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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70년⑩] 미술 애호가 수정 박병래

잠용(潛蓉) 2016. 11. 17. 13:14

[유홍준의 안목](10)

"조선인이 조선 접시를 몰라보나"..그를 일깨운 한마디
경향신문ㅣ2016.09.12 22:09 

 

미술 애호가 열전 - 2. 수정 박병래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2층에 있는 박병래 기증실에는 수정 선생이 수집한 도자기 362점이 전시돼 있다. 대부분 18~19세기 경기 광주 금사리와 분원리 가마에서 만든 도자기로 청화백자가 가장 많다.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에 가깝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미적 욕구, 미적 체험, 미적 향수(享受)는 문화 창조의 내적 동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름다움이 구현된 예술품 감상 취미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다만 시대에 따라 그 대상이 달랐다. 조선시대 문인들은 주로 서화를 감상하면서 아울러 희귀하고 오래된 물품을 즐겼다. 이를 고동(古董) 또는 골동(骨董)이라고 했다. 연암 박지원은 가난해도 서화와 골동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눈을 저버리지 않는 자라고 했다. 옛사람의 골동이란 대개 좋은 벼루, 잘생긴 향로, 옛 청동기 등 멋스럽고 예스러운 문방 장식품들이었다. 이 골동 취향이 20세기 문턱에 들어서면서 도자기가 차지하게 되었다. 그 이전에 도자기는 일상용기였을 뿐이다. 그런데 1902년 경의선 철도 부설이 시작되면서 개성지역 공사판에서 청자라는 진귀한 물품들이 나온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동안 고려청자란 아주 희귀한 존재였는데 고려고분에 부장된 아름다운 청자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조선에 올 때마다 선물용으로 고려청자를 있는 대로 사들인 장물아비였다. 그 결과 고려고분이란 고분은 모두 도굴되고 만다. 조선에 온 일본인들은 청자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분청사기와 백자도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를 마구 사들이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이 귀하게 모시는 이도(井戶)다완이라는 것이 조선시대 막사발 중 하나라는 사실,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같은 학자들이 내세운 민예(民藝)의 사상이라는 것도 이미 조선 도자기에 구현되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거의 열광적으로 심취했다.

 

 

평생 동안 수집한 도자기를 들어 보이고 있는 수정 박병래 선생.

1910년 일제강점기로 들어가면 일본인 고미술상들이 대거 한반도에 진출했고, 이들은 1922년부터 경성미술구락부에서 수시로 경매를 열며 우리 도자기들을 일본의 호사가들의 손에 넘겼다. 당시 우리는 여전히 도자기의 가치에 어두워 ‘가이다시’라 불리던 매출(買出)꾼들이 일본 왜사기를 갖고 전국 가가호호를 돌아다니며 옛 도자기와 바꾸어 와 일본 상인들에게 팔았다. 이처럼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는 한국미술사의 한 루르로 연구되고 체계화되기 이전에 일본인들의 골동 취미에서 부각되었다. 그러다 1920년대에 들어와 한국인 미술품 애호가들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우리도 도자기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문화재의 반출을 막고 보호하는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이때 등장한 수정(水晶) 박병래(朴秉來·1903~1974) 선생은 열정적인 미술애호가로 조선백자의 진수를 알아본 당대의 대안목이었다.

 

 

백자 청화 꽃무늬 조롱박모양병

■ 인도주의 의사이자 독실한 가톨릭 신도

수정 박병래 선생을 단순히 미술애호가로만 말한다면 그것은 큰 실례이다. 미술애호가이기 이전에 독실한 천주교 신도였고, 폐결핵 분야의 권위자로 성모병원 초대 원장을 지낸 내과 의사였다. 박병래 선생의 70평생 삶은 당신의 아호대로 수정처럼 맑기만 하다. 1974년 5월 선생의 영결미사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추도했다. “박병래 선생님이 한국 천주교회 발전에 끼친 공은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무엇보다 선생님은 성실과 사랑에 찬 고매한 인격자로서 사람들의 육체적 질병뿐만 아니라 마음의 병까지도 고쳤던 인술(仁術)의 실천자였습니다.”

 

박병래 선생과 동갑으로 40년지기였던 윤형중 주교는 ‘내가 아는 박병래 선생’에서 이런 이야기를 전한다. 백범 김구 선생이 중국에 있을 때 우빈 주교와 절친한 사이여서 가톨릭에 대한 이해가 깊었는데 성모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박병래 선생, 간호 수녀들에게 자신도 타계할 때는 천주교에 귀의하고 싶다고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퇴원 후 얼마 안된 1949년 6월26일, 경교장에서 총격을 당해 쓰러졌을 때 맨 먼저 부른 분이 박병래 선생이었다. 선생이 달려가 진단하니 의식은 없지만 생명은 아직 잔존해 있어 세례를 주고 세례명을 베드로라고 지어주었다고 한다.

 

 

백자 청화복숭아모양 연적

이런 인연으로 박병래 선생은 김구 선생의 며느리이자 안중근 의사의 조카딸인 안미생의 딸을 돌보아주었다. 선생은 천성이 어질고, 소박하고, 총명한 데다 인정이 대단해서 그의 손길을 거쳐간 사고무친의 자제들이 여럿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박병래 선생은 한국의료사, 한국가톨릭사에 훌륭한 발자취를 남기셨는데 당신의 삶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미술애호가로서의 일생이다.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에 개안

수정 박병래 선생은 1903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때부터 가톨릭 집안이었는데, 논산에서 선교사업을 하던 프랑스인 신부의 권고로 신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아버지 박준호와 함께 상경해 양정고등학교에 1, 2학년 학생으로 같이 입학했다. 1924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마친 뒤 모교에서 내과 교실 조수로 일하던 어느 날 일본인 교수가 접시 하나를 보여주며 “박군, 이게 무슨 물건인지 아나”라고 물었단다. 이에 어물어물하다 우리나라 물건은 아닌 것 같다고 대답하자 “조선인이 조선 접시를 몰라봐서 말이 되느냐”고 하여 부끄럽고 분한 마음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고 한다.

 

그리하여 학교 건너편 창경원에 있던 이왕직박물관(국립박물관의 모태)으로 달려가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를 보고 우리 조상들에게 이렇게 뛰어난 솜씨가 있었던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마침 아는 수위가 무료 입장을 시켜줘 매일 박물관에 갔고 마침내 도자기를 하나씩 사게 된 것이 미술품 수집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평생 봉급생활을 한 그였기 때문에 항시 ‘탐나는 물건과 주머니의 밸런스를 생각해야’ 해서 값이 저렴한 접시와 백자연적을 주로 모았다. 1935년 성모병원 초대 원장으로 부임할 때 월급이 300원으로 책정되었으나 아버지가 젊은 사람이 돈이 많으면 안된다고 해서 200원으로 깎였다고 한다. 그래서 골동계에서 ‘연적쟁이’라는 말도 들었지만 훗날 보물 1058호로 지정된 ‘백자 난초무늬 조롱박 모양 병’ 같은 것은 몇 달에 걸쳐 월부로 사기도 했다.

 

 

백자 청화국화 대나무 무늬 팔각병

그러나 당시만 해도 값이 싸다고 도자기의 예술적 가치가 꼭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 백자필통이 10원짜리인가, 100원짜리인가, 아니면 1000원짜리인가. 1000원의 가치가 있는데 10원에 살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었다. ‘가이다시’들이 지방에서 푸대자루에 들고 온 것은 값이 헐했는데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냉큼 사서 양잿물에 넣고 끓인 다음 다시 물에 깨끗이 닦아놓고 보곤 했단다. 그러다 희한하게 좋은 것을 얻으면 머리맡에 놓고 자다가 한밤중에 일어나 전등불에 비추어 보고 흥분해서 어쩔 줄 모르기도 했단다. 퇴근 후에는 명동, 충무로, 회현동에 있는 고미술상을 한바퀴 도는 것이 거의 일과였다고 한다.

 

그렇게 골동에 취미를 붙이게 되니까 처음에는 차디차고 표정이 없는 사기그릇에서 차츰 따뜻한 체온을 느끼게 되었고 나중에는 다정하고 친근한 마음이 생기면서 고요한 정신으로 도자기를 한참 쳐다보게 되면 그릇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한다. 유형의 사기그릇을 통해 옛 선인들의 무형의 마음을 집을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기꺼웠다고 한다. 박병래 선생은 미술품을 모으면서 이것을 돈으로 바꾼다거나 재산을 이룬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 본 적이 없고, 한번 산 물건을 내다 판 적도 없다고 한다. 6·25 동란 때는 사랑채 바깥마당에 몇 길이 넘게 구덩이를 파고 모래를 깔고 도자기 등을 가지런히 놓은 뒤 다시 모래 한 겹을 덮고 맨 위에 간장독, 김칫독으로 위장하고 떠났는데 공군 군의관으로 복무하고 돌아와 보니 독 속은 말끔히 비어 있었지만 도자기는 하나도 다친 게 없었다고 했다.

 

 

백자 청화매화 대나무 무늬 필통

■ 딸 시집보내듯 기증

박병래 선생은 이런 이야기를 1973년 중앙일보에 ‘골동 40년’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하고 <도자여적(陶瓷餘滴)>이라는 예쁜 책으로 출간했는데 거기에는 참으로 귀중한 미술사적 증언들이 많다. 사후 이 책은 <백자에의 향수>(1984, 심설당)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간되었다. 박병래 선생은 이 책의 첫머리에서 도자기와 함께 지내옴으로써 인생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르겠다면서 그것은 “덧없는 인생에 더없는 양념 같았다”며 자신은 미술품을 사랑한 애호 취미 때문에 과히 허물을 입지 않고 오히려 한 가지 길에 전념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 맺는말에 이르러서는 40년간 도자기를 통해 자신이 얻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는 점이라고 했다. 1973년 고희(古稀)를 맞은 박병래 선생은 자신이 이렇게 평생 모은 미술품을 국립중앙박물관 최순우 관장에게 기증할 뜻을 밝히며 그 소회를 이렇게 말했다.

 

“우리 조상들이 만든 예술품을 혼자만 갖고 즐긴다는 일이 죄송스럽기도 하여 내가 몇 십년 동안 도자기와 함께 지내던 마음을 이제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면 더욱 행복하겠습니다. 지금 나는 과년한 딸을 정혼(定婚)한 듯한 기쁨에 넘쳐 있습니다.” 이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기증유물 도록을 만들고, 1974년 5월27일 선생의 생신에 맞추어 전시회를 열기로 했다. 그러나 개막 열이틀을 앞두고 5월15일에 세상을 떠나셨다.박병래 선생의 수집품을 보면 한결같이 정갈하고 아름답다. 기형과 문양이 잔잔한 ‘백자 풀무늬 각병’, 자물쇠 장식이 있는 희귀한 ‘백자 주전자’, 피부가 매끄러운 ‘백자 투각 필통’, 생김새가 야무진 ‘백자 복숭아 연적’ 등 명품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선생의 수집품들은 형태는 제각기 다르지만 공통된 미감 내지 일괄된 취향을 엿볼 수 있다. 단아하고, 조용하고, 편안하고, 고결하고, 정감 있고, 품위 있는 백자들이다. 그것은 ‘선비문화의 미학’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결국 박병래 선생은 한국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펜이 아니라 실물로 보여주는 불멸의 논문을 발표한 셈이다.

 

지금도 국립중앙박물관 2층에 있는 박병래 기증실에는 당신이 딸자식처럼 애지중지했고, 당신이 한국미를 찾아 평생을 바친 도자기들이 수정처럼 밝게 빛나고 있다. 선생 사후 부인 최구 여사는 매일 꽃을 들고 기증실을 다녀가셨다. 그렇게 17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1991년 세상을 떠나면서 아내의 몫으로 남겨둔 민예품들을 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시고 수유리 수정 선생 곁에 잠드셨다.

 

<유홍준 |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