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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애청곡

[유성기 가요] '왜 못오시나' (1936) - 황금심 노래

잠용(潛蓉) 2016. 9. 16. 06:47

 

'왜 못오시나' (1936)

이노홍 작사/ 박시춘 작곡/ 노래 황금심 

 

<대사>
열 일곱 소녀 가슴에 열여덥 총각 가슴에
치렁치렁 검은 머리 갑사댕기 수집 어라
봄바람은 불어와도 님바람은 왜 못부나?
님아님아 가신 님아 돌아올 줄 왜 모르나?//

 

< 1 >

봄바람은 음 음~ 불어오건만 으으음~
어이해 내 사랑은 왜 못오시나?
에헤 에헤 에헤야~ 왜 못오시나?
날 두고 가신 님은 왜 못오시나?
 

< 2 >
봄바람은 음 음~ 불어오건만 으으음~
어이해 한번 가신 님 왜 못오시나?
에헤 에헤 에헤야~ 왜 못오시나?
날 두고 가신 님은 왜 못오시나?
 

< 3 >
봄바람은 음 음~ 불어오건만 으으음~
어이해 우리 님은 소식이 없나?
에헤 에헤 에헤야~ 왜 못오시나?
날 두고 가신 님은 왜 못오시나?

 


[이동순의 가요이야기-20]

'한국의 마리아 칼라스' 황금심 

 

↑ 황금심 음반 자켓

 

'타향살이' 설움을 '알뜰한 당신' 으로 풀다
감성 밴 꾀꼬리 음색… 14세 데뷔 70년대까지 1천여곡 발표
10살 차 고복수와 결혼 장안의 화제 '가요계 1호 스타 부부'  

동서고금의 음반이란 음반을 모조리 수집하던 한 선배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와 이런저런 방담을 나누다가 문득 가수 황금심(黃琴心:1922~2001)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졌지요. 그런데 선배는 대뜸 "그녀는 한국의 마리아 칼라스였어!"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리아 칼라스(1923~77)는 1950년대를 배경으로 전 세계 음악팬들에게 커다란 인기를 누린 프리마돈나 가수로 그야말로 오페라의 전설이었지요. 그리스 이주민의 딸로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지만 부모의 이혼 등을 비롯한 삶의 파란으로 인해 많은 시달림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달림은 칼라스의 예술을 한 단계 도약시키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음악의 감성을 정확히 표현하는 힘, 매력적인 음색은 마리아 칼라스의 상표처럼 여겨졌지요. 여기에다 우아한 용모, 스타로서의 기품까지 갖추어 그야말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오페라가수로 인정받았습니다.

 

저는 곧 선배의 말에 딴죽을 걸었습니다. 아무리 황금심 노래가 훌륭하다 하더라도 어찌 마리아 칼라스에 비견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선배의 표정은 결연했습니다. 황금심 음반을 다시금 귀 기울여 반복해서 들어보라는 충고를 주었습니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와 1960년대 황금심 절정기에 취입한 음반을 마그나복스 장 전축에 걸어놓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몇 시간이고 들었습니다. 고즈넉한 밤,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황금심의 노래는 나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처연하게 스며들어와 아프고 쓰라린 가슴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도달한 결론은 과연 선배의 지적에 일리가 있다는 동의와 공감이었습니다.

 

황금심 음반을 듣던 중에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하나의 아련한 실루엣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내가 소년시절이었던 60년대 초반, 한옥 고가에서 아버님과 함께 살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마당에는 벽오동 한 그루가 우뚝 서서 바람소리를 내고 있었지요. 힘겨운 가계에 보태기 위해 아버님께서는 꽃밭이 있던 담장 쪽 공터에 새로 방을 넣으셨습니다. 그 방에 40대 중반의 여인이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세를 들어 살았습니다. 여인은 아마도 과수댁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침 식사를 마치면 전축에다 곧장 황금심 음반을 올려놓고, 앞뒷면을 돌려가며 해질 무렵까지 듣고 또 듣는 것이 그녀의 일과였습니다. 청소를 할 때도 저녁밥을 지을 때도, 한가한 시간 방바닥에 홀로 누워있을 때도 황금심 노래만 들었습니다. 당시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과수댁의 복잡하고 힘든 삶의 무게를 지탱해준 힘의 원천은 필시 황금심 노래였을 것이라고 이제 어른이 된 나는 짐작을 하는 것이지요.

 

본명이 황금동(黃金童)인 가수 황금심은 1922년 부산 동래 출신입니다. 그러나 어려서 부모를 따라 서울 청진동으로 이주했고, 일곱 살에 덕수보통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4세가 되었을 때 축음기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을 너무도 좋아했는데, 어느 날 동네의 음반가게 점원이 골목을 지나다가 소녀의 기가 막힌 노랫소리를 들었습니다. 마침 오케레코드사 전속가수 선발 모집이 있었는데, 거기에 소개를 받아서 황금동은 당당히 1등으로 뽑혔습니다.

 

↑ 일제시대, 경회루에서 신식악기로 연주회를 하고 있는 일본 군악대. (사진제공 정성길)

 

↑ 16세의 황금심과 그녀의 첫 음반 가사지

 

드디어 1936년 오케레코드에서 '왜 못오시나'와 ''지는 석양 어이 하오리'란 음반을 황금자(黃琴子)란 이름으로  처음 취입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듬해 작사가 이부풍이 황금동을 빅터레코드사로 안내하여 전수린 작곡의 '알뜰한 당신'(조명암 작사, 전수린 작곡)과 '한양은 천리원정'(조명암 작사, 이면상 작곡)을 취입하도록 했습니다. 이 음반을 낼 때 예명은 황금심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측했던 대로 이 음반은 공전의 대히트를 했지만, 장래가 촉망되는 가수를 빼앗긴 오케레코드사에서는 황금동을 이중계약으로 법원에 고소를 했습니다. 결국 가족들이 나서서 황금심을 빅터사에 머물게 하기로 하고, 분쟁을 힘들게 무마했습니다.

 

작사가 이부풍, 작곡가 전수린, 가수 황금심! 이 트리오는 이후 빅터레코드사를 대표하는 간판격 음악인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데뷔 시절, 엄청난 소란으로 마음의 고통을 겪은 황금심은 그 어느 다른 레코드회사에서 취입을 제의해도 전혀 듣지 않고, 오로지 빅터사에서만 활동했습니다. 가수 황금심 노래에 가사를 담당했던 작사가로는 이부풍을 위시해 시인 장만영과 박노춘 등이었습니다. 시인 김안서 선생도 김포몽(金浦夢)이란 필명으로 가사를 주었지요. 황금심 노래를 거의 전담하다시피 했던 작곡가로는 단연코 전수린 선생입니다.

 

자, 그러면 일제 식민지 후반기에 발표했던 황금심의 대표곡을 어디 한번 보실까요? 신민요 '울산 큰 애기'(고마부 작사, 이면상 작곡, 빅터 49511) '마음의 항구' '알려주세요' '청치마 홍치마' '꿈꾸는 시절' '여창에 기대어' '만포선 천리 길' '날 다려가소' '한 많은 추풍령' '재 우에 쓰는 글자' 등입니다. 1939년 4월 발표한 '외로운 가로등'(이부풍 작사, 전수린 작곡, 빅터 KJ-1317)은 블루스 곡입니다. 일제말 제국주의 압제에 지치고 시달린 식민지 백성의 아픈 가슴을 따뜻하게 쓰다듬어준 작품이지요.

 

이 무렵 김용환이 조직한 반도악극좌(半島樂劇座)의 주요멤버로 활동한 황금심은 노총각이던 가수 고복수(高福壽)와 이동열차 안에서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나이 차이는 무려 10년, 이를 극복하고 마침내 결혼에 골인하게 됩니다. 부부는 악극단 활동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다가 8·15광복을 맞이하게 됩니다. 6·25전쟁은 이들 부부에게도 시련의 세월이었습니다. 고복수는 인민군에 납치되었다가 극적으로 탈출하였고, 부부는 국군 위문대원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1952년 황금심이 취입한 '삼다도 소식'(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스타 KB-3002)으로 부부는 커다란 삶의 용기를 얻었습니다. 이후 '뽕따러 가세'(나화랑 작곡) 등으로 계속 인기를 이어가지만 고복수는 손대는 사업마다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마침내 1958년 고복수는 가수생활을 접고 은퇴하게 되지만 힘겨운 생활고는 마침내 고복수로 하여금 월부서적 외판원으로 길거리를 헤매게 했습니다. 이 무렵 황금심은 생계를 위해 참으로 많은 분량의 노래를 취입하게 됩니다. 영화주제가, 연속방송극 주제가는 황금심이 도맡다시피 했습니다. 황금심은 1970년대까지 무려 1천여 곡을 발표하며 한국가요사를 통하여 '가요계의 여왕' '꾀꼬리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말년에 파킨슨씨병을 앓으면서도 노래에 대한 애착이 변함없던 황금심은 드디어 2001년, 한 많고 설움도 많았던 이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시인·영남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