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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기념일

[오늘은 3.1절] 그날을 되새기는 네 가지 이야기

잠용(潛蓉) 2016. 3. 1. 07:42

[첫번째] "태극기 훼손됐어요"... 알고보니 사찰 '진관사의 태극기'
MBN | 입력 2016.02.29. 20:58



[앵커멘트] 삼일절을 맞아 거리 곳곳에 태극기가 걸렸습니다. 서울 은평구에서는 거리에 내걸린 태극기가 훼손됐다는 신고가 접수됐다고 하는데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오태윤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기자] 삼일절을 맞아 거리 곳곳에 펄럭이는 태극기.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빛이 바래져 있고 훼손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 인터뷰 : 정상훈 / 서울 갈현동
- "하나는 잘 관리가 된 거 같은데, 하나는 지저분해 보여서 정부 쪽에서 잘 관리를 안 한 거 같은데." 알고 보니 이 태극기는 지난 2009년 북한산 자락에 있는 사찰 진관사에서 발견된 태극기입니다. 사찰에 머물던 백초월 스님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데, 독립신문 등과 함께 9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은평구는 삼일절을 맞아 진관사 태극기 1,360여 기를 현재 사용하는 태극기와 함께 달았습니다. 지금의 태극기와 비교하면 4괘 가운데 달과 해를 상징하는 감괘와 이괘의 위치가 달라졌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다는 의미에서 일장기 위에 그려졌습니다. 태극 문양도 지금의 것과는 확연히 다른데, 복잡한 문양이 점점 단순해져 광복 이후 지금의 태극문양을 갖춘 것으로 추정됩니다.


▶ 인터뷰 : 계호 / 진관사 주지 스님
- "백초월 스님은 오로지 나라를 찾아야겠다는 이런 의미에서…." 거의 100년 만에 빛을 본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의 태극기가 처절했던 독립운동의 정신을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MBN뉴스 오태윤입니다. [5tae@mbn.co.kr] 영상취재 : 김준모 기자, 영상편집 : 이소영


서울 은평구 진관사 소장 태극기


[두번째] 위안부 합의 후 두달… 일본측 '태도 돌변', 한국은 '무대응'
JTBC | 이서준  | 입력 2016.02.29. 21:15  


[앵커] 내일(1일)은 작년 12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합의 이후에 처음으로 맞는 3·1절입니다. 지금까지도 협상 내용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은 오늘 외교부를 상대로 위안부협상 문서를 공개하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민변이 소송을 내게 된 이유는 합의 이후 일본 정부가 줄기차게 그나마 불만족스러운 합의내용까지 거스르는 주장을 펴고 있어섭니다. 일본이 또 거짓 주장을 내는 거라면 자료를 공개해서 국제사회에 고발하자는 취지인데, 정부는 그동안 정보 공개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난 두 달 동안 일본 정부는 어떤 말을 했고, 우리 정부는 어떻게 대응해왔는지 이서준 기자의 보도를 보시겠습니다.

[기자] 한일 위안부 합의 발표 직후 일본은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는 듯했습니다.


[기시다 후미오/일본 외상 (지난해 12월 28일) : 당시 (일본)군의 관여로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로서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합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먼저 문제가 된 건 아베 총리와 박근혜 대통령의 통화내용입니다. 일본 외무성은 "전화 통화에서 위안부 문제를 포함 한일간 청구권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점을 밝혔다"고 통화 내용을 공개했습니다. 이후 아베 총리는 일본 중의원에 출석해 소녀상 이전이 한국 정부가 해야 할 적절한 대처라고 말했습니다.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도 부인했습니다.


[아베 신조/일본 총리 (지난달 18일 참의원) : (일본) 정부가 발견한 자료 중에 군이나 관헌에 의한 강제연행을 직접 보여주는 기술은 없었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지난 16일 열린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서도 같은 입장을 보였습니다.


[스기야마 신스케/일본 외무성 심의관 (지난 16일) : (일본)정부가 발견한 자료에서 군이나 관헌에 의한 위안부의 강제연행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서청원 새누리당 의원이 "합의정산을 해치지 말자"는 내용의 박 대통령 친서를 아베 총리에게 전달했지만, 바로 다음날 한 자민당 의원은 "위안부는 직업으로서의 매춘부였다"는 망언을 합니다. 하지만 정부는 그때마다 일본 정부 관계자들을 비난할 뿐 국익을 이유로 협상과정 등을 일절 밝히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일방적인 주장을 쏟아내는 상황에서 정부의 무대응이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JTBC 이서준입니다.


[세번째] 대한독립과 결혼한 만석꾼 딸, 그가 남긴 건 수저 한벌
중앙일보 | 배영대  | 입력 2016.03.01. 07:20
 
도쿄 유학 중 3·1독립운동 참가, 임정 첫 여성 의원...
1944년에 숨져 3·1절 맞아 추모 음악회 열려

다시 3·1절이다. 지난해 영화 ‘암살’을 통해 일제강점기 여성 독립운동가의 활약상이 알려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여성 독립운동사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대개 유관순(1902~20) 열사를 언급하는 정도다. 3·1절을 맞아 여성 독립운동가 김마리아(1892~1944) 선생을 추모하는 음악회가 열린다. 제목부터가 ‘당신을 잊지 않았습니다’다. ‘한국의 잔다르크’라고까지 불리며 3·1 운동의 한 불씨 역할을 했던 김마리아를 재조명하는 자리다.



↑ ‘한국의 잔다르크’로 불리며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했다”고 했던 김마리아.

/김마리아선생기념사업회·인문서원


↑ 한말 최초의 여성 의병장인 윤희순(左),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右).

 /사진 김마리아선생기념사업회·인문서원


↑ 날아다니는 여자 장군이란 별명을 가졌던 남자현(左), 의열단을 이끈 김원봉의 아내이자 동지 박차정(右)

/김마리아선생기념사업회·인문서원


김마리아선생기념사업회와 이화여대 음악연구소가 공동 주최해, 3일 오후 7시30분 이화여대 음악관 김영의홀에서 열린다. 김마리아를 기리는 노래 ‘님이여 어서 오소서’(이건용 작곡·홍준철 작사)가 초연될 예정이다. 황해도 장연군 소래마을의 만석꾼 집안에서 셋째 딸로 태어난 김마리아는 서울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여자학원에 유학 중 1919년 2·8독립선언에 참가했다.


2·8 독립선언서 10여 장을 미농지에 복사해 평생 한 번 입은 기모노 띠 속에 감추고 2월 15일 부산항으로 입국해 광주·대구·서울을 거쳐 황해도까지 독립선언문을 운반했다. 이렇게 3·1 독립운동에 참여한 선생은 3월 6일 체포됐다. ‘엘리트 신여성’으로 편안한 길을 마다하고 독립운동에 나선 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다. 체포와 투옥을 거듭하면서 교육과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전국적 규모의 첫 여성독립운동 단체인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해 활동을 계속했고,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치료를 받다가 극적으로 병원을 탈출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김구 선생과 함께 황해도 의원으로 당선돼 활동하기도 했다. 첫 여성 의원이었다. 이어 다시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공소시효가 끝난 1933년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독립을 한 해 앞둔 44년 3월 13일 5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의 유품은 수저 한 벌이 전부로 현재 정신여고 ‘김마리아관’에 보관돼 있다. 이송죽 김마리아선생기념사업회 실행이사는 “고문 후유증으로 일생을 고생하고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했다’고 하면서 혼신의 힘을 바친 한국 독립운동의 대모 같은 분”이라며 “여성교육의 선구자이자 김마리아 선생의 집안을 빼고는 한국 독립운동을 얘기할 수 없을 정도인데도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추모 음악회라도 열리는 김마리아는 그나마 ‘괜찮은 처지’라고 해야 할까. 현재까지 알려진 전체 독립유공자 1만4300여 명 중 여성 독립운동가는 272명으로 전체의 3%도 안 된다.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심옥주 소장은 “국민들의 관심도 적고 연구자들의 관심도 이어지지 않아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발굴과 조사가 제대로 안 되었다”며 “여성 독립운동가의 수가 본래 그렇게 적은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심 소장은 “그나마 지난해 영화 ‘암살’에서 독립운동가 남자현(1872~1933) 역을 맡은 배우 전지현이 전투적인 여전사의 모습을 새롭게 보여주면서 그 이후 여성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어 다행”이라고 덧붙였다.


심 소장은 “한말 최초의 여성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 윤희순(1860~1935),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1862~1927), 의열단을 이끈 김원봉의 부인으로 총을 들고 전투에 참여한 박차정(1910~44) 여사 등 새롭게 조명할 여성 독립운동의 역사가 많다”며 “여성 독립운동을 재조명하는 일은 한국 어머니의 역할을 바로 세우는 일이다. 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때 어머니들이 금 모으기에 적극 나섰던 것은 우연이 아니라 그 같은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여성 독립운동가를 다룬 책으로는 『조국과 여성을 비춘 불멸의 별 김마리아』(김영란 지음), 『당신이 알아야 할 한국사 10:인물편』(서경덕·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지음), 『조선의 딸, 총을 들다』(정운현 지음) 등이 나와 있다.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네번째] 백주에 일본 왕에게 폭탄 던진 이봉창(李奉昌) 의사
조선일보 1932년 1월 10일  


 

   
천황 폐하 환행(還幸)[1] 도중 노부(鹵簿)[2]에 폭탄 투척

8일 오전 동경 경시청 앞에서 어료차(御料車) 별무 이상

[동경 8일 오후 6시 15분발 지급보-오후 11시 30분 연착]-내무성 발표 천황 폐하께옵서 육군시관병식(陸軍始觀兵式)에 행행(行幸)[3] 하옵셨다가 환행하옵시는 도중 노부가 앵전문(櫻田門) 앞으로 지날 즈음에 어경위(御警衛) 사고가 발생하였는데 그 사건 개요는 아래와 같다.


8일 오전 11시 40분경 노부가 국정구(麴町區) 앵전정 경시청 앞거리 모퉁이로 꺾어 들어갈 때 봉배자(奉拜者)[4] 선내(線內)에서 돌연 어료차로부터 앞으로 약 18간 되는 노부의 둘째 차 궁내대신(宮內大臣)이 탄 차에 수류탄 같은 것을 던지었다. 동 대신 승용차 왼편 뒤 차륜 부근에 떨어져 동 차체의 밑으로 엄지손만큼 파손된 곳이 두세 곳이 있었으나 어류차 기타에는 어이상(御異狀)이 없이 오전 11시 50분 무사히 궁성에 환어[5] 하옵시었다.


범인은 경성 출생 이봉창 현장에서 즉시 체포

범인은 경시청 석삼(石森) 순사 외 헌병 등이 이곳 현장에서 체포하여 경시청으로 인치[6] 하고 취조한 결과 범인은 경성 출생의 일명 조산창일(朝山昌一) 이봉창(李奉昌, 32)으로 판명되었다.



[해설] 1932년 1월 8일 도쿄 사쿠라다몬(櫻田門) 앞을 지나던 일본 천황 히로히토의 행렬에서 폭탄이 터졌다. 일행은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열린 신년 관병식에 참여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1탄은 거리가 짧아 명중하지 못했고, 2탄은 불발이어서 히로히토는 멀쩡하고 말 두 필을 쓰러뜨리는 데 그쳤다. 하지만 일제가 신격화하던 천황을 겨냥했고, 일본 경시청 앞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일본에 준 충격은 컸다.


‘범인’은 상하이임시정부의 비밀 의열 투쟁 단체인 한인애국단 소속의 조선 청년 이봉창이었다. 이봉창은 1900년 서울 태생으로 청년기에 일본에서 잠깐 생활한 적도 있지만 1931년 상하이로 건너가 김구가 이끌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제1호 한인애국단원이 된 그는 그해 12월 일본에 잠입해 당시 일본인들이 신으로 추앙하던 천황을 폭살하려 폭탄을 던진 것이었다.


거사를 단행한 후 가슴에 품고 있던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그는 현장에서 체포돼 그해 10월 10일 사형당했다. 당시 이 사건을 보도한 중국 언론이 거사 실패를 애석해 하자 1931년 만주사변 후 중국 본토를 호시탐탐 노리던 일본 측은 이를 상하이 사변을 일으키는 구실로 삼기도 했다. [위키백과]


이봉창(李奉昌 1900~1932, 독립운동가)


▲ [왼쪽] 한인 애국단 선서문을 가슴에 걸고 태극기 앞에 서있는 이봉창,

[오른쪽]이봉창 재판 출정 / 사쿠라다문 의거


일본명은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 아버지는 이진규(李鎭奎). 서울 출신이다. 천도교가 세운 서울 용산문창보통학교(文昌普通學校)를 졸업한 뒤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한학 공부를 하다 1913년 일본인 과자점의 점원으로 들어갔다. 1917년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 있는 일본인 경영의 화전(和田) 상점 점원으로 일하다가 1919년 해고당하였다. 1920년에는 용산역 만선철도(滿鮮鐵道)의 기차운전견습소의 역부(驛夫)를 지냈다. 이어 같은 해 전철수(轉轍手)와 연결수(連結手)가 되었다. 1921경 한·일 간의 임금 격차 문제에 눈을 뜨고 항일의식이 싹텄다. 1924년 4월 위의 직책에서 해고당하였다.


1924년 9월 자택에 항일 단체인 금정청년회(錦町靑年會)를 조직, 동 총무가 되었다. 다음 해 형 범태(範泰)와 같이 조카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대판(大阪)에서 철공소직원으로 근무하다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이름을 기노시타(木下昌藏)로 바꾸었다. 이후 동경과 대판 등지를 전전하며 가스회사에서 노동을 하는 등 막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1926년에는 병고(兵庫)에서 1년간 일본인 표구사의 보조원으로 생계를 꾸렸다. 일제의 침략으로 한민족의 생계가 위협받는다는 생각에 방랑 생활보다는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맹세, 1930년 12월 중국 상해로 갔다. 1931년 1월 한국인 거류민단 사무실을 찾아가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호소했으나 민단 간부들이 그의 거동을 수상하게 여겨 받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뒤 김구(金九)가 그의 진의를 알고 자신이 조직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시켜, 이봉창의 소신대로 일본천황폭살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거사 자금이 여의치 못해, 월급 80원을 받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인쇄소와 악기점에서 일하며 확실하게 준비를 하였다. 원로 이동녕의 승인하에 김구도 군자금모집을 펴던 중 재미 동포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고 거사를 촉진시켰다.


당시 중국군 대령으로 복무하던 왕웅(王雄), 즉 김홍일(金弘壹)에게 부탁해 상해공병창에서 수류탄 1개를 구입하고 김현(金鉉)으로부터 또다시 수류탄 1개를 입수하였다. 이 수류탄을 받은 즉시 거사자금 300원을 가지고 1931년 12월 13일 안중근(安重根)의 막내동생인 안공근(恭根)의 집에서,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선서식을 마친 뒤 17일 일본 동경으로 향하였다. 1932년 1월 8일, 동경 요요키(代代木) 연병장에서 만주국 괴뢰황제 부의(溥儀)와 관병식을 끝내고 경시청 앞을 지나가는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나 명중을 시키지는 못하고 체포되어 토요다마(豊多摩)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누가에(犬養) 내각이 총사퇴하고 다수의 경호 관련자가 문책당하였다. 그 해 10월 비공개재판에서 전격적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10일 이치가야형무소(市谷刑務所)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이봉창의 거사가 알려지자 중국의 각 신문들은 이 사실을 대서특필하였다. 특히, 중국 국민당 기관지인 『국민일보』는 “한국인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했으나 불행히도 명중시키지 못하였다.”고 보도하여 모든 중국인의 간절한 의사를 대변하여 주었다.


그러나 이 보도가 나간 후 푸저우(福州)에 주둔하던 일본 군대와 경찰이 국민일보사를 습격, 파괴함과 동시에 중국 정부에 엄중 항의하는 등 중·일 관계가 매우 악화되었다. 또한 일본군은 중국인 자객을 산 뒤 일본 일련종(一蓮宗)의 승려 한 명을 암살하게 하여, 이를 빌미로 제1차상해사변(第一次上海事變)을 일으키는 등 그 파급 양상이 심각하였다. 1946년 7월 6일 그의 유해를 서울 효창원에 안장하고 국민장으로 모셔져 오늘에 이른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한국민족문화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