한 어떤 것을 발견한다. 자동 설에 관해 언급을 하면서 “지구가 태양에 예속된 작은 위성에 불과하기 때문에 천문학적으로는 우주의 중심이 될 수 없음이 사실이지만 의식을 갖고 생각하는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작은 지구는 역시 형이상학적으로는 우주의 중심이다”라고 말한 헤겔은 파스칼과 똑같은 생각을 달리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어두운 밤이 궁국적 진리를 보여주는 듯하다. 진정한 지혜는 어두운 밤에 더 빛난다. 방대한 밤이 진정한 우리의 모습,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보여주는 듯하다. 위대한 밤에 압도되어 오만한 자아가 머리를 숙이고 경건해진다. 철모르고 날뛰던 허영심이 부끄러워지고 검박한 마음을 되찾을 수 있다. 자신만만했던 이성이 걷잡을 수 없는 방대한 궁국적 신비로움 앞에는 움츠러들게 된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우주보다도 위대한 의식으로서의,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우주 이 존재일반은 어떻게 생겼는가, 그것은 무슨 궁극적인 의미를 띠고 있는가, 아무리 따져봐도 궁극적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이런 물음 앞에서 아무리 뛰어난 논리도 무력함을 깨닫는다. 이 장엄한 물음을 던지는 밤은 아무리 밝은 이성의 빛으로도 전혀 밝아질 수 없다. 밤이 낮보다 크다. 역시 역설적이지만 밤은 낮보다 밝다. 육안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밤에는 영혼이 눈을 뜬다. 눈을 감아야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밤은 어두워서 그만큼 더 밝다. 밤이 오면 서로 떨어지고 갈래갈래 나뉘어졌던 모든 것이 다시 하나가 되고 밤이 깊어야 모든 갈등들이 잠시나마 풀려 화해를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밤은 지혜롭다. 밤은 경건하다. 밤은 엄숙하다. 밤은 밝다. 밤은 깊다. 밤은 방대하다. 밤하늘 영원한 곳에서 반짝이는 영혼의 부름을 따라 굳게 닫혔던 마음의 문을 열고, 이제 눈을 크게 뜨고 떠나야만 될 것 같다.

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글쓴이 : 희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