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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흔적의 역사] 이토 히로부미는 고려자기 장물아비

잠용(潛蓉) 2019. 12. 22. 09:00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고려자기 장물아비

경향신문ㅣ2012.11.28 10:26 수정 : 2013.01.30 11:54

 


▲ 창덕궁 이왕가박물관은 도굴품인 이 ‘포도동자무늬 표주박모양 주자’를 950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구입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 청자는 어디서 만든 겁니까?”(고종)

“이것은 이 나라 고려시대의 것입니다.”(이토 히로부미)

“아 그래요? 이런 물건은 이 나라에는 없는 겁니다.”(고종)

“…”(이토)


대화 내용이 어째 이상하다.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청자는 어디서 만든 거냐”고 묻는 이가 고종이요, ‘고려시대의 것’이라고 말하는 이는 이토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던가.

고종 임금은 한 술 더 뜬다. “이런 물건은 이 나라에는 없는 것”이라고…. 이토는 고종의 말에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 대꾸도 못했다.

왜냐? 그 도자기가 도굴품이라는 것을 이실직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나라엔 없는 물건이요.”

정말 딱한 노릇이다. 어떻게 조선의 임금이라는 분이 고려청자를 모를 수 있다니? 아니 ‘우리나라엔 없는 것’이라고 딱 잘라 말하시다니…. 물론 이해가 간다.

아마도 고종은 고려시대 무덤 속에 안장돼있던 고려자기를 꿈에서도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불법으로 무덤을 파서 꺼낸 물건(고려자기)이라니…. 청나라군도 정묘호란·병자호란 때 천인공고할 도굴을 자행한 적이 있다. 하지만 청나라 군은 금붙이만 가져가고 고려자기는 남겨두었다.


“특히 조선민족은 사욕(死褥·죽은 뒤 모욕을 당하는 행위)을 기혐(忌嫌·꺼리고 싫어함)하는 뿌리깊은 사상의 소유자들이다. 그러니 어지간히 하급의 무식자가 아니면 이런 일(도굴)을 감히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현재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고분이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었다.”


일제시대 평양박물관장을 지낸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의 반성 섞인 회고담이다.

“고분 도굴의 참상은 병합(1910년) 전후부터 내지인(일본)들이 조선의 촌(村)까지 파고들었다.~일확천금을 꿈꾸고 한국에 온 일본인들이~묘 속에서 금닭이 운다든가 하는 전설의 고분을 요사이 유행인 금광이라도 파낸 것 같은 생각으로 파돌아다는 것 같다.~”(<조선> ‘205호’·1932년)


고이즈미는 한일합병을 전후로 일본인들이 대거 몰려들어 앞다퉈 마치 금광을 탐색하듯 조선의 분묘를 마구 파헤쳤음을 알리고 있다. “무덤 안에서 금닭이 운다”는 등의 전설을 퍼뜨리며….

그랬다. 일본인들은 고려자기를 비롯해 수많은 부장품을 시신과 매장한 고려시대 무덤을 일확천금의 보고로 보았다.


일본인들은 백주에 총검을 들이대고 그 후손들이 펄펄 뛰고, 발을 구르는 눈앞에서 그 선조들의 무덤을 파헤치고 부장품들을 강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특히 수난을 당한 것은 고려자기였다.


‘고려자기 싹쓸이 쇼핑’한 이토 히로부미

고려자기 불법도굴의 원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이었다. 1906년 통감부 법무원 재판장의 평정관으로 부임한 미야케 조사쿠(三宅長策)의 회고담을 보자.

“일찍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한역시(征韓役時·임진왜란)에도 고려 고분의 일부가 발굴됐다. 지금 일본에 존재하는 운학청자와 명품 찻잔들이 이 때 들어왔다.”


그로부터 400여 년 후인 1900년대 초까지도 고려자기에 관심을 쏟은 이는 경성에서는 거의 없었다.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雄)와 아가와 시게로(阿川重郞) 등 몇몇 애호가들 만이 알음알음 수집했을 뿐이었다. 지금의 충무로에 곤도(近藤)라는 골동품상 한 곳이 있었다. 이외에 경찰 출신인 다카하시(高橋)라는 작자가 점포를 갖지 않고 고려자기를 중개하는 정도였다. 다카하시는 개성부근에서 불법 발굴된 고려자기를 모아 팔았다.


고려자기의 도굴을 조장한 최악의 장물아비는 뭐니뭐니해도 1906년 초대 조선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였다. 일본의 도자전문가 고야마 후지오(小山富士夫)의 회고담을 보자.

 


▲ 고려시대 왕비릉으로 짐작되는 강화도 능내리 고려석실분. 1910년을 전후로 싹쓸이 도굴의 피해를 입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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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의 취임 이후 (고려자기를) 수집하는 이가 격증해서 1912~13년 사이 수집열이 절정이 이르렀다. 당시 그 발굴판매로 생활해온 자가 수백명이었다.~발굴발견된 고려도자의 총수는 몇십만이라고 헤아리기 곤란할 것이다.”(고야마의 <고려도자서설>에서)

이토는 있는 대로 고려자기를 싹쓸이했다. 일왕가와 귀족 들 사이에서 고려자기는 최고급 선물로 통했다. 이토가 수집한 완품의 고려자기는 1000점이 넘었다고 한다.


이토가 당시 일왕에게 상납한 최고급 도자 103점은 도쿄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토의 하수인은 니타(新田)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늘 이토의 술자리에 수행해서 노래와 춤을 추면서 좌흥을 돋구던, 지금으로 치면 ‘술상무’였다. 이토는 니타에게 “고려자기를 보이는대로 다 사들이라”는 명을 내렸다. 니타는 개성과 강화, 장단 등에서 불법 발굴된 고려자기들을 좌(左)에서 우(右)로 50~100점씩을 손가락으로 지정, 한꺼번에 구입한 뒤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했다. 어떤 경우엔 곤도 가게의 고려자기를 싹쓸이 쇼핑하기도 했다. 이토가 귀국했을 때 자신의 회계원에게 “이만큼의 고려자기를 사는데 얼마나 들었는가”를 물었다. 회계원이 10만원이 조금 넘는다고 하자 이토는 그 회계원을 칭찬했다.

“그만한 돈으로 이 정도의 고려자기를 모았단 말인가?”


이토는 귀국 때 정거장에 마중나온 사람들에게 입이 깨진 고려자기나 파손된 주발(鉢) 등을 뿌리듯 선물했단다. 어떻든 조선의 국권침탈의 원흉인 이토는 이구열 선생의 표현대로 불법도굴품의 최대 장물아비라는 오명을 얻어야 할 것 같다. 
 


▲ 도굴범을 처벌한 판결문. 요시다라는 도굴범은 1909년 7월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백주대낮에 개성 청효면 고려고분을 도굴한 혐의로 처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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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굴업이 최대 유망직종’

어떻든 그 정도였으니 경성에서는 한 때 고려자기가 품귀현상을 빚기도 했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다. 이 시대를 미야케는 ‘고려청자광시대(高麗靑磁狂時代)’, 즉 ‘고려청자의 광풍시대’라 했다. 그럴만도 했다. 굴옥(掘屋), 즉 호리꾼이라고 하는 직업도굴단이 생길 정도였으니까…. 어떻든 이 때 불법발굴과 장물거래로 먹고 사는 자가 수천명이었다니 고려자기 도굴 및 거래업은 당대 조선의 각광받는 산업이었다.


1904년 요시쿠라 본노(吉倉凡農)라는 인물은 조선 땅에서 성공할 수 있는 유망업종 가운데 하나를 ‘골동품상’으로 곱았다.

“저 고려자기의 우수품은 서양각국에서는 적어도 수백원의 가치가 있는데 이 나라에서는 최상품이 10원 정도였다. 너무도 바보같았다. 그런데 더 싸게 사고 싶으면 고분이라고 생각되는 곳을 탐험해서 그곳을 매입하여 지하에 묻혀있는 것을 찾으면 된다. 고분이 있는 토지라 해서 그 값은 비싼것도 아니다.”(<요시쿠라의 (기업안내)실리의 조선)>에서)


그러니까 고려고분으로 의심되는 곳 부근의 토지를 통째로 사서 무자비한 도굴을 감행한 것이다. 개성이나 강화, 장단, 해주의 고려고분은 쑥대밭이 됐다. 어떤 경우엔 무덤 한 곳이 2~3번이나 도굴되기도 했다. 어떤 경우엔 막 파내 흙이 잔뜩 묻어있는 채로 신문지에 싸여 매매되기도 했으니까.

일본으로 반출된 고려자기는 서양으로도 팔려나갔다. 예컨대 오사카의 야마나카(山中)상회 같은 곳은 고려자기를 대량으로 사들여 유럽과 미국 등에 팔아넘겼다.


고려자기가 얼마나 유럽의 도자전문가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는 지는 아오야나기 고타로(靑柳綱太郞)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고려의 도자기는 세계적인 일품(逸品·명품)으로 동서에서 독보적이다. 일찍이 후쿠다라는 사람이 유럽여행 중 독일의 한 귀족 저택을 방문했다. ‘도자기광’인 귀족은 빼어난 감식안까지 갖고 있었다. 이때 후쿠다가 ‘어느 나라 도자기가 최고냐’고 물었다. 독일 귀족은 일언지하에 ‘고려자기’라 대답했다.”


‘나라의 비운이 지하백골에까지…’

어쨌든 ‘고려도자기 최대의 장물아비’인 이토 히로부미는 이완용(당시 총리대신)과 짜고 창덕궁에 이왕가 박물관을 세우는 한편, 창경궁에 동물원을 조성했다. 고종황제를 위로한답시고….

그런데 이왕가 박물관이 소장했던 고려자기(6,562점) 출토지의 99%가 개성부근이라 기록돼있다. 이 모두 도굴품이라는 얘기다. 그러니까 이왕가박물관의 설립은 도굴품에 합법이라는 옷을 입혀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일본인 도굴범과 골동품상은 우리 땅에서 도굴한 도자기, 즉 장물을 박물관에 거액을 받고


 

▲ 이토 히로부미가 일왕에게 선물했던 거북모양 주전자. 1966년 반환됐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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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아넘겼으니까. 당시 5~20원에 불과하던 고려자기의 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예컨대 박물관이 1908년 구입한 ‘포도 동자무늬 표주박 모양 주전자’은 무려 950원을 지불했다. 그 거액의 돈은 모두 조선왕실이 냈다. 일본인 도굴품을 조선왕실의 돈, 즉 조선백성의 고혈로 구입한 것이다.


1909년 가을 일본 도쿄에서는 대대적인 고려자기 경매전시가 열렸다. 조선 땅에서 도굴한 장물을 떡하니 공식적으로 거래하는 장이 선 것이다. 이듬해 2월 도쿄에서 발행된 전시회 도록을 보자.

“고려자기는 조선에서는 단 1점도 지상에서는 볼 수 없고 모두 고분에서 굴출(掘出·도굴)된 것들이다.”


그러면서 고려자기를 출품한 자들의 이름을 쭉 실어놨는데, 후작·자작·남작 등 작위를 받은 자들이 대부분이다. 참으로 한심하기 이를데 없다.


사학자 이홍직 선생은 일본의 민간인 소장 고려자기만 2만점이 넘는다고 기록했다. 지금 국내 모든 박물관과 민간 소장의 고려자기를 모두 합친다 해도 2만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감안해보면 그저 참담할 따름이다. 일찍이 미술사학자 황수영 선생은 <일제기 문화재 피해자료>를 쓰면서 긴 한숨을 몰아쉰다.

“이같이 강탈된 수만점의 고려도자는 지금 일본에 있다고 일본인 자신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안중근 의사가 거듭 말하고 있다. ‘기울어지는 나라의 비운이 지하백골에 이르렀다’고….”


요즘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는 뜻깊은 전시가 열리고 있다. 12월16일까지 열리는 <천하제일 비색청자> 특별전이다. 청자완형만 350여점이 출품된다. 특히나 앞에서 숱한 사연을 간직한 고려자기들이 대거 등장한다. 도굴품인데도 950원이나 주고 구입했던 ‘청자 포도동자무늬 표주박모양 주자’와 이토 히로부미가 자신의 왕에게 선물했다가 1965년 반환받은 ‘청자 거북이형 주전자’(보물 452호) 등…. 청자의 찬란한 비취색에 이토록 숨겨진 아픈 과거가 담겨있음을….

“이 청자는 어디서 만든 겁니까?”(고종) “고려시대의 것입니다.”(이토 히로부미) “아 그래요? 이런 물건은 이 나라에는 없는 겁니다.”(고종) “….”(이토)


뭔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 든다. 조선의 임금이라는 분이 고려청자를 전혀 본 적도 없다고 하고, 일본인 통감 이토는 ‘고려의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하고…. 그런데 이토는 “이런 물건은 조선에는 없다”는 고종의 말에 꿀먹은 벙어리가 됐다. 그랬을 것이다. 이 청자가 도굴품임을 이실직고할 수 없었을 테니…. 조선인들은 조상의 무덤을 훼손하는 것을 패륜행위로 보았다. 그랬으니 고종은 고려시대 무덤 안에 안장되던 고려자기를 꿈에서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일제침략이 본격화한 1900년대 초 일본인들은 고려고분 도굴에 눈이 멀었다. 처녀분에서 찬란한 고려자기를 완형의 상태로 수중에 넣을 수 있었으니까….


심지어는 총칼로 후손들을 위협한 뒤 무덤을 유린, 강탈해갔다. 어떤 경우엔 흙이 잔뜩 묻은 고려자기를 신문지로 싸서 매매하기도 했다. 무덤 한 곳을 2~3차례씩이나 털리는 예도 생겼다. 고분이라 짐작되는 주민의 땅을 통째로 매입해서 무덤을 파낸 뒤 꺼낸 고려자기(사진)를 거래하는 일도 있었다. 식민사학의 뿌리를 심은 이마니시 류(今西龍)와 우메무라 스에하루(梅原末治)조차 개탄했다. “악질 일본인이 남의 나라 조상 무덤을 그토록 비정하게 도굴, 총독정치의 오점이 됐다”고….


특히 이토 히로부미는 그렇게 파헤친 도굴품을 사들여 퍼뜨린 고려자기 장물아비였다. 당시 일왕가와 귀족들 사이에 이토의 고려자기 선물을 받지 못한 자가 없을 정도였다. 이토의 하수인은 니타(新田)라는 자였다. 이토의 술자리에 배석해 노래와 춤으로 주흥을 돋운, 지금으로 치면 ‘술상무’였다. 이토는 ‘닥치는 대로 (고려자기를) 사라’고 명령했다. 
     
니타는 충무로의 곤도(近藤)라는 골동품상에서 개성과 강화 등에서 불법 발굴된 고려자기들을 좌(左)에서 우(右)로 50~100점씩을 손가락으로 지정, 한꺼번에 구입했다. 고려자기 ‘싹쓸이 쇼핑’이었다. 경성에서는 고려자기가 품귀현상을 빚기도 했다. 도굴과 장물거래로 먹고사는 자가 수천명이었다. 고려자기 도굴 및 거래업이 ‘당대 조선의 각광받는 유망산업’으로 추천되기도 했다. 이 시대를 ‘고려청자의 광풍시대’라 했다. 굴옥(掘屋), 즉 호리꾼이라는 직업도굴단까지 생겼다. 모두 이토가 퍼뜨린 ‘광풍’이었다. 이토를 쏘았던 안중근 의사가 그랬단다.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비운(悲運)이 지하 백골에 이르렀다”고….



<참고자료>
황수영, <일제기 문화재 피해자료>, 한국미술사학회, 1973
이구열, <한국 문화재 수난사>, 돌베개, 1996
이순자, <일제 강점기 고적조사사업 연구>, 숙명여대 박사논문, 2007
이홍직, <재일한국문화재비망록:최근 반세기간에 있어서>, ‘사학연구’, 한국사학회, 1964
국립문화재연구소, <강화 고려왕릉 발굴조사보고서>, 2007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 <국권회복운동판결문집>, ‘광복50주년 기념특집’, 국가기록원, 1995


[이기환/ 문화·체육에디텨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lkh@kha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