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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학·설화

[중편] "순이 삼촌" - 현기영 작

잠용(潛蓉) 2018. 4. 4. 23:03


 

"순이 삼촌" / 현기영 작

 

 

 

내가 그 얻기 어려운 이틀간의 휴가를 간신히 따내가지고

고향을 찾아간 것은 음력 섣달 열여드레인

할아버지 제삿날에 때를 맞춘 것이었다.


할머니 탈상(脫喪) 때 내려가보고 지금까지이니

그동안 8년이란 세월이 흐른 것이었다.

바쁜 직장 핑계 대고 조부모 제사에 한번도 다녀오지 못했으니

큰아버지나 사촌 길수형은 편지 글발에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무던히도 욕을 하고 있을 터였다.


물론 일본에 있는 아버지가 제사 때가 되면 잊지 않고

제숫감 마련에 쓰고도 남아 얼마간 가용에 보탬이 될 만큼 넉넉하게

큰집으로 송금하는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선산을 못 돌아보고 기제사에 참례 못하는

죄스러움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요 며칠 전에

큰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만 것이었다.

가족묘지 매입 문제로 상의할 일이 있으니

할아버지 제사일에 맞춰 내려오라는 편지 내용이었다.

편지투로 보아 이번엔 기어코 나를 내려오게 만들려는

당신의 속마음이 헤아려지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런데 8년 세월에 비하면 김포공항에서 단 오십분 만에 훌쩍 날아간 고향은 참으로 가까운 곳이었다. 기내(機內)에 퍼져 틀틀거리는 엔진 폭음에 귀가 먹먹해져서 잠시 멍한 방심 상태에서 몸을 맡기고 있는데 별안간 기체가 덜컹하길래 눈을 떠보니 제주공항이었다는 식으로 나는 고향에 닿았다.

정말 눈 깜짝할 새에 고향땅 한복판에 뚝 떨어진 거였다. 그건 흡사 나 자신이 고향을 찾은 게 아니라 거꾸로 고향이 나를 찾아온 것처럼 어리둥절하고 낭패스러웠다.


뭐랄까, 아무 예비감정도 없이 고향과 맞닥뜨린 셈이랄까. 나는 비행기 안에서 좀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멍하니 허송한 오십분이 못내 후회스러웠다. 괜히 비행기를 탔다 싶었다. 기차를 타고 배를 타야 하는 건데 8년 만의 귀향을 직장 통근시간에 불과한 단 오십분에 끝내다니.


내게 고향이란 무엇이었나.

나에게 깊은 우울증과 찌든 가난밖에 남겨준 것이 없는 곳이었다. 관광지니 어쩌니 하지만 그것도 지역 나름이어서 나의 향리인 서촌(西村)은 이렇다 할 관광자원도 없고 하늬바람이 몰아쳐 귤농사도 안되는 한촌이었다.

적어도 내 상상 속에서 나의 향리는 예나제나 죽은 마을이었다. 말하자면 삼십 년 전 군 소개작전에 따라 소각된 잿더미 모습 그대로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향을 외면하여 살아오길 팔년, 그 유맹(流氓)의 십년 전으로 되찾아가려면 아무래도 조심스럽게 주저주저하며 다가가야 하리라. 기차를 타도 완행을 타서 반도(半島) 끝까지 가 거기서 다시 배를 타고 밤을 지새우며 밤항해를 해야 하는 수륙 천오백리길. 차멀미, 배멀미에 시달리며 소주에 젖고 8년 만에 찾아가는 고향 생각에 젖어서 허위허위 찾아가야 할 고향이었다.


이것이 내가 평소에 고향을 지척에다 두고서도 지구 끝처럼 아득하게 여기던 이유였다.
그러나 휴가는 단 이틀이고 할아버지 제사가 바로 오늘인 걸 어떻게 하랴. 기차 타며 그렇게 여유작작하게 우회해서 고향에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마치 스튜어디스에게 등을 떠밀린 사람처럼 엉거주춤거리며 승강구 계단을 내려왔다.


하늘은 낮은 구름에 덮여 음울해 보였고 한라산 정상은 구름떼가 잔뜩 몰려 있었다. 낯익은 제주도 특유의 겨울날씨였다. 그건 어린시절의 겨울하늘을 낮게 덮고 벗겨질 줄 모르던 바로 그 음울한 구름이었다.


흐린 날씨 때문에 돌담은 더 검고 딱딱해 보이고 한라산 기슭의 질펀한 목장에 덮인 눈빛은 침침했다. 하늬바람이 불어와 귓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바람소리,

쉴새없이 고시랑거리는 앞머리칼.

나는 불현듯 가슴이 답답해왔다.

어린시절의 그 음울한 겨울철로 돌아온 것이었다.


나는 동문 로터리에서 내 향리인 서촌을 경유하는 버스를 탔다. 시골행 차는 온통 고향 사투리로 왁자지껄했다.


“할마니, 이거 뭐우꽈?”


하고 남자 차장이 통로에 부려놓은 대 구덕(바구니) 속의 옹기 허벅을 가리켰다.


“아따, 팥죽이라 팥죽. 팥죽 쑤언 삼양 동네에 고렴[弔問]감서."


광목수건을 쓰고 눈이 진무른 할머니가 구덕에 달린 질빵을 쥔 채 대답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고향 사투리였다.

내 입가에도 은연중에 고향 사투리가 떠올라 뱅뱅 맴돌았다.


버스는 계속 털털거리면서 해변 따라 일주도로를 타고 달려갔다.

일상생활에 노상 모래바람이 부는 어촌들.

헌 그물로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단도리해놓은 초가집 추녀.

돌담 울타리 너머 바람에 부대끼는 빨간 열매 달린 사철나무들.

나는 내 눈이 육지서 온 관광객의 호기심 많은 눈이 안되도록 조심하면서 이것저것 눈여겨보았다.


잿빛 바다 안으로 날카롭게 먹어들어간 시커먼 현무암의 갑(岬),

저걸 사투리로 ‘코지’라고 했지.

바닷가 넓은 ‘돌빌레’[岩盤]에 높직이 쌓여 있는 저 고동색 해초더미는 ‘듬북눌’이겠고,

겨울바다에 포말처럼 둥둥 떠있는 저것들은 해녀들의 ‘태왁’이다.


시커먼 현무암 바위 틈바구니에 붉게 타는 조짚불, 뭍에 오른 해녀들의 불을 쬐는 저곳을 ‘불턱’이라고 했지. 나는 잊어먹고 있던 낱말들이 심층의식 깊은 데서 하나하나 튀어나올 때마다 남 모르는 쾌재를 불렀다.

이렇게 추억의 심부(深部)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내 머릿속은 고향의 풍물과 사투리로 그들먹해지는 것이었다.


그날은 하루에 두 집 제사라 큰당숙 댁에서 종조모 제사를 초저녁에 먼저 치른 다음 모두 큰집에 모였다. 나는 누구보다도 길수형을 만나는 것이 즐거웠다. 나와는 겨우 한 살 차이인데도 벗어진 이마 태깔이 벌써 중년티가 완연했다. 그는 요즘 귤밭을 하나 일구노라고 중학교에서 받는 봉급의 절반이 날아간다고 했다.


생각했던 대로 인사 올릴 만한 친척 어른들은 모두 참례하고 있어서 짧은 일정에 일일이 찾아다니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어 좋았다.

제주시에 사는 고모 식구들은 밤늦어 차편으로 도착했다.


부쩍 늙어버린 친척 어른들의 얼굴을 대하자니 그동안 찾아뵙지 못한 8년이란 세월이 실감으로 가슴에 와닿는 것이었다.

흰 머리칼에 대조되어 얼굴에 핀 검버섯이 더욱 뚜렷하게 돋보이는 큰아버지,

주름진 눈에 항시 눈물이 질퍽한 큰당숙어른.


나는 각오했던 대로 한참 고개를 숙이고 어른들의 책망을 다소곳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서울서 아내 몰래 좀 무리해서 마련한 봉투 삼만원짜리 석 장과 이만원짜리 다섯 장을 내놓았다.

8년 만에 귀향하는 서울의 큰 회사의 부장에 대한 고향 친척들의 기대감을 도무지 저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봉투를 내밀면서, 물건으로 사올까도 생각했지만 어떤 게 필요한 물건인지 몰라서 좀 뭣하지만 그냥 돈으로 드리니 양해해달라는 말을 덧붙이기를 잊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분들이야 현금이 귀한 농촌생활이라 돈봉투는 충분히 생색이 나겠지만 도청 주사로 있으면서 밀감밭도 꽤 크게 갖고 있는 고모부에게마저 봉투를 내밀자니 좀 쑥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아닌게아니라, 고모부는 한마디 능청떨어 내 얼굴을 화끈 달게 하기를 잊지 않았다.


“이게 뭐라? 욕을 그만해달라고 와이로 씀이라? 하이고, 나도 이런저런 와이로 다 먹어봤쥬만 처조캐한티 와이로 얻어먹긴 이거 처음인디…”


고모부는 이 지방 사투리를 수월수월 잘도 말했다.

평안도 용강 사투리를 영 못 버리던 저분이 이젠 여축없이 제주도 사람이 되었구나. 서북청년으로 입도해서 이제 삼십년도 넘고 있으니 충분히 그럴 만도 하리라.


대개 초저녁에 잠자 버릇해서 제삿날이면 노상 꾸벅꾸벅 졸기를 잘하는 시골 어른들이었지만 그날은 나를 맞아 자정이 넘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다. 가족장지 매입에 대한 의논을 끝내고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한담을 즐기고 있는데 불현듯 순이(順伊)삼촌 생각이 났다.


아까부터 그분이 보이지 않는 게 이상했다. 어릴 때 보면 큰집 제삿날마다 부주로 기주떡 구덕을 들고 오던 분이었다.

촌수는 멀어도 서너 집 건너 이웃에 살아서 큰집과는 서로 기제사에 왕래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던 것이다. 그래서 길수형과 나는 어려서부터 그분을 삼촌이라고 부르면서 무척 따랐다.(고향에서는 촌수 따지기 어려운 먼 친척 어른을 남녀 구별 없이 흔히 삼촌이라 불러 가까이 지내는 풍습이 있다.) 어서 삼촌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할 텐데.

더구나 삼촌은 일년 가까이 서울 우리 집에 올라와 밥을 해주며 고생하다가 불과 두 달 전에 내려오셨는데 그동안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퍽 궁금했다. 혹시 몸이 편찮으신 게 아닐까? 나는 길수형에게 물어보았다.


“형, 순이삼촌이 통 안 보염싱게(보이는데) 무슨 일이 이서?”


그런데 웬일인지 내 말에 사람들은 하던 말을 문득 멈추고 조용해졌다.

길수형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역력하게 떠올랐다.

큰아버지도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입맛을 쩝쩝 다시며 얼굴을 돌렸다.


잠시 방안은 안쓰런 침묵이 흘렀다. 왜들 이러실까? 나이 스물여섯에 홀어미머니 되어 삼십년이란 긴긴 세월을 수절해오던 순이삼촌이 지금에 와서 개가라도 했단 말인가? 이윽고 큰아버지가 담뱃재를 화로 운두에 털면서 고개를 들어 나를 건너다보았다.


“겨를 없어 너한티는 못 알려져마는 그 삼춘은 며칠 전에 죽어부러시녜.”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우꽈? 순이삼춘이 돌아가셔서 마씸?”


그분이 돌아가시다니, 나는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잔병치레 없이 늘 정정하시던 분이 아니던가.

나는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좌중을 휘 둘러보았다.

작은당숙이 나에게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도 몰랐는디 형님, 무사 나헌티는 기별도 안합디가?”


이렇게 고모부가 말해도 큰아버지는 담배만 풀썩풀썩 피워댈 뿐 도무지 입을 열지 않았다. 평소에 친누이같이 지내던 사이인지라 몹시 괴로운 모양이었다. 좌중은 한참 침묵이 흘렀다. 싸르락, 싸르락. 창호지창에 싸락눈 흩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큰아버지는 지그시 감았던 눈을 뜨고 나를 이윽히 바라보았다.


“그런 죽음은 몰라 좋은 거쥬만 일단 알았이니까 내일 서울 올라가기 전에 문상이나 해영 가라. 시(市)에 딸네 집에 위패 모셨져.”


하고 잠시 말을 끊었던 큰아버지는 새로 피워문 담배를 깊이 들이마시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허기사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기는 매한가지쥬만…”


이렇게 떠듬떠듬 시작한 큰아버지의 얘기는 대강 이러했다.

그분은 돌아가신 날짜도 분명치 않았다. 집을 나간 날이 곧 당신이 돌아가신 날이 되겠는데 그걸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 있는 딸자식을 시집 보낸 후 여러 해 홀몸으로 살아오던 터라 당신이 먼저 말하지 않으면 밥을 끓이는지 죽을 쑤는지 이웃에선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처음 며칠은 집이 덧문까지 닫혀 있는 걸 보고 시에 딸네 집에 갔겠거니 하고 예사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딸네 집에 가도 자고 오는 법이 없이 그날로 돌아오곤 하던 분이 보름이 넘도록 보이지 않자 큰집에선 차차 불길스럽게 생각되었다.

또 서울 조카네 집(우리 집)에 갔나? 서울 가면 간다고 말했을 텐데. 걱정된 나머지 큰집 식구들은 시에 있는 딸네 집에다 연락했다.

딸과 사위가 달려와 당신이 있을 만한 곳을 이곳저곳 찾아다녔다. 전에 신경쇠약으로 몇개월 정양했던 한라산 밑 절간에도 가보았다.

파래나 톳을 뜯으러 갔다가 무슨 횡액을 만났나 하고 바닷가 바위 틈서리도 뒤졌다.


그러다가 결국 당신은 국민학교 근처 일주도로변의 밭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부패한 정도로 봐서 죽은 지 이십일은 좋이 넘어 보였다.

그 밭이 일주도로에서 한 밭 건너에 있었음에도 이십일이 넘도록 사람 눈에 안 띈 것은 거기가 후미지고 옴팡진 밭인데다 밭담으로 가리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흰옷 아닌 밤색 두루마기를 입고 있어서 더더욱 눈에 안 띄었을 것이다. 서울 우리 집에 올라올 때 입었던 밤색 두루마기에 따뜻한 토끼털 목도리까지 두르고 자는 듯 모로 누워 있었다.

머리맡에는 먹다 남은 꿩약 사이나가 몇알갱이 흩어져 있고…

그렇게 발견된 것이 불과 여드레 전이라는 것이었다.


“나도 따라가 봤우다만, 거참 이상헌 일도 다 있십디다. 그 사이 눈이 나련 보리밭이 사뭇 해영허게(하얗게) 눈이 덮였는디 말이우다, 참 이상허게시리 순이삼춘 누운 자리만 눈이 녹아 있지 않애여 마씸”


하고 육촌 현모형이 말하자 큰아버지가 맞장구쳤다.


“발복할 땅이여. 그 동생이 죽어도 자기가 드러누울 묫자리 하나는 잘 잡았쥬.”

“발복해봐사 무슨 자손이 있어야쥬. 외손편엔 몰라도… 양자 들이라, 들이라, 경(그렇게) 말해도 노시(영) 말을 안 들엉게(듣더니만) 쯧쯧.”


하고 큰당숙어른들이 애석하다는 듯 혀를 찼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내 등에는 남 모르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얼마 동안 귀가 먹먹해지고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한평생 다 산 나이 쉰여섯에 끔찍하게도 스스로 목숨을 끊다니.
평생 일궈먹던 밭을 찾아가 양지바른 데를 골라 드러누워버린 삼촌,

유서도 한 장 없이 죽었으니 그것은 표면상 아무 뚜렷한 이유가 없는 죽음이었다.


그렇다. 정신이 잘못되어 죽었다는 큰아버지의 판단이 옳을 것이다. 평소의 지병인 신경쇠약이 원인이 되었으리라. 그런데 신경쇠약은 왜 갑자기 악화되었을까? 거기에는 어떤 계기가 있을 것이다.

무엇이 삼촌을 죽음의 궁지로까지 몰아붙였나?

혹시 항상 원만치 못했던 일년 동안의 서울 우리 집 생활에서 병이 악화된 게 아닐까? 아니, 그럴 리 없어.

여기 내려와서 무슨 충격적인 일을 당해도 당했을 테지.

그런데 친척 어른들의 얘기는 고향에 내려와서는 이렇다 할 사고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서울 우리 집에서 내려온 지 한달도 채 못되어 일어난 일이고…

 가책과 후회의 감정으로 나는 가슴이 오그라붙는 듯했다.


생각하면 순이삼촌이 우리 집에 와 있었던 지난 일년은 당신이나 나나 내 아내나 모두 서로가 불편스럽고 원만치 못했던 게 사실이었다.

아내가 벌이도 시원찮은 옷가게를 진작 걷어치웠더라면 삼촌이 올라오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러나 하루 종일 아내가 의상실에 매달려 있는 형편이니 밥해주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으면 안되었다.


재작년 일년 동안 밥하는 여자아이들이 서너 차례 불나게 엇갈려 들락거리더니, 나중에는 그나마 구하기가 무척 어려워졌다. 그래서 길수형에게 편지를 내어 고향에다 수소문해봤던 것인데, 마침 순이삼촌이 서울구경도 해볼 겸 우리 집에 한 일년 와 있겠다고 나섰던 것이었다.


순이삼촌이 손잡이가 망가진 옷가방을 질빵으로 짊어지고 우리 집에 온 지 열흘도 못되어 언짢은 일이 발생했다. 아내가 가게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저녁때였다.

당신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내 방으로 건너왔다.


“조캐, 참말 이럴 수가 이싱가?”


삼촌의 눈에선 눈물마저 글썽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나는 영문도 모르고 가슴이 섬찟했다.


“아니, 무슨 일이 있었어요? 여기 앉아서 자초지종을 얘기해보세요.”


평소에 순이삼촌 앞에서는 고향말을 써야지 하고 생각하던 터라 무의식중에 툭 튀어나온 서울말이 무척 민망스러웠다.


“동네 사람들이 날 숭보암서라. 새로 온 민기네 집 식모는 밥 하영(많이) 먹는 제주도 할망(할미)이엔 소문나서라.”


나는 하도 말도 안되는 말이라 어이가 없었다.


“아니, 누게가 그런 쓸데없는 소릴 헙디가?”


“허기사 고향서 궂은일, 쌍일을 허멍(하면서) 보리밥 한 사발 고봉으로 먹던 버릇 따문에 아명(아무리) 밥을 적게 먹젱 해도 공기밥 먹는 조캐네들보다사 하영 먹어지는 게 사실이쥬. 사실이 그렇댄 해도 밥 하영 먹는 식모옌 사방팔방에 논(남)한티 소문내는 벱이 어디 이시니?”


나는 순간 눈망울이 확 더워지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삼촌보고 밥 많이 먹는 식모라니, 이런 모욕적인 언사가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나도 분통이 터져 견딜 수 없었다.


“누게가 그런 말을 헙디가? 어디서 들입디가?”


그러나 삼촌은 치맛귀로 눈물을 찍어낼 뿐 통 대답을 하지 않았다.


“민기 어멍(엄마)이 그런 말을 헙디가? 어디 말해봅서. 요 아래 희야네 가게서 그런 말을 헙디가? 꼭 밝혀내서 혼을 내사 허쿠다. 혼저(어서) 말해봅서.”


그러나 삼촌은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붉으락푸르락 화를 내는 것에 다소 위안을 얻었는지는 몰라도 삼촌은 더 이상 따져들지 않고 그만 물러갔다.

아내가 그런 말을 했나? 설마하니 아내가 그런 희떠운 언동을 할 경박한 여자일까? 혹시 민기놈이 희야네 가게에 군것질하러 갔다가 그런 못된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다섯살짜리 숫기도 없는 녀석이 어떻게 그런 당돌한 말을 해?

그러나 ‘밥 많이 먹는 제주도 식모’라고 말했을 리는 없지만 밥 많이 먹는다는 말은 누가 해도 했을 것이다.


이런 의심이 좀처럼 풀리지 않은 채 저녁 늦게 돌아온 아내를 맞고 보니 자연히 말다툼이 벌어졌다.

내가 전에 없이 치를 떨며 화를 내는 꼴을 보고 놀랐던지 아내는 결혼 후 처음으로 내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나는 격앙된 어조로, 시부모 없어 시집살이를 면하더니 시댁 어른을 대하는 게 도무지 버릇없다고 질타했던 것이다.

하여간 아내가 그런 말을 했고 안했고 간에, 그날 밤 나는 아내가 순이삼촌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내 딴에는 톡톡히 보여준 셈이었다.


밥을 좀 많이 드신다고 해서,

누구나 건져내버리는 배춧국의 멸치를 잡수신다고 해서,

잘 통하지 않는 사투리를 쓴다고 해서

그게 어째 흉이 된단 말인가.


시골에 혼자 먹고 살 만큼은 농토도 있고 남을 빌려 주고 온 오막살이지만 집도 있는 분이었다.

말 그대로 서울구경할 겸해서 우리 집 일을 도우러 오신 분을 흉보다니.

아내의 태도가 우선 글러먹었다.

순이삼촌이 하는 사투리를 아내는 알아듣지 못했다.

이해해보려고 애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저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볼 때 나는 나 자신이 무시당한 것처럼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그건 신혼초에 아내가 무슨 일로 호적초본을 뗐다가 제 본적이 남편 본적인 제주도로 올라 있는 당연한 사실을 가지고 무척 놀란 표정을 지었을 때 내가 느낀 수치감과 비슷한 것이었다.

이렇게 사투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아내 앞에서 순이삼촌의 처신은 어떻게 해야 옳은가? 그저 말수를 줄이고 시키는 말만 고분고분 따르는 수동적인 입장을 취할 도리밖에 더 있는가.


그날 이후 나는 여태 막연히 기피증 현상으로만 나타나던 고향에 대한 선입견을 대폭 수정하기로 했다. 삼촌의 존재가 나에게 늘 고향을 의식하게 해준 셈이었다. 서울생활 십오년 동안 한번도 써보지 못하고 묵혀두었던 사투리도 쓰기 시작했다. 고향말은 주로 삼촌하고 얘기할 때만 썼지만 민기놈에게도 사투리를 꽤나 많이 가르쳐주었다.


그렇다. 나는 내 아들이 허여멀끔한 아내를 닮아 빈틈없이 서울내기가 되어가는 것이 딱 질색이었다. 에미를 닮아선지, TV를 너무 봐선지, 다섯살 나이에 벌써 안경을 써야 할 지경으로 눈이 나쁜 녀석, 아내는 피아노를 가르쳐줄 계획이지만

나는 녀석에게 투박한 고향 사투리를 가르치고 싶었다.


아들놈마저 제 애비의 고향을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 서울말 일변도의 내 언어생활이란 게 얼마나 가식적이고 억지 춘향식이었던가.

그건 어디까지나 표절인생이지 나 자신의 인생은 아니었다.


그러나 순이삼촌은 그때 일로 퍽 상심했던지 좀처럼 밝은 표정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거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용서를 빌었는데도 삼촌은 삭이지 않고 내내 꼬불쳐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드디어 아내와 정면으로 맞부딪치고 말았다.


어느날 회사일로 저녁 늦게 귀가해보니 삼촌과 아내가 말다툼하고 있었다. 삼촌은 나를 보자 울면서 부엌바닥에 주저앉아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 일이냐고 아내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이번엔 아내가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게 아닌가,

빌어먹을.


아내는 순이삼촌이 쌀이 다 떨어져서 사와야 한다는 말에 “쌀이 벌써 떨어졌어요?”라고 예사로 말을 던졌을 뿐이란다. 알았다는 뜻에서, 아, 그래요? 하듯이 가볍게 한 말을, 서울말의 억양에 익숙하지 못해서 그랬던지 “쌀이 벌써 다 떨어질 리가 있나요?” 하는 반문(反問)으로 잘못 오해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삼촌은, 내가 너무 밥을 많이 먹어서 쌀이 일찍 떨어진 줄 아느냐, 둑년처럼 내가 쌀을 몰래 내다 팔았다는 말이냐, 하면서 우는 것이었다.

참 기가 찰 노릇이었다. 하도 어이없는 일이라 어디서 어떻게 수습해야 좋을지 몰랐다. 다만, 하잘것없는 일에 꼼짝없이 붙잡혀 상심하고 있는 삼촌을 보자 나 자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이었다.


그날 우리 내외는 오해를 풀어 안심시켜드리려고 얼마나 애를 썼던가.

그러나 그게 아무 소용도 없었음이 그 뒤부터 노출된 삼촌의 야릇한 결벽증에서 판명되었다.

쌀이 일찍 떨어진 원인이 밥을 질게 하거나 눌게 한 데 있다고 그 나름대로 판단했던지 순이삼촌은 그 뒤부터 된밥을 지어내려고 무진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된밥을 만드는 일이 무슨 지독한 강박관념처럼 삼촌을 짓누르고 있었다.

때문에 위무력증세가 있어 진밥을 좋아하는 나였지만 쓰다 궂다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쌀 사온 지 열흘도 못되어 그동안 얼마나 먹었는지 알아내려고 하루 종일 됫박질해보는 모습은 정말 애처롭다 못해 섬찍한 느낌마저 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비슷한 일을 두 번 겪고 난 다음부터는 아내는 또 순이삼촌의 오해를 살까봐 언동을 조심하느라고 거의 신경과민이 될 지경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아내의 삼촌에 대한 태도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그러나 삼촌은 뚱하게 굳어진 표정이 풀릴 날이 없었다.

심지어는 나에게마저 말하기를 기피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공원에 놀러가서 사진을 서너 장 찍어드렸는데 사진값을 내겠다고 우기지를 않나, 토마토주스를 들면서 같이 들자고 권해도

“식모는 그런 고급은 먹엉 안되는 거라.” 하고 퉁명스럽게 거절하면서

자리를 피하곤 하는 것이었다.


또 하룻저녁은 늦은 저녁상을 혼자 받는데 삼촌이 상을 들여다놓고 얼른 부엌으로 쫓아가더니 석쇠를 들고 왔다.

웬일인가 했더니 삼촌은 그 생선껍질이 눌어붙은 석쇠를 보이면서 밥상에 오른 구운 생선이 부서진 것이지 당신이 입질해서 그 모양이 된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왔다.

왜 생선이 부서졌느냐고 누가 묻기라도 했단 말인가.

왜 묻지도 않았는데 그런 자격지심이 생겼을까?

당신의 결벽증은 정말 지독한 것이었다.


결국 나는 완전히 손들고 말았다.

오해를 풀어드리려고 얼마나 진력을 다했던가.

그러나 순이삼촌은 완강한 패각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꼼짝도 않고 막무가내로 우리를 오해하는 것이었다. 그 오해는 증오와 같이 이글이글 타는 강렬한 감정이었다.


그동안 시골 딸에게서 편지가 두 번 온 모양인데 두 번 다 아내가 몰래 훔쳐보니까, 외손주가 할머니를 찾는다고 어서 내려오라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나는 순이삼촌이 곧 내려가리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새 오해가 풀리지 않아 무슨 원수처럼 헤어지게 되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짐작과는 반대로 당신은 내려갈 의사를 전혀 비추지 않았다.


그러다가 시골서 사위가 올라왔다. 나보다 칠년 연하인 사위 장씨는 농촌지도원으로 수원 농촌진흥원에 출장온 것이었다.

아니, 장모를 모셔갈 작정으로 남의 출장을 가로채가지고 올라왔다고 했다.

의지할 데라곤 딸자식 하나밖에 없는 노인을 어떻게 객지생활을 하도록 놔두겠느냐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남부끄러워 못 견디겠다고 했다.

삼촌은 서울 올라올 때, 혹시 못 가게 막을까봐 딸네 집에 알리지 않고 몰래 올라왔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사위가 찾아와 같이 내려가재도 순이삼촌은 웬일인지 싫다고 고집을 세웠다. 애초에 마음먹은 대로 남의집살이 일년을 다 채우고 내려가겠노라고 했다.

우리 내외와 원만치 못하게 지내온 푼수로 봐서는 미련없이 훌훌 떠나버릴 것 같은 분이 그냥 눌러 있겠다니 우리로선 참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사람 구하기 어려운 때라 아쉬운 생각에서가 아니라,

우리를 그토록 오래했으면서도 딱 잘라 매정하게 돌아서 버리지 않는 그 마음씀이 더없이 고맙게 여겨졌다.

아마 순이삼촌 자신도 시간 매정고 오해를 풀고 가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모든 것은 사위 장씨의 입에서 밝혀졌다.


그날 밤 장씨는 내 권유에 못 이겨 우리 집에서 자고 갔는데, 내가 삼촌이 우리를 오해하게 된 여러 사례를 들려주자 그는 그럴 줄 알았다고 하며, 아무래도 장모를 두고 가는 것이 걱정이라고 했다.

그의 속삭이는 말로는 순이삼촌은 심한 신경쇠약 환자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환청증세까지 있어 시골에 있을 때도, 한 적이 없는 말을 들었노라고,

보지도 않은 흉을 봤다고 따지고 들기를 잘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밥 많이 먹는 식모’라는 것도, 우리에게 품은 오해도 모두 환청 때문에 생긴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역시 그랬었구나.

옆에서 얘기를 듣던 아내는 방정맞게 안도의 한숨까지 내쉬었다.

당신의 신경쇠약은 지독한 결벽증과도 서로 얽혀진 것인데 이런 증세는 꽤나 해묵은 것이라고 했다. 그건 4, 5년 전 콩 두 말을 훔쳤다는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 얻은 병이었다.


하루는 이웃집에서 길에 멍석을 펴고 내다 넌 메주 콩 두 말이 감쪽같이 없어졌는데 그 혐의를 평소에 사이가 안 좋던 순이삼촌에게 씌워놓았다.

두 집은 서로 했느니 안 했느니 하면서 옥신각신 다투다가 그 집 여편네가 파출소에 가서 따지자고 당신의 팔을 잡아끌었던 모양인데

파출소 가자는 말에 당신은 대번에 기가 죽으면서 거기는 못 간다고 주저앉아버리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자연히 당신이 콩을 훔친 것으로 소문나버릴밖에.

당신이 그전서부터 파출소를 피해다니는 이상한 기피증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알고 있었지만

그건 일단 씌워진 누명을 벗기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당신은 1949년에 있었던 마을 소각 때 깊은 정신적 상처를 입어, 불에 놀란 사람 부지깽이만 봐도 놀란다는 격으로 군인이나 순경을 먼빛으로만 봐도 질겁하고 지레 피하던 신경증세가 진작부터 있어온 터였다.


하여간 당신은 그 콩 두 말 사건으로 심한 정신적 충격을 입었던 모양으로 절간에서 두어 달 정양까지 해야 했다.

그때부터 당신은 심한 결벽증에 사로잡혀 혹시 누가 뒤에서 흉보지 않나 하는 생각에 붙잡혀 늘 전전긍긍하게 되고,

나중엔 환청증세까지 겹쳐 하지 않은 말을 들었노라고 따지고 들곤 했다.

그리고 서울 우리 집에 올라올 무렵에는, 상군해녀이던 당신이 갑자기 물이 무서워져서 물질마저 그만두었다는 것이었다.


순이삼촌은 사위를 홀로 내려보낸 뒤 우리 집에서 석 달 가까이 더 지냈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당신은 오해를 풀어주기는커녕 오히려 새로운 오해를 자꾸 만들어 보태가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당신은 끝내 일년을 다 못 채우고 고향에 내려온 것인데

내려온 지 한달도 못되어 이런 불상사가 발생했으니, 나로서는 일말의 가책을 안 느낄 도리가 없었다.  아니, 양심의 가책이라니, 내가 무슨 잘못이 있나.

나도 골치를 썩이며 당신에게 꽤 하느라고 하지 않았던가.

당신은 한마디로 불가항력이었다.

그럼에도 결과론으로 따져 순이삼촌의 서울생활이 여의치 못했으리라고 짐작하고 있을 친척 어른들을 마주 대하기가 참으로 면구스러웠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바람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래도 시원찮아 염치 불고하고 길수형 등뒤로 가 바람벽을 마주보고 잠깐 누웠다. 문풍지를 푸르르 떨게 하며 창틈으로 들어오는 찬바람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식혀주었다.


바람은 또 때때로 강하게 불어와 싸락눈을 창호지창에 훅훅 뿌려놓곤 했다.

그건 고양이가 앞발로 창을 긁어대는 소리처럼 을씨년스럽게 들렸다.

왜 고향엔 유별나게 싸락눈이 많을까?

바람 많이 부는 기상 때문일까? 아니다. 그건 언제나 고구마, 조팝을 상식하는 고향사람들에게 내리는 산디쌀일 것이다.

모처럼 제삿날에나 먹어보던 ‘곤밥’. 왜 ‘곤밥’이라고 했을까?

‘곤밥’은 ‘고운밥’에서 왔을 것이고 쌀밥은 빛깔이 고우니까.


어린 시절에도 파제 후 ‘곤밥’을 몇숟갈 얻어먹어보려고 길수형과 나는 어른들 등뒤에서 이렇게 모로 누워 새우잠을 자곤 했다.

제상마저 소각 때 태워먹고 송진내 물씬 나는 날송판때기 위에다 제물이라곤 마른생선 하나에 메밀묵 한 쟁반, 고사리, 무채 각각 한 보시기밖에 진설할 것이 없던 그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메는 꼭 산디쌀밥이었다.


자정이 넘어 큰아버지가 우리들을 깨워 세수하고 오라고 방 밖으로 떠밀었을 때 마당에 하얗게 깔려 있던 것도 싸락눈이었다.

그 시간이면 이 집 저 집에서 그 청승맞은 곡성이 터지고 거기에 맞춰 개 짖는 소리가 밤하늘로 치솟아오르곤 했다. 한날 한시에 이 집 저 집 제사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이날 우리 집 할아버지 제사는 고모의 울음소리부터 시작되곤 했다. 이어 큰어머니가 부엌일을 보다 말고 나와 울음을 터뜨리면 당숙모가 그 뒤를 따랐다.

아, 한날 한시에 이 집 저 집에서 터져나오던 곡성소리,


음력 섣달 열여드렛날,

낮에는 이곳저곳에서 추렴 돼지가 먹구슬나무에 목매달려 죽는 소리에 온 마을이 시끌짝했고 5백 위도 넘는 귀신들이 밥 먹으러 강신하는 한밤중이면 슬픈 곡성이 터졌다.


그러나 철부지 우리 어린것들은 이 골목 저 골목 흔해진 죽은 돼지 오줌통을 가져다가 오줌 지린내를 참으며 보릿짚대로 바람을 탱탱하게 불어넣어 축구공삼아 신나게 차고 놀곤 했다.

우리는 한밤중의 그 지긋지긋한 곡성소리가 딱 질색이었다.

자정 넘어 제사시간을 기다리며 듣던 소각 당시의 그 비참한 이야기도 싫었다.

하도 들어서 귀에 못이 박힌 이야기. 왜 어른들은 아직 아이인 우리에게 그런 끔찍한 이야기를 되풀이해서 들려주었을까?


그리고 파제 후 이 집 저 집 지붕 위에 던져올린 퇴주그릇의 세 숟갈 밥을 먹으러 날새자마자 날아드는 까마귀들도 기분 나빴다.

까마귀가 죽은 귀신의 혼령이라든가, 저승차사라고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 광택 있는 검은 날개빛이 마을 어른들을 잡으러 오던 서청(西靑) 순경들의 옷빛하고 너무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얕보던 까마귀들. 사람이 다가가도,

우여우여 소리쳐도 달아날 줄 몰랐다.

그것들은 시체가 널린 보리밭을 까맣게 뒤덮고 파먹다가

심심하면 겨울하늘로 떼지어 날아오르며

세찬 날갯짓으로 하늬바람 타기를 잘했다.


그 당시 일주도로변에 있는 순이삼촌네 밭처럼 옴팡진 밭 다섯 개에는 죽은 시체들이 허옇게 널려 있었다.

밭담에도, 지붕에도, 듬북눌에도, 먹구슬나무에도

어디에나 앉아 있던 까마귀들.


까마귀들만이 시체를 파먹은 게 아니었다.

마을 개들도 시체를 뜯어먹고

다리토막을 입에 물고 다녔다.

사람 시체를 파먹어 미쳐버린 이 개들은

나중에 경찰 총에 맞아 죽었지만.

그 많던 까마귀들은 모두 어디 갔을까?

아까 낮에 까마귀가 눈에 안 띄길래 길수형에게 물어보았지만

그도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농작물에 큰 피해가 될 정도로 그렇게 번성하던 까마귀들이 사오년 전부터는 웬일인지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문득 큰당숙어른의 감기 쇤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뉘었던 몸을 일으키고 바로 앉았다.


“순이아지망은 죽어도 발쎄 죽을 사람이여. 밭을 에워싸고 베락같이 총질해댔는디 그 아지망만 살 한점 안 상하고 살아났으니 참 신통한 일이랐쥬.”

“아매도 사격 직전에 기절해연 쓰러진 모양입니다. 깨난 보니 자기 우에 죽은 사람이 여럿이 포개져 덮연 있었댄 허는 걸 보민…

그때 발쎄 그 아지망은 정신이 어긋나버린 거라 마씸.”


하고 작은당숙어른이 말을 받았다.


“해필 그 밭이 순이아지망네 밭이었으니.”
“그 밭이서 죽은 사름들이 몽창몽창 썩어 거름되연 이듬해엔 감저(고구마)농사는 참 잘되어서. 감저가 목침덩어리만씩 큼직큼직해시니까.”
“그핸 숭년이라, 보릿겨범벅 먹던 때랐지만 그 아지망네 밭에서 난 감저는 사름 죽은 밭엣 거라고 사름들이 사먹질 안했쥬.”
“그 아지망이 필경엔 바로 그 밭이서 죽고 말아시니, 쯧쯧.”

 

어른들의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야릇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순이삼촌은 한달 보름 전에 죽은 게 아니라

이미 삼십년 전 그날 그 밭에서 죽은 게 아닐까 하고.


이렇게 순이삼촌이 단서(端緖)가 되어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그 흉물스럽던 까마귀들도 사라져버리고,

세월이 삼십년이니 이제 괴로운 기억을 잊고 지낼 만도 하건만 고향 어른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오히려 잊힐까봐 제삿날마다 모여 이렇게 이야기를 하며 그때 일을 명심해 두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제사 때마다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었던 그 이야기들이 다시 머릿속에 무성하게 피어올랐다.


그 사건은 당시 일곱살 나이던 내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사건 바로 전해에 폐병으로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도피자라는 낙인을 받고 노상 마룻장 밑에 숨어살던 아버지마저 일본으로 밀항해 가버려 졸지에 고아가 되어버린 나는 큰집에 얹혀살고 있었다.


죽은 어머니 생각에 걸핏하면 남 몰래 눈물짓던 내가 그 울음을 졸업한 것은 음력 섣달 열여드렛날의 그 사건이 내 어린 가슴팍을 짓밟고 지나간 뒤였다.


말하자면 너무 놀란 나머지 울음이 뚝 떨어진 거였다.

그리고 일주도로변 옴팡진 밭마다 흔전만전 허옇게 널려 있던 시체를 직접 내 눈으로 보고 나자 나는 어머니의 죽음이 유독 나에게만 닥쳐온 불행이 아니고

그 숱한 죽음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되었다.

사실 어머니가 폐병으로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하더라도

그날 그 사건에 말려 어차피 죽고 말았을 것이다.


“그날 헛간에 앉안 멕(멱서리)을 잣고 있는디 군인들이 완(와서) 연설 들으레 오랜 하지 안해여.”


큰당숙어른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음력 섣달 열여드렛날, 그날은 유달리 바람 끝이 맵고 시린 날씨였다. 그래서 여편네들은 돈지코지 미역밭에 나가 물질할 엄두를 못 내고 집에서 물레로 양말 짤 실을 잣거나, 텃밭의 배추포기에 오줌거름을 주든지,

시아버지를 도와 지붕이엉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동여맬 동아줄을 띠풀로 꼬고 있었다.

그 무렵 젊은축들은 공연히 도피자로 몰려 낮에는 마을에서 사오리 한라산 쪽으로 올라간 큰냇가 자연동굴에 숨어 있다가 밤에나 내려오는 박쥐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날 아침나절에 길수형과 나는 큰아버지를 도와 밭거름으로 쓰려고 밤사이 갯가에 올라온 듬부기나 감태 따위 해초를 한군데 모아놓는 일을 했다. 그러고는 집에 돌아와서 점심요기로 할머니가 내준 식은 고구마 한 자루씩 받아먹고 있노라니까 별안간 밖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요란하고 고함소리가 들렸다.


“연설 들으러 나오시오!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국민학교 운동장으로 모이시오!”


보통 때 같으면 순경이나 대동청년단원 몇사람이 다니면서 사람들을 불러모았는데 이번엔 어쩐 일인지 철모에 총까지 든 군인들이 수십 명 퍼져 다니면서 득달같이 재촉하는 것이 뭔가 심상치 않았다. 심지어는 총검으로 창문을 열어젖히면서 병든 노인까지 내몰았다.

좀 불안한 생각이 없지도 않았지만, 그 전해 5․10선거 무렵에도 그렇게 득달같이 사람들을 불러모은 적이 있어서 그때처럼 무슨 중요한 연설이 있는가 보다라고만 생각했다.


길수형과 나는 할머니와 큰아버지 뒤를 따라 국민학교로 갔다.

먼저 온 동네아이들 여남은 명이 벌써 조회대 밑에 진을 치고 있었다.

시국 강연회는 아이들에게 퍽 인기가 있었다.

그 당시 연사들에게 유행하던 신파조의 웅변이 퍽 재미있고 맨 끝순서로 부르는 “역적의 남로당을 때려부숴라”라는 씩씩한 노래와 우렁찬 만세삼창은

정말 가슴 뛰게 하는 것이었다.


길수형과 나는 할머니 곁을 떠나 아이들 있는 데로 가 쪼그리고 앉았다.

운동장 흙은 진눈깨비가 녹은 다음이라 몹시 질척거렸는데 밑창 터진 고무신에 물이 새어들었다. 나는 발이 젖어 시렸지만 참고 기다렸다.


“그때 운동장에 뫼인 사람 수가 대강 얼매나 되어시까 마씸?”


하고 육촌 현모형이 물었다. 형은 당시 열댓살 나이에 도피자로 몰려 피해다녔으므로 요행히 그날 사건현장에는 없었다.


“겔쎄, 마을 호수가 삼백 호가 넘어시니까 한 천 명쯤 안됐이까? 병든 할망들까장 부축해연 나와시니까."


하고 큰당숙어른이 말하자 큰아버지가 참견했다.


“아니 그보다 많을 거여, 선흘리와 논흘리 쪽에서 소개해연 온 사람들도 건줌(거의) 백 명은 되어시니까.”


잠시 후 돌과 흙으로 쌓아올린 조회대 위로 권총 찬 장교가 올라섰다. 그 장교의 지시에 따라 모두 질척거리는 땅에 쪼그리고 앉았다. 강연이 시작되나보다 했는데 웬걸 장교는 지서 박주임과 이장 강씨를 단 위로 불러세우더니 지금부터 군인가족을 골라내겠다고 큰소리로 언명하지 않는가.


“군인가족들은 앞으로 나오시오. 사돈에 팔촌까장 덮어놓고 나오디 말구 직계가족만 나오라요. 만일 군인 직계가족도 아닌데 나온 사람은 당장 엄벌에 터하가시오.”


단 밑에는 입산자 색출 때문에 종종 마을에 나타나던 함덕지서 순경 두 명과

창 끝이 검게 그슬린 대창을 든 대동청년단 청년 예닐곱 명이 뻣뻣한 자세로 서 있고 그 뒤로 스무 명쯤 되어 보이는 무장군인들이 이열횡대로 늘어서 있었다.

그들의 한결같이 굳은 표정을 보자 사람들은 적이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영문 모르는 그들은 옆사람을 바라보며 수군거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별안간에 무슨 일일까?

군인가족들에게 보리쌀 배급이라도 주려나?

막상 군인가족 당사자들도 나가야 좋을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자,

장교는 빨리 나오라고 빽 고함을 질렀다.


군인가족들은 주뼛주뼛 눈치보면서 앞으로 나갔다.

그들은 단 앞으로 가 이장과 순경과 대동청년단 사람들의 심사를 받고 나서

단 뒤로 인솔되어 따로 앉혀졌다.


“아명해도(아무래도) 낌새가 이상해연 나도 어머님을 찾안 뫼시고 군인가족들 틈에 섞연 나갔쥬. 매부가 군인이니 직계가족은 아니지만 다행히 이장 강씨가 눈감아주언 넘어갔쥬."


큰아버지의 말이었다.


“형님 그것 봅서. 누이동생을 나한치 팔아 무신 손핼 봅디까? 이북것한티 시집간다고 결사반대허더니.” 하고 고무부가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 다음에 순경가족이 나가고 이어서 공무원가족이 나갈 즈음 뭔가 좋지 않은 낌새를 눈치챈 군중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공무원가족에 이어 마지막으로 대동청년단과 국민회 간부 차례가 왔을 때 사람들은 너도나도 앞을 다투어 나아가 이장과 청년단 사람들에게 매달렸다.


“정숙이 아버지, 우리 친정 오래비가 작년에 병정간 거 무사(왜) 알지 않우꽈?”

“이장님 마씸, 우리 사촌동상이 금녕지서에 순경으로 있우다. 김갑재라고 마씸.”

“뒤로 물러갑서. 다들 직계가족이 아니라 아니됩니다. 물러갑서.”


이장은 손을 내저었다.


“직계가족이 뭐우꽈?”

“이장님. 날 좀 내보내줍서.”


이런 북새통에 별안간 군중 속에서 날카로운 부르짖음 소리가 났다.


“불났져! 마을에 불났져!”


화들짝 놀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 학교 돌담 울타리에 기어올랐다.


“불이여, 불.” “불났져, 불났져.” “아이고, 아이고.”


운동장 사방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회오리바람처럼 일어나 하늘을 찔렀다.

울타리까지 갈 것 없이 마을 동편 하늘에 까맣게 불티가 날고 있는 게 내 눈에도 역력히 보였다.

매캐한 연기 냄새도 차츰 바람에 밀려왔다.

그때 서편 울타리 돌담이 여기저기서 매달린 사람들의 체중에 못 이겨 와르르 무너졌다. 사람들이 그 울타리 터진 데로 몰려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지체없이 총소리가 울렸다.

사람들은 다시 운동장 복판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무너진 돌담 위에 흰 무명적삼에 갈중의를 입은 노인이 한 사람 엎어져 죽은 모양인지 꼼짝하지 않았다.

군인 여남은 명이 빠른 동작으로 돌담 위로 뛰어오르더니 아래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그러자 조회대 뒤에 늘어서 있던 이십여 명의 군인들도 앞에총 자세로 잽싸게 뛰어나오더니 정면에서 사람들을 포위했다.

단상의 그 장교는 권총을 어깨 위로 빼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가 강하게 턱을 올려젖히자 철모가 햇빛에 번쩍 빛났다.


“잘 들으라요. 우리레 지금 작전수행둥에 있소.

여러분의 집은 작전명령에 따라 소각되는 거이오.

우리의 다음 임무는 여러분을 모두 제주읍으로 소개하는 거니끼니

소개둥 만약 질서를 안 지키는 자가 있으문 아까와 같이 가차없이 총살할 거이니 명심하라우요.”

 

장교의 귀설은 이북 사투리가 겁 집어먹는 부락민들의 머리 위에 카랑카랑 울려퍼졌다.

사람들은 제주읍으로 소개시킨다는 말에 반신반의하면서 군인들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 당장은 자기 집이 불타고 있다는 생각에만 완전히 넋잃고 절망해야 할 사람들이 다른 무엇을 예감하고 두려워하는가?

마을 쪽에서 해풍을 타고 매캐한 연기 냄새가 더욱 심하게 밀려오고 불티가 까맣게 뜬 하늘에 불아지랑이가 어른거렸다.

게다가 이따금 총소리가 탕탕 울렸다.

 

“난 그날 섯(西)동네에 쇠(소) 흥정하레 갔다 오던 참이랐우다.

마악 빌레동산 잔솔밭에 당도해연 내려다보난 묵은 구장네 집허구 종주네 집이 불붙어 있십디다.

잔솔밭이 숨어서 보난 군인들이 조짚뭇을 빼어다 불붙여 들고

이 집 저 집 옮겨댕기멍 추녀 끝뎅이에다 불을 당기고 이십디다."


군인들의 지시에 따라 사람들이 교문을 향해 늘어서기 시작했을 때, 별안간


“군인들이 우리를 죽이레 데려감져”


하는 말이 전류처럼 군중 속을 꿰뚫었다.

그러자 교문 가까이 선두에 섰던 사람들이 흩어지며 뒤로 우르르 몰려갔다.

단상의 장교가 권총을 휘두르며 뒤로 물러가는 자는 가차없이 총살하겠다고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이 말에 사람들은 잠시 주춤했을 뿐 다시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그때 큰아버지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이고, 난 그때 저 길수놈하고 상수녀석(나)을 얼마나 찾았는지 모를로고.

어머님하고 아명(아무리) 큰소리로 불러도 이놈우 새끼들이 어디 가 박혀신지…”


할머니와 큰아버지가 번갈아 악쓰며 부르는 소리를 우리는 듣고 있었지만 갈팡질팡하는 사람들 틈에 섞여서 도무지 헤어나갈 수가 없었다.

우리는 둘 다 고무신이 벗겨진 채 사람들에게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면서

울고 있었다.


우리들은 서로 손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서로 이름 부르며 가족을 찾는 소리와 군인들의 악에 바친 욕소리로

운동장은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머리 위에서 한 발의 총성이 벼락같이 터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사람들은 일제히 “아이고!” 소리를 지르며 서편 울타리 쪽으로 우르르 몰려가 붙었다. 운동장은 순식간에 물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몰려가고 난 빈자리에 한 여편네가 앞으로 엎어져 있고

옆에는 젖먹이 아이가 내팽개쳐져 있었다.

조용한 가운데 그 아기만 바락바락 악을 쓰며 울고 있었다.

 

 


“영배 각시 총 맞았져!”


누군가 이렇게 속삭였다.

흰 적삼에 번진 붉은 선혈이 역력했다.


“두살난 그 아기가 바로 방앳간 허는 장식이여, 후제 외할망이 키웠쥬. 이젠 결혼도 하고 씨 멸족할 뻔한 집이서 아들 둘까지 낳아시니

죽은 어멍 복을 입은 것일 거라, 아매도.”


작은당숙의 말이었다.

죽은 사람을 보자 나는 더럭 겁이 났다. 사람들이 뒤로 물러나 앞이 트였지만

길수형과 나는 장교가 권총을 빼들고 서 있는 조회대 뒤로 달려갈 엄두가 도무지 나지 않았다.

저쪽으로 가다간 저 사람이 틀림없이 총을 쏠 테지.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기만 했다.


사람들이 서편 울타리에 붙어 나올 생각을 하지 않자

군인들은 긴 장대 두 개를 들고 나왔다.

그건 교무실 앞 추녀 끝에 매달아두었던 것으로

학교 운동회 때마다 비둘기들을 넣은 대바구니 두 개를 맞붙여

얇은 종이를 발라 만든 큰 공을 높이 매달아놓은 데 사용되던 거였다.


그것은 얼마나 신나는 경기였던가.

청백으로 나뉜 우리들이 모래 넣어 꿰맨 헝겊공(오제미)을 던져 상대편 바구니를 먼저 터뜨리는 순간 비둘기들이 날고

머리 위로 오색 테이프가 흘러내리고 색종이가 나부끼던 기분이란.

그런데 바구니공을 매달아놓던 장대가 이런 엉뚱한 데 쓰일 줄이야.

장대 두 개는 이제 한쪽에 몰려 있는 사람을

울타리에서 떼어내서 내모는 구실을 했다.

장대 양끝에 군인 한 사람씩 붙어서 군중 속으로 끌고 들어가

장대로 오십 명쯤을 뚝 떼어내어 교문 밖으로 내몰아가는 것이었다.


이런 와중을 틈타 길수형과 나는 사람들 사이로 빠져나와 할머니가 있는 조회대 뒤편으로 냅다 뛰어갔다.

청년단원들이 우리 다리를 겨냥해서 대창을 아래로 휘둘렀다.

그러나 용케 맞지 않았다.

우리가 쫓기며 조회대 뒤로 가자 거기 모인 우익인사 가족들이

얼른 우리를 안으로 끌어넣어 주었다.


할머니가 달려들어 치마를 벌리고

닭이 병아리 품듯이 우리를 싸서 숨겼다.

우리 뒤를 쫓던 청년단원 두 명이 우리를 포기한 것은

마침 우리 뒤미처 달려드는 다른 사람들 때문이었으리라.

아이들과 아낙네 열 명쯤이 달려들었다가 마구 내지르는 대창에 쫓겨갔다.


장대 두 개가 서로 번갈아가며 사람들을 몰아갔다.

장대가 머리 위로 떨어질 때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지고 장대에 걸린 사람들은 빠져나오려고 허우적거렸다.

장대 뒤에서 빠져나오려는 사람들에게

몽둥이를 휘두르고 공포를 쏘아대자

사람들은 장대에 떠밀려 주춤주춤 교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교문 밖에 맞바로 잇닿은 일주도로에 내몰린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며불며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군인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울부짖는 할머니들,

총부리에 등을 찔려 앞으로 곤두박질치는 아낙네들,

군인들은 총구로 찌르고 개머리판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사람들은 휘둘러대는 총개머리판이 무서워 엉금엉금 기어갔다.

가면 죽는 줄 번연히 알면서 어떻게 제 발로 서서 걸어가겠는가.

뒤처지는 사람들에게는 뒤꿈치에다 대고 총을 쏘아댔다.


군인들이 이렇게 돼지 몰듯 사람들을 몰고

우리 시야 밖으로 사라지고 나면

얼마없어 일제사격 총소리가 콩볶듯이 일어나곤 했다.

통곡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할머니도 큰아버지도 길수형도 나도 울었다.

우익인사 가족들도 넋놓고 엉엉 울고 있었다.


우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마을에서 외양간에 매인 채 불에 타죽는 소 울음소리와 말 울음소리도 처절하게 들려왔다.

중낮부터 시작된 이런 아수라장은

저물녘까지 지긋지긋하게 계속되었다.

길수형이 말했다.


“그때 혼자 살아난 순이삼촌 허는 말을 들으난,

군인들이 일주도로변 옴팡진 밭에다가 사름들을 밀어붙였는디,

사름마다 밭이 안 들어가젠 밭담 우엔 엎디어젼 이마빡을 쪼사

피를 찰찰 흘리멍 살려달렌 하던 모양입디다.”

“쯧쯧쯧, 운동장에 벳겨져 널려진 임자 없는 고무신을 다 모아놓으면

아매도 가매니로 하나는 실히 되었을 거여.

죽은 사람 몇백 명이나 되까?”


하고 작은당숙이 말하자 길수형은 낯을 모질게 찌푸리며 말을 씹어뱉었다.

 

“면에서는 이 집에 고구마 멫가마 내고

저 집에 유채 멫가마 소출냈는지는 알아가도

그날 죽은 사람 수효는 이날 이때 한번도 통계 잡아보지 않으니,

내에참. 내 생각엔 오백 명은 넘은 것 같은디,

한 육백 명 안 되까 마씸?

한번에 오륙십 명씩 열한 번에 몰아가시니까.”

 

열한번째로 끌려가던 사람들은 그야말로 운수 대통한 사람들이었다.

때마침 대대장 차가 도착하여 총살 중지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이 불행한 사건에도 예외없이 ‘만약’이란 가정이 따라왔다.

만약 대대장이 읍에서부터 타고 오던 찝차가 도중에 고장만 나지 않았더라면 한 시간 더 일찍 도착했을 터이고, 그렇게 되면 삼백 명이나 사백 명은 더 살렸을 것이다.

따라서 희생자는 백 명 내외로 줄어들 것이고,

또 적에게 오염됐다고 판단된 부락을 토벌해서 백 명 정도의 이적행위자를 사살했다면 그건 수긍할 만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피살자 육백 명이란 수효는 옥석을 가리지 않은 무차별 사격을 의미했다.


“고모부님, 대대장이 말한 차고장은 핑계가 아닐까 마씸?

일개 중대장이 대대장도 모르게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를 수가 이서마씸?”


고모부는 그 당시 토벌군으로 애월면에 가 있었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할 터였다. 고모부는 한때 인근 부락인 함덕리에 주둔했던 서북청년으로만 구성된 중대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마침 사건 수개월 전에 애월로 이동해갔던 것이었다. 신혼초라 고모도 따라갔었다.


“그 당시엔 중대장 즉결처분권이란 것이 있을 때랐쥬.

또 갸들이 전투사령부의 작전명령에 따라 행동했댄 해도

작전명령을 잘못 해석하였을 공산이 커.

난 졸병 군대생활해서 잘은 모르지만

아마 그것도 견벽청야 작전의 일부일 거라.

쉬운 말로 소개작전이란 거쥬.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이란 것이 뭐냐믄

손자병법에서 따온 것이라는데,

공비를 소탕할 때 먼저 토벌군으로 벽을 쌓아 병풍을 만들고

그후 들을 말끔히 청소하는 거라.

산간벽촌을 일일이 다 보호헐 수 없는 것 아니냔 말이여.

그러니 일정한 거점만 확보하고 나머지 지역은 인원과 물자를 비워버려

공비가 발붙일 여지가 없게 하자는 궁리이었쥬.

그런디 인원과 물자를 비워버리라는 대목에서

그만 잘못 일이 글러진 거라.

작전 지역내의 인원과 물자를 안전지역으로 후송하라는 뜻이

인원을 전원 총살하고 물자를 전부 소각하라는 것으로

둔갑하고 말았으니 말이여.”


“아니, 고모부님도 참, 그 말을 곧이들엄수꽈?

그건 웃대가리들이 책임을 모면해보젠 둘러대는 핑계라 마씸.

우리 부락처럼 떼죽음당한 곳이 한둘이 아니고

이 섬을 뺑 돌아가멍 수없이 많은데

그게 다 작전 명령을 잘못 해석해서 일어난 사건이란 말이우꽈?

말도 안되는 소리우다.

이 작전명령 자체가 작전지역의 민간인을 전부

총살하라는 게 틀림없어 마씸.”


“겔쎄, 나도 중산간 부락민들을 해안지방으로 소개시키는 데

참가했었쥬마는… 겔쎄 말이여,

일단 몇날 몇시까지 소개하라고 포고령이 내린 후제도

계속 작전지역에 남아 있는 자는

공비나 공비 동조자로 간주해서 노인, 아이 할 거 없이

전부 사살하라는 명령은 있었쥬.

사실 작전지역내의 어떤 부락에 들어서민,

바로 전날에 두 집 건너서 하나씩 붙여놔둔 소개하라는 포고문이

발기발기 찢어젼 바람에 펄럭펄럭하는디,

이건 틀림없이 공비 소굴이구나 하는 생각이 팍 들어라.

그런디 이 부락사건은 소개하라고 사전에 포고령도 없어시니…”


그러나 작전명령에 의해 소탕된 것은 거개가 노인과 아녀자들이었다. 그러니 군경 쪽에서 찾던 소위 도피자들도 못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총질을 하다니! 또 도피생활을 하느라고 마침 마을을 떠나 있어서 화를 면했던 남정네들이 군경을 피해다녔으니까 도피자가 틀림없겠지만 그들도 공비는 아니었다. 사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공비에게도 쫓기고 군경에게도 쫓겨 할 수 없이 이리저리 피해 도망다니는 도피자일 따름이었다.


그런데도 군경측에서는 왜 도피자를 공비와 동일시했던가?

아마 그건 한때 무식한 부락민들이 저지른 섣부른 과오 때문이었나보다.

5․10선거 때 부락 출신 몇몇 공산주의 골수분자의 선동에 부화뇌동하여 선거를 보이콧한 사건이 화근이 된 것이었다.

그것이 두고두고 군경측에 부락을 적색시하는 빌미가 될 줄이야.

부락민들이 아무리 개과천선하여 결백을 내보여도 소용이 없었다.

부락민들이 5․10선거 보이콧을 선동했던 주모자 한라산 입산 공비 김진배의 아내를 부락에서 추방하고,

그의 밭 한가운데를 모여들어 파헤쳐, 비오면 물 차는 못을 만들면서까지

결백을 주장했으나, 군경의 오해는 막무가내였다.


밤에는 부락 출신 공비들이 나타나 입산하지 않는 자는 반동이라고 대창으로 찔러죽이고, 낮에는 함덕리의 순경들이 스리쿼터를 타고 와 도피자 검속을 하니,

결국 마을 남정들은 낮이나 밤이나 숨어 지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순경들이 도피자라고 찾던 폐병쟁이 종철이형은 공비가 습격해온 밤에 궤 뒤에 숨어 있다가 기침을 몹시 하는 바람에 발각되어 대창에 찔려죽었고

헛간 멍석 세워둔 틈에 숨어 있다가 역시 공비의 대창 맞고 죽은 완식이 아버지도 순경들이 찾던 도피자였다.

우리 종조부님도 사건 석 달 전에 부락 출신 공비의 대창에 찔려 돌아가셨다.

당시 1구 구장이던 종조부님은 밤중에 내려온 마을 출신 폭도들로부터

식량을 모아달라는 요구에 고개를 흔들었던 것이다.


“그렇게는 못해여. 쌀을 모아도랜 허지 말앙 차라리 빼앗앙가게. 자진해서 쌀 모아주었다가 냉중에 경찰에서 알민 우린 어떵 되는가. 숭시가 나고말고. 그러니 제발 부탁햄시메 쌀을 모아도랜 말앙 억지로 빼앗앙가게.”

 

이렇게 협조 못하겠다는 말에 화가 난 폭도들은 그 자리에서 가슴팍에 대창을 내질렀던 것이었다. 같은 날 밤 용케 약탈을 면했던 철동이네 집은, 약탈당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필시 공비와 내통함에 틀림없다는 엉뚱한 오해를 받아, 이튿날 경찰에게 화를 당했다.


나는 한밤중 밖에서 대창으로 창호지창을 퍽 찌르며 “모두 잠깨라. 우리가 왔다!” 하고 무섭게 속삭이던 목소리와 뒤미처 아버지의 겁먹은 얼굴 위에 쏟아지던 덴찌불을 생각하면 지금도 몸이 오싹해진다.


이렇게 안팎으로 혹독하게 부대낀 마을 남정들 중에는 아버지처럼 여러 달 전에 밤중에 통통배를 타고 일본으로 밀항해버린 사람도 있고 육지 전라도 땅으로 피신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집에서는 아무래도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지 사내아이들을 다른 마을로 보내기도 했다. 그것도 큰놈은 읍내 이모네 집에, 샛놈(가운데 아들)은 함덕 외삼촌한테, 막내놈은 또 어디에 하는 식으로 사방에 뿔뿔이 흩어놓았다. 그건 아마도 한군데 모여 있다가 몰살되어 씨멸족하면 종자 하나 추리지 못할까봐 생각해낸 궁리였으리라. 그러나 대부분의 남정네들은 마을에 그대로 눌러 있었는데, 이들은 폭도에 쫓기고 군경에 쫓겨 갈팡질팡하다가, 결국은 할 수 없이 한라산 아래의 목장으로 올라가 마른 냇가의 굴속에 피난했다.


행방을 알 길 없는 남편 때문에 모진 고문을 당하던 순이삼촌도 따라 올라갔다.

이 섬은 워낙 화산지대라 곳곳에 동굴이 뚫려 있어서, 우리 부락처럼 폭도에도 쫓기고 군경에도 쫓긴 양민들이 몰래 숨어 있기 안성맞춤이었다.

솥도 져나르고 이불도 가져갔다.

밥을 지을 때 연기가 나면 발각될까봐 연기 안 나는 청미래덩굴로 불을 땠다.

청미래덩굴은 비에도 젖지 않아 땔감으로는 십상이었다.

잠은 밥짓고 난 잉걸불 위에 굵은 나무때기를 얼기설기 얹어 침상처럼 만들고 그 위에서 잤다.

쌀은 아끼고 들판에 널려 까마귀밥이나 되고 있는 썩은 말고기를 주워다 먹었다.


겨울이 되어도 난리 때문에 미처 내리지 못한 소와 말이 목장에는 좀 남아 있었는데 그냥 놔두면 한라산 공비들의 양식이 된다고 토벌군이 총으로 쏘아죽여,

쇠고기만 운반해가고 말고기는 그대로 내버려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천장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혈거생활은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이불이 점점 젖어들고 얼어죽는 사람이 생겼다.


삼년 뒤 온 섬이 평정되어 할머니를 따라 목장에 고사리 꺾으러 갔다가 비를 만나 어느 동굴로 피해 들어갔을 때, 굴속에 사람의 흰 뼈다귀와 흰 고무신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하여튼 이렇게 남정네들이 마을을 비우자 군경측에서는 자연히 입산한 것으로 오해하게 되고 그러한 오해가 저 섣달 열여드레의 끔찍한 사건의 소지(素地)가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사건은 마을 남정들이 그 냇가 동굴에서 혈거생활을 시작한 지 아흐레 만에 일어난 것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날 순이삼촌은 우리 할머니에게 맡겨두었던 오누이 자식을 데리러 내려와 있다가 그만 화를 당하고 만 것이었다.

문득 길수형의 열띤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하여간에 이 사건은 그냥 넘어갈 수 없우다.

아명해도 밝혀놔야 됩니다.

두번 다시 이런 일이 안 생기도록 경종을 울리는 뜻에서라도

꼭 밝혀두어야 합니다.

그 학살이 상부의 작전명령이었는지

그 중대장의 독자적 행동이었는지

누구의 잘잘못인지 하여간 밝혀내야 합니다.

우린 그 중대장 이름도 모르는 형편 아니우꽈?”


이 말에 큰당숙어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거 무신 쓸데없는 소리고! 이름은 알아 무싱거(무엇) 허젠?

다 시국 탓이엔 생각하고 말지

공연시리 긁엉 부스럼 맹글 거 없져.”


고모부도 맞장구쳤다.


“하여간 그 작자들이 아직 퍼렇게 살아 있는 동안은

아마 어려울 거여.

그것들이 우리가 그 문제를 들고나오게

가만 놔둠직해여?

또 삼십년 묵은 일이니

형법상 범죄구성도 안될 터이고.”

 

그러나 길수형은 자기 주장을 꺾지 않았다.


“아니우다. 이대로 그냥 놔두민 이 사건은 영영 매장되고 말 거우다.

앞으로 일이십년만 더 있어봅서.

그땐 심판받을 당사자도 죽고 없고,

아버님이나 당숙님같이 증언할 분도 돌아가시고 나민

다 허사가 아니우꽈?

마을 전설로는 남을지 몰라도.”

 

길수형의 말에 갑자기 짜증이 났던지 고모부의 입에서 느닷없이 평안도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기쎄, 조캐,

지나간 걸 개지구 자꾸 들춰내선 멀하간?

전쟁이란 다 기런 거이 아니가서?”


순간 오십줄 나이의 고모부 얼굴에서 삼십년 전의 새파란 서북청년의 모습을 힐끗 엿본 느낌이 들었다. 가슴이 섬찟했다.

야릇한 반발감이 뾰죽하게 일어났다.


내 아래 또래의 아이들에게 몰래 양과자를 주어

아버지나 형이 숨은 곳을 가르쳐달라고 꾀어내던 서청 출신의 순경들,

철모르는 아이들은 대밭에서, 마루 밑에서,

외양간 밑이나 조짚가리 밑을 판 굴에서

여러 번 제 아버지와 형을 가리켜냈다.

도피자 아들을 찾아내라고 여든살 노인을 닦달하던 어떤 서청 순경은

대답 안한다고 어린 손자를 총으로 위협해서 무릎 꿇고 앉은 제

할아버지의 따귀를 때리도록 강요했다.

닭 잡아내라고 공포를 빵빵 쏘아대기도 했다.


그들은 또 여맹(女盟)이 뭣 하는지도 모르는 무식한 촌처녀들을 붙잡아다가 공연히 여맹에 가입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발가벗겨놓고 눈요기를 일삼았다.

순이삼촌도 그런 식으로 당했다.


지서에 붙들어다놓고 남편의 행방을 대라는 닦달 끝에 옷을 벗겼다는 것이었다.

어이없게도 그건 간밤에 남편이 왔다 갔는지 알아본다는 핑계였는데,

남편이 왔다 갔으면 분명 그짓을 했을 것이고,

아직 거기엔 분명 그 흔적이 남아 있을 테니 들여다보자는 것이었다.


나는, 어느날 마당에서 도리깨질하던 순이삼촌이

남편의 행방을 안 댄다고 빼앗긴 도리깨로 머리가 깨어지도록 얻어맞는 광경을 내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있었다.


거기다가 이들은 밭에서 혼자 김매는 젊은 여자만 보면

무조건 냅다 덮친다는 소문이었으니

나이 찬 딸을 둔 집에서는 이래저래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다.

그러니 딸이 겁탈당하기를 기다리느니 미리 선수를 써서 서청 출신 군인에게 시집 보낸 우리 할아버지의 처사는 백번 잘 한 일이었다.


아직 스무살 어린 나이에 별 분수를 모르던 고모부는 할아버지가 꾀로 어르는 바람에 얼떨결에 결혼하고 만 것이었는데 고모는 고모부보다 두 살이 더 많았다.


하여간 그 당시 도피자 가족들 중에는 목숨을 부지해보려는 방편으로 이런 정략결혼이 성행했는데, 그것은 연대가 교체되어 육지로 떠남에 따라 거의 파경에 이르고 애비 없는 자식들만 서럽게 자라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우리 고모부는 역시 할아버지가 잘 보아 고른 사람이라 그랬는지 휴전과 더불어 처가를 다시 찾아 입도한 후 지금까지 삼십년간 이 고장 사람이 되어 살아온 것이었다.

이러한 고모부가 방정맞게 갑자기 이북 사투리를 쓰다니.

고모부의 느닷없는 이북 사투리는 좌중의 다른 분들에게도 이런 것들을 일깨워주었는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벌써 멧밥을 짓는지 부엌에서 마른 솔가지 태우는 매운 냄새가 마루를 건너 흘러들어왔다.

고샅길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아마 한 집 제사를 끝내고 다른 집으로 옮아가는 사람들이리라.

고모부는 다른 사람들 귀에 거슬리는 줄도 모르고 다시 이북 사투리로 말을 꺼냈다.


“도민들이 아직도 서청을 안 좋게 생각하구 있디만,

조캐네들 생각해보라마. 서청이 와 부모형제들 니북에 놔둔 채 월남해왔갔서?

하도 뻘갱이 등쌀에 못니겨서 삼팔선을 넘은 거이야.

우린 뻘갱이라문 무조건 이를 갈았디.

서청의 존재 이유는 앳세 반공이 아니갔어.

우리레 무데기로 엘에스티(LST) 타구 입도한 건 남로당 천지인 이 섬에 반공전선을 구축하재는 목적이었디.

기린디 말이야,

우리가 입대해보니끼니 경찰이나 군대나 영 엉망이드랬어.

군기두 문란하구 남로당 뻘갱이들이 득실거리구 말이야.

전국적으로 안 그랜 향토부대가 없댔디만

특히 이 섬이 심하단 평판이 나 있드랬디.


이 섬 출신 젊은이를 주축으로 창설된 향토부대에

연대장 암살이 생기디 않나,

반란이 일어나 백여 명이 한꺼번에 입산해설라무니

공비들과 합세해버리디 않나…


그 백여 명 빠져나간 공백을 우리 서청이 들어가 메꾸었디.

기래서 우린 첨버텀 섬사람에 대해서 아주 나쁜 선입견을 개지구 있댔어.

서청뿐만이가서? 야, 그땐 다 기랬어.

후에 교체해개지구 들어온 다른 눅지 향토 부대두 매한가지래서.

사실 그때 눅지사람치구 이 섬 사람들을 도매금으로 몰아쳐

뻘갱이루다 보지 않는 사람이 없댔디.

43폭동이 일어나디, 510선거를 방해해설라무니

남한에서 유일하게 이 섬만 선거를 못 치렀디,

군대는 반란이 일어나디.

하이간 이런 북새통이었으니끼니…”


이때 큰아버지가 끙 앓는 소릴 내며 고개를 돌려 외면해버렸다.

눈썹이 발에 밟힌 송충이처럼 꿈틀거리는 것으로 보아 몹시 심기가 뒤틀린 모양이었다.

고모부는 그제서야 이북 사투리를 쓰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던지

흠칫 놀라며 말을 멈췄다.

큰당숙, 작은당숙 어른도 못마땅한 표정으로 담배만 풀썩풀썩 빨아댔다.

잠시 거북살스러운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언제나 반죽 좋은 고모부는 곧 섬사투리로 돌아와 다시 말을 꺼냈다.


“성님, 서청이 잘했다는 말이 절대 아니우다.

서청도 참말 욕먹을 건 먹어야 헙쥬.

그런디 이 섬 사람을 나쁘게 본 건 서청만이 아니랐우다.

육지사람치고 그 당시 그런 생각 안 가진 사람이 없어서 마씸.

그렇지 않아도 육지사람들이 이 섬 사람이랜 허민

얕이 보는 편견이 있는디다가

이런 오해가 생겨부러시니… 내에참.”


“맞는 말이라. 그땐 왼 섬이 육지것들 독판이랐쥬.”

하고 큰당숙어른이 혀를 찼다.


“그때 함덕 지서주임이 본도 사람이랐는디

부하들한티 명령 없이 도피자를 총살 말렌 당부했는디도

그 육지것들이 자기 주임이 제주사람이라고 얕이 보안

함부로 총질했쥬.”


이 말에 작은당숙이 한손을 내저으며 이의를 달았다.


“박주임이 참말 그런 말을 해서까 마씸?

아매도 죄없는 사람 죽인 책임을

조금이라도 벗어보젠 변명허는 걸 거우다.”


현모형도 한마디 거들었다.


“난 들으니까 박주임 그 사람이

서청보다 되리어 더 악독하게 놀았댄 헙디다.”

 

고모부가 다시 말을 받았다.


“그것도 그럼직한 말이쥬. 그 당시 본도 출신 순경 중에는 자기네들이 서청헌티 빨갱이로 몰리카부댄 되리어 한술 더 떠서 과격한 행동으로 나간 사람들이 더러 있어시니까.”

“아니라. 나도 잡혀가 취조받고 풀려나온 인수 아방한티 들은 이야기쥬만,

박주임은 잡아온 도피자를 여러 사람 몰래 놓아주었댄 해여라.

악독한 것은 그 밑에 있는 육지것들이라.”

 

사건 후 이년쯤 뒤에 박주임은 한번 부락에 왔다가 치도곤을 당한 일이 있었다.

마침 휴가중이라 군복 입고 있던 그 감나무집 청년은 “죽은 우리 아방, 우리 성을 살려내라, 이 사람백정놈아, 고리백정놈아!” 하고 부르짖으며 작대기를 휘둘렀던 것이다. 그 인구라는 청년은 현모형과 한날 한시에 입대한 해병대였다.

 

그 무렵 뒤늦게 초토작전을 반성하게 된 전투사령부는 선무공작을 펴서 한라산 밑 동굴에 숨은 도피자들을 상당수 귀순시켰는데 현모형도 그중에 끼여 있었던 것이다. 때마침 6․25가 터져 해병대 모병이 있자 이 귀순자들은 너도나도 입대를 자원했다. 그야말로 빨갱이 누명을 벗을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대로 눌러있다간 언제 개죽음당할지도 모르는 이 지긋지긋한 고향을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니까 현모형은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해병대 3기였다. ‘귀신 잡는 해병’이라고 용맹을 떨쳤던 초창기 해병대는 이렇게 이 섬 출신 청년 3명을 주축으로 이룩된 것이었다. 이 지그 용맹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건 따지고 보면 결국 반대급부적인 행위가 아니었을까?


빨갱이란 누명을 뒤집어 씌워 몇번씩이 죽을 고비를 넘긴 그들인지라 한번 여봐란 듯이 용맹을 떨쳐 누명을 벗어 보이고 싶었으리라. 아니, 것만이 아니다. 어쩌면 거기엔 보복적인 감정이 짙게 깔려 있지 않았을까? 그 사람에게 당한 것을 그 사람에게 돌려준다는식으로 말이다. 섬 청년들이 6․25동란 때 보인 전사에 빛나눈 용맹은, 한때 군경측에게 섬 주민이라면 무조건 좌익시해서 때려잡던 단세포적인 사고방식이 얼마나 큰 죄악을 저질렀나를 반증하는 한 모형이 된다. 전사를 듣고 있지니 머리 속에게 울화가 불끈 치밀어올랐다. 기분 같아선 은연중에 서청을 변호하는 고모부를 면박주고 싶었지만 꾹 눌러참았다. 그래도 내 말은 약간 서슬져서 나왔다.


“고모부님, 고모분 당시 삼십만 도민 중에

진짜 빨갱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햄수꽈?”

“그것사 만 명쯤 되는 비무장공비 빼부리면 얼마 되여?

무장공비 한 3백 명쯤 되까?”


이 말에 나도 모르게 발끈 성미가 났다.


“도대체 비무장공비란 것이 뭐우꽈?

무장도 안한 사람을 공비라고 할 수 이서 마씸?

그 사람들은 중산간 부락 소각으로 갈 곳 잃어

한라산 밑 여기저기 동굴에 숨어 살던 피난민이우다.”


나의 반박하는 말에 고모부는 의외라는 듯이 흠칫 나를 바라보았다.


“그건 서울 조캐 말이 맞아. 나도 직접 내 눈으로 봤쥬.

목장지대서 작전중인디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길래

덤불 속을 헤쳐 수색해보난 동굴이 나왔는디

그 속에 비무장공비 스무남은 명이 들어 있지 않애여.”


“비무장공비가 아니라 피난민이라 마씸.”


나는 다시 한번 단호하게 고모부의 말을 수정했다.


“맞아, 내가 말을 자꾸 실수해졈져.

그땐 산에 올라간 사람은 무조건 폭도로 봤이니까.

하이간 굴속에 있는 사람은 영 행색이 말이 아니라서.

굶언 피골이 상접헌디다가 한겨울에 젖은 미녕옷 한벌로 몸을 가리고 떨고 있는디, 동상 걸려 발구락 모지라진 사람도 더러 있었쥬.

소위 비무장공비란 것이 이 모냥으로 동굴 속에서 비참한 꼴로 발견되니까 냉중엔 상부에서도 생각을 달리 쓰게 되어서.

구호물자를 준비한 갱생원 차려놓고 선무공작을 썼쥬.

엘 파이브(L-5) 연락기로 한라산 일대에 전단을 뿌련

투항을 권고하난 하루에도 수십 명씩 떼지어 귀순자들이 내려와서라.”


“바로 그것입쥬. 선무공작은 왜 진작에 쓰지 못했느냐는 말이우다.

처음부터 선무공작을 했으면 인명피해가 그렇게 많이 나지 않았을 거라 마씸.

폭도도 무섭고 군경도 무서워서 산으로 피난간 양민들을 폭도로 간주했이니…”


“겔쎄 말이여. 대유격전이란 것이 본디 정치 7에 군사 3인데…

이건 정치는 쥐뿔도 없고 무작정 군사행동만 했이니…

창설 일년도 못된 군대니 오죽할 것고….”


아, 떼죽음당한 마을이 어디 우리 마을뿐이던가.

이 섬 출신이거든 아무라도 붙잡고 물어보라. 필시 그의 가족 중에 누구 한 사람이, 아니면 적어도 사촌까지 중에 누구 한 사람이 그 북새통에 죽었다고 말하리라.

군경 전사자 몇백과 무장공비 몇백을 빼고도 5만 명에 이르는 그 막대한 주검은 도대체 무엇인가?

 

대사를 치르려면 사기그릇 좀 깨지게 마련이라는 속담은 이 경우에도 적용되는가. 아니다. 어디 그게 사기그릇 좀 깨진 정도냐. 아, 멀리 육지에서 바다 건너와 그 자신 적잖은 희생을 치러가면서 폭동을 진압해준 장본인들에게 오히려 원한을 품어야 하다니, 이 무슨 해괴한 인연인가.


그러나 누가 뭐래도 그건 명백한 죄악이었다.

그런데도 그 죄악은 30년 동안 여태 단 한번도 고발되어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가 그건 엄두도 안 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군지휘관이나 경찰간부가 아직도 권력 주변에 머문 채 아직 떨어져나가지 않았으리라고 섬사람들은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섣불리 들고나왔다간 빨갱이로 몰릴 것이 두려웠다. 고발할 용기는커녕 합동위령제 한번 떳떳이 지낼 뱃심조차 없었다. 하도 무섭게 당했던 그들인지라 지레 겁을 먹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결코 고발이나 보복이 아니었다. 다만 합동위령제를 한번 떳떳하게 올리고 위령비를 세워 억울한 죽음들을 진혼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가해자가 쉬쉬해서 30년 동안 각자의 어두운 가슴속에서만 갇힌 채 한번도 떳떳하게 햇빛을 못 본 원혼들이 해코지할까봐 두려웠다.


섣달 열여드레 그날 해질녘이 다 되어서 군인들이 두 대의 스리쿼터에 분승해서 떠난 다음에도 마을사람들은 그대로 운동장에 남아 있었다.

그들은 조회대 뒤 우익가족이 있는 데로 몰려 살아남은 가족끼리 서로 붙안고서 마을에서 들려오는 타죽는 소 울음보다 더 질긴 울음을 입에 물고 있었다.

 

내 입에서도 겁먹은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한 운동장의 진창흙은 함부로 내달린 스리쿼터 바퀴자죽으로 여기저기 무섭게 패어 있고,

벗겨진 만월표 고무신짝들이 수없이 널려 있었다.


그 위로 불타는 마을의 불빛이 밀려와 땅거죽이 붉게 물들었다. 교실 창이 이내 벌개졌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은 하늘 가득히 붉은 노을처럼 번져가는 불기운에 압도되어 더욱 서럽게 곡성을 올릴 뿐 누구 하나 울타리께로 가서 불타는 마을을 직접 내려다보려는 사람은 없었다.


날이 어두워짐에 따라 마을을 태우는 불빛은 어둠을 사르며 점점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이것이 일시적으로 확 붉었다가 꺼져버리는 저녁놀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불빛은 오히려 어두워질수록 더욱도 큼직하게 군림하여갔다. 낮게 드리운 구름떼는 불빛에 물들어 붉은 내장처럼 꿈틀거리고, 바다는 멀리 달려도섬까지 불빛이 벌겋게 번져나가 마치 들불이 타오르는 형국이었다.

운동장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에도 더러운 피에 얼룩진 듯 불그림자가 너울거렸다. 마을 쪽에서는 집집마다 불붙은 고방(庫房)의 쌀독들이 펑펑 터지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할아버지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던 큰아버지는 군인들이 마을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싶자 변소 가는 척하고 몰래 학교를 빠져나갔다.

할아버지는 며칠 전 남의 집 소뿔에 찔린 허벅지 상처 때문에 기동도 못하고 집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큰아버지는 한참 후에야 맥없이 돌아왔는데 그의 축 늘어진 적삼 소매에서는 연기 냄새가 지독하게 났다.

할머니가 먼저 울음을 터뜨리고 우리도 따라 울었다. 할아버지는 짐작대로 총 맞고 죽어 있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시신에 화기가 미치지 않은 것이다.

할아버지는 아픈 몸을 이끌고 문짝들을 떼어 텃밭으로 내던지고 난 다음 마지막으로 병풍을 들고 나오다가 감나무 밑에서 총을 맞은 모양이었다.


그날 밤 사람들은 한기를 피해 모두 한교실로 몰려들어가 서로 붙안고 밤을 지새웠는데, 밤중에 우리들은 두 번 호되게 놀랐었다.

한번은 마을에서 대밭이 타면서 마구 터지는 폭죽소리를 총소리로 잘못 알고 놀랐고, 또 한번은 죽은 줄만 알았던 순이삼촌이 살아 돌아와 밖에서 유리창을 두드렸을 때였다. 삼촌은 밤이 이슥해진 그때까지 시체 무더기 속에 파묻혀 까무러쳐 있었던 것이다.


교실 안에 들어선 당신은 이상하게도 사람들에게 접근하려 들지 않았다. 길수형이 가서 소매를 잡고 끌어도 막무가내로 뿌리치고 저만치 홀로 떨어져 웅크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울지도 않았다. 두 아이를 잃고도 울음이 나오지 않은 것은 공포로 완전히 오관이 봉쇄되어버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마 울음은 공포가 물러가는 며칠 후에야 둑이 터지듯 밀려나올 것이었다.


불은 이튿날 아침까지 탔다. 밤새 울음으로 탈진했던 사람들이 날이 새자 아연 활기를 띠었다. 해가 채 떠오르기도 전인데 우리들은 마을로 한꺼번에 몰려갔다. 갯바람에 밀려오는 자욱한 연기 때문에 맞바로 들어갈 수 없어서 멀찍이 우회해서 바닷가로 해서 마을로 들어갔다.


사람들의 눈은, 밤새 뜬눈으로 새우며 운데다 독한 연기를 쐬어서 토끼눈처럼 빨개 있었다. 아니, 살려고 눈이 벌개 있었다는 표현이 더 옳으리라.

불타고 있는 집이 아직도 많아서 사람들은 불 꺼진 해변 쪽에 하얗게 몰렸다.

네 집, 내 집이 따로 없었다.

불타버린 집터 아무데나 들어가 타다 남은 좁쌀, 고구마를 퍼담았다.

고구마 중에도 탄숯같이 되어버린 것도 있었지만 먹기 좋게 익은 것도 있어서 사람들은 그것으로 전날 점심과 저녁을 거른 고픈 배를 달랬다.

타죽은 소, 돼지도 각을 내어 나누어 가졌다.


이렇게 사람마다 등짐 하나씩 만들어 지고 함덕으로 소개하였다.

밤새 울음으로 탈진했던 사람들이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났을까?

모두가 보통때 두 배나 되는 짐을 지어날랐다.


순이삼촌은 멱서리 하나를 지고도 부족했던지

몸뻬 가랑이에다 탄 좁쌀을 채워넣어가지고

함덕까지 시오릿길을 걸어갔던 것이었다.

수용소 시설도 없이 그냥 함덕에 내팽개쳐진 우리 부락 사람들은

우선 잠잘 곳이 문제였다.


용케 빈방이나 온 가족이 다 떠나버린 도피자 집이 얻어걸린 경우는 다행이었지만, 그렇지 못한 식구들은 말방앗간이나 남의 집 헛간, 외양간을 빌려 써야만 했다.

하기는 빈방을 구한 사람도 이불 없기는 매한가지라

방에다 보릿짚을 잔뜩 넣고 살았으니

헛간이나 외양간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도피자 가족들은 함덕국민학교에 수용되어

취조를 받고 닷새 만에 풀려나왔는데

순이삼촌도 그중에 끼여 있었다.

그 닷새 동안 할머니 심부름으로 길수형과 내가 번갈아가며 차좁쌀 주먹밥을 매일 한덩어리씩 차입해주었다.

마지막날엔 내가 주먹밥을 가지고 가다가 도중에 풀려나오는 순이삼촌을 만났는데 그 몰골은 차마 끔찍한 것이었다.

비녀가 빠져나가 쪽이 풀리고 진흙으로 뒤발한 검정 몸뻬에다 발은 맨발이었는데, 길가 돌담을 짚고 간신히 발짝을 떼며 허위허위 걸어오고 있었다.


삼촌은 서울 우리 집에 있을 적에 궂은날이면 허리뼈가 쑤셔 뜨거운 장판에 지져대곤 했는데,

생각하면 그게 다 그때 얻은 골병임에 틀림없었다.


함덕으로 온 지 두 달도 못되어 양식이 떨어진 피난민들은

들나물과 갯가의 파래나 톳을 삶아 멸치젓 국물에 찍어먹으면서

간신히 두 달을 버텼는데 그제서야 소개령이 해제되어 향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부락민들이 마을에 돌아와서 맨 먼저 한 일은

시체를 처리하는 일이었다.

일주도로변의 순이삼촌네 밭을 비롯한 네 개의 옴팡밭에

늘비하게 널려진 시체를 제각기 찾아다가 토롱(土壟)을 만들어 가매장했다.


석 달 가까이 방치되었던 시체들이라 까마귀밥이 되고 풍우에 썩어

흐물흐물 문드러져 탈골되었으니, 누구의 시체인지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겨우 옷가지를 보고 구별했는데 동(東)동네 누구는 제 아버지 시신을 찾아놓고 지고 갈 지게를 가지러 간 사이에 다른 사람이 잘못 알고 가져가버린 일도 있었다.

애어머니들은 대개 제 자식의 몸 위에 엎어져 죽어 있었는데

그건 죽는 순간에도 몸으로 총알을 막아 자식을 보호해보려는 처절한 몸짓이었다.

 

그럭저럭 시체를 가매장하고 나서

밭에 나가 보리를 거둬들였는데,

거둬들일 시기를 놓친 뒤라 대궁이 썩은 보리들이 온 밭에

늘비하게 쓰러져 몽창몽창 썩고 있었다.

썩어가는 보리이삭들은 퍼렇게 싹이 트고 들쥐들이 마구 설쳐댔다.

게다가 난리 때문에 한번도 김을 못 매어

범이 새끼치게 잡초가 무성했으니

그해 보리농사란 게 한 집에 멱서리로 하나가 고작이었다.


그 다음에 급히 서둘러 한 일은 움막 짓는 일이었다.

들에서 소나무와 억새를 베어다가 하루이틀 새에 움막을 세웠다.

칡덩굴로 서까래를 얽어매고 지붕도 벽도 억새를 엮어 둘러쳤다.

게다가 이불과 요를 태워먹고 없어 보릿짚을 잔뜩 움막 속에 처넣었으니

그건 영락없이 돼지우리였다.


집말고도 돼지와 똑같은 게 하나 더 있었는데

그건 똥이었다.

양식이 모자라 돼지사료로 쓰는 밀기울로 범벅해 먹고

파래밥, 톳밥을 해먹었으니 돼지똥과 사람똥이 구별될 리가 없었다.


밀기울밥도 양껏 먹어본 적이 없었다.

작은 놋쇠양푼 하나에 밥을 퍼놓고 네 식구가 둘러앉으면

밥 위에다 숟갈로 금을 그어 제 몫을 표시해놓고 먹었다.

달려도섬 건너편 갈치밭에 배를 띄우면 그래도 국거리로 살찐 갈치가 꽤 잡힐 텐데, 곧 시작된 성 쌓는 일 때문에 주낙질은 물론

잠녀의 물질도 일체 허락되지 않았다.


부락민들은 순경들의 감독을 받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눈 팔 새 없이 허기진 배를 안고 성을 쌓지 않으면 안되었다.

말하자면 전략촌 건설이었다.

불탄 집터의 울담도 허물고 밭담도 허물어다가 성을 쌓았다.

그것도 모자라 묘지를 두른 산담까지 허물어다 날랐다.

순이삼촌도 임신한 몸으로 돌을 져날랐다.

 

남정들이 출정해버린 부락에 남은 건 노인과 아녀자들뿐이라

그 역사는 거의 두 달 가까이나 걸렸다.

전략촌을 두 바퀴 두르는 겹성이었다.

두 성 사이에는 실거리나무, 엄나무 따위 가시 많은 나무를 베어다 넣었다.

길수형과 나 같은 어린애도 동원된 그 일은 참으로 고되었다.

우선 배가 고파 견딜 수 없었다.

 

허기진 뱃심으로 돌덩이를 들다가 힘에 부쳐 놓치는 바람에

발등을 찍히는 사람들도 많았다.

겨우 성이 완성되자 낮이나마 주낙질과 물질이 허락되었다.

밤이 되면 성문이 닫혀 사람들은 일체 성밖 출입이 금지되고

순번제로 초소막 지키러 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국민학교 3, 4학년에서 일년째 쉬고 있던 나와 길수형도 대창을 하나씩 들고 막(幕)을 지키러 나가곤 했다. 순이삼촌도 만삭의 몸인데도 우리 초소에 대창 들고 막 지키러 나왔다. 사건날의 그 무서운 공포를 겪었는데도 아기는 떨어지지 않고 살아 있었던 것이다. 사건날 오누이를 한꺼번에 잃은 삼촌에게는 뱃속의 아기가 유일한 씨앗이었다.


어려운 시절에 아기를 가진 삼촌은 먹을 것을 구하느라고

그야말로 눈이 벌개 있었다.

만삭의 몸이라 물질은 못하고 하루 종일 땡볕에 갯가를 기어다니며

굴, 성게를 까먹고, 게, 보말(갯우렁이) 따위를 잡았다.

밤에 초소막에 나올 때는 보말 삶은 것 한 채롱 가득 삶아가지고 와서는

우리에게 먹어보라는 말 한마디 없이 밤새도록 혼자서 걸귀처럼 까먹어대곤 했다. 여자가 아기를 배면 사정없이 먹어댄다는 걸 몰랐던 나는

순이삼촌이 걸신들려 실성하지 않았나 생각할 지경이었다.

 

이런 전략촌 생활은 거의 일년 넘게 계속되었지만 그동안 한번도 공비의 습격을 당한 적이 없었다. 한번은 밤중에 성문께에서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서 모두 혼비백산한 적이 있었지만, 그건 나중에 알고 보니 낮에 들에서 놓친 누구 집 소가 밤에 제 발로 성까지 걸어와서 부스럭거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결국 해안지방의 축성은 과잉조처라는 게 판명된 셈이었다.

이미 몇십 명으로 전력이 크게 줄어든 입산폭도들은

해안지방을 약탈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부락민들은 일년이 넘도록 한번도 써먹어본 일이 없는 무용지물의 성을

다시 허물고 제각기 제 집터로 돌아갔다.

성을 허문 돌을 날라다가 다시 울담과 벽을 쌓고 새로 집을 지었다.

집이라고 해야 방 하나에 부엌 딸린 두 칸짜리 함바집이었다.

못이 없어서 대신 굵은 철사를 잘라 썼으니 오죽한 집이었을까?


순이삼촌도 우리 큰집에서 몸을 풀고 큰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불탄 집터에다 조그만 오두막집을 지어올렸다.

그러나 일가족이 전부 몰살되어 집을 세우지 못한 채

그대로 방치된 집터도 더러 있었다.


그 무렵 내 또래 아이들은 사람 죽은 일주도로변의 옴팡밭에서

탄피를 주워다 화약총을 만들기가 유행이었다.

아이들은 이제 옴팡밭의 비극을 까맣게 잊고 사람 죽인 탄피를 주워모았다.

그렇다. 무럭무럭 자라는 데 도움 안되는 것은 무엇이든 편리하게 잊어버리는 게 아이들의 특성이 아닌가.


그러나 어른들은 도무지 잊을 수 없었다.

아이들이 장난으로 팡팡 쏘아대는 화약총 소리에도 매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그들이었다. 어떤 아이는 어디서 났는지 불에 타서 엿가락처럼 휘어진 총신만 남은 구구식 총을 끌고 다니다가 제 아버지한테 얻어맞고 빼앗겼는데,

총의 그 푸르딩딩한 탄 쇠빛은 꼭 죽은 피 빛깔을 연상시켜주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순이삼촌만큼 후유증이 깊은 사람은 없었으리라.

순이삼촌네 그 옴팡진 돌짝밭에는

끝까지 찾아가지 않는 시체가 둘 있었는데

큰아버지의 손을 빌려 치운 다음에야 고구마를 갈았다.

그해 고구마농사는 풍작이었다.

송장거름을 먹은 고구마는 목침덩어리만큼 큼직큼직했다.


더운 여름날 당신은 그 고구마밭에 아기구덕을 지고 가 김을 매었다.

옴팡진 밭이라 바람이 넘나들지 않았다.

고구마 잎줄기는 후줄근하게 늘어진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바람 한점없는 대낮, 사위는 언제나 조용했다.

두 오누이가 묻힌 봉분의 뗏장이 더위먹어 독한 풀냄새를 내뿜었다.


돌담 그늘에는 구덕에 아기가 자고 있었다. 당신은 아기구덕에 까마귀가 날아들까봐 힐끗힐끗 눈을 주면서 김을 매었다.

이랑을 타고 아기구덕에서 아득히 멀어졌다가 다시 이랑을 타고 돌아오곤 했다.

호미 끝에 때때로 흰 잔뼈가 튕겨나오고 녹슨 납탄환이 부딪쳤다.

조용한 대낮일수록 콩볶는 듯한 총소리의 환청(幻聽)은 자주 일어났다.

눈에 띄는 대로 주워냈건만 잔뼈와 납탄환은

삼십년 동안 끊임없이 출토되었다.

그것들을 밭담 밖의 자갈더미 속에다 묻었다.

 

그 옴팡밭에 붙박인 인고(忍苦)의 삼십년,

삼십년이라면 그럭저럭 잊고 지낼 만한 세월이건만

순이삼촌은 그렇지를 못했다.

흰 뼈와 총알이 출토되는 그 옴팡밭에 발이 묶여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당신이 딸네 모르게 서울 우리 집에 올라온 것도

당신을 붙잡고 놓지 않는 그 옴팡밭을 팽개쳐보려는

마지막 안간힘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오누이가 묻혀 있는 그 옴팡밭은 당신의 숙명이었다.

깊은 소(沼) 물귀신에게 채여가듯

당신은 머리끄덩이를 잡혀 다시 그 밭으로 끌리어갔다.

그렇다. 그 죽음은 한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30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당신은 그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다만 30년 전 그 옴팡밭에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30년의 우여곡절한 유예(猶豫)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생각을 마무리짓고 나자 나는 문득 담배 피우고 싶은 충동이 조바심치듯 일어났다. 좌중은 어느 틈에 나만 빼놓고 농사얘기로 동아리져 있었다.


“올해는 제발 작년모냥 감저 시세가 폭락하지 말았으면 좋을로고…

빌어먹을, 그눔의 가을장마는 뜽금없이 터져가지고는

썰어 말리던 감저에 곰팽이 피어부렀이니…”

 

나는 밖으로 나와 마당귀에 있는 조짚가리에 등을 기대고 담배를 피워물었다.

마당에 얇게 깔린 싸락눈이 바람에 이리저리 쏠리고 있었다.

음력 열여드레 달은 구름 속에 가려 있었지만 주위는 희끄무레 밝았다.

고샅길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기척이 들려왔다.

아마 두어 집째 제사를 끝내고 마지막 집으로 옮아가는 사람들이리라. <끝>

<1978, 창작과 비평 가을호>

 

 

[출처] 순이 삼촌 / 현기영|작성자 

[배경음악] Tsetsagmaa - A Wind With No Na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