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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 오늘 106주기 추모식 국내외서 열려

잠용(潛蓉) 2016. 3. 26. 14:24

안중근 의사 순국 106주기 추모식 국내외서 열려
연합뉴스 | 2016/03/26 11:00

 

(서울=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안중근 의사의 순국 106주기 추모식이 26일 한국과 중국에서 열렸다. 국가보훈처는 이날 오전 서울 안중근의사기념관 강당에서 안중근 의사 숭모회 주관으로 '안중근 의사 순국 106주기 추모식'이 개최됐다고 밝혔다. 기념식에는 최완근 국가보훈처 차장과 유족, 시민 등 400여 명이 참석했다.

기념식은 안중근 의사 약전 봉독, 유언 낭독, 추모사, 추모 공연, 헌시 낭송, 헌화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안 의사가 순국한 장소인 중국 다롄(大連) 뤼순(旅順) 감옥에서도 이날 오전 추모제가 개최됐다. 추모제에는 이세기 한중친선협회장과 김형태 주중 한국대사관 정무공사를 포함한 200여 명이 참석했다. 다롄 한국국제학교 학생 대표는 안 의사의 유언을 봉독했다.

 

↑ '안중근을 기억합니다'  (서울=연합뉴스) 한종찬 기자 = 26일 오전 서울 중구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순국 106주기 추모식'에서 참석자들이 헌화하고 있다.

 

↑ '그를 기억하며'  (서울=연합뉴스) 한종찬 기자 = 26일 오전 서울 중구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순국 106주기 추모식'에서 참석자들이 헌화하고 있다.

 

↑ '안중근을 기억합니다' (서울=연합뉴스) 한종찬 기자 = 26일 오전 서울 중구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순국 106주기 추모식'에서 참석자들이 묵념하고 있다.

 

↑ '그를 기억하며'  (서울=연합뉴스) 한종찬 기자 = 26일 오전 서울 중구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순국 106주기 추모식'에서 역사어린이합창단이 안중근 의사 추념가를 부르고 있다.

 

앞서 경남 창원 해군사관학교에서는 지난 25일 안중근 의사 유묵비 제막식이 열렸다. 1879년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난 안 의사는 일제가 대한제국 외교권을 박탈한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세워 민족계몽운동에 힘쓰다가 일제의 강점이 본격화하자 의병운동에 투신했다. 1909년 동지들과 함께 손가락을 자르고 일사보국(一死報國)을 맹세한 안 의사는 같은 해 10월 26일 만주 하얼빈(哈爾濱)역에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했다. 뤼순 감옥에 투옥돼 일제의 심문과 재판을 받는 중에도 의연한 태도를 조금도 굽히지 않던 안 의사는 사형을 선고받고 1910년 3월 26일 순국했다. [ljglory@yna.co.kr]


中 뤼순 곳곳에 안중근 의사 마지막 발자취
연합뉴스 | 2016/03/26 08:01


일본관동법원·기차역·감옥 등 역사현장 보존
(다롄=연합뉴스) 홍창진 특파원 = 안중근 의사가 동양평화론을 설파하고 순국한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시 뤼순(旅順)구에는 안 의사가 마지막 발자취가 곳곳에 남아있다. 순국일을 하루 앞둔 지난 25일 살펴본 안 의사의 사적 가운데 주목할 만한 장소는 6번의 공판 끝에 일제의 사형선고를 받은 옛 뤼순일본관동법원이다. 옛 관동법원은 안중근 의사가 사실상 사형이 예정된 불리한 상황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것은 개인의 감정이나 충동적 울분 때문이 아니라 대의를 위한 것"이라고 당당히 답변한 현장이다. 그는 이곳에서 1910년 2월 7일부터 같은 달 14일까지 모두 6번의 재판을 받았으나 각본에 짜인 대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 (다롄=연합뉴스) 홍창진 특파원 = 안중근 의사가 동양평화론을 설파하고 순국한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시 뤼순(旅順)구에는 안 의사가 마지막 발자취가 곳곳에 남아있다. 사진은 안 의사가 6번의 공판 끝에 일제의 사형선고를 받은 옛 뤼순일본관동법원 재판정의 모습. 2016.3.26 realism@yna.co.kr

 

법원 1층 관동지법 재판정에서 열릴 예정이던 재판은 1천여 명의 방청객이 몰리는 바람에 추첨으로 300명을 골라 2층 관동고법에서 진행됐다. 1950년대부터 뤼순 인민병원으로 쓰인 법원건물은 병원 증축에 따라 한때 철거될 위기에 처했으나 안 의사 재판정으로서 의의를 강조한 시민단체 호소 덕분에 2001년 3월 다롄시 문물보호단위로 거듭났다.

 

정춘매 뤼순관동법원전시관 주임은 "당시 세계열강이 중국을 침탈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열강도 안중근 의사 재판에 관심이 많았다"며 "일제는 한국인 변호사를 선임해 달라는 안 의사 가족의 요청을 묵살하고 일본인 국선변호사에게 변호를 맡기는 등 편파적이었다"고 말했다. 안 의사가 뤼순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은 일제에 의해 수감 및 사형집행을 당한 옛 뤼순 감옥(현재 명칭은 뤼순감옥박물관)이다. 안 의사는 하얼빈에서 뤼순으로 압송된 이후 사형집행까지 감옥 서쪽 독방에서 104일간 수감됐다.

 

↑ (다롄=연합뉴스) 홍창진 특파원 = 안중근 의사가 동양평화론을 설파하고 순국한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시 뤼순(旅順)구에는 안 의사가 마지막 발자취가 곳곳에 남아있다. 사진은 안 의사가 갇힌 상태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한 옛 뤼순감옥 독방의 내부 모습. 안 의사 감방 일대가 내부수리 준비 중으로 폐쇄된 탓에 외부에서 촬영했다. /2016.3.26 realism@yna.co.kr

 

↑ (다롄=연합뉴스) 홍창진 특파원 = 안중근 의사가 동양평화론을 설파하고 순국한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시 뤼순(旅順)구에는 안 의사가 마지막 발자취가 곳곳에 남아있다. 안 의사가 하얼빈에서 열차로 압송된 뤼순역사의 모습. 2016.3.26 realism@yna.co.kr

 

감옥박물관 측은 안 의사가 사형당한 장소를 리모델링해 추모공간으로 만들고 '안중근 의사가 의로운 죽음을 한 곳'(安重根義士就義地)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약 170여 ㎡ 넓이의 추모공간 전면에 안 의사 흉상이 있고 양쪽 벽면엔 그가 수감생활 도중에 쓴 유묵의 복사본 54점이 걸렸다. 뤼순 감옥 북쪽 야산엔 아직 정확한 장소가 확인되지 않았으나 안 의사 유해가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묘지 터가 있다. 우리 정부와 안중근 의사를 연구하는 시민단체들이 안 의사의 유해를 찾기 위해 십수 년째 계속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또한 뤼순에는 안 의사가 1909년 11월 1일 하얼빈에서 압송돼 11월 3일 도착한 기차역이 남아있어 지금도 승객들이 이용한다.
[realism@yna.co.kr]

 

中 다롄 안중근의사 매장추정지에 암장한 분묘 수백기
연합뉴스 | 2016/03/26 07:56

 

↑ (다롄=연합뉴스) 홍창진 특파원 = 안중근 의사가 일제에 의해 순국한 뒤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의 옛 뤼순감옥 묘지터는 수십년동안 암장(暗葬)한 개인분묘로 가득했다. /2016.3.26 realism@yna.co.kr

 

(다롄=연합뉴스) 홍창진 특파원 = 안중근 의사가 일제에 의해 순국한 뒤 매장된 곳으로 추정되는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의 야산은 수십 년 동안 곳곳에 암장(暗葬)한 개인분묘로 가득했다. 안 의사 순국일을 하루 앞둔 지난 25일 다롄 뤼순(旅順)구의 뤼순감옥박물관 북쪽 예전 '마잉허우'(馬營後)로 불린 야산을 답사했다. 이곳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추적해온 연구자와 시민단체가 유해 매장 가능성이 크다고 공통으로 지목하는 곳이다.

 

산을 뒤진 끝에 지난 2001년 다롄시문물관리위원회가 옛 뤼순 감옥 묘지터에 세운 비석을 발견했다. 일제는 1907년부터 1945년까지 이 묘지 터에 길이 90~100m, 넓이 1m, 깊이 2m 정도의 도랑을 5개 파서 사형을 집행하거나 옥사한 수감자들의 시신을 매장했다. 일제 패망 이후 방치되던 감옥묘지에 인근 주민들이 개인분묘를 설치하면서 현재 수백여기(基)가 난립했고 상당수는 허물어졌다.

 

관리의 손길이 닿지 않아 잡초가 무성하고 도랑이 있던 자리엔 나무들이 자라나 원형을 찾기도 힘든 상태이다.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이 소장한 사형보고서는 "당일(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 20분 안중근의 시신을 특별히 감옥에서 제작한 침관(寢棺)에 넣고 흰 천으로 덮어 교회당으로 운구한 뒤 우덕순·조도선·유동하 등 공범 3명을 끌어내 예배하게 하고 오후 1시 감옥 묘지에 매장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뤼순 감옥에서 안 의사를 처형한 일제는 시신을 유족에게 인계하지 않고 유해를 어디에 묻었는지도 밝히지 않았다. 순국 당시 뤼순 감옥 형무소장의 딸 이마이 후사코(今正房子)가 제시한 두 장의 사진과 증언에 기초해 지난 2008년 한국 정부가 뤼순 현지에서 유해 발굴을 시도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감옥 주변은 20층 이상의 고층 건물과 아파트 등이 빼곡히 들어선 개발지역으로 변해버려서 안 의사의 유해를 찾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한국 정부는 재작년 중국 측에 감옥 묘지 일대에 대한 지표투과레이더(GPR) 조사를 요청했으나 공식적인 답변을 받지 못했다. 뤼순 일대가 군사보호지역인 데다가 안 의사 고향이 황해도 해주인 점을 들어 유해 발굴에 적극적인 북한 입장을 고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다롄안중근연구회는 "유해 매장지와 관련한 네 가지 설 가운데 유력하던 원보산 남사면이 발굴에서 성과가 없었고 나머지 3곳은 감옥 묘지의 어딘가를 가리키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realism@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