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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애청곡

[분단의 노래] '찔레꽃' (1941 원곡) - 백난아 노래

잠용(潛蓉) 2016. 1. 28. 22:03





'찔레꽃' (1941)

김영일 작사/ 김교성 작곡/ 노래 백난아


< 1 >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자주 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잊을 동무야.


< 2 >

달 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던 세 동무

천리 객창 북두성이 서럽습니다

삼년 전에 같이 앉아 백인 사진
하염없이 바라보니 즐거운 시절아.


< 3 >

연분홍 봄바람이 돌아드는 북간도
아름다운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꾀꼬리는 중천에 떠 슬피 울고
호랑나비 춤을 춘다 그리운 고향아.




제주도 출신 백난아가 부른
북간도 이주민 망향의 노래 <찔레꽃>


<찔레꽃>은 일제 강점기가 거의 끝날 무렵인 1942년에 백난아가 부른 한국의 트로트 곡이다. 첫 발표 시기는1941년 5월이라는 설도 있다. 김영일이 작사하고, 김교성이 작곡한 곡으로, 한국의 야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서민의 꽃 찔레꽃을 소재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그렸다. 처음 백난아가 이 노래를 발표했을 때는 별로 반응을 불러온 것은 아니었으나, 이후 광복과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향수를 자극하는 가사가 시대적 상황과 맞아 떨어져 꾸준한 인기를 얻어 '국민가요'로까지 이기가 오르게 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김교성과 백난아가 만주 공연을 다녀온 뒤, 만주 독립군들이 고향을 그리는 심정을 담아 만들었다고 한다. 가사 중 3절에는 "북간도"라는 배경이 구체적으로 나오기도 한다. 북방의 이국에서 "남쪽나라 내 고향"과 "못 잊을 동무"를 그리워하는 애절한 사연이 소박하게 담겨 있는데다, 포근하고 따뜻한 백난아의 창법과 잘 어우려져 한국적 정서와 망향의 아픔을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다.


한국방송의 성인가요 전문 프로그램인《가요무대》가 2005년 방송 20돌을 맞아 가장 많이 불렸던 노래를 조사해 발표했을 때,〈울고 넘는 박달재〉에 이어 <찔레꽃>이 2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국내에서 오랫동안 애창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발표된 곡이라 북한에서도 계속 불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2001년 북조선에서 공연을 가졌던 김연자의 증언에 따르면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과 함께 이 곡이 김정일의 애창곡이었다고 한다. 2007년 백난아의 고향 제주도에 찔레꽃 노래공원과 노래비가 세워졌다. [위키백과]





제주도 찔레꽃 향기 솔솔… '찔레꽃 노래비' 건립 준비
노컷뉴스 2007-04-02 18:38
제주CBS 김대휘 기자 jejupop@cbs.co.kr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1941년 처음 발표된 가수 백난아(白蘭兒)의 ''찔레꽃'' 노래비가 제주도에 건립된다. 제주시는 제주 출신 가수인 백난아의 대표곡인 '찔레꽃 노래비'를 가수의 출생지인 한림읍 명월리에 유적지 표석문 사업의 하나로 설치한다고 밝혔다. 가수 백난아 씨는 1927년 한림읍 명월리에서 오남보 씨의 3남 3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나 <나그네 설움>의 가수 백연설 씨의 양녀로 노래활동을 했다. 백난아 씨의 본명은 오금숙으로 당시 태평레코드사에서 활약할 때 함경북도 청진을 고향이라고 쓴 뒤 제주에서는 잊혀졌다. 백 씨는 나중에 <아리랑 낭낭>, <갈매기 쌍쌍>, <직녀성>, <망향초 사랑> 등을 불러 유명해졌다.


<찔레꽃> 노래는 김영일 작사에 김교성 작곡으로 "1941년 5월 음반이 나왔지만, 전쟁으로 반응이 미미했으나 1945년 해방과 더불어 민중의 노래로,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퍼지면서 애창됐다"고 제주문화원장인 김찬흡 선생의 <20세기 제주인명사전>(2000)은 기록하고 있다. 백난아 씨는 지난 1992년 12월 서울에서 타계했다. "찔레꽃 노래비"는 북제주문화원이 지역내 유적지 표석을 세우는 사업의 하나로 한림읍 명월초등학교에 건립될 예정이다.


남쪽나라 내 고향… 백난아 찔레꽃 노래공원 오픈
(2007. 6. 27)



한림읍 명월리, 이제는 폐교가 되어버린 '명월국민학교' 정문 앞에는 조그마한 조립식 건물이 하나 서있다. 한 평이 될까 말까한 건물에 관리인도 없는 건물, 하나밖에 없는 문을 열어 제치면  방안에는 덜렁 음향기계 하나가 방문객을 반긴다. 안으로 들어가 노래 듣기 단추를 누르면 팽나무 우거진 명월대 위로 이런 노래가 울려 퍼진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자주 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동무야


달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던 세 동무

천리객창 북두성이 서럽습니다

삼년 전에 모여앉아 백인 사진

하염없이 바라보니 즐거운 시절아


연분홍 봄바람이 돌아드는 북간도

아름다운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꾀꼬리는 중천에 떠 슬피 울고

호랑나비 춤을 춘다 그리운 고향아.


일제 강점기이던 1941년에 가수 백난아(白蘭兒)가 발표한 노래 '찔레꽃'이다. 백난아는 1923년 한림읍 명월리에서 가난한 어부의 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오금숙, 17세에 함경도 회령에서 열린 전국 가요콩쿠르에 2위로 입상하면서 가수로서 발을 내디뎠고, 당시 심사위원이던 가수 백년설이 수양딸로 삼고 자기 성씨를 붙여 백난아라는 예명을 지어 주었다. 그래서 가수 백난아가 제주도 출신이라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게 되었다.


<찔레꽃> 노래는 김영일 작사, 김교성 작곡으로 한민족의 대표적 정서인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 곡이다. 노래는 광복과 6.25를 거치면서 사람들의 인기를 얻게 되었고, 지금은 대표적인 '국민 애창곡' '겨레의 노래'로 자리잡고 있는 노래이다. 1941년에는 한림읍 명월리를 찾아온 작곡가와 작사자, 가수 백난아, 세 명이 명월대에 올라 찔레꽃 노래를 부르며 망국의 설움을 달랬다고 한다. 가수 이미자는 열살 무렵에 부산 피난시절 동아극장에서 백난아의 음악공연을 보고 가수의 꿈을 품었다고 한다.



백난아는 1992년 12월에 타계했고, 2007년 북제주문화원에서는 그녀의 고향인 명월리에 아담한 노래공원을 만들고, 공원 한쪽에는 그녀를 추모하는 찔레꽃 노래비를 세웠다. 초행길인 방문자에게는 너무 작고 아담한 규모에 놀랄 수도 있겠지만 백난아의 그리움을 이해한다면 아마도 <찔레꽃> 노래에 어울리는 공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찔레꽃> 가사에 나오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삼간’은 영락없는 제주도를 상징하고 있고, 찔레꽃은 봄이면 어김없이 제주도에 지천으로 피어나는 꽃이다. 제주도 출신이라면 가난하던 어린시절 찔레순 껍질을 벗겨 잘근잘근 씹어가며 먹어본 기억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이런 찔레꽃을, 망국의 세월에 흘러흘러 들어간 북간주 벌판에서 바라보는 찔레꽃은 무슨 색깔로 피어났을까? 아마도 하얀 찔레꽃은 고향을 그리는 사람의 가슴에서 붉게 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옛날 고려시절에 몽고제국에 처녀를 바치던 시절 머나먼 대륙땅으로 팔려갔던 찔레라는 공녀가 부모형제를 그리다가 십 수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집은 없어지고, 일부는 죽고 더러는 사라진 식구들을 찾아 헤매다가 하얀 눈밭에서 그녀도 묻혀 죽고 말았는데, 이듬해 봄이 되어 눈이 녹고 그녀가 죽었던 자리에 하얀 꽃이 피어났다. 그 꽃이 바로 찔레꽃이었다. 찔레가 죽어간 하얀 눈밭을 닮아 대부분 하얀 색이지만 한맺힌 그 심정만은 피처럼 붉을 수밖에 없는 꽃이 될 수밖에...


찔레꽃 가수와 찔레꽃의 노래 가사와 찔레꽃의 전설이 삼위일체가 되는 노래 <찔레꽃>을 듣고 싶다면 명월리를 지나다가 찔레꽃 노래공원 조그만 건물로 문을 열고 들어가 노래듣기 단추를 한번 눌러 보시라. 명월대를 둘러싼 거대한 팽나무 고목들 위로 전설이 흐를 터이니...


[출처] http://cafe.daum.net/babybrier/1490/10?q=%C1%A6%C1%D6%B5%B5%20%C2%F1%B7%B9%B2%C9&re=1



백난아 -찔래꽃/백난아 명곡선-스타365


찔레꽃-백난아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