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용의 타임머신... 영원한 시간 속에서 자세히보기

흔적의 역사

[흔적의 역사] '해귀' 흑인용병, 임진왜란에 참전하다

잠용(潛蓉) 2019. 12. 22. 09:04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해귀' 흑인용병, 임진왜란에 참전하다

경향신문ㅣ2012.12.05 10:47 수정 : 2012.12.05 12:14


 

▲ 명나라군의 철수를 기념해 그린 <천조장사전별도>에 보이는 흑인용병 4명. 몸집이 너무 커서 말에 타지 못하고 수레에 탔다는 기록에 완전히 부합되는 그림이다. 잠수해서 적선의 밑을 뚫는 특수임무를 지녔지만 별 전과는 기록하지 못했다. /민속원 제공  

정유재란이 한창이던 1598년 5월26일, 선조가 명나라 파견군 장수인 팽신고를 위해 술자리를 베풀었다. 주흥이 한껏 달아오르자 팽신고가 선조 임금에게 고했다.

“전하. 제가 ‘색다른 신병’을 소개하겠습니다.”
“그래요. 어느 지방 사람이오이까.”
“예. 호광(湖廣)의 남쪽 끝에 있는 파랑국(波浪國) 사람입니다. 바다를 세 번 건너야 호광에 이르는데 조선과의 거리는 15만 여 리 됩니다. 그 사람은 조총을 잘 쏘고, 여러가지 무예를 지녔습니다.”


흑인용병은 UDT 대원

팽신고가 그 ‘색다른’ 신병을 불러왔다. 과연 신기했다. <선조실록>의 기자는 “그 신병을 일명 해귀(海鬼·바다귀신)라 한다”면서 세세한 인상착의를 묘사한다.

“노란 눈동자에 얼굴빛은 검고 사지와 온몸도 모두 검다. 턱수염과 머리카락은 곱슬이고 검은 양모(羊毛)처럼 짧게 꼬부라졌다. 이마는 대머리가 벗겨졌는데 한 필이나 되는 누른 비단을 반도(磻桃)의 형상처럼 서려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누가봐도 영락없는 흑인의 모습이다. 팽신고의 자랑이 하늘을 찌른다.

“이 흑인은 바다 밑에 잠수하여 적선(賊船)을 공격할 수 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며칠동안 물 속에 머물면서 수중생물(水族)을 잡아 먹을 줄 압니다.”


그러자 선조 임금이 화답한다.

“우리 같은 작은 나라에서 어찌 이런 신병을 보았겠소이까. 대인의 덕택에 보게 되었으니 황은(皇恩)이 아닐 수 없소이다. 이제 흉적(왜적)을 섬멸하는 날이 시간문제가 아니겠소이까.”


이 흑인은 명나라군에 합류한 용병이었다. 팽신고의 말에 따르자면 이 흑인용병은 바다 밑에 잠수하여 적선을 공격하는, 지금으로 치면 UDT 요원? 파랑국 혹은 불랑국(佛浪國)은 1557년 이미 마카오 반도를 조차(통치권을 획득)한 포르투갈의 한문표기이다. 그러니까 이 흑인용병은 포르투갈 사람인 것이다.


팽신고의 말이 맞다면 그야말로 대단한 특수부대 용병이 아닐 수 없다. 며칠동안 물 속에 머물며 온갖 수중생물을 먹고 버틸 수 있다니…. 해귀는 한 사람 뿐이 아니었다. 팽신고는 이틀만인 5월28일 포르투갈 용병 3명을 선조 임금 앞에서 소개한다. 선조는 그들의 칼솜씨를 구경한 뒤 상급으로 은자(銀子) 한 냥을 선사했다.(<선조실록>)


‘해귀 등장’ 소식에 전국이 떠들썩

이 포르투갈 용병을 둘러싼 당대의 관심은 대단했던 것 같다. 문헌 곳곳에서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해귀의 기사가 보인다. 보는 사람마다 그 신기한 ‘종족’의 인상착의를 앞다퉈 기록한 것이다.

“명나라 군이 4만7000여 명이었다. 해귀(海鬼) 4명이 있었는데 살찌고 검고 눈이 붉고 머리카락이 솜털 같았다.”(<난중잡록> 3)


 

▲ <천조장사전별도>의 전체그림. 1599년 2월 철수를 앞둔 명나라을 위한 연회의 모습을 담았다. 왼쪽 아랫부분에 해귀, 즉 포르투갈 흑인 용병의 모습이 보인다. /민속원 제공

“해귀(海鬼)라는 자가 있었다. 남번(南番) 출신으로 낯빛이 칠처럼 까맣고, 바다 밑에 숨어 다니기도 하며 그 모양이 귀신같다 하여 해귀라고 했단다. 키가 큰 사람이 있었는데, 몸이 아주 커서 거의 두 길이나 되었다. 말을 타지 못하고 수레를 타고 다녔다.”(<서애집>)
“군중에 해귀(海鬼)가 넷인데 까만 눈에 붉은 머리털이 가는 털과 같았다.”(<일월록>)

“해귀가 등장했다”는 뉴스는 적진을 공포의 도가니로 빠뜨린 것 같다. 그 해 9월5일 전라 관찰사 황신의 보고를 보자.


“적진을 왕래하는 자의 보고입니다. 왜적이 중국군의 병력수를 묻기에 수·육군을 합해 모두 40만명이라 했답니다. 해귀(海鬼)와 달자(달子·몽골군)도 수없이 출전했고 엄청나게 불려 말했더니 왜적들이 (두려워하여) 모두 얼굴색이 변하면서 짐바리와 잡물(雜物)을 죄다 배에 실었답니다.”

왜 아니 그랬겠는가. 지금의 UDT의 임무를 펼치는 ‘용감무쌍한’ 해귀가 출전했다는 소식에 왜병들도 부들부들 떨면서 철수준비를 했던 것이다.


41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포르투갈 용병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로 1599년 2년 철수를 앞둔 명나라 군을 위한 연회의 모습을 담은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에서 확연히 나온다.(박정혜의 <세전서화첩>) 한국국학진흥원이 소장한 그림의 맨 마지막 장면 왼쪽 하단에 수레를 탄 ‘해귀’ 4명을 그렸다. 그림을 설명한 표제에는 ‘불랑국(佛浪國)의 해귀 4명은 살결이 검고 누르스름한 머리가 방석둘레처럼 펼쳐졌어도 적선을 잘 뚫었다’고 했다. 몸집에 하도 커서 ‘말을 타지 못하고 수레를 탔다’는 <서애집>의 기록과 정확하게 부합된다.

 


▲ 해귀, 즉 포르투갈 용병의 출전소식을 알린 <선조실록>. “노란 눈동자에 얼굴빛과 사지와 온몸이 모두 검다. 턱수염과 머리카락은 곱슬이고 검은 양모(羊毛)처럼 짧게 꼬부라졌다”고 인상착의를 전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실패한 퇴출용병

그렇다면 이 용감한 용병은 선조 임금의 기대만큼 혁혁한 공을 세웠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명나라 장군 유정이 수 십 종류의 해귀(海鬼)를 이끌고 나왔다고 한다. ~얼굴이 새까만 것이 귀신처럼 생겼고 바다 밑으로 헤엄을 잘 쳤으며, 그 중에 키가 거의 두 길 정도나 되는 거인(巨人)이 수레를 타고 오기도 했다. ~유정은 경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한 치의 공도 세우지 못했다. 왜 해귀(海鬼)를 시켜 물속으로 들어가 왜선의 밑을 뚫어 침몰하도록 하지 않았을까.”(<성호사설> 23권 ‘경사문·유정동정’)


그러니까 명나라군은 해귀, 즉 포르투갈 용병의 재주를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패했다는 것이다. <성호사설>의 저자 이익은 바로 그 점을 꼬집으며 안타까워 한 것이다.

흑인 용병들은 잔뜩 기대를 모았다가 실망만 안겨준채 쓸쓸히 귀국해야 하는 ‘톼출용병’의 신세가 된 것이다.


흑귀노, 곤륜노

동양의 역사 속에서 흑인은 곤륜노(崑崙奴), 혹은 흑귀노(黑鬼奴) 등으로 표현됐다. 1713년 나온 시문선집인 <동문선>의 주서문병서(呪鼠文幷書·쥐를 저주하는 글)를 보자.

“사람의 집에는~각각 맡은 바가 있노라. 음식을 만드는 일은 적각(赤脚·계집종)이고, 나무하고 마소를 치는 것은 곤륜(崑崙)이 한다. 아래로 육축(가축)에 이르기까지 각기 구분이 있으니…,”


여기서 말하는 곤륜은 흑인 노예를 가리킨다. 이유원(1814~1888)의 연작시를 모은 <임하필기> ‘이역죽지사(異域竹枝詞)’에도 ‘양흑귀노’를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흑귀노는 바로 당나라 시대의 곤륜노.(黑奴唐代崑崙奴). 명사에도 하란이 부리던 오귀가 있네.(明史荷蘭役鬼烏) 구유에 음식을 담아서 말처럼 먹이고(饋以一槽如馬食), 손에 단봉을 들고 다니며 부려 먹네.(手提短棒自相呼)”


무슨 말이냐면, 서양의 흑귀노는 바로 당시 ‘곤륜노’로 통했다는 것. <명사(明史)>에도 “하란(荷蘭), 즉 네덜란드 사람이 부리던 노예를 ‘오귀(烏鬼)’라 했는데 바로 그 흑귀노”라는 것이다. 그런데 주인은 남은 음식을 말구유통 같은 그릇 하나에 쏟아서 흑귀노를 먹이고 항상 목봉(木棒)을 가지고 다니며 부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임진왜란 때 참전한 포르투갈 흑인용병도 바로 포르투갈인들이 부리던 노예가 아니었나 싶다.


‘산 같기도, 구름같 기도 한’ 영어 알파벳

어떻든 조선인들은 이렇게 흑인 만을 다른 동물로 취급하면서 신기해하고 폄훼했을까. 그렇지 않다.

1797년 8월27일 새벽, 동래 구봉 봉수대(동구 초량동)을 지키던 군사가 아연실색했다. 엄청난 규모의 이양선 한 척이 용당포로 근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괴한 이양선을 본 조선인들은 이른바 ‘멘붕’에 빠졌다. 지휘계통을 통해 배에 타고 있던 선원들의 인상착의가 보고됐다.(<증정교린지(增訂交隣志)>)


 

▲ <하멜표류기> 프랑스어판. 제주도에 표류한 네덜란드인 하멜일행을 구경하러 온 조선인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코가 높고 눈이 푸른 것으로 보아 서양사람인듯 합니다. 붓을 내밀어 글을 쓰게 했더니 마치 산과 구름을 그려놓은 듯이 도무지 알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쓴 영어 알파벳을 보고 조선사람들은 ‘산과 구름을 그려놓은 듯 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동유(1744~1808)가 쓴 <주영편(晝永篇)>에 묘사된 선원들의 인상착의는 아주 구체적이다.


“몸집이 거대했다. 우리보다 두 어 자(60㎝) 컸다. 콧대가 높고 곧아서 위로 이마를 관통했다. 뺨에는 광대가 없었다. 코에서 귀를 향해 평평하게 낮아졌다. 마치 살구씨 모서리를 깎아 놓은 것 같았다. 상의와 바지는 몹시 좁아서 겨우 팔다리를 꿸 수 있을 뿐 무릎을 굽힐 수 없었다. 그들이 쓴 글자는 산 같기도 하고, 구름 같기도 해서 통역관도 알지 못했다.”


조정에서도 이양선 출몰은 엄청난 화제를 뿌렸다. 다음은 10월4일 정조 임금이 대신들과 나눈 대화내용이다.(<정조실록>)

“동래에 온 배는 아란타(阿蘭타)·네덜란드) 사람들인 듯 하다. 아란타는 어느 나라 오랑캐인가?”(정조)

비변사 당상 이서구가 한 치의 주저함이 없이 쾌도난마식으로 브리핑했다.

“예. 아란타는 곧 서남지방 번이(蕃夷)의 무리로서 중국의 판도에 속한 지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명사(明史)>에서는 ‘하란(賀蘭)’이라 했는데 요즘의 대만(臺灣)이 바로 그것입니다.”


정조와 신하들은 이서구의 해박한 지식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특히 우의정 이병모는 이서구를 칭찬하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과연! (이서구가) 저토록 해박하다니…. 역시 재상은 독서한 사람을 뽑아 써야 한다니까요.”


독서인 이서구의 ‘뻥’



▲ 하멜 일행이 1656년부터 1663년까지 7년간 머물렀던 전남 강진의 병영마을. 하멜 일행 중 몇몇이 청나라 사신 앞에서 ‘조국으로 보내달라’는 기습시위를 벌인 뒤 조선조정의 감시가 심해졌다.

그러나 실상 이서구는 ‘전혀’ 해박하지 않았다. 이서구가 아뢴 것은 결과적으로 ‘뻥’이었으니까.

우선 아란타, 즉 네덜란드는 중국영토로 편입되지 않았다. 네덜란드는 1602년 동인도회사를 세워 동방무역을 개척한 뒤, 1624년 대만북부를 점령했다. 하지만 청나라는 1683년 다시 대만을 정복하고 푸젠성(福建省)의 일부로 편입했다. 결국 이서구의 말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은 것이었다. 청나라가 대만을 푸젠성으로 포함시킨 지 무려 114년이나 흘렀는 데도 그 사실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잘못됐다. 동래에 정박한 이양선은 네덜란드 배가 아니라 윌리엄 브로턴 함장이 지휘한 영국배, ‘프로비던스’호였다.

400톤 규모의 이 배는 2년 간의 태평양 탐사 도중 안전한 항구를 찾아 동래에 닻을 내린 것이다. 브로턴 함장은 귀국 후 <북태평양 탐사항해기>를 출간했다. 또 <코리아 남동해 초산항 스케치(A Sketch of Thosan Harbor S.E. Coast of Corea)>라는 도면을 영국해군수로부에 제출했다.

하지만 항해기와 지도에 나온 지명의 표기가 들쭉날쭉했다. 예컨대 부산항은 ‘초산항’을 비롯해 Tshosan, Chosan, Tchosan, Thosan, Tshesan, Chousan, Thesan 등 무려 7가지 지명으로 표기됐다.


주민들과 말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브로턴이 주민들에게 항구의 이름을 묻자 ‘초산’이라고 대답했단다. 주민들이 항구이름이 아니라 ‘조선’, 즉 나라이름을 불러준 것이다. 또한 브로턴은 남해안을 ‘토상(Thosang), 조선국을 ‘토상고(Thosango)’로 일컫고 있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만 오륙도는 바위가 검게 보인다고 해서 ‘검은 바위들(Black Rocks)라 한게 흥미롭다.

그러고 보면 이서구와 조선 조정을 국제정세에 어둡다고 싸잡아 비난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어차피 낯선 자들끼리의 만남이었으니까….(박천홍의 <악령이 출몰하던 조선의 바다>)


벨테브레와 박연

네덜란드인인 얀 얀세 벨테브레(1595~?)와 헨드릭 하멜의 이야기는 읽어도 읽어도 흥미롭다. 그 사연을 보자.

1627년 5월12일 벨테브레는 상선 우베르케르크호를 타고 대만으로 향하다가 항로를 벗어난다. 태풍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배는 동해안 경주(혹은 제주도) 앞바다까지 흘러왔다. 벨테브레는 다른 동료 2명과 함께 물과 양식을 구하려 보트를 타고 상륙했다가 주민들에게 사로잡힌다. 주민들은 이들을 동래의 왜관으로 돌려보냈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왜관을 통해 나가사키로 보낼 요량이었다.


하지만 왜관은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표류자의 접수를 거부했다. 벨테브레 일행은 할 수 없이 서울로 이송됐다. 조정은 이들을 훈련도감 군사로 편입했다. 이들은 임진왜란 때 투항한 일본인 및 표류한 중국인들로 구성된 부대의 장수가 됐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들은 조선군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전쟁통에 두사람은 전사했고, 벨테브레만 살아남았다. 벨테브레는 조선여인과 결혼해서 1남1녀를 두었다. 그의 조선이름은 박연(朴淵)이다. 그는 조선글자를 알지못해 자기 이름을 말할 때는 늘 네덜란드 말로 이름을 불렀다. 자발적인 귀화가 아니었던 벨테브레가 얼마나 고향을 그리워 했는 지는 필설로 다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박연과 하멜의 만남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1653년 8월이었다. 동인도 회사 소속 상선인 스페르웨르호에 탑승한 하멜 일행은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다가 폭풍을 만나 제주도 대정현에서 좌초됐다.

이 사고로 64명 중 28명이 죽고, 서기관 하멜 등 36명이 구조됐다. 제주 목사 이원진이 조정에 이 사건을 보고한다.

“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에 수염이 짧았는데 혹 구렛나룻은 깎고 콧수염을 남긴 자도 있었습니다.”(<효종실록>)


제주 관리들은 왜어 통역자를 통해 생존자들을 심문했다.

“너희는 서양의 크리스챤(吉利是段)인가?”

그러자 다들 ‘야 야(耶耶)’ 했다.(<효종실록>) 즉 ‘예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땅이 어느 나라냐?”(조선 관리)

“고려입니다.”(하멜 일행)


조정은 생존자들을 모두 서울로 보내라고 명했다. 조선 조정은 박연(벨테브레)과 하멜을 대질시켰다. <효종실록>은 이 대목을 아주 드라이하게 기록했다.

“남만인(南蠻人) 박연이라는 자가 (하멜 일행을 보고) ‘만인(蠻人)이 맞다’고 했다. 그래서 이들을 금려(禁旅·국왕 호위군)에 편입하였다. 그들이 대개 화포(火砲)를 잘 다루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에는 코로 퉁소를 부는 자도 있었고 발을 흔들며 춤추는 자도 있었다.”


‘코를 귀 뒤로 돌리고 음료를 마신다.’

그런데 무려 26년 만에 고국동포를 만난 박연과, 앞길에 막막해진 하멜의 만남이 이렇게 무미건조했을까. 아니었다. 윤행임(1762~1801)의 시문집인 <석재고>는 “(박연이 하멜을 만나자) 옷깃이 더 젖을 때까지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하멜이 훗날 조선을 탈출한 뒤 남긴 <하멜표류기>에도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박연과 하멜일행의 만남을 설명하고 있다. 박연은 하멜일행에게 이렇게 푸념했다.

“난 여러 번 국왕(효종)에게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조선 조정은 ‘당신이 새라도 된다면 날아갈 수 있겠지만 우리는 국법 때문에 당신을 보낼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난 일생을 이 나라에서 보내야 합니다.”


하멜 일행은 박연의 지휘아래 훈련도감의 포수로 임명됐다. 저잣거리엔 하멜 일행을 보려는 구경꾼들로 가득 찼다. 관리들은 앞다퉈 그들을 초청, 연회를 베풀었다. 그들의 검술과 춤을 보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사람이라기 보다는 괴물로 보았다. 음료를 마실 때는 코를 귀의 뒤로 돌리고 마신다든가, 금발이라 물속을 헤엄쳐 다니는 새처럼 보인다든가 하는 소문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처음 한동안은 구경꾼들 때문에 시끄러워서 숙소에서도 쉬지 못할 정도였다.”


조선사람들이 보기에 서양인들의 코가 얼마나 컸으면 코를 귀 뒤로 돌리고 음료수를 마신다고 했을까. 높은 서양인의 코가 참으로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하멜 일행은 박연처럼 가만있지 않았다. 일등 항해사와 포수 등 두 사람이 1655년 조선을 방문한 청나라 사신 앞에서 선처를 호소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결국 두 사람은 감금됐고, 그 곳에서 사망했다. 후에 전라도에 유배됐던 하멜 일행은 13년여 만인 1663년 조선을 탈출했다.


‘조선인은 인육을 구워먹는다’

타자(他者)와의 조우, 즉 나와 우리가 아닌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은 늘 서로간 오해를 불렀다.

조선인들이 ‘서양인’을, ‘흑인’을 양귀, 혹은 흑귀노로 낮췄지만, 서양인들도 조선인은 ‘미개하고 야만적인 사람들’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심지어는 “조선에서는 식인풍속이 있다”는 는 해괴망측한 이야기도 들렸다. 정재륜의 <공사견문록>을 보자.

“박연은 ‘본국에 있을 때 고려인들은 인육을 구워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박연이 제주도에 표류했을 때 마침 날이 어두워 조선 군사들이 횃불을 준비했다. 배안에 있던 (네덜란드) 사람들은 모두 이 불이 자신을 구워먹으려는 도구라고 여겨 하늘이 사무치도록 통곡했다고 한다.”


여기에 <하멜표류기>는 조선을 둘러싼 부정적인 이미지를 더욱 악화시켰다. 하기야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인 이덕무(1741~1793)마저도 네덜란드인을 이렇게 묘사했단다.

“네덜란드 사람의 발 길이는 1척2촌(36㎝ 정도)이며, 오줌을 눌 때는 늘 한 쪽 다리를 들고 눈다.”(<편서잡고(編書雜槁)>)

사람을 개(犬)의 종류로 보다니…. 낯선 이들을 인간으로 대접하고 존중하는 일 이렇게 힘든 것인가..


‘백인만 골라 제사지낸 사연’

“백인으로 요제(燎祭)를 지낼까요?(燎白人)”

“오늘 저녁 흰 강인 3명을 제물로 올려 제사를 지낼까요?(唯今夕用三白羌)”

은(상)나라의 정복전쟁이 한창이던 시절(기원전 1300~1046년), 정인(貞人·점을 치는 관리)들이 점을 치면서 국왕에게 보고한 갑골의 내용들이다. 그야말로 끔찍한 일이다.


첫번째 갑골은 백인을 잡아 불에 태우는 제사를 지낼 지 어떨 지를 묻고 있다. 두번째 갑골은 정복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강족 노예 가운데 피부가 하얀 사람을 3명을 잡아 제사를 지낼 지 어떨 지를 묻고 있다. 그러니까 희생자들은 피부색깔이 하얗다는 단 한가지 이유로 제물로 선택돼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양동숙의 <갑골문 해제>)


이렇듯 차별과 구별의 역사는 뿌리가 깊은 것이다. 3300년 전에도, 500년 전에도…. 피부색깔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내남’의 차이를 두려는 습성은 여전했던 것 같다.


타자(他者)와의 조우, 즉 나와 우리가 아닌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은 늘 이렇게 서로간 오해를 불렀으니…. 아니 다른 말 집어치우고 사람에겐 사람이 가장 무서운 존재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전하. 얼굴이 다른 ‘색다른 신병’을 소개하겠습니다.” 정유재란 때인 1598년 5월, 명나라 장수 팽신고가 선조에게 ‘신기한’ 용병을 소개했다. 다음은 <선조실록> 기자가 쓴 인상착의이다.

“노란 눈동자에 몸 전체가 검었다. 턱수염과 머리카락은 검은 양모(羊毛)처럼 꼬부라졌다. 일명 ‘해귀(海鬼·바다귀신)’라 했다.”


팽신고는 “이들은 바다 밑에서 수중동물을 잡아 먹으며 적선의 밑을 뚫어 침몰시킬 수 있다”고 자랑했다. 이 신병은 파랑국(波浪國·포르투갈) 출신 흑인 용병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수중폭파대원’? 
흑인 용병의 존재는 1599년 2년 명나라 군의 철수를 기념하여 그린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에서 확인할 수 있다(그림·민속원 제공). 왜병들도 ‘엄청난 수의 해귀가 출전했다’는 소문에 두려움에 떨며 서둘러 철군 준비에 나서는 촌극까지 빚어졌다. 하지만 용병의 전과는 신통치 않았다.
“명군은 수십 종류의 해귀(海鬼)를 이끌고 나왔지만 한 치의 공도 세우지 못했다. 왜 해귀를 시켜 물속으로 들어가 왜선을 침몰시키도록 하지 않았을까.”(<성호사설>)


재주 한 번 써볼 기회도 없이 ‘퇴출용병’의 신세가 됐으니 말이다. 한데 ‘수십 종류’라는 표현이 몹시 귀에 거슬린다.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고 ‘흑인’에게만 그런 것은 아니다.
“콧대가 높아 위로 이마를 관통했습니다. 코~귀 사이는 살구씨 모서리를 깎은 것 같습니다.”


1797년 부산 용당포에 정박한 이양선의 ‘코쟁이’ 서양 선원들을 묘사한 표현이다. 1653년 제주도로 표류한 하멜 일행의 인상착의 또한 요절복통이다. “(코가 하도 커서) 물을 마실 땐 코를 뒤로 돌리고 마신다”(<석재고>)고 했으니…. 오죽했으면 실학자인 이덕무마저도 “네덜란드 사람이 오줌을 눌 땐 늘 한 쪽 다리를 들고 눈다”(<편서잡고>)고 오해했을까. 조선인을 바라보는 서양인들의 시각도 마찬가지였다. 네덜란드 출신 귀화인인 박연은 “고려인들은 인육을 구워 먹는 줄 알았다”고 전했다. 그랬으니 ‘밤에 횃불을 든 조선인을’ 보고 자신들을 구워 먹으려는 줄 알고 대성통곡했다.

  
이것은 ‘약과’다. 기원전 1300년 무렵의 은(상) 갑골문에는 “백인을 잡아 요제(燎祭·불에 태우는 제사)를 지낼지(燎白人)”를 묻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니까 이 백인은 단지 피부색깔이 하얗다는 이유로 제물이 된 것이다. 그러고보면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가장 무서운 것 같다.



<참고자료>
박천홍, <악령이 출몰하던 조선의 바다>, 현실문화, 2008
박정혜, <세전서화첩>, 민속원, 2012
양동숙, <갑골문 해제>, 서예문인화, 2005
정은주, <조선시대 명청사행 관련 회화>,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논문, 2008
루이스 프로이스. <임진난의 기록>, 정성화·양윤선 옮김, 살림, 2008
이희수, <이슬람과 한국문화>, 청아출판사, 2012


[이기환/ 문화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