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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70년⑾] 미술 애호가 소전 손재형

잠용(潛蓉) 2016. 11. 17. 13:25

[유홍준의 안목](11)

그는 공습 중인 도쿄로 향했다... 추사의 '세한도'를 되찾으려
경향신문 2016.10.10 21:16

 

미술 애호가 열전 - 3. 소전 손재형

 

 

‘세한도(歲寒圖)’는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1844년 이상적이 중국 베이징에서 책을 구해 보내준 것에 대해 감사하며 ‘날이 차가워진(歲寒)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도록 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는 글과 함께 그린 그림이다. 종이에 수묵, 23.3×108.3㎝, 개인 소장.

 

“추사의 작품은 가짜는 있어도 유찰은 없다.”

요즘 미술시장의 대세를 이루는 옥션(경매시장)에서 통하는 말이다. 1930년대 본격적으로 가동된 고미술시장에서도 추사의 작품은 최고의 인기 품목이었다. 1932년 10월 서울 미쓰코시(三越) 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갤러리에서 ‘완당 김정희 선생 유묵·유품 전람회’라는, 추사 사후 최초의 대규모 전람회가 열렸다. 이 전시회에는 위창 오세창, 간송 전형필, 창랑 장택상, 무호 이한복, 다산 박영철, 구룡산인 김용진, 소전 손재형, 일본인 학자 후지쓰카 지카시, 일본인 화상인 아유가이 후사노스키(鮎貝房之進), 이나바 이와요시(稻葉岩吉) 등 장안의 고서화 수집가들이 소장하고 있던 추사의 명품 83점이 출품되었다.

 

■ 추사는 영원한 인기 작품

안목 있는 당대의 애호가들이 경쟁적으로 추사 작품 소장을 원했기 때문에 부르는 게 값일 정도였다. 추사의 최말년작인 ‘대팽두부(大烹豆腐,·큰 요리는 두부찌개)’ 대련(쌍폭)이 경매에 나왔을 때 예상가가 100원 정도였는데 간송이 만주에서 사업하는 일본인 경매자와 치열하게 경합한 끝에 결국 1000원에 낙찰받았다. 당시 쌀 한 섬 값이 3원이던 시절이었다. 박병래의 증언에 의하면 추사 작품 값을 올려놓는 데는 창랑 장택상이 한몫했다고 한다.

 

“어떤 경매에서 추사의 대련이 나왔는데 당시 100원대에 머무르던 물건을 창랑은 2400원에 낙찰시켰다. 그 자리에서는 모두 어리둥절하였다. … 그러나 다음부터는 그게 바로 시세가 되어 다른 사람들도 그 정도의 값에 활발한 거래를 시작하였다. 물론 창랑이 가지고 있던 모든 추사의 글씨도 몇 배의 값이 나가게 되었다.”

창랑은 이처럼 미술품 수장에서도 정략적 계산이 뛰어났던 것으로 유명한데 실제로 그는 추사의 예술에 크게 매료되어 있었다. 그는 추사야말로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 서예사 2000년의 능서가(能書家) 중 대장’이라고 장담했으며 ‘춘풍대아(春風大雅·봄바람은 크게 온화하고)’ 대련, 난초그림 ‘부작란(不作蘭·우연히 그린 난초)’, 사후 영남대 박물관에 기증한 ‘단연 죽로 시옥(端硯 竹爐 詩屋·단계벼루, 대나무 화로, 시 짓는 집)’ 횡액이 그의 소장품이었다.

 

 

김정희, ‘단연 죽로 시옥’, 81.0×180.0㎝, 영남대 박물관(장택상 기증 유물)

 

■ 후지쓰카 지카시의 추사 연구

또 한 분의 추사 마니아는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1879~1948)였다. 후지쓰카는 <논어총설> 같은 저서를 남긴 일본의 대표적인 동양철학자로 특히 청나라 경학과 고증학에 정통했다. 그는 청조학의 연구를 위해 베이징에 있을 때부터 18~19세기에 이뤄진 조선과 청나라 학예인들의 왕성한 교류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1926년에 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교의 전신) 중국철학 교수로 임명돼 서울로 오게 되면서 연구를 위해 북학파와 추사의 작품을 열심히 수집했다. 그가 고서점을 무시로 드나들면서 한·중 학자들 간에 오간 편지와 서예작품은 물론, 탁본·그림까지 보는 대로 구입해 나중에는 책이 1000권, 또 서간과 탁본이 1000점에 달했다고 한다.

 

그의 수집품 중에는 청나라 나양봉이 그린 ‘박제가 초상’, 청나라 주학년이 추사에게 보내준 그림,

 

그리고 저 유명한 추사의 ‘세한도’까지 있었다. 1932년 추사 특별전 때 후지쓰카가 출품한 것이 18점이나 되었다. 후지쓰카는 창랑, 다산, 소전 등 추사의 팬들과 친교가 깊어 이들의 작품을 빌려다 보기도 하며 북학파와 청나라 학자들의 교류를 논문으로 계속 발표했고, 1940년 ‘청조 문화의 동점(東漸)과 추사 김정희’라는 논문으로 동경제국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훗날 아들인 아키나오(明直·1912~2006)가 같은 이름의 저서로 펴냈고 우리말로도 번역·출간되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청조학 연구의 제일인자는 추사 김정희”라며 청나라 고증학은 중국이 아니라 오히려 조선의 추사 김정희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극찬했다.

 

■ ‘세한도’의 소장자 이동과정

국보 중의 국보라 할 추사의 ‘세한도’는 1844년, 제주도 귀양살이 시절 우선 이상적이 변함없이 사제 간의 의를 지키며 연경(베이징)에서 책을 구해 보내준 것에 대해 감사하며 ‘날이 차가워진(歲寒)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도록 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는 글과 함께 그린 처연한 그림이다. 우선은 이듬해 중국에 가면서 이 작품을 갖고 가 청나라 학자 16명의 찬시를 받아 장대한 두루마리로 표구해 애장했다.

 

우선 사후 이 작품은 그의 제자였던 김병선이 소장하게 되었고 그의 아들 김준학은 이 시를 읽으며 공부했다는 감상기를 두루마리 끝에 적어놓았다. 그 뒤 ‘세한도’는 평안감사를 지낸 휘문고등학교 설립자인 민영휘의 소유로 되었다가 그의 아들 민규식이 ‘경성 민(閔)씨 소장품 경매전’에 내놓은 것을 후지쓰카가 대학 교수로서는 무리한 값이지만 끝내 낙찰받아 그의 소유로 되었다. 그리고 태평양전쟁이 한창인 1943년 여름 어느 날이었다. 서예가이자 당대의 서화 수집가로 추사 컬렉터 중 한 분이었던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1902∼1981)은 혹시 후지쓰카가 다른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귀국하게 되면 이 ‘세한도’를 가지고 가게 된다는 생각이 들어 후지쓰카에게 “원하는 대로 다 드리겠으니 ‘세한도’를 양도해주십사”라며 부탁했다. 그러나 후지쓰카는 자신도 평생 추사를 존경해 고이 간직하고 있노라며 거절했다.

 

추사의 뒤를 잇는 ‘20세기 서예의 거장’으로 불렸던 소전 손재형.

 

■ ‘세한도’를 구하기 위해 일본에 간 소전

1944년 여름이었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달하자 후지쓰카는 살림살이와 책은 물론이고 ‘세한도’를 비롯한 한·중 교류 관계 서화·전적을 모두 갖고 도쿄로 돌아갔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소전은 나라의 보물이 일본으로 건너가 버리고 말았다고 크게 걱정하며 마침내 비장한 각오로 부산으로 내려가 관부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후지쓰카의 집을 찾아갔다.

 

당시는 미군의 도쿄 공습이 한창인 때였고 후지쓰카는 노환으로 누워 있었다. 소전은 후지쓰카를 만나 막무가내로 ‘세한도’를 넘겨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후지쓰카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나 소전은 뜻을 버리지 않고 무려 두 달간 매일 문안인사를 드리며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자 12월 어느 날, 후지쓰카는 맏아들 아키나오를 불러 자신이 죽으면 소전에게 넘겨주라고 유언하고는, 소전에게 그러니 안심하고 어서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러나 소전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세한도’를 양도해 줄 것만을 묵묵히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자 마침내 후지쓰카는 소전이야말로 ‘세한도’를 간직할 자격이 있는 분이라며 건네주었다. 소전이 어떻게 사례해야 할지를 묻자 후지쓰카는 선비가 아끼던 것을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 잘 보존만 해달라고 했다. 그리하여 소전은 ‘세한도’를 갖고 서울로 돌아왔다. 소전이 ‘세한도’를 가지고 귀국하고 나서 석 달쯤 지난 1945년 3월10일, 후지쓰카의 연구실이 공습을 받아 많은 서적과 서화 자료들이 불타버렸다. 그러나 다행히 추사와 북학파 자료들은 집에 있었기 때문에 소실을 면했다.

 

소전은 ‘세한도’를 갖고 귀국한 뒤 조용히 보관하고 있다가 8·15 해방공간의 어수선한 정국을 지나 정부 수립이 된 이듬해인 1949년 이 사실을 위창 오세창과 당시 부통령으로 서예에 조예가 깊었던 성재 이시영에게 알리고 축하 발문을 받았다. 위창은 소전의 열정적 행동을 이렇게 칭찬했다. “전쟁의 기운이 가장 높을 때 소전이 훌쩍 현해탄을 건너가… 폭탄이 비와 안개처럼 자욱하게 떨어지는 가운데 어려움과 위험을 두루 겪으면서 겨우 뱃머리를 돌려 돌아왔다. 감탄하노라! 만일 생명보다 더 국보를 아끼는 선비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잘하고도 잘하였도다. 소전은 영원히 잘 간직할지어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소전 손재형에게 넘겨준 후지쓰카 지카시(오른쪽)와 그의 아들 아키나오.

/과천문화원 제공

 

그러나 훗날 소전은 정계에 투신해 제6대 민의원, 제8대 국회의원을 지내며 정치자금을 마련하느라 수장품 중 천하의 명작 겸재의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를 삼성물산 이병철 사장에게, ‘세한도’는 이근태에게 저당 잡히고 돈을 빌어다 썼다 갚지 못해 소유권을 잃었다. 결국 ‘세한도’는 미술품 수장가인 손세기에게 넘어갔고 지금은 그 아들인 손창근의 소유로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되어 있다. 소전 손재형이 이렇게 추사의 ‘세한도’를 전란 속에 찾아온 것은 영원히 문화사에 남을 공이다. 이와 아울러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것은 후지쓰카 지카시의 학문적 열정과 고마움이다. 후지쓰카의 연구로 추사는 조선의 명필을 넘어 동양의 명필로 드높여졌다.

 

■ 아들 아키나오의 추사 유물 기증

그뒤 반세기가 지난 2006년의 일이다. 당시 과천문화원의 최종수 원장이 후지쓰카 아키나오에게 추사 학술대회 참가를 부탁하러 찾아갔을 때 94세의 아키나오는 부친이 소장하고 있던 유물과 책 모두를 과천문화원에 기증했다. 아키나오는 이 자료들을 도쿄대에서도 원했지만 먼지 속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인이 계속 추사를 연구하는 데 이용하기 바란다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지 못하고 이 나이까지 산 것은 부친의 이 자료를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아키나오는 1차로 2750점을, 2차로 118박스에 가득 담긴 1만여점의 서화와 전적을 기증했다. 거기에는 추사 김정희, 초정 박제가 등의 서화류 70여점, <황청경해> 680책, 선장본 고서 2500책, 근대 양장본 1500책, 후지쓰카 지카시의 원고 사진자료 1000여점이 들어 있다. 이것들은 오늘날 과천의 추사기념관과 과지초당(瓜地草堂)에 소장돼 있다. 당시 나는 문화재청장으로 후지쓰카 아키나오에게 문화훈장 목련장, 최종수 원장에게 포장 수여를 상신했고, 2006년 5월18일 아키나오는 병상에서 이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두 달 뒤 아키나오는 향년 94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홍준 |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