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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애청곡

[유성기 가요] '분홍 손수건' - 장세정 노래

잠용(潛蓉) 2016. 6. 10. 12:29

 

'분홍 손수건' (1937)

박영호 작사/ 문호월 작곡/ 노래 장세정

(1937년 6월 오케레코드)

 

< 1 >

손수건을 흔들어 離別한 埠頭
그날 밤은 달빛도 흐렸습니다
아무리 웃음팔이 身勢거니와
당신만은 내 맘의 太陽이였소.

 

< 2 >

뜬 世上을 날으는 까마귀 같은
믿지 못할 당신을 믿었습니다
보내곤 살 수 없는 그대어니와
우는 마음 속이고 웃었습니다.

 

< 3 >

죽음보다 더 아픈 새까만 이별
하룻밤의 꿈이라 잊었습니다
그러나 어이하랴 어이하리까?
가슴 깊이 사모친 당신인 것을~

 

(가사 참조: 한국문화콘텐츠닷컴)

 


장세정(張世貞, 1921∼2003)

 

 

193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활동한 대중가요 가수. 1936년 평양방송국 개국 기념 공연으로 가수 활동을 시작해, 1937년 「연락선은 떠난다」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데뷔했다. 이후 오케레코드와 조선악극단의 간판급 가수로 부상했다. 광복 이후에도 1950년대 초까지 악극 무대에 계속 서는 한편 「울어라 은방울」, 「샌프란시스코」 등 대표곡을 발표하며 인기를 이어 갔다. 1970년대 초까지도 공연과 방송을 통해 꾸준히 활동했다.
 
1921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악기점 점원으로 일하다가 오케레코드 운영자 이철에게 발탁되어 가수가 되었다. 1937년에 정식으로 데뷔한 이후 오케레코드에서 이난영에 버금가는 인기 가수가 되었고, 이철의 연인이 되어 아들 둘을 낳기도 했다. 이철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오케레코드 관련 공연단체인 조선악극단의 프리마돈마로 절정의 인기를 누렸으나, 1944년 이철이 병사한 뒤 한동안 홀로 지내다가 연주가 한두식과 결혼했다. 1960년대에는 한일 국교 정상화를 전후해 여러 차례 일본 공연에 참가하기도 했다. 1973년 무렵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지병이 악화되어 오랫동안 투병하다가 2003년에 타계했다.

 

데뷔 당시에는 청순한 음색과 이미지로 인기를 모았으나, 1940년 일본에 일시 체류하며 성악 발성을 익힌 뒤로는 세미클래식풍 창법을 구사하게 되었다. 그를 바탕으로 1940년대 악극 무대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가수가 되었고, 음반을 통해서도 「백팔염주」(1949년) 같은 독특한 작품을 발표했다. 김백희ㆍ심연옥ㆍ백설희 등 조선악극단 출신 후배 가수들의 전범 역할을 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분홍 손수건>은 1937년 6월에 張世貞닙이 불렀던 노래입니다. <山有花; 오케 12002/ 宋達協 노래>와 같이 나온 이 노래는 <세기말의 노래(1932.10 포리돌)를 데뷔작으로 하여 포리돌, 태평, 오케에서 많은 주옥 같은 노래를 작사한 朴英浩님이 아름다운 노랫말을 쓰고, 초기 오케에서 민요 채집, 연구에 힘썼고 많은 신민요를 작곡한 文湖月님이 곡을 달아 <연락선은 떠난다 1937.2>로 화려하게 데뷔한 장세정님이 불러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뜬 세상을 나르는 가마귀 같은~ 죽음보다 더 아픈 새까만 이별~> 노랫말이 참으로 아름다운 (분홍 손수건>입니다.  <雲水納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