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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70년⑫] 미술 애호가 간송 전형필

잠용(潛蓉) 2016. 11. 17. 13:43

[유홍준의 안목](12)

"미술품은 조선의 자존심" 23세에 '문화보국' 뛰어들다
경향신문 2016.11.07 21:13 

 

미술 애호가 열전 - 4. 간송 전형필

 

 

1938년 국내 최초 사립미술관인 보화각(寶華閣) 개관 기념일에 북단장 사랑에 모인 문화예술인들. 왼쪽부터 이상범, 박종화, 고희동, 안종원, 오세창, 전형필, 박종목, 노수현, 이순황.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1906~1962) 선생의 애국적이고 열정적인 미술품 수집에 대해서는 교과서에 실릴 정도이니 모르는 국민이 없을 것이다. 간송이 일제강점기에 ‘고려청자 운학문 매병’ ‘조선백자 꽃무늬 술병’, 추사의 최말년작 ‘대팽두부’ 등 국보 중의 국보를 경매에서 일본인 원매자들을 물리치고 낙찰받아 우리 문화재를 지킨 것은 거의 영웅담으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은 결과만을 전하는 것일 뿐 과정이 생략되어 있어서 어찌 생각하면 재력이 있기 때문에 그게 가능했던 것이라고 쉽게 치부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세상만사가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시키고, 결과는 과정을 파묻어 버리는 것이 생리라고 하지만 간송미술관이라는 결과만을 이야기하고 그 위업을 이루어가는 과정을 생략한다면 이는 간송을 올바로 기리는 바가 아니다.

그런데 간송의 문화재 수집은 하나의 전설로만 전하고 그 동기와 컬렉션을 이루어가는 집념, 그의 안목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은 오랫동안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나 자신도 1991년 ‘간송문화 41’에 실린 최완수의 <간송 선생 평전>을 읽기 전에는 아주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었다. 1996년 간송 탄신 90주년을 맞이해 열린 전시회와 그때 펴낸 방대한 도록에 실린 시인 이흥우의 <간송 평전>, 외사촌형인 월탄 박종화, 소설가 조용만의 회고록, 최순우·황수영·진홍섭·김원용·정양모 등 미술사가들의 추모글, 미술평론가 이구열의 사회로 열린 좌담회 기록 등을 보고서야 비로소 간송의 삶을 확연히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백자 진사 양각 초충문병. 18세기, 높이 42.3㎝, 국보 제294호.

 

■ 간송의 전설, 넷

이런 증언들을 통해 내가 확인할 수 있는 몇 가지 사실 중 가장 놀라운 것은 간송이 우리 문화재 수집을 시작한 것이 불과 23세 때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거의 충격에 가까운 것이었다. 나이 23세 때 나는 육군 일등병이었다. 다른 사람도 그 나이엔 아직 입지(立志)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공자도 나이 서른에야 뜻을 세워 30세를 이립(而立)이라고 하지 않는가?

 

두 번째는 간송이 전 재산을 바쳐 문화재를 수집하였다고 하는데 그 재산 규모가 그렇게 방대한 줄은 몰랐다. 증조부 때부터 지금 광장시장과 동대문시장의 모태인 배오개시장 상권을 쥐고 있는 거상이었다. 그 재력으로 전답을 구입하여 6만석을 갖고 있어 1년에 거둬들이는 쌀은 당시 기와집 150채를 사고도 남을 정도였다고 한다. 게다가 양자로 들어간 작은집 또한 4만석이어서 결국 간송은 10만석지기, 당시 국내 자산 서열 및 연간 소득이 열손가락 안에 꼽혔다는 사실이다. 간송이 이를 상속받아 자산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문화재 수집과 육영사업으로 돌렸다는 것은 여간한 마음의 결단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셋째는 간송의 문화재 수집은 책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했다는 점이다. 간송은 생전에 ‘수집 여화(餘話)’를 간혹 남겼는데, 스스로 회고하기를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시절 도쿄 유명한 고서점 거리인 간다(神田)에 무시로 드나들며 고서를 모았다고 했다. 학생시절 이미 수장 목록이 공책 한 권을 채울 정도였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간송은 미술품뿐만 아니라 간송문고로 불리는 수만권의 고서를 소장하게 되었고 이를 위하여 1932년 우리나라 최초의 고서점인 한남서림을 인수해 고서 수집과 아울러 출판까지 하고 또 이를 통해 <훈민정음>도 구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만약 집안에 재력이 없었다면 간송은 책과 함께 사는 학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넷째는 간송의 그림과 글씨 솜씨가 참으로 높은 경지에 있었다는 점이다. 1991년 간송미술관 정기 전람회에서 처음 본 간송의 그림들은 참으로 감동적인 것이었다. 그 간결함과 깔끔함, 거기에 어린 고고한 멋과 은은한 문기는 당대 최고 가는 문인화로 꼽아도 한 점 과장됨이 없다. 그런 학예적 서정의 뿌리가 결국 간송미술관을 이루어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거기에다 간송에게는 불굴의 집념과 집요한 추구, 사업을 해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는 추진력과 실천력이 있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일본에 있던 영국인 미술품 수집가 존 갓스비(Sir John Gadsby)의 고려청자 컬렉션 인수 과정이다.

 

청자 기린뚜껑 향로. 12세기 전기, 높이 19.7㎝, 국보 제65호(존 갓스비 구장품).

 

■ 갓스비의 고려청자 인수 과정

1937년 간송은 갓스비의 고려청자 명품 20점을 인수했다. 그 중엔 국보로 지정된 ‘청자 기린뚜껑 향로’와 ‘상감청자 원앙무늬 정병’, 보물로 지정된 ‘상감청자 포도동자무늬 매병’ ‘청자 오리모양 연적’ 등이 포함되어 있다. 존 갓스비 컬렉션 인수는 당시에도 엄청난 화제를 불러모아 이에 대해 많은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하고 있는데 정확한 내용은 ‘신태양’ 1957년 9월호에 간송 자신이 기고한 ‘수집 여화’에 그 앞뒤 사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갓스비는 영국인 변호사로 25세 때 일본에 건너와 미쓰비시 빌딩에 사무소를 두고 일본 황궁 뒤편에 호화로운 저택을 짓고 살았는데 간송이 만날 당시 50세가 훨씬 넘게 보였다고 한다.

 

갓스비는 타고난 미술품 애호가이자 수집가였다. 그는 도쿄에 온 지 얼마 안되어 거리를 걷다가 골동상에 놓인 아름다운 꽃병을 보고 반하여 값을 물으니 500원이라고 하였는데 자신의 통장에 있는 전액을 털어 이를 샀다고 한다. 이것이 훗날 일본의 중요미술품(우리나라 보물)으로 지정된 ‘나베시마 색회(色繪) 화훼무늬 병’이다.

이후 얼마 되지 않아 그는 고려청자에 매료되어 그 빛깔과 형태미가 세계 어느 나라 도자기보다도 아름답다며 도쿄의 골동상을 통해 명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어느 해 말에는 시간을 내어 급히 비행기로 한국에 와서 ‘상감청자 원앙무늬 정병’과 ‘고려백자 박산향로’를 사갔는데 이것이 간송 인수 후 우리나라 국보로 지정된 명품이었다.

 

대학 재학시절이던 1928년 간송 전형필(22세).

 

갓스비의 고려청자 컬렉션은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져 모든 고미술 수집가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며 간송은 어느 때인가 그가 팔기 위해 내놓으면 무조건 살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1937년, 마침내 기회가 왔다. 갓스비가 자신의 애장품을 팔게 된 것은 1936년 이른바 2·26사태를 보고 일본이 곧 전쟁을 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일본을 떠날 작정을 했기 때문이었다. 2·26사태란 그 해 2월26일 육군 황도파(皇道派) 극우 청년 장교 1500명이 주동이 돼 수상 관저와 고관들 집을 습격하여 제3대 조선총독을 지낸 내무대신 사이토 마고토(齊藤實)를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해 버린 것이다. 사태는 일왕의 명령으로 4일 만에 수습되었지만, 이로 인해 육군대신과 해군대신에 현역 군인이 취임하여 일본이 군국주의로 급선회하는 단초가 되었던 사건이다.

 

그리하여 간송은 도쿄로 건너가 갓스비의 저택에서 고려자기를 다 인수하게 되었다. 대금은 전하기로 40만원, 당시 기와집 400채의 값이었다. 이를 위해 간송은 대대로 내려오던 공주의 전답을 팔았다고 한다. 이때 간송은 그와 마지막으로 나눈 몇 마디 대화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귀하는 아직 나이(32세)도 젊고 혈기 왕성하니 아무쪼록 훌륭한 귀국의 고미술품을 많이 모아서 세상에 널리 알리십시오.”

“선생님은 다른 나라 도자기는 수집하지 않으셨나요?”

“고려자기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나요. 다른 자기들은 연대도 많이 떨어지지 않나요. 그리고 고려자기를 한국의 수장가인 귀하가 고국으로 도로 가져가게 된 것이 정말 기쁩니다.”

“오랫동안 애장하셨던 수집품들과 헤어지게 되니 대단히 섭섭하시겠습니다. 고려자기가 보고 싶거든 언제든지 오십시오.”

“암 가고말고요. 꼭 가겠습니다.”

 

그러나 갓스비는 한국에 온 일이 없다. 이후 갓스비는 그의 예견대로 일본이 중국을 침공하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상해로 갔다고 하는데 그 후 갓스비는 행적이 묘연해졌고 소식이 끊어졌다. 간송은 ‘수집 여화’ 마지막에 만약 갓스비가 노구를 이끌고 우리나라를 찾아온다면 그의 애장품을 기꺼이 보여주고 싶었다며, 아마도 말없는 고려자기도 그를 반겨 맞이했을 것이라고 했다.

 

추사 김정희, 예서대련(隸書對聯). 지본, 129.5X31.9㎝.

 

■ 문화보국(文化保國)에 대하여

간송이 이처럼 문화재 수집을 하게 된 데는 결정적으로 두 분의 지도가 있었다. 일본 유학시절 일본인에게 무시당하는 수모를 겪으면서 문화재 수집에 뜻을 세우고 휘문고등학교 시절 미술선생이었던 춘곡 고희동에게 상의드리니 춘곡은 위창 오세창 선생을 찾아가자고 했다. 이리하여 20대 간송과 40대 춘곡과 60대 위창이 한자리에서 만나 이 위업의 단초를 열었다. 이때 위창이 간송에게 왜 서화나 문화재 수집에 나섰느냐고 물었을 때 간송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서화 전적과 미술품은 조선의 자존심이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1930년 대학 졸업 후 귀국한 간송은 열심히 문화재를 수집하기 시작했고, 1934년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세워 표구시설까지 갖추고 고서화 전적과 도자기, 불교미술품을 모았다. 북단장은 선잠단 북쪽에 있는 집이라는 뜻으로 위창이 지어준 이름이다. 그리고 1938년 북단장에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보화각(寶華閣)을 지었다. 한편 간송은 1940년 동성학원을 설립하고 1945년 보성중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1954년 문화재보존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것이 간송이 지닌 사회적 직함의 전부이다. 1960년에는 김상기, 김원룡, 최순우, 진홍섭, 황수영 등과 ‘고고미술 동인회’를 만들고 ‘고고미술’이란 동인지 발간을 주도했다. 그것이 현재 한국미술사학회의 전신이며 학회지 ‘미술사학’의 모태이다.

 

그렇게 헌신적이고 애국적이고 열정적으로 활동하셨는데 1962년 1월26일 갑자기 향년 56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간송 사후 간송미술관은 1971년부터 봄·가을로 1년에 두 차례 일반공개를 해오다 밀려오는 관객의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여 2014년 간송미술문화재단을 설립하고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간송문화전’을 진행하고 있다. 나라에선 사후 반세기가 지난 2014년에야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이미 국민들은 마음속으로 금관 이상의 훈장을 바친 지 오래다.

 

간송의 삶을 생각하면 나는 두 분이 생각난다. 하나는 위창 오세창 선생이 ‘문화보국(文化保國)’을 위하여 헌신적이고 열정적으로 우리 서화를 수집하고 연구한 것과 똑같이 간송의 뜻 역시 문화보국을 위하여 전 재산을 바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문화보국의 뜻을 새기자면 백범 김구 선생이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에서 문화보국의 뜻을 말한 것보다 더 절절한 것이 없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합니다. 가장 부강(富强)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합니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입니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입니다.”

 

<유홍준 |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 (고회부처아녀손 대팽두부과강채) - 좋은 반찬은 부부 오이 생강나물,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 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