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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70년⑨] 미술 애호가- 송은 이병직

잠용(潛蓉) 2016. 11. 17. 12:56

[유홍준의 안목](9)

미술 애호가 열전 - 1. 송은 이병직
경향신문 2016.08.15 21:59 수정 2016.08.17 09:54 댓글 1개

 

조선의 마지막 내시,

미술품 수집으로 민족의 유산 지키다

 

 

 

변상벽, ‘닭’, 18세기 중엽, 종이에 채색, 30×46㎝, 간송미술관 소장

미술품 수집에는 기본적으로 작품을 살 수 있는 경제적 여력과 미술을 좋아하는 취미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수집의 질을 좌우하는 것은 안목이다. 재력도 있고 안목도 있는 분은 천하의 명작을 소장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재력이 약하지만 안목이 높은 사람은 자기 소품에 만족하며 자신의 취미를 저버리지 않는다. 반면에 재력은 있지만 안목이 낮은 사람은 취미의 고양이 아니라 수집에 치중해 양만 많아 결과적으로 허접한 작품만 많이 모으는 결과를 낳는다.

 

흔히 세상 사람들은 미술품을 투기 또는 투자의 대상으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이건 오해다. 투기를 목적으로 미술품을 구입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있다고 해도 그렇게 해서 성공한 사례는 더더욱 드물다. 투기 목적이라면 미술품 구입보다 위험한 것이 없다. 작품은 상품과 달라 값이 일정치 않다. 똑같은 18세기 백자 항아리라도 값이 천차만별이고, 같은 화가의 같은 크기 작품이라도 몇 배 차이 나는 것이 미술품인데 무얼 믿고 여기에 투자를 하겠는가?


미술품 값은 내가 얼마에 샀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지금 팔 때 얼마를 받을 수 있다는 시세가 작품 값이다. 투기가 아니라 투자라도 주식시장과 마찬가지로 어느 시점에 사서 어느 시점에 팔았느냐에 성패가 달린 것인데 그걸 알아맞히는 귀신같은 재주를 가진 사람이 있을까? 그림값 상승은 박수근을 많이들 생각한다. 1980년대에 박수근 그림값이 1호짜리가 100만원으로 올랐을 때부터 언론에서 화제가 됐다. 그러나 그 박수근 작품들은 국립현대미술관, 리움, 박수근미술관 등 여러 국·공·사립 미술관과 개인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어 전시회 때마다 대여해 주고 있다. 작품이 좋아 한 점 더 갖고 싶은데 가격이 너무 올라 더 못 사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소장가들도 많다. 이처럼 좋은 작품이라 사두었는데 나중에 크게 값이 오른 경우는 있어도 투기해서 돈 벌었다는 예를 나는 보지 못했다.

 

■ 진정한 애호가의 마지막 기부

미술을 애호하여 수집한 진정한 수장가의 마지막을 보면 자신이 수집한 미술품을 마치 자식처럼 사랑하여 흐트러트리지 못한다. 간송, 호암, 호림, 송암, 화정처럼 사설 미술관을 세우거나 그것을 좋은 집에 시집보내듯 박영철, 박병래, 이홍근, 김양선처럼 박물관에 기증하여 별도의 개인 기증실을 만들게 하거나 장택상, 김지태, 현수명, 서재식, 조재진처럼 애장품 중 아끼던 것을 흔쾌히 박물관에 기증하고 떠난다. 최영도는 토기만을, 유창종은 와당만을 수집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김두량, ‘낮잠’, 18세기 중엽, 31×56㎝,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한광호는 영국 대영박물관에 신라 토기를 기증했고, 이병창은 뛰어난 한국 도자기 컬렉션을 일본 오사카 동양도자관에 별실을 만들 정도로 기증했고, 남궁련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미술관에 조선백자를 기증했고, 이우환은 프랑스 파리 기메뮤지엄에 우리 민화를 기증해 한국실 전시품을 높은 수준으로 올려주었다. 외국의 유명한 박물관 관장은 ‘위대한 거지(great bagger)’라고 한다. 좋은 수장가의 소장품을 기증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큰 임무이기 때문이다. 기증이 안되면 돈을 주고라도 양도받아 컬렉션의 위상을 높인다. 미국 LA카운티 뮤지엄인 라크마(LACMA)는 로버트 무어 수집품을, 하버드 포그뮤지엄은 그레고리 핸더슨 수집품을 양도받아 한국 전시실을 크게 보완하였다. 그것이 미술 애호가의 모습이다. 그리고 지금 이야기하려는 송은(松隱) 이병직(李秉直·1896~1973)은 또 다른 미담을 낳은 미술품 수집가이다.

 

■‘조광’지 기자의 이병직 방문기

우리나라에 근대적 의미의 미술품 수장가가 등장한 것은 1920년대이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보인 것은 1930년대였다. 그 시절엔 미술품 수장가가 존경의 대상이었다. 1937년 ‘조광(朝光)’ 3월호는 수장가 6명의 집을 방문하는 ‘진품 수집가 비장실 역방기(珍品 蒐集家 秘藏室 歷訪記)’를 실었는데 그 중 한 분인 이병직의 인터뷰에서 기자는 세종 때 화가인 김뉴의 ‘한산사도’를 보여주자 이렇게 물었다.

“이러한 좋은 그림을 처음 얼마에 입수하셨습니까?”

“네, 이 그림은 어떤 사람이 자기 방문에 붙여둔 것을 장택상씨가 40원에 샀는데 내가 가지고 싶어 하니까 얼마 후 장씨가 800원에 내게 양여한 것입니다.”

이어 추사 김정희가 초의에게 써 준 ‘반야바라밀다심경’을 보고 기자는 ‘타산적’으로 물었다.

“이 글씨가 현재 시가로 계산하면 얼마나 됩니까?”

“시가로 일천이백원가량 되지요.

그러나 일천이고 일만원이고 이것은 좀처럼 구하기 어려운 진서(眞書)이니까요.”

 

 

김홍도, ‘초상인물화’, 종이에 담채, 27.5×43.0㎝,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마지막으로 기자는 지금까지 수집하시느라 쓰신 돈이 몇 만원이나 되느냐고 물으니 “아마 사오십만원은 넉넉히 되겠지요. 그러나 이 돈을 일조일석에 쓴 것이 아니고 몇 십년을 두고 쓴 돈이니까요”라고 지난 과거를 회상하는 듯 잠깐 눈을 흐리셨다고 한다. 그리고 수집 생활을 하는 동안에 여러 동호인들이 만나서 늘 회합하고 상종하며 수집담과 예술담으로 밤을 새운 것에 행복과 생활의 탄력이 있다고 전하며 인터뷰를 끝맺는다. 금석지감(今昔之感)이 있다.

 

지금 시절에는 묻는 사람이나 대답하는 사람이나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내용의 인터뷰인데 그 시절엔 이렇게 거금을 들여 우리 미술품을 모은다는 것은 민족문화를 지킨다는 수장가의 애국적 함의에 국민들이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술품의 진정한 수장가는 나라를 대신하여 민족의 문화유산을 지키고, 미술문화를 발전시키는 밑거름을 제공하는 애국자이다.

 

■ ‘ 대부자’였던 내시 유재현의 양자 되다

송은 이병직은 1896년 양주에서 태어났다. 나이 7세 때 사고로 ‘사내’를 잃은 뒤 내시인 유재현의 양자로 들어가 궁내부 내시가 되었다. 통문관 이겸로는 <내시 족보>라는 것이 있어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내시는 애를 낳지 못해 이성(異姓) 양자로 들여 대를 잇게 하는 것이 통례였다고 한다. 유재현은 7000석의 대부자로 고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병직은 내시의 적통을 그렇게 이어받았는데 12세 때인 1908년에 내시제가 폐지돼 궁에서 나왔다. 그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내시였다.

 

 

이계호, ‘포도’, 종이에 수묵, 35.5×48.1㎝, 개인 소장

■학문과 미술품 수집에 열정 쏟아

이병직은 학문에도 열중하였고 19세 때인 1915년에는 해강 김규진의 ‘서화연구회’에 입학하여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훗날 고암 이응노가 이 연구회에서 수학하였다. 27세 때인 1923년엔 나혜석 등과 고려미술회 회원으로 참여했고 이때부터 1931년까지 조선미술전람회 사군자부에 8차례 입선하였다. 그러나 이후 사군자가 폐지되고 동양화부에 흡수되면서 출품하지 않았다.

 

광복 이후 이병직은 허백련, 이응노 등과 ‘조선서화 동연회’를 결성하여 활동했고 국전의 초대작가를 지내기도 했지만 화단활동이 적극적인 것은 아니었다. 난초와 매화를 주로 그렸지만 뛰어난 솜씨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림을 보는 안목이 높은 데다 7000석의 부자여서 고서화 수집에 전념하였다. 당시의 대중지인 ‘삼천리’ 1940년 9월호에는 연간 개인 소득을 상위 순으로 발표한 것이 있는데 1위는 광산왕 최창학 24만원, 2위는 화신백화점의 박흥식 20만원이고, 간송 전형필이 10만원, 인촌 김성수가 4만8000원인데, 송은 이병직은 3만원 내외라고 했다.

 

 

이병직씨가 1963년 7월  유일본을 들어 보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병직의 미술 수집품은 정말로 대단했다.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재도록인 <조선고적도보>(전15권) 중 조선시대 회화 편에 실린 9점, 조선도자 편에 실린 6점이 이병직 소장으로 명기되어 있을 정도이다. 그가 소장했던 작품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지금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변상벽의 ‘닭’과 평양역사박물관에 소장된 김두량의 ‘낮잠’이라는 풍속화, 그리고 단원 김홍도의 ‘자화상’이다. 이 작품들에는 ‘송은 진장(珍藏)’ ‘이병직 가진장(家珍藏)’이라는 소장인이 찍혀 있다. 이병직이 소장했던 것으로 명작임을 보증한다는 것이다. 이 소장인은 작품을 감정하는 데 아주 중요한 입증, 전문용어로 프로브넌스(provenance)가 된다.

 

이병직은 서화 감정에 일가견이 있어 낙관이 없어도 화첩에서 낙질된 작품, 또는 자신이 감정한 결과에는 누구의 작품이라고 옆에 쓰고 자신의 도장을 찍었다. 이를 첨(簽)이라고 하는데 무낙관 ‘포도’ 그림은 17세기의 휴옹(休翁) 이계호의 그림이라고 판단해 ‘휴옹 선생 묵적’이라고 쓰고, ‘송은’이라 낙관한 다음 ‘이씨’ ‘병직’이라는 작은 도장을 찍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전(傳) 이계호작’으로 통한다. 그가 이런 식으로 작품을 살려낸 것이 얼마인지 모를 정도이며 아주 정직하게 첨을 썼기 때문에 미술사학계는 이 프로브넌스를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병직은 1937년과 1941년 자신의 소장품을 두 차례에 걸쳐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걸고 ‘경성구락부’에서 경매에 내놨다. 1950년 한국전쟁 직전에 전적류를 또 한 번 경매에 부쳤다. 이렇게 실명으로 경매에 부친 수장가는 이병직과 박창훈뿐이었다. 그리고 이병직은 여기서 모은 돈을 고향의 양주중학교(현 의정부고등학교) 설립을 위해 기부하였다. 동아일보 1939년 9월9일자는 ‘40만원을 혜척(惠擲)한 이병직’이라는 제목 아래 이 미담을 소개하고 있다. 이병직이 살던 집은 낙원상가 가까운 익선동의 큰 한옥이었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뒤 이 집은 우리나라 3대 요정의 하나인 그 유명한 오진암(梧珍庵)으로 되었다. 이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으면 분명 국가의 보물로 되었을 것인데 2014년에 이 자리에 호텔이 들어서게 되면서 구기동 무계정사 자리로 옮겨졌다. 이병직은 1973년에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우리 화랑계의 원로이신 동산방 박주환 회장이 젊었을 때 이병직 선생댁을 자주 찾아뵈었는데 내시들이 다 그렇듯이 7척 장신에 얼굴이 아주 희고 맑은 조용한 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랑방 두껍닫이에는 흰 종이만 발려 있어 “왜 아무것도 바르지 않으셨나?”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시더란다.

“여보게, 박군, 내가 여기에 얼마나 많은 그림을 그려 넣었는지 아나.”

 

<유홍준 |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