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역사교과서 편향적 내용 수두룩"... 우려가 현실로
JTBC | 윤영탁 | 입력 2016.02.29. 21:16
[앵커] "오류가 없고 편향되지 않은 교과서를 만들겠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우려가 커지자 정부가 밝힌 원칙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개편 발행된 초등학교 역사 교과서를 살펴보니 그간의 우려가 괜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윤영탁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새학기부터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이 배우게 될 국정 역사교과서입니다. "광복절과 대한민국의 수립"이라는 말은 제목부터 들어가 있습니다.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배제하는 뉴라이트 계열의 역사관이 그대로 담긴 겁니다. 내부 검토본까지 있었던 "유신 헌법이 국민의 자유를 제한했다"는 내용은 최종본에서 빠졌습니다. 대신 "경제성장을 위해 유신을 선포했다"고 설명합니다. 박정희 정부에 대해선 '독재'가 아닌 '장기 집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교과서를 분석한 역사교육연대회의는 근현대사의 편향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밝혔습니다.
[김태우 회장/전국역사교사모임 : 권력의 입맛에 의해서 좌우될 수 있는 내용이 (교과서에) 개입될 수 있다는 겁니다. 역사가 정치에 이용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위안부라는 표현이 빠지고 일제강점기 분량 자체가 줄어든 것도 논란거리입니다. 특히 이같은 서술이 초등학교에 이어 현재 집필중인 중고교 교과서에서도 그대로 반영될 것으로 보여 논란이 더욱 커질 전망입니다. JTBC윤영탁입니다.
3.1절 앞두고 초등 교과서 '친일·독재 미화' 논란
프레시안 | 2016.02.29 18:32:58
'1948년 건국론'이 교과서에?…박정희 기술엔 '국민 저항' 삭제돼
새 학기부터 초등학교 6학년들이 배우게 될 사회(역사) 국정교과서가 3.1절을 앞두고 친일·독재 미화 논란에 휩싸였다. 3.1절을 하루 앞둔 29일, 역사교육연대회의(연대회의)는 서울 NPO지원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사회 교과서 완성본을 분석한 결과 편향적인 서술이 31건, 비문이거나 부적절한 표현이 93건에 달하는 등 총 124건의 문제점이 발견됐다고 주장했다.
연대회의는 "완성본 교과서는 우려됐던 국정 교과서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며 "현대사 부분은 뉴라이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박정희 정권에 대해선 편향적으로 서술했다"고 주장했다. 당장 3월 2일부터 초등학생들은 이 교과서로 학습하게 된다. 연대회의에 따르면 '대한민국 수립' 시점과 관련한 단원 제목인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서 '정부'가 빠진 '대한민국 수립'으로 표현됐다. 이는 지난해부터 거센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중고교 역사 국정 교과서에서도 쟁점이 됐던 부분이다.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관련해 3.1운동과 임시정부의 등장이 기점이 된 1919년 대한민국 수립을, 남한에 합법적 정부가 들어선 시점인 1948년 대한민국 수립으로 바꾸려 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지점이다. 1948년 건국론은 뉴라이트의 주장과 맞닿아 있다. 또한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을 부각시켰지만, 군사 독재, 인권 탄압 부분에 대한 서술은 줄어들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연대회의는 "사진 설명까지 합치면 이승만은 14번, 박정희는 12번 언급하고 있다"며 "조선 후기나 근대에 비해 현대사 서술 분량이 적은 걸 감안하면 지나칠 정도로 많이 언급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연대회의는 "6·25 전쟁에선 민간인 희생에 대한 서술이 축소됐고, 경제성장·새마을운동은 성과로 부각시켰다"며 "심지어 5·16과 유신 대목에서도 '장기집권'이라고 표현했을 뿐, '독재'란 표현이 없다"고 주장했다.
2014년 나온 실험본과 비교하면, "1972년 박정희 정부는 통일을 준비한다는 구실로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내용을 담은 유신 헌법을 통과시켰다. 국민의 자유가 크게 제한받게 되자 유신 헌법에 반대하는 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났다"고 돼 있던 실험본 기술이, 완성본에서 "박정희 정부는 국가 안보와 지속적인 경제 성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헌법을 고쳤다"는 기술로 바뀌어 있다. '국민의 자유가 크게 제한반았다'는 내용이 빠진 것이다.
급속한 경제 성장 과정에서의 '빈부 격차'란 표현도 사라졌고, 그 주역이 된 '노동자'의 역할 관련 기술도 빠졌다고 연대회의는 주장했다. 최근 논란이 된 '위안부' 표현 삭제에 대한 우려도 제기됐다. (☞관련기사 : "올해 초등 교과서에 위안부 단어·사진 삭제") 연대회의는 "이번 초등 교과서는 박근혜정부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발표한 이후 처음 발행되는 국정교과서"라며 "박정희 정권에 대한 우호적·편향적 서술이 눈에 띄게 나타나, 권력의 입김에 휘둘릴 수 있다는 우려가 사실로 드러났다"고 거듭 비판했다. [박세열 기자]
새 초등 국정교과서 ‘박정희 유신’을 내놓고 정당화
경향산문ㅣ2016.02.29 22:05:35 수정 : 2016.02.29 23:09:04
시범 배포한 실험본서 ‘국민 자유 제한’ 유신 내용 삭제
군사정변을 ‘혁명’처럼 설명…이승만 정부에만 ‘독재’ .
박근혜 정부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발표한 이후 처음 발행한 초등학교 6학년 국정 사회교과서의 내용이 박정희 정부 합리화와 찬양 일색인 것으로 분석됐다. 실험본에 있었던 ‘국민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유신헌법의 내용이 삭제된 대신 유신헌법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식으로 바뀌었고, 군사정변도 ‘혁명’처럼 설명했다. 29일 역사교육연대회의는 서울시 NPO센터에서 ‘초등 6-1 사회교과서’ 분석 결과 발표 기자회견을 열고 이같이 밝혔다. ‘위안부’ 용어와 사진 삭제 논란에 이어 새 교과서의 편향성까지 드러나며, 깜깜이로 진행되고 있는 중·고등학교 국정 역사교과서의 친일·독재 미화 우려도 커지고 있다.
■ 박정희 공(功)은 띄우고 과(過)는 감추고
실험본에는 “1972년 박정희 정부는 통일을 준비한다는 구실로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내용을 담은 유신헌법을 통과시켰다”였지만, 최종본에선 “박정희 정부는 국가 안보와 지속적인 경제 성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헌법을 고쳤다”로 바뀌었다. 유신의 정당성을 설명한 셈이다.
‘군사정변’에 대해서도 “정부가 4·19혁명 이후 나온 각계각층의 요구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자 박정희를 중심으로 하는 일부 군인들이 국민 생활의 안정과 공산주의 반대를 주장하며 군대를 동원해 정권을 잡았다”고 서술했다. 배경식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은 “용어는 ‘군사정변’이라고 썼지만 내용은 군사정변이 혁명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주장으로 채워졌다”고 비판했다. 또 이승만 정부에는 ‘독재’ 단어를 사용했지만 박정희 정부에는 “장기집권이 가능해졌다”라고만 서술했다.
경제 발전 부분에선 박정희 정부의 공을 한껏 치켜세웠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경제 발전을 중심으로 서술했고, ‘수출액의 변화’ 표에서는 수출이 급증한 1990년대 이후 상황보다는 ‘1977년 수출 100억달러 달성’을 콕 집어 표시하고 도표 옆에는 관련 사진을 첨부했다. 배 부소장은 “경제 성장, 새마을운동 등 박정희 정부의 성과를 부각시키고 독재와 인권 탄압에 대해서는 어물쩍 소략했다”며 “누구를 위한 서술인가”라고 지적했다.
■ 일제강점기 ‘친일파’는 한번 뿐
실험본에 있었던 위안부 용어와 사진은 삭제됐고, 사진과 함께 실렸던 ‘군함섬은 수백명의 한국인이 강제로 끌려가 사망한 장소’라는 설명도 최종본에선 빠졌다.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친일파 용어는 “일부 친일파들을 보좌역이나 앞잡이로 내세워”라는 표현밖에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준식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하위 관료 친일파 한 번 언급 외엔 나라가 강제병합되는 가운데 책임져야 할 사람들의 서술이 빠져 있고, 일제 말기 친일의 역사를 완전히 지워버렸다”고 말했다.
3·1운동 이후의 독립운동사도 대폭 축소됐고, 6·10만세운동과 노동자·농민들의 저항은 아예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양정현 한국역사교육학회 회장은 “박근혜 정부는 국정화를 고시하면서 ‘오류가 없고 편향되지 않은 교과서’를 강조했지만 초등 역사교과서 완성본은 우려했던 문제점이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며 “정치권, 권력층에서 마음만 먹으면 고칠 수 있는 것이 국정제이고, 그렇게 하고 싶어 국정제로 가는 것임이 드러났다”고 말했다. [임아영 기자 layknt@kyunghyang.com]
[르포] 3·1 독립만세 함성 흔적 간데없고... 그 자리엔 역사의 망각만이
국민일보 | 박세환 신훈 김판 기자 | 입력 2016.03.01. 04:07
97년 전 3·1 독립만세운동 역사의 현장들, 지금은...
“우리는 이제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하노라….”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음식점 태화관에 민족대표 33명 중 29명이 모였다. 조선독립을 선포하는 ‘기미독립선언서’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이었다. 같은 시각 태화관에서 불과 300여m 떨어진 탑골공원에는 학생과 시민 5000여명이 흥분에 가득 차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만세운동은 서울을 넘어 전국 각지로 뻗어나갔다. 그해 3월 3일 간행된 조선독립신문은 당시 상황을 ‘수많은 학생이 너무나 기뻐 손을 흔들고 발을 굴리니 어찌 목이 메지 않으리오’라고 묘사했다.
↑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29명이 기미독립선언서를 선포했던 서울 종로구 태화관 자리엔 12층 태화빌딩이 들어서 있다.
↑ 재미교포 여영필씨 부부가 이날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안에 설치된 손병희 선생 동상 앞에서 ‘셀카’를 찍고 있다.
↑ 서울 종로구 강북삼성병원 앞길에 ‘돈의문(서대문) 터’라고 적힌 표지물만 서 있다. 돈의문은 1915년 도로 확장공사 명목으로 철거됐다.
↑ 3·1운동 당시 매일신보사가 있었던 서울시청 앞에 태극기가 깃대에 매달려 나부끼고 있다. 이 태극기는 시민단체가 동성애 반대 시위를 하면서 내걸었다.
함성과 열망으로 가득 찼던 그 공간은 97년이 지난 지금 어떻게 변했을까. 숨 가빴던 역사의 현장을 후손들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을까. 국민일보 취재팀이 97주년 삼일절을 맞아 3·1운동의 주요 현장을 둘러봤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그날’을 역사의 기억 속에 묻어두고 있었다.
여기가 독립만세운동 현장이라고요?
29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태화빌딩. 민족대표가 모였던 태화관 자리에 지상 12층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입구에 ‘삼일독립선언유적지’라는 비석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빌딩 1층 로비에는 ‘민족대표 삼일독립선언도’라는 그림이 붙어 있다. 민족대표 29인이 둘러앉아 독립선언서를 검토하는 모습을 그렸다. 비석과 그림, 두 흔적만이 ‘3·1운동의 시발점’을 알려준다.
빈약한 징표 탓일까. 지나치는 사람들은 이 공간의 의미를 잘 몰랐다. 30분 남짓 동안 수백명이 태화빌딩 앞을 지나쳤지만 누구도 비석 앞에 멈춰서거나 비석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이 빌딩에 직장이 있다는 송모(32)씨는 “이곳에서 독립선언이 있었다는 걸 아느냐”는 질문에 “처음 알았다”고 답했다. 탑골공원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이날 탑골공원 입구 삼일문 오른편에는 가로 3m, 세로 2m 대형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그런데 삼일절을 기념하기 위해 내건 게 아니었다. 한 보수단체가 일본을 향해 대마도를 반환하라는 집회를 열면서 부착해 놓은 것이다.
탑골공원 안에는 손병희 선생 동상과 함께 삼일운동기념동판부조 10개가 전시돼 있지만 사람들은 그 앞을 무심히 지나갔다. 몇몇 노인도 “큰 관심이 없다”고 했다. 탑골공원에서 만난 프랑스인 캘런(41·여)씨는 “가이드북에서 독립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보고 둘러보러 왔는데 사람도 없고 휑한 것 같다”고 했다. 말레이시아 친구와 함께 이곳을 찾은 이모(40·여)씨는 “삼일절을 맞아 역사적 장소를 소개하려고 왔는데 방치된 것 같아 너무 민망하다”고 했다. 여행 왔다는 재미교포 여영필(62)씨도 “공원 앞에 있는 태극기를 보고 들어왔는데 사람이 없고 허전해서 이상하다”고 말했다.
남대문과 덕수궁 대한문, 미국 영사관과 경복궁 앞, 서대문(돈의문) 등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져간 곳마다 ‘그때’를 떠올리기는 어려웠다. 당시 매일신보가 있던 자리는 현재 서울시청으로 바뀌었다. 이곳이 독립운동의 현장이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덕수궁 앞에서 만난 미국인 여행객 마크(35)씨는 “거리에 걸린 태극기 외에 내일이 삼일절임을 알게 해주는 게 전혀 없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3·1운동’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맞은편 길 위에선 ‘평화의 소녀상’이 눈을 맞고 있었다. 곁에서 ‘한일협상안폐기 대학생대책위원회’ 소속 A씨가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두꺼운 외투를 여미고, 이불을 겹겹이 덮었지만 추위를 감당하기 힘들어 보였다. 지난 연말 한·일 양국이 위안부 문제에 합의한 뒤로 소녀상이 철거될까봐 지키고 있다고 했다.
이름을 묻자 그는 “대책위 관계자라고만 알아 달라. 인터뷰 잘못하면 경찰서에서 소환장 날아온다”고 했다. 개강하면 학교에 가야 하고, 졸업반이니 취업도 준비해야 하는데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눈물에 가슴이 아파서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소녀상 앞을 지나가던 시민 박모(48)씨는 “위안부 협상을 둘러싼 논란조차 사그라들고 있다”며 “잊혀가는 역사를 환기시킬 수 있는 복원작업과 성숙한 시민의식이 절실해 보인다”고 말했다. [박세환 신훈 김판 기자 foryo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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