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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애청곡

[분단의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 (1953 원곡) - 현인 노래

잠용(潛蓉) 2010. 6. 18. 11:32

 


'굳세여라 今順아' (1953 원곡)
姜史浪(해인) 작사/ 朴是春 작곡/ 노래 玄仁 (1919~2002)
(사진/ UN군 흥남철수작전 1950.12.15~24 북한 흥남부두)


< 1 >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興南 埠頭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어를 보았다.

今順아 어데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였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1.4 以後 나홀로 왔다.


< 2 >
一家親戚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내 몸은 國際市場
장사치기다.

今順아 보고 싶고나
故鄕 봄도 그리워진데.
影島다리 欄干 위에
初生달만 외로이 떴다.


< 3 >
鐵의 帳幕 모진 서름
받고서 살아를 간들
天地間에 너와 난데
變함 있으랴?

今順아 굳세여 다오
南北統一
그 날이 되면
손을 잡고 울어보자
얼싸 안고 춤도 추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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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곡) ---(개사곡)

* 어데로 → 어디로

* 고향봄도 → 고향꿈도

* 南北統一 → 北進統一

* 울어보자 → 웃어나 보자

 


(굳세여라 금순아 - 현인 원곡)

현인 - 굳세어라 금순아 (원곡 LP 음향)


현인 - 굳세어라 금순아 (원곡 가요무대 1989)


현인 - 굳세어라 금순아 (개사곡)


◆ 강해인(姜史浪). 1911~1985

작사가 본명은 강해인(姜海人). ·오케(Okeh)레코드 직원. 1911년 2월 6일에 전라남도 여수 출생했으며, 본명은 강대은(姜大恩)이다. 광복 이전에는 강해인이라는 예명을 사용했고, 광복 이후에는 강사랑(姜史浪)이라는 예명을 주로 사용했다. 작사가로 데뷔하기 이전 이력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1935년에 태평(太平)레코드에서 발매된 <승리의 거리>라는 곡이 처음 가사를 쓴 작품으로 보이는데, 이후 곧 오케레코드에 직원으로 입사했다고 한다. 1936년에 가수 남인수(南仁樹)가 시에론(Chieron)레코드에서 오케레코드로 옮겨올 당시 같은 종씨라는 이유로 보증인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남인수의 본명은 강문수(姜文秀)이다). 이후 1938년에 빅타(Victor)레코드, 1939년에 포리돌(Polydoe)레코드에서 몇 작품을 발표한 예가 확인되기도 하지만, 대체로 직원으로 일한 오케레코드에서 가사를 썼다. <향수>(1938년), <감격시대>, <뒤져 본 사진첩>, <안개 낀 상해>(이상 1939년), <비 젖는 화륜선>, <얼시구 당기>(이상 1940년)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해방 이후에는 1953년까지 강해인이라는 예명을 계속 사용하다가 1954년 무렵부터 강사랑으로 바꾸었다. <굳세어라 금순아>(1953년), <청춘쌍곡선>, <아리랑 목동>, <눈물의 자장가>(이상 1956년), <추억에 우는 여인>, <서귀포 사랑>(이상 1957년)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1956년에 설립된 대한레코드작가협회 간사를 역임했고, 1960년대 이후 신문이나 잡지에 대중가요 관련 일화를 많이 소개했다.

◆ 한국전쟁 중 흥남철수작전과 1.4 후퇴
흥남철수작전 (興南撤收作戰)은 중국공산군(중공군)이 불법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전세가 불리해지자, 1950년 12월 15일에서 12월 24일까지 열흘간 동부전선의 미군 제10군단과한국군 제1군단을 흥남항에서 피난민과 함께 군용 수송선으로 남쪽 거제도까지 안전하게 철수시킨 작전을 말한다. 이때 북녘의 피난민들은 주로 부산지방에 터를 잡았는데 가수 현인(玄仁 1919∼2001)이 부른 ‘굳세여라 금순아’는 바로 이때의 피난민의 사연을그린 것이다. 유엔군사령부는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인해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1950년 12월 8일 흥남철수지시를 내렸다. 12월 15일 미군 제1 해병사단을 시작으로 12월 24일까지 열흘간 철수가 이루어졌다. 흥남 철수작전에서 한국군 제1군단과 미군 제10군단의 병사 10만명과 차량 1만7천대, 피난민 약 10만명과 35만t의 군수품을 수송선으로동해를거쳐 거제도로철수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wikipedia)

한국전에 참가한 중국이 처음 한국전쟁의 정전에 거부태도를 취하였던 것은 당시의 전황이 그들에게 유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계속 유엔군을 추격하여 남진하였다. 그 결과 북한군은 1951년 1월 4일 서울을 재점령하였고 우리 정부와 민간인들은 다시 피란길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1·4후퇴’ 이다.연합군 총사령관맥아더 장군은 중국 공업지대 폭격을 포함한 4개 항목에 달하는 전면적 대응을 계속 주장하였지만 관철되지 않았다. 1951년 1월 25일부터 유엔군은 다시 반격을 재개하여 2월 10일 인천과 김포(金浦)를 탈환하였고, 이어서 서울을 수복하고 3월 24일에는 38선을 다시 돌파하였다.(야후백과)


◇ ‘가수 1세대’의 대표주자 현인 (玄仁 1919~2002, 부산출신)

 

“아아, 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여 온다.”
국민가요라고 할 만한 ‘신라의 달밤’은 가수 현인(본명 현동주)이 부른 곡이다. 무명가수이던 현인은 1947년 ‘신라의 달밤’을 발표하면서 스타가 됐다. 일제 강점기에 노래를 시작한 그는 ‘가수 1세대’의 대표주자였다. 또 현인은 당시에는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예명을 사용해 화제가 됐다. 1919년 부산 태생. 현인은 도쿄 음악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의 징용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샹송과 칸소네를 부르며 가수활동을 시작했다. 광복 직후 귀국한 그는 고향 경음단이라는 7인조 악단을 만들어 활동했다. “성악을 전공한 음악도가 유행가를 부를 수 없다”며 자존심을 지키던 그는 작곡가 박시춘씨의 권유로 ‘신라의 달밤’을 취입했다. 이후 ‘신라의 달밤’은 트로트 가수 이미자, 나훈아, 재즈가수 말로 등이 불렀고, 2001년에는 김혜수·차승원·이성재 주연의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져 또한번 화제가 됐다.

 

현인은 ‘신라의 달밤’ 외에도 피란민의 애환을 그린 ‘굳세어라 금순아’나 ‘비 내리는 고모령’ ‘청포도 사랑’ ‘전선야곡’ 등을 불러 한국전쟁으로 실의와 절망에 빠졌던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줬다. 또 번안곡인 ‘베사메무초’ ‘꿈 속의 사랑’ 등을 불러 이국적인 번안곡 열풍을 이끌었다. 현인은 성악가 출신답게 성악을 바탕으로 한 혀 짧은 소리에 턱을 떨며 부르는 독특하면서도 절도 있는 창법으로 유명했고, 당시 민요나 트로트 일색이던 대중음악계에 혁신을 일으켰다. 현인은 지병인 당뇨병을 앓다가 2002년 4월13일 별세했고, 장례는 한국 연예예술인장으로 치러졌다.(향년 84세). 사후에 ‘굳세어라 금순아’의 무대인 부산 영도대교 남단에 현인의 동상과 함께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비가 세워졌고, 경주에도 ‘신라의 달밤’ 노래비가 세워졌다. 또 그를 기리기 위해 2005년부터 그의 고향 부산에서 매년 <현인가요제>가 열리고 있다. (경향신문 2011-04-12 21:29:27)