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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애청곡

[유성기 가요] '은혜냐 사랑이냐' (부녀계도 1940) - 이인권 노래

잠용(潛蓉) 2016. 10. 17. 15:35

'은혜냐 사랑이냐' (婦女系圖 1943)

處女林 작사/ 李在鎬 작곡/ 노래 李寅權

 

< 1 >
은혜냐 사랑이냐 두 갈래 길에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더듬는 발길
스승을 따르자니 사랑이 울고
사랑을 따르자니 스승이 운다

스승이 운다~

 

< 2 >
스승은 해가 뜨는 地平線이요
陽金이는 달이 뜨는 水平線이다
달이냐 태양이냐 쌍갈래 길에
발길을 더듬는다 福壽는 운다

복수는 운다~

 

< 3 >
스승길 사랑길에 헤매는 발길
이 길이냐 저 길이냐 헤매는 가슴
빕니다 비옵니다 빛나는 成功
사나이 地平線을 찾어가소서

찾어가소서~

 

 

<父女系圖>는 가수 李寅權님이 1943년 1월에 태평레코드에서 밝표한 노래입니다. <千里戰場; KC-5054/ 李寅權 노래>과 같이 발매된 이 노래는, 處女林 作詞/ 李在鎬 作曲의 작품으로, 태평에서 발표한 첫 곡인데, 훗날 <은혜냐 사랑이냐>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노래입니다. <雲水衲子>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23]

'미사의 노래'와 가수 이인권의 삶'

 

젊은 시절의 이인권  

 

비명에 간 아내, 오늘도 '미사의 노래'로 부른다
'청진의 남인수'로 데뷔, 작사 작곡 ·노래의 '1인 3역'
대구로 피란와 꽃을 피우다  

함경북도 청진에서 출생한 가수 이인권(李寅權;1919∼73)은 6·25전쟁과 더불어 대구로 피란 내려와서 살았다. 이인권이 대구와 가졌던 인연은 그보다 훨씬 이전의 일이었다. 오케레코드사 전국순회공연을 비롯해 KPK악극단 순회공연 때 종종 다녀간 곳이기도 했다. 이인권이 대구에 들를 때면 공연을 마친 뒤 대구 중심가에서 악기점을 열고 있었던 작곡가 이병주의 사무실에 꼭 들러 환담을 나누곤 했다. 이병주와 이인권은 서로 동갑내기였으므로 남달리 교분이 두터웠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인권은 아예 대구로 와서 계산성당 맞은 편 골목에 셋집을 얻어 살면서 날이면 날마다 이병주가 운영하는 오리엔트레코드사로 거의 출근하다시피 했다. 그곳에 가면 작곡가 박시춘·이재호, 작사가 강사랑·손로원·유호 등을 비롯하여 예전부터 친밀한 대중예술인들이 항시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편했다. 이 오리엔트레코드사에서 이인권은 광복 이후 첫 취입곡인 '귀국선'을 비롯하여 '무영탑 사랑' '백제의 봄빛' '나의 등대' '추억의 백마강' '사랑의 복지' '미사의 노래' '그리운 다방' 등을 발표하였다.

 

당시 이인권은 가수활동을 하던 아내와 함께 최전방 전선으로 위문공연을 자주 다녔다. 어느 지역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이인권 부부가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던 중 난데없는 포탄이 날아와 아내는 현장에서 즉사하고, 이인권은 파편에 다리를 찢기는 중상을 입었다. 야전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뒤 이인권은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목발을 짚고 혼자 대구에 돌아왔다. 하지만 무대 공연 중에 아내를 잃은 무서운 충격과 고통에서 벗어날 길 없었다. 날이 갈수록 번민과 죄책감에 시달리며 차분하고 건실하던 성격의 이인권은 깊은 우울증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 뒷줄 왼쪽부터 가수 정향, 희극배우 김희갑, 가수 한복남, 가수 이인권.  
  

↑ 이인권 독집앨범.  
  

↑ 오케레코드사 활동시절의 이인권. 

 

그러다가 이인권은 집 앞의 오래된 성당인 계산동 천주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으며, 독실한 신앙을 갖게 되면서 차츰 마음의 중심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따금 불쑥불쑥 떠오르는 아내 생각으로 잠 이루지 못하던 어느 겨울밤, 이인권은 아내의 넋을 위로하는 한 편의 가사를 이불 속에 엎드린 채로 써내려갔다. 그리곤 바로 오선지에 곡조를 옮겨 탱고풍 작품을 만들었다. 몇 차례 연습해보곤 곧바로 오리엔트 레코드사로 악보를 들고 가서 이병주에게 취입을 부탁했다. 이 음반이 바로 '미사의 노래'(임영일 작사, 이인권 작곡, 이인권 노래)이다. 1953년 대구 오리엔트레코드사에서 발매된 이 음반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뜨거웠다. 전쟁 통에 사랑하던 가족을 잃고 줄곧 상심 속에 빠져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이 노래는 크나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미사의 노래>

'당신이 주신 선물 가슴에 안고서
달도 없고 별도 없는 어둠을 걸어가오
저 멀리 니콜라이 종소리 처량한데
부엉새 우지마라 가슴 아프다

 

두 손목 마주 잡고 헤어지던 앞뜰엔
지금도 피었구나 향기 높은 다리아
찬 서리 모진 바람 꽃잎에 불지마라
영광의 오실 길에 뿌려 보련다

 

가슴에 꽂아 주던 카네이션 꽃잎도
지금은 시들어도 추억만은 새로워
당신의 십자가를 가슴에 껴안고서
오늘도 불러보는 미사의노래'

 

이인권의 본명은 임영일(林榮一)이다. 오케그랜드쇼가 함경도 청진에서 공연 중일 때 무대 뒤로 작업복 차림의 한 청년이 찾아와 이철 사장과 작곡가 박시춘에게 노래 테스트를 받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마침 조용하던 시간이라 두 사람은 흥미를 느끼고 청년에게 노래를 시켰는데, 뜻밖에도 남인수의 '꼬집힌 풋사랑'을 너무도 분위기를 잘 살려 부르는 것이 아닌가. 당시 오케그랜드쇼는 결핵이 악화된 남인수가 공연에 불참해 풀이 죽어있던 터라, 이철은 그 자리에서 청년을 남인수의 대역으로 출연시킬 것을 결정했다. 그날 밤 공연에서 임영일은 '청진의 남인수'로 소개되어 큰 박수를 받았고, 일행과 함께 서울로 와 정식으로 가수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임영일이 이인권이란 예명을 정식으로 쓰게 된 것은 1938년 10월 서울 부민관 공연이었다. 하지만 임영일은 데뷔 초기 오케와 빅터 두 회사에서 동시 전속으로 활동하게 되는 혼란을 빚었다. 임영일의 재능을 탐낸 빅터사에서 임영일을 유혹해 빼돌린 것이 혼란의 원인이었다. 하지만 이 해프닝은 잠시였고, 이인권은 오케 전속으로 확정되어 다수의 음반을 취입·발표하였다. 식민지 시절에 발표한 이인권의 대표곡들은 '눈물의 춘정' '향수의 휘파람' '항구에서 만난 여자' '신혼명랑보' '타관마차' '이역의 우는 사나히' '낙타야 가자' '고향의 풍경화' '동생을 차저서' '국경의 다방' '꿈꾸는 백마강' '삼등차 일기' '부녀계도'('은혜냐 사랑이냐'의 원래 제목) 등이다.

 

이 가운데서 1940년 11월에 발표한 '꿈꾸는 백마강'(조명암 작사, 임근식 작곡, 이인권 노래, 오케 31001)은 가수 이인권의 위상을 반석 위에 앉힌 대표곡으로 자리를 잡았다. 작곡가 임근식은 오케레코드사 악단 전속의 피아니스트였다. 작사가 조명암은 당시 일본 와세다대학 불문과에 재학 중인 학생 신분이었다. 유학 중에도 자주 레코드회사로 가사를 써 보내었고, 노래가 히트하면 학비에 큰 보탬이 되었다고 한다. 

 

<꿈꾸는 백마강>
(조명암 작사, 임근식 작곡, 이인권 노래. 성우 정은숙)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잊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에 울어나 보자

 

고란사 종소리 사무치면은
구곡간장 올올이 찢어지는 듯
그 누가 알리요 백마강 탄식을
낙화암 달빛만 옛날 같구나

 

이 노래는 멸망한 백제의 비극적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나그네의 시각으로 식민지 체제의 고통과 상실감을 은근히 애절하게 그려내고 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이 노래는 크게 히트하였고, 높은 인기를 두려워한 조선총독부에서는 즉각 발매금지 조치를 내렸다. 이 '꿈꾸는 백마강'은 광복 이후 또다시 금지가요로 묶이는 불운을 겪었다. 그 까닭은 1965년 방송윤리위원회가 이 노래의 작사자 조명암의 월북 사실을 지적했기 때문이다.

 

가수 이인권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오케, 빅터, 태평레코드사 등 3대 제작사를 통해 다수의 가요작품을 취입·발표하였다. 빅터에서 발매한 음반에는 임영일이란 본명으로 표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인권은 가수이면서 동시에 작곡가, 작사가, 기타연주자 등으로 음악적 재능이 두루 뛰어난 만능 대중 예술인이었다. 가수 데뷔 직전 포리도루레코드사에서 작곡가로 여러 편의 가요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광복 이후 악극과 드라마, 영화음악 분야에서도 탁월한 공적을 쌓았다. 1950년대 이후로는 노래보다 작곡 분야에서 한층 두드러진 활동을 펼쳤다. 당시 이인권이 작곡한 작품으로는 '꿈이여 다시 한 번'(현인 노래), '카츄샤의 노래'(송민도 노래), '원일의 노래' '외나무다리'(최무룡 노래), '들국화'(이미자 노래), '바다가 육지라면'(조미미 노래), '후회'(나훈아) 등 다수이다. 노래 잘 부르던 함경도 청년 이인권은 한국 대중음악사에 크나큰 공적을 남기고, 1973년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글: 이동순/ 시인·영남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