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이도가(武夷棹歌)"
주자(朱子)의 무이도가(武夷櫂歌) 10수(首)를 해설한 글
□ 해설 / 포저(浦渚) 조익(趙翼)
주공(朱公) 자신이 제목을 붙이기를 “순희 갑진년 2월에 정사에서 한가히 거하다가 무이도가 10수를 장난으로 지어 함께 노니는 벗들에게 보여 주며 서로들 한번 웃었다.〔淳熙甲辰仲春 精舍閑居 戱作武夷櫂歌十首 呈諸友遊 相與一笑〕”고 하였다.
[序曲] 무이산 위에는 신선이 살고 있고 / 武夷山上有仙靈
산 아래엔 찬 냇물이 굽이굽이 맑아라 / 山下寒流曲曲淸
그 속의 멋진 경치 아시고 싶거들랑 / 欲識箇中奇絶處
뱃노래 두세 가락 한가히 들어 보소 / 棹歌閑聽兩三聲
산상(山上)의 선령(仙靈)은 도(道)의 본원(本原)이 하늘에서 나온 것을 비유한 것이 아닌가 한다. 산하한류곡곡청(山下寒流曲曲淸)은 이 도의 근원이 깊고 흐름이 멀어서 곳곳마다 모두 아름다운 것을 표현한 것이다. 곡곡(曲曲)은 아래에 나오는 구곡(九曲)을 가리킨다. 개중기절처(箇中奇絶處)는 굽이마다 모두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지고 있는 것을 말한다. 뱃노래 두세 가락이란 아래에 나오는 9수(首)의 시를 가리키니, 아래의 9수에서 아름다운 그 경치를 표현해 내었다는 말이다. 장차 아래의 9수를 지으려 하면서 먼저 이 말을 꺼내었으니, 이것은 곧 총서(總序)에 해당한다. 나름대로 생각해 보건대, 이 지역은 그윽하고 깊숙해서 사람들이 찾아와 노니는 일이 드물기만 하다. 그런데 그 속의 산과 물의 경치가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기이해지다가, 계곡이 끝나는 곳에 이르러서는 또 문득 평탄하고 널찍한 공간이 활짝 열려 있다. 따라서 이것을 가지고 도를 향해 나아가는 일에 비유할 수가 있기 때문에, 주자(朱子)가 이 10수의 시를 지어 산수(山水)에 흥을 붙이면서 비유한 것이니, 아래의 9수는 도를 향해 나아가는 순서를 말한 것이고, 이 1수는 총서 격으로 맨 앞에 내놓은 것이다.
일곡이라 냇가에서 고깃배에 올라타니 / 一曲溪邊上釣船
만정의 봉우리 그림자가 맑은 시내에 잠겼어라 / 幔亭峯影蘸晴川
무지개 다리 끊긴 뒤로는 소식도 알 길 없이 / 虹橋一斷無消息
일만 골짜기 일천 바위가 푸른 연무에 갇혔도다 / 萬壑千巖鎖翠煙
일곡(一曲)은 바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장차 이 계곡에서 노닐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이곳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이것을 취해서 초학(初學)에 비유한 것이다. 고깃배에 올라타는 것은 학문을 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봉영잠청천(峯影蘸晴川)은 처음으로 보이는 것이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아직도 보이는 것이 그림자이고 보면, 방불하게 보이는 것이 있을 따름이지 진정으로 보았다고는 꼭 말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초학자는 본 것이 혹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확실한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홍교일단무소식(虹橋一斷無消息)은 다리가 끊긴 뒤로 건너간 사람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안의 경치를 다시는 알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만학천암(萬壑千巖)은 아래 이곡(二曲)에서부터 구곡(九曲)까지의 산수의 승경(勝景)을 가리키고, 쇄취연(鎖翠煙)은 사람에게 보이지 않게 된 것을 말한다. 들어가는 곳의 다리가 끊어져서 사람이 건널 수 없게 되었고 보면, 그 깊숙한 곳의 가경(佳境)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는 이 도(道)가 단절된 것이 오래된 것을 비유한 것이다. 첫머리의 문로(門路)를 향할 뜻마저 아직 있지 않다면, 깊이 나아가 고원(高遠)한 경지에 이를 수 있는 희망을 어떻게 다시 가질 수가 있겠는가. 이 도 속에는 즐길 만한 경계가 한없이 많건마는 이를 추구하는 자가 없어서 언제나 텅 비고 적막한 땅으로 버려져 있는 것을 이 시는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곡이라 우뚝 서 있는 옥녀봉이여 / 二曲亭亭玉女峯
꽃 꽂고 물 굽어보며 누굴 위해 화장했노 / 揷花臨水爲誰容
도인에게 양대의 꿈이 다시 있을 리야 / 道人不復陽臺夢
흥이 돋는 것은 앞 산의 몇 겹 운무일 뿐 / 興入前山翠幾重
사람이 만약 도를 배우려고 결심하였다면 도에 해를 끼치는 물욕(物欲)을 근절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여색(女色)으로 인한 피해가 더욱 크기 때문에, 도를 배우는 자로서는 더더욱 이것을 깊이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 두 번째 굽이를 학문하는 순서로 말하면 일단 학문의 길에 들어선 단계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 마침 그곳에 옥녀봉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취해서 비유로 삼은 것이다. 도인불부양대몽(道人不復陽臺夢)은 도를 배우는 사람이 다시는 여색에 미련을 두지 않는 것을 말하고, 전산취기중(前山翠幾重)은 앞으로 나올 삼곡(三曲)부터 구곡(九曲)까지를 가리킨다. 이는 더 이상 여색에 미련을 두지 않음은 물론이요, 마음속으로 사모하고 좋아하며 지향하는 것은 오직 도에 있다는 말이다. 그의 뜻이 드높고 원대하기 때문에, 형기(形氣)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구구한 욕구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고 떨쳐 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대저 남녀의 관계 속에는 인간의 크나큰 욕망이 내재하고 있다. 따라서 만약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 채 오직 욕망만을 따를 경우에는, 장차 더럽고 비천한 정욕만을 추구한 나머지 금수(禽獸)의 지경으로까지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도를 배우는 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찌 만리 멀리 떨어지는 일만 될 뿐이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이것을 근절해야만 도를 행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시가 학문을 처음 시작하는 단계에서 바로 이것을 가지고 먼저 경계한 것은, 이것이 해를 끼치는 정도가 가장 심각한 만큼 우선 근절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삼곡이라 산에 걸려 얹혀 있는 배를 보소 / 三曲君看架壑船
모를레라 노 멈춘 지 몇몇 해이런고 / 不知停棹幾何年
바다가 지금 뽕 밭으로 변해 있나니 / 桑田海水今如許
포말과 풍등 같은 인생 감히 스스로 아끼리오 / 泡沫風燈敢自憐
가학선(架壑船)은, 옛적에 큰물이 져서 배가 높은 곳까지 떠밀려 올라왔다가 물이 빠진 뒤에 그대로 땅에 버려진 채 오랜 세월 낡고 썩은 배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마침 이 굽이에 그런 배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계기로 해서 뽕나무 밭과 바닷물의 말을 꺼낸 것이다. 이것은 즉 창해(滄海)처럼 큰 것도 오히려 변천하는 법인데, 더군다나 인생이란 허무해서 물거품과 같고 바람 앞의 등불과 같으니 어떻게 이를 변치 않는 영원한 것으로 믿을 수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포말(泡沫)은 물 위에 뜬 거품이니, 바람 속의 등불과 함께 모두가 없어지기 쉬운 물건이다. 사람들은 단지 자기의 사욕(私欲)을 채우려고만 한다. 그런 까닭에 언제나 부귀를 한껏 누려 보려고 추구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면서 심지어는 별별 죄악을 범하곤 하는데, 이 모두가 이기적인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반드시 자기의 사욕을 채우려 하지 않게 되어야만 외물(外物)을 가볍게 보면서 도에 가까워질 수가 있는 것이다. 포말과 풍등(風燈)은 불가(佛家)의 용어이다. 이것이 비록 불가의 용어이긴 하나, 외물에 대한 집착을 떨쳐 버리는 데에는 참으로 힘이 있는 말이기 때문에, 주자가 차용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 유자(儒者)의 학문에 있어서는 무아(無我)의 뜻과 서로 비슷하다고 하겠다. 이 몸이 물거품과 같고 바람 속의 등불과 같아서 장구히 지속되는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제대로 알기만 한다면, 외물을 구하는 일은 자연히 하지 않게 될 것이요, 길이 부귀를 누릴 계책을 꾸미지도 않을 것이니, 이렇게 해서 도를 추구하는 공부가 반드시 전일(專一)하게 될 것이다. 주자가 일찍이 말하기를 “세간의 온갖 일은 잠깐 사이에 변화하여 없어지는 것인 만큼 진력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할 것이다. 오직 죽을 때까지 치지하고 역행하고 수신하는 이것이야말로 구경법이라고 하겠다.〔世間萬事 須臾變滅 無足爲盡力者 唯有致知力行修身俟死 是爲究竟法耳〕”고 한 것도 바로 이 뜻인데, 도를 배우는 자들은 이 점을 깊이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사곡이라 동쪽 서쪽 두 개의 돌바위 산 / 四曲東西兩石巖
산꽃은 이슬 드리우고 바위는 검푸른 모포(毛布)로세 / 巖花垂露碧
새벽닭도 울었건만 사람은 보이지 않고 / 金鷄叫罷無人見
빈 산엔 달빛 가득 못에는 물이 가득 / 月滿空山水滿潭
이미 성색(聲色)의 유혹이 없어진 위에 다시 이기적인 사심(私心)까지 없어졌고 보면, 이런 경지에 이르러서는 가슴속이 쇄락해지면서 바야흐로 도(道)가 낙(樂)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바위 산의 꽃과 물 위에 비친 달은 모두가 좋은 경치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계를 다른 사람은 아직 알지 못하고 나만 혼자서 찾아온 것이다. 이는 마치 고요한 밤에 사람 하나 없는데 맑은 경치에 호연(浩然)해져서 나 홀로 그 경계를 보며 즐기는 것과 같으니, 명도(明道)가 음풍농월(吟風弄月)하며 돌아온 시절의 경지라고 하겠다.
오곡이라 산이 높아 구름 기운 깊은 속에 / 五曲山高雲氣深
어느 때나 안개비가 평림에 자욱하네 / 長時煙雨暗平林
숲 사이의 나그네를 알아보는 사람 없이 / 林間有客無人識
뱃노래 가락 속에 만고의 마음이 들었어라 / 欸乃聲中萬古心
산고운기심(山高雲氣深)과 연우암평림(煙雨暗平林)은 그 지위가 더욱 높아지고 더욱 깊어져서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된 것을 말한다. 임간유객무인식(林間有客無人識)과 애내성중만고심(欸乃聲中萬古心)은 나 홀로 이런 경계에 도달해서 세상 사람들 중에는 아는 이가 없는 가운데 오직 만고의 성현들과 계합(契合)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경계는 예로부터 성현들만이 도달했던 만큼, 사람들이 모두 알 수가 없고 오직 만고의 성현들만이 함께 어울릴 수가 있는데, 가령 이윤(伊尹)이 농촌 들녘에 거처하면서 요순(堯舜)의 도를 즐긴 것이 바로 만고심(萬古心)인 것이다. 위의 사곡(四曲)에서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고, 여기서는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고 하였는데, 이 모두가 자기 혼자 터득해서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육곡이라 푸른 병풍이 푸른 물굽이 에워싸고 / 六曲蒼屛繞碧灣
띳집에는 종일토록 사립문이 닫혔어라 / 茅茨終日掩柴關
객이 와서 노에 기대니 산꽃만 떨어질 뿐 / 客來倚棹巖花落
새들도 놀라지 않는 속에 봄 뜻이 한가해라 / 猿鳥不驚春意閑
이쯤 되면 이미 계곡 안으로 깊이 들어와서 속세의 소음도 멀리 사라지고 거처할 집도 마련된 가운데,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경계가 모두 편안하고 한가하고 평화롭고 안락하기만 할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고요해져야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사곡(四曲)부터 여기까지는 그 뜻이 대개 비슷해서, 모두 사욕(私欲)이 없어지고 난 뒤의 자득(自得)의 낙을 말하고 있는데, 한 단계씩 들어갈수록 더욱 깊은 경지를 보여 주고 있다.
칠곡이라 배를 옮겨 벽탄으로 올라가서 / 七曲移船上碧灘
대은병산(大隱屛山) 선인장(仙人掌) 봉우리 다시금 돌아 보네 / 隱屛仙掌更回看
어여뻐라 지난밤 산꼭대기에 뿌린 비여 / 可憐昨夜峯頭雨
불어난 저 비천은 몇 번의 추위를 넘겼을꼬 / 添得飛泉幾度寒
일단 안정을 ‘찾을 수 있는〔能安〕’ 경계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거기에서 그치면 안 될 것이니, 이는 최고의 경지에까지 완전히 이르지 못한 이상에는 나아가는 일을 멈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선상벽탄(移船上碧灘)은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일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다른 특별한 공부가 꼭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도달한 지위에서 더욱 쉬지 않고 노력하여 더욱 깊고 더욱 높은 경지를 터득하는 것이니, 이는 곧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뜻이라고 하겠다. 은병선장갱회간(隱屛仙掌更回看)은 바로 온고(溫故)의 비유이고, 첨득비천(添得飛泉)은 바로 지신(知新)의 비유이다. 여기서부터 구곡(九曲)까지는 그 뜻이 또 서로 비슷하니, 편안하고 평화로운 지위에 일단 도달하고 나서도 반드시 앞으로 더 나아가도록 힘껏 노력하여 최고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을 모두 말하고 있다.
팔곡이라 바람과 연무 그 형세 곧 갤 듯 / 八曲風煙勢欲開
고루암 아래로는 맴돌아 나가는 물이로세 / 鼓樓巖下水縈回
이곳에 멋진 경치 없다고 하지 마오 / 莫言此處無佳景
단지 노니는 이들이 올라오지 않을 따름 / 自是遊人不上來
이 팔곡의 지위는 매우 높으니, 최고의 경지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세욕개(勢欲開)는 최고의 경지와 가깝게 된 것을 비유한 말이다. 막언차처무가경(莫言此處無佳景) 자시유인불상래(自是遊人不上來)는 세상에서 도를 추구하는 자들 중에 이 지위에 도달한 자는 아직 있지 않다는 말이다.
구곡이라 막다른 골에서 눈이 활짝 트이나니 / 九曲將窮眼豁然
뽕과 삼이 우로에 젖어 평평한 들판에 보이도다 / 桑麻雨露見平川
어랑은 도원의 길을 다시금 찾았다만 / 漁郎更覓桃源路
오직 인간 세상 속에 별천지가 있는 것을 / 除是人間別有天
나름대로 생각건대, 이곳에 도착하자 산의 형세가 양쪽으로 나뉘어 열리며 그 가운데에 토지가 널찍하고 평평하게 펼쳐지는데, 더 이상 기이하고 특수한 경관(景觀)이 있지는 않지만, 농지와 농작물 등 사람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비유로 삼은 것이 아닌가 한다. 가장 높은 경지의 도를 소유한 분으로 말하면, 기특하고 비범하여 인간 세상을 초월한 일을 그 안에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평상적으로 날마다 쓰는 사물 사이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이른바 “요순도 우리 사람들과 똑같다.〔堯舜與人同〕”고 한 것이 이것이라 하겠다. 다만 그분들은 평상시에 정조(精粗) 대소(大小)의 일을 막론하고 미진한 점이 없게 함은 물론이요, ‘굳이 생각을 하지 않고 억지로 힘을 쓰지 않는 가운데〔不思不勉〕’ 천도의 실상과 순수하게 부합되어 사람들이 예측을 할 수가 없으니, 공자(孔子)가 “아래로 인간의 일을 배우면서 위로 하늘의 이치를 터득한다.〔下學而上達〕”고 한 것이 이것이라 하겠다. 안활연(眼豁然)은 본 것이 투철한 것을 말하니, 즉 ‘지혜를 통해 높아진 것으로서 하늘을 본받은 것〔知崇 法天〕’에 해당하고, 상마우로견평천(桑麻雨露見平川)은 도가 단지 평상적인 일상생활 속에 있는 것을 말하니, 즉 ‘예법을 따라 낮춘 것으로서 땅을 본받은 것〔禮卑 法地〕’에 해당한다. 이것은 터득한 견해가 지극히 고명(高明)하지만, 그 행동을 보면 그저 평상적인 일일 뿐이라는 말이다. 어랑갱멱도원로(漁郞更覓桃源路) 제시인간별유천(除是人間別有天)은 이곳이 바로 선경(仙境)의 궁극에 다다른 곳인데, 만약 노니는 자가 평상적인 것을 싫어해서 다시 도원(桃源)을 찾는다면 잘못이라는 말이다. 가령 도를 배우는 자가 도는 일상생활 사이에 있지 않다고 말하면서 기이하고 특이한 일이 되는 것을 구하려고 한다면 도에서 멀어지기만 할 것이다. 제시(除是)는 오직이라는 뜻의 유시(唯是)와 같다. 오직 인간 세상 속에 별천지가 있는 것이요, 별도로 찾아갈 만한 도원이 있을 수는 없음을 말한 것이니, 이는 이단(異端)의 학을 지칭한 것으로 그 허망(虛妄)함을 말한 것이다.
지난 무오년(1618, 광해군 10) 겨울에 천안(天安)의 현희암(玄希庵 현덕승(玄德升)) 장(丈)이 주자(朱子)의 이 시를 나에게 부쳐 주었다. 내가 받아서 읽어 보니 주자가 자신의 뜻을 구곡(九曲)에 붙여서 드러낸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되었다. 그런데 유씨(劉氏)의 주석은 자못 절실하지 못한 듯도 하였고 특별히 드러내 밝힌 것도 없는 듯하기에, 내가 천박한 소견을 가지고 대략 해석해 보았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의 일인데, 그 뒤에 난리를 겪고 떠돌아다니는 와중에서도 이 원고가 없어지지 않고 다른 글들 속에 뒤섞여 있었다. 지금 살펴보건대 그 대의(大意)는 혹 타당함을 얻은 듯도 하였지만 사어(辭語)에는 역시 너저분한 점이 꽤나 눈에 띄었으므로, 다시 교정을 하여 이와 같이 정리하였다. 대저 성현의 마음은 도(道)와 일치하기 때문에 잠시라도 도를 잊는 때가 없다. 그런 까닭에 도의 경지와 비슷한 사물을 보게 되면, 반드시 이를 비유하여 드러내 밝히곤 하니, 예컨대 공자(孔子)가 “물이여, 물이여.〔水哉水哉〕”라고 찬탄한 것이나, “준마는 힘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驥不稱力〕”라고 한 것이나, “소나무와 잣나무는 뒤에 시든다.〔松柏後凋〕”고 한 것 등이 그것이라고 하겠다. 이 아홉 굽이의 계곡 역시 도를 배우기 시작해서 그 공부를 마칠 때까지의 과정과 너무도 흡사하기 때문에, 주자가 이 10수의 시를 지어서 그 뜻을 밝혔으니, 도를 체득하기 위한 그 정성과 도를 밝힌 그 공이 어떠한지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하겠다. 각 굽이마다 비유한 것을 보면 이 학문의 과정과 곡진하게 그 법도가 합치되지 않는 것이 없는데, 계곡에 이런 경치가 있는 것도 참으로 기이하다고 하겠지만, 시에서 이를 비유로 취한 것 역시 오묘하기 그지없으니, 학자가 이 시를 보면 도를 터득하기 위해 공부하는 시작과 끝의 그 대략을 또한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해석한 것이 시의 본지(本旨)를 한두 가지라도 드러내 밝혔는지 모르겠는데, 우선 이렇게 기록해 두고서 도를 소유한 자를 만나면 바로잡아 보려고 한다.
무인년(1638, 인조 16) 초봄에 풍양(豐壤) 조익(趙翼)은 신창(新昌) 도고봉(道高峯) 아래 시골집에서 쓰다.
[주] * 무이구곡(武夷九曲) : 무이산(武夷山) 속의 아홉 구비 계곡의 경치를 말하는데, 1곡이 승진동(升眞洞), 2곡이 옥녀봉(玉女峯), 3곡이 선기암(仙機巖), 4곡이 금계암(金雞巖), 5곡이 철적정(鐵笛亭), 6곡이 선장봉(仙掌峯), 7곡이 석당사(石唐寺), 8곡이 고루암(鼓樓巖), 9곡이 신촌시(新村市)이다.
* 조익(趙翼 1579~1655) : 조선조 성리학의 대가로 예학에 밝았으며 음률 병법 복서에 능하고 문장도 뛰어 난 인물이다. 벼슬은 좌의정(左議政) 을 지냈고 저서에 포저집(浦渚集)과 경서천설(經書淺說)이 있다.
[출처: 豊柳마을]
주희 [무이도가] 타이포그래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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