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부마는 민주주의의 성지" 제40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 - 문재인 대통령 기념사 [KTV]
문재인 대통령 부마 민주항쟁 기념사 [전문]
Focusㅣ서정석 기자 승인 2019.10.16 16:25
▲ 문재인 대통령은 "부마민주항쟁은 유신독재를 무너뜨리고 6월 민주항쟁까지 이어지게 한 위대한 시민항쟁"이라고 평가했다. /청와대
▲ 문재인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40년 전 민주화를 위해 싸운 피해자, 관계자에게 정부를 대표해 공식 사과했다. /청와대
(서울=포커스데일리) 서정석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은 16일 경남 창원시 경남대학교에서 개최된 제40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에 참석했다. 청와대는 부마민주항쟁은 4·19 혁명, 5·18 광주민주화운동, 6·10 민주항쟁과 함께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을 대표하는 4대 민주항쟁으로 자리매김했다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40년 전 민주화를 위해 싸운 피해자, 관계자에게 정부를 대표해 공식 사과했다. 문 대통령은 "부마민주항쟁은 유신독재를 무너뜨리고 6월 민주항쟁까지 이어지게 한 위대한 시민항쟁"이라고 평가했다. 다음은 문 대통령의 기념사 전문이다.
문재인대통령 기념사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창원과 부산, 경남 시민 여러분, 지난 9월 부마민주항쟁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고 오늘 처음으로 40주년만에 정부 주관 기념식이 열립니다. 4.19혁명과 5.18광주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과 함께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국가기념일로 기리게 되어 국민들께서도, 또 시민들께서도 더욱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마산 민주항쟁의 발원지였던 바로 이곳 경남대학교 교정에서 창원과 부산, 경남 모두의 마음을 모은 통합 기념식을 치르게 되어 더욱 뜻깊습니다. 지난 10월, 故 유치준 님이 40년이 지나서야 부마민주항쟁 관련 사망자로 공식 인정되었습니다. 국가가 부마민주항쟁을 기리지 못하는 동안에도 부산, 창원 시민들은 줄기차게 항쟁기념일을 지켜왔습니다. 저 자신도 부마민주항쟁 기념사업회에서 활동했고, 부산에서는 물론 이곳 경남대 교정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부마민주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알리고, 국민 여러분, 우리의 민주주의는 쉬지 않고 발전되어 왔고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을 때마다 국민들은 행동으로 민주주의를 살려냈고, 정치적 민주주의로 시작된 거대한 흐름은 직장과 가정, 생활 속 민주주의로 확대되어 가고 있습니다. 부마민주항쟁은 우리 역사상 가장 길고, 엄혹하고, 끝이 보이지 않았던 유신독재를 무너뜨림으로써 민주주의의 새벽을 연 위대한 항쟁이었습니다. 비록 신군부의 등장으로 어둠이 다시 짙어졌지만, 이번엔 광주 시민들이 엄청난 희생을 치르며 치열한 항쟁을 펼쳤고, 마침내 국민들은 87년 6월항쟁에 이르러 민주주의의 영원한 승리를 이루었습니다. 부·마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성지입니다. 3.15의거로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곳도, 87년 6월항쟁의 열기가 주춤해졌을 때 항쟁의 불꽃을 되살려 끝내 승리로 이끈 곳도 바로 이곳 부·마입니다. 이제 민주주의의 하늘에는 부산의 아들 박종철과 광주의 아들 이한열이 함께 빛나고 우리는 국민의 이름으로 민주주의의 또 다른 역사를 쓰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통해 많은 국민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각자의 목소리를 분출하며 민주주의는 더 다양해지고, 자신의 목소리가 중요한 만큼 다른 이들의 목소리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실천하는 가운데 확장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부마민주항쟁을 기념하는 것도 민주주의를 위한 어제의 노력이 더 발전된 민주주의로 확장되기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언제나 행동으로 민주주의를 살려온 우리 국민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이제 우리의 민주주의가 양보하고 나누며, 상생하고 통합하는 더욱 성숙한 민주주의로 발전하길 희망합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창원과 부산, 경남 시민 여러분 정부는 부마민주항쟁의 진상규명과 피해자들의 명예회복, 보상에 더욱 힘을 쏟을 것입니다. 숫자로만 남아있는 항쟁의 주역들과 피해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찾고 명예를 회복하도록 할 것이며, 국가폭력 가해자들의 책임 소재도 철저히 규명하겠습니다. 이제 와서 문책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정부는 작년 설립된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이 잘 뿌리내려 부마민주항쟁의 정신이 꽃필 수 있도록 돕고, ‘부산 민주공원 기록관’과 ‘창원 민주주의 전당’을 통해 더 많은 국민들이 일상에서 항쟁의 역사를 보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지난해 발의한 개헌안에서 헌법전문에 4.19혁명에 이어 부마민주항쟁과 5.18광주민주화운동, 6.10항쟁의 민주이념 계승을 담고자 했습니다. 비록 개헌은 좌절되었지만 그 뜻은 계속 살려나갈 것입니다. 또한, 국회에 계류 중인 부마민주항쟁의 진상조사 기간 연장과 관련자 예우에 대한 법률 제·개정안의 조속한 통과를 위해서도 노력하겠습니다. 창원, 부산, 경남의 시민들은 그동안 정치적 민주화의 열망뿐 아니라, 독재정권의 가혹한 노동통제와 저임금에 기반한 불평등 성장정책, 재벌중심의 특권적 경제구조를 바꾸고자 하는 데에도 가장 앞장서 왔습니다. 지난 40여 년간 창원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국가산업단지를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을 선도하고 견인해왔습니다. 2006년 ‘환경수도 창원’을 선언한 창원시는 지금 산업과 환경이 공존하는 미래형 도시로 발전하고 있으며, 지난해 11월에는 전국 최초로 수소산업 특별시를 선포하고,수소버스 운행을 시작했습니다. 민주주의의 성지 창원시가 추진하는 ‘사회적경제 활성화’에 거는 기대가 아주 큽니다. 이윤만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함께 생각하는 ‘사회적경제 혁신타운’ 조성을 적극 지원해 지역주민의 일자리를 늘리고, 더불어 사는 공동체 정신을 다지는 좋은 사례를 창원시와 함께 만들어내겠습니다. 부산은 ‘동북아 해양수도’로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난 7월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로 선정되어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한 물류, 관광, 금융산업의 육성과 생활 밀착형 블록체인 산업의 성장을 이끌 것으로 기대합니다. 지난 10월 ‘제2차 규제자유특구 심의 대상’으로 선정된 경남의 ‘무인선박 규제자유특구’도 경남의 풍부한 조선산업 인프라를 활용하고 되살리며 더욱 발전시킬 기회가 될 것입니다. 정부는 40일 앞으로 다가온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와 ‘제1차 한-메콩 정상회의’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범정부 차원의 ‘2030년 부산월드엑스포 유치’ 전담조직을 조속히 구성해 세계를 향한 창원과 부산, 경남의 도약을 힘껏 돕겠습니다. 부마민주항쟁의 자부심으로 시민들께서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시길 바랍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4.19혁명, 부마민주항쟁, 5.18광주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과 2016년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민주항쟁의 위대한 역사가 있는 한, 어떤 권력도 국민 위에 군림할 수 없습니다. 지금 국민은 더 많은 민주주의와 더 좋은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모든 권력기관은 조직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민주주의의 상식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100년 전, 3.1독립운동과 임시정부의 선조들이 꿈꿨던 진정한 민주공화국, 평범한 사람들이 진정으로 나라의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 국가적 성취가 국민의 생활로 완성되는 민주주의를 향해 국민과 함께 나아가겠습니다. 오늘 마침내 모두의 역사로 되살아나 우리 곁에 와있는 부마민주항쟁의 정신이 국민 모두에게 굳건한 힘과 용기가 되어 주리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2019년 10월 16일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 |
[서정석 기자 focusgw@ifocus.kr]
그날처럼 “우리의 소원은 ‘민주’” 부른 부마민주항쟁 기념식
한겨레ㅣ2019-10-16 15:44수정 :2019-10-16 15:57
▲ 문재인 대통령이 16일 오전 경남 창원시 경남대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제40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16일 경남대서 첫 국가기념일 행사
문 대통령 내외 등 3000여명 참석
부마민주항쟁의 정부 주관 첫 기념식이 16일 오전 10시 문재인 대통령 내외 등 3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경남 창원시 경남대학교 대운동장에서 열렸다. 부마민주항쟁의 국가기념일이 부산에서 첫 시위가 일어난 10월16일로 결정됨에 따라, 첫 기념식 장소는 부산에 이어 10월18일부터 시위를 벌었던 옛 마산(현 창원시)에서 열린 것이다. 기념식은 ‘1979-2019 우리들의 부마’라는 주제로 55분 동안 1부 그날의 부마와 2부 민주의 불꽃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났던 1979년은 유신독재 시절이라 대학가에서도 운동가요가 없었다. 당시 시위대가 함께 부를 수 있는 가장 좋은 노래는 ‘애국가’였고, 다음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다.
1부를 시작하는 국민의례에서는 부마민주행쟁 피해자와 자녀·손자 등 40여명이 애국가를 4절까지 합창했다. 2부에서는 다문화소년소녀합창단과 부산시립합창단이 무대에 올라, 광주 옛 전남도청에 설치한 별도 무대의 오월 소나무합창단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번갈아 불렀다. 이들은 부마민주항쟁 때 시위대가 했던 것처럼 가사에서 ‘통일’을 ‘민주’와 ‘자유’로 바꿔서 불렀다. 1부와 2부 사이엔 부마민주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혁명의 시인으로 불렸던 고 임수생 시인의 시 ‘거대한 불꽃’을 조진웅 배우가 낭송했다.기념식 총감독을 맡은 이창재 감독은 “부마민주항쟁에 대해 처음 듣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당시 언론사들의 사진·영상을 모으고 뮤지컬 형식 등을 복합적으로 사용해 기승전결이 있는 서사구조의 기념식을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박정희 독재 끝낸 첫 민중항쟁, 40년째 기념관 하나 없다
한겨레ㅣ:2019-10-16 04:59수정 :2019-10-16 07:31
[부마민주항쟁 40돌-그날의 기억]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큰 획 그은 사건... 박정희 심장 겨눈 김재규 중정 부장도
“부마사태 발포명령 운운해 저격” 진술... ㅇ의위원회 6년째 진상규명 지지부진해
강제 조사권 없어 자료·진술확보 힘들어... 피해 인정범위 협소해 신고자 적어 한계
“탕! 탕!”
1979년 10월26일 저녁 7시40분 서울 종로구 경복궁 옆 궁정동 대통령 안전가옥(안가)에서 두발의 총성이 울렸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과 권력 서열 2위로 불렸던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을 향해 권총을 쐈다. 두 사람은 현장에서 즉사했다. 친정부 성향의 대의원들이 대통령과 전체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선출하고 대통령 임기를 6년으로 늘리면서 중임제한을 폐지하는 이른바 유신헌법을 만들어 장기집권을 꿈꾸었던 독재자의 18년 철권통치가 끝난 것이다.
중앙정보부 수장인 김재규는 박 대통령의 심장을 왜 겨눴을까. 많은 분석과 견해가 나오는 가운데 궁정동 안전가옥에서 총소리가 나기 열흘 전 발생했던 부마민주항쟁이 10·26사건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주장이 갈수록 힘을 얻고 있다. 근거는 김재규의 형사재판 기록이다. 1979년 12월8일 비공개로 열린 1심 2차 공판에서 그는 “계엄이 선포된 부산에 내려갔다가 본 것을 각하에게 보고했는데 각하께서 ‘이제부터 사태가 더 악화하면 내가 직접 쏘라고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말기에는 최인규와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했으니까 총살됐다. 대통령인 내가 발포명령을 하는데 누가 나를 총살하겠느냐’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10월16일 부산대 학생들이 시작한 거리 시위가 시민항쟁으로 발전하는 것을 현장에서 목도한 김재규가 박 대통령한테 온건한 대책을 세우라고 했는데 박 대통령이 강경 대응을 하겠다고 하자 저격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김재규의 형사재판 기록을 추적한 부산 법무법인 민심의 변영철 대표변호사는 “재판 기록을 보면 김재규는 1972년 유신헌법이 선포되자 박 대통령 살해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던 중 부마민주항쟁을 직접 목격하고 박 대통령에게 전향적 변화를 건의했는데 이마저 묵살당하자 실행에 옮겼다”고 평가했다.
▲ 부산 중구 광복동에서 시민·학생이 유신 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하고 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제공
▲ 계엄령이 선포된 뒤 옛 부산시청(부산 중구 광복동) 앞에서 탱크가 감시를 하고 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제공
부마민주항쟁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부마민주항쟁이 없었다면 박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죽음도, 두달여 뒤 신군부의 12·12쿠데타도, 1980년 5·18민주항쟁도, 1987년 6·10민주항쟁도 없었다. 부마민주항쟁은 1960년 4·19혁명과 5·18민주항쟁, 6·10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대규모 반독재 민주항쟁의 계보를 잇는 항쟁이었다. 부마민주항쟁 이전 1970년대 민주화운동이 학생과 재야인사 중심이었다면 부마민주항쟁은 박정희 군사정권에 저항한 최초의 시민항쟁이었다. 부마민주항쟁 당시 경찰과 계엄군에 검거된 이들 가운데 학생(27%)보다 일반인(73%)이 훨씬 많았다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부마민주항쟁은 긴급조치 때문에 숨죽였던 전국 대학가에 불을 댕겼다. 10월25일 대구 계명대생 600여명이 유신 철폐 등을 외치며 교내 시위를 벌였다. 비슷한 시기 서울대, 연세대, 공주사범대 학생들은 ‘부마사태 구속자 즉각 석방’ 등을 요구하며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이런 사실은 박 대통령의 죽음이 없었다면 부마민주항쟁이 전국 항쟁으로 번졌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부마민주항쟁이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권에 맞섰다면 5·18민주항쟁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쿠데타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5·18민주항쟁을 닮은 부마민주항쟁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5·18민주항쟁은 1997년에, 6·10민주항쟁은 2007년에 국가기념일로 지정됐지만 이보다 앞서 일어난 부마민주항쟁은 40년이 지난 올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뒤늦게 국가기념일 지정이라는 큰 산을 넘었지만 진상 규명과 피해자 보상 등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도 적지 않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3년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부마항쟁보상법)이 제정되고 2014년 10월 심의·의결기구인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가 꾸려졌으나 진상 규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경찰과 계엄군이 시위 현장에서 검거한 사람은 1564명에 이르렀지만 현재 심의위원회에 피해자라고 신고된 건수는 지난 5일 기준 289건에 불과하고 심의위원회를 거쳐 피해자라고 인정된 사람은 208명에 불과하다. 최소 이틀 이상 경찰서 등에 불법구금됐던 1000명 이상이 피해자 신고를 하지 않은 것이다. 당시 3명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올해 9월 경남 마산(현 창원시)의 유치준(당시 51살)씨만 공식 사망자로 인정됐다. 나머지 2명은 이름조차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피해자 신고가 적은 것은 심의위원회의 기능과 권한 등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심의위원회는 조사관이 5명에 불과한데다 그마저도 오는 12월에 활동이 종료된다. 조사기간을 2년 더 연장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국회는 1년으로 못 박았다. 조사관들이 당시 군경 관계자들을 만나려거나 군과 경찰에 자료를 요청하면 거부하기 일쑤다. 강제 조사권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주영·최인호 의원 등이 조사기간 연장과 동행명령권 등을 담은 법률 개정안을 제출했지만 국회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 차성환 심의위원은 “박근혜 정부가 대선 공약 때문에 부마항쟁보상법을 만들었지만 첫 단추를 잘못 끼우는 바람에 지지부진하다. 지금이라도 활동기한을 연장하고 실질적인 활동이 가능하도록 정치권이 협조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의 신고를 늘리려면 보상금 지원 대상을 확대할 필요성도 있어 보인다. 보상금은 생활지원금과 의료지원금 등으로 나뉘는데 생활지원금 지급 대상은 구금일수 30일 이상으로 한도액은 5000만원이다. 피해자 1564명 가운데 구속된 121명만 생활지원금을 받고 구금일수가 30일 미만인 나머지 피해자는 생활지원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5·18민주항쟁 피해자들은 하루만 구금돼도 보상하는 것과 비교된다.
민법을 적용하고 있는 국가의 손해배상 소멸시효도 문제다. 민법은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권의 경우 피해자나 법정 대리인이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부터 3년 동안 행사하지 않거나 불법행위를 한 날부터 10년이 지나면 가해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이를 적용하면 부마민주항쟁 피해자들의 소멸시효는 1989년 10월이다. 부마민주항쟁 피해자들이 1989년 10월까지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않았다면 국가의 손해배상 의무는 사라진다. 문제는 공무원들이 조직적으로 진실을 조작하거나 은폐하면 오랜 기간 진실 규명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3년 소멸시효는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을 언제로 삼을 것인가가 쟁점인데 재판부마다 엇갈린다.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하는 재판부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부마민주항쟁 피해자들을 인정한 2010년 5월을, 손해배상청구를 인용하는 재판부는 심의위원회에서 피해자로 인정받은 날을 각각 기준으로 삼는다. 부마민주항쟁을 재조명하고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조처도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979년 10월16일 부산대 교내 시위를 처음 주도한 정광민씨는 “3·15의거와 5·18민주화운동 기념관은 있지만 부마민주항쟁기념관은 없다. 부마항쟁기념관을 만들어 독재 폭압에 맞선 부마민주항쟁의 가치를 제대로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영배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사무처장은 “5·18민주화운동 피해자처럼 부마민주항쟁 피해자들도 유공자 대우를 해야 한다”고 했다. [부산/ 김광수 기자 k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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